천호역앞 바람드리 풍차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천호역앞 바람드리 풍차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서울의 폼페이’라고 홍보되는 곳이 있다. 송파구 풍납동 일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방이동과 석촌동 고분군 일대이다. 백제 678년 역사 중 493년 역사, 시조 온조부터 의자왕까지 31명 왕 중 21명(온조~개로왕)의 ‘한성(漢城)백제’ 왕도(王都), 하남위례성이 있던 곳이다. 이후 천도한 웅진(공주, 63년)과 사비(부여, 122년)와 달리 흔적조차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긴 역사책도 1천 년 전에 사라졌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일부만이 부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몇몇 일부 중국 역사책에는 파편으로 남아 있다. 조선의 경우, 서울은 518년 동안 수도였고 수많은 기록과 문물이 남아있지만 같은 500년 역사가 이렇게 엄청나게 다르다.

1500년 동안 사라진 한성백제 수도 하남위례성은 1925년 대홍수 때 처음 흙이 쓸려나가면서 세상에 나왔다. 주목받을 틈도 없이 다시 몇십 년 동안 잊혔다. 개발과 성장시대, 1988년 서울올림픽의 작용과 반작용으로 깊이 파헤쳐진 흙 속에서 홀연히 우리 세계에 다시 떠올랐다. 천호동을 중심으로 영역을 조금 더 확장하면, 강북 중랑구․광진구, 강남 강동구․송파구․강남구, 하남시 지역까지가 대략 500년 동안 미스터리 백제 왕도 위례성과 주변부 공간이다. 폼페이보다 더 깊이 땅속에 잠든 한성백제이나, 언젠가는 세상에 조금 더 드러날 듯하다. 수수께끼 왕도를 천호동에서부터 찾아간다.

풍납리토성사적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풍납리토성사적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아파트 숲, 현대 도시 속 500년 왕도 풍납토성

지하철 5호선과 8호선이 함께 있는 천호역(풍납토성) 10번 출구(풍납1동 주민센터, 풍납토성․한강시민공원)로 나간다. 한강 방향으로 40미터 직진하면 ‘풍납전통시장’이라고 쓴 조형물이 있고, 그 옆에 ‘바람드리골 풍차’가 있다. ‘바람드리’는 ‘풍납(風納)’의 우리말이다. 성벽을 활용한 풍납근린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마치 강변의 뚝처럼 생긴 언덕이 있다. 풍납토성이다. 우리나라 최대 토성이다. 한성백제 5백 왕도이며, 서울이 2천 년 고도(古都)임을 증명하는 역사적 유적이다. 고고학 연구 결과 1세기 무렵부터 쌓았고, 475년 불타기 전까지 사용했다.

산에 쌓은 산성이 아니다. 돌로 쌓은 성도 아니다, 한강 옆 평지에 흙으로 쌓은 성(城)이다. 바닥에는 진흙처럼 끈끈한 흙을 깔아 방수 역할을 하게 하고, 성벽 붕괴 방지를 위한 유동성 확보 방법이었다. 그 위 성벽은 10센티 두께 단위로 나뭇잎, 볏집, 풀 등을 얇게 깔고 불에 그을린 뒤 다시 진흙을 덮는 것을 반복하며 층층이 다져 쌓았다. 이 방식은 오늘날 제방 축조시에도 이용하는 토묵기술이라고 한다. 또 다리나 고층건물의 붕괴 방지를 위한 유동성 확보 원리와도 비슷한 기술이라고 한다. 모래와 진흙을 이용했으나, 1500년을 버티고 있는 놀라운 구조물이다.

규모로 보면, 풍납토성은 일부 유실 또는 파괴된 곳을 포함해 총 둘레 3.5킬로미터, 최대 너비 60미터, 최대 높이 13.3미터, 내부 면적 약 24만 평의 공간이다. 연인원 약 140만 명 이상이 투입되어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 바깥에는 인접한 한강물을 끌어들여 적군의 침입을 방해하는 해자(垓子)도 설치되었다. 현재는 2.1킬로미터만 남아 있다. 하늘에서 보면 한강을 낀 채 긴 타원형의 나룻배처럼 생겼다. 고구려 국내성이 약 2.6킬로미터, 경주 월성이 2.4킬로미터인 것에 비하면 얼마나 대규모인지 비교할 수 있다.

1925년 대홍수 때 술이나 약을 숯불 위에 얹어 데우는 솥으로 왕이나 귀족만이 사용했던 ‘청동초두’ 2개가 발견되면서 주목받았지만, 곧 잊혀졌다. 1964년 시굴조사가 있었으나 또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1997년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선문대 이형구 교수의 유물 발견 소식이 전해 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후 문헌과 지속적인 발굴결과를 종합한 결과 풍납토성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첫 왕성인 위례성이자 한성(漢城)의 북성(北城)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반면 700미터 이웃의 몽촌토성은 남성(南城)이다.

안내판 코스에서는 공원 입구에서 풍납1동 주민센터를 거쳐 풍납시장을 경유해 경당역사공원으로 가는 것을 안내하고 있었지만, 천호대교․천호IC 방향의 토성을 따라갔다. 공원 입구에서 풍납1동 주민센터를 거치는 구간은 약 170미터로 짧다. 또 현대인의 생활공간으로 인해 토성 옆구리가 뚫린 듯해 그곳으로 옛 성으로 들어가는 것도 어색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성백제 답사 시작을 속전속결과 허전함 대신, 약 360미터 정도 둘러가야 되는 한강 방향 토성 옆길을 택했다.

경당지구 우물터 음수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경당지구 우물터 음수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성백제 도성 증거 경당지구와 백제문화공원

울타리 쳐진 토성과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옆을 지나 360미터 가면 토성 끝이 나온다. 천호대교 입구, IC부근으로 그 앞에는 올림픽대로가 가로 지르고 있다. 토성 끝부분에는 1973년에 세워진 「풍납리토성사적비」가 있다. 뒷면 비문은 1973년 기준 정보이다. 그 이후 현재까지 수차례 발굴되어 고고학적으로 업데이트된 정보와는 큰 차이가 있다.

토성 끝으로 돌아 성 안쪽에서 다시 토성 옆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보면 ‘안내판’에 나오는 코스인 풍납시장로 갈 수 있다. 350미터 정도 더 가면 ‘풍납토성 경당지구’가 있다. 경당지구 안내판에는 최근까지 발굴 상황 정보가 나온다.

경당지구는 1999~2000년, 2008년 각각 발굴 조사가 있었고, 한성백제 시기 왕과 귀족 등이 사용했을 만한 고급 시설과 유물 등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백제 토기는 물론 중국의 고급 도자기, 일본 토기도 발굴되었다. 한성백제의 국제 교류 상황을 보여준다. 지상건물터 중 ‘呂(여)’자형 초대형 건물터는 국가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경당지구는 발굴을 마치고 지금은 공원처럼 잘 단장되어 시민 휴식처가 되고 있다.

풍납백제문화공원내 복원중인 백제 살림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풍납백제문화공원내 복원중인 백제 살림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경당지구 입구에서 동아한가람아파트 방향 대각선상에 있는 삼각형 주차장 끝에 ‘풍납 백제 문화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본래 1925년 홍수 때 쓸려나간 서쪽 성벽 바로 안쪽에 위치한 곳이다. 1999년 ‘미래마을 재건축조합’이 아파트 신축 계획 중에 발굴한 유적지다. 공원에는 발굴로 확인된 중요 유구를 재현해 놓았다. 그중에는 한성백제 초기 동서남북대로, 지상건물(백제살림집)도 있다. 또 출토된 유물에 대한 설명문도 있다. 그에 따르면, 백제 자체 제작 최고급 검은간(黑色磨硏)토기, 중국제 청자(靑磁) 주발도 이곳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문화공원에서 다시 거꾸로 경당지구, 풍납초등학교를 거쳐 토성으로 가서 강동대로 방향 토성 옆을 따라 간다. 700미터 정도 가면, 풍납동현대리버빌1지구아파트 끝이 나온다. 현대리버빌 아파트는 풍납토성 발굴의 최고 공신이다. 아파트가 재건축되지 않았다면 역설적이게도 풍납토성은 어쩌면 그 사이 더 많이 훼손되었거나, 파괴되었을 듯하다. 개발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재산상 손실을 감수하고 백제 역사를 세상에 드러나게 해 준 아파트 주민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풍납토성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풍납토성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횡단보도를 건너면 풍납토성을 직접 밟을 수 있는 입구가 있다. 천호역부터 지금까지는 풍납토성을 보호하는 울타리 옆만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부터는 비록 약 540미터 정도이나 성벽 위를 걸을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 성벽에 오르면 21세기 대한민국 건축기술의 상징과도 같은 롯데월드타워가 가장 먼저 눈을 끈다.

이 일대의 아파트나 주택들은 문화재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나 기타 불편함이 많다. 그러나 현재의 토성 주변을 보면, 1500년 이상 된 옛 성을 자신들의 울타리와 공원으로 둔 최고 입지이다. 마음먹기 따라 이 토성 길은 지금 이 순간의 삶과 건강, 평안을 가장 편리하게 즐기기 쉬운 앞마당이 된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찾아낸 몽촌토성

다음 코스는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몽촌토성이다. 풍납토성도 마찬가지나 백제시대 성(城) 이름이 아니다. 이 지역은 『고려사 열전』․「조운홀(1332~1404)」에 따르면, ‘고원강촌(古垣江村)’이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 몽촌으로 불렸다. ‘고원강촌’은 ‘옛 담이 있는 강변의 촌락’이란 뜻이다. 백제 토성 흔적이 담겨있는 이름이다.

몽촌토성 안 은행나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몽촌토성 안 은행나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올림픽공원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 개최를 기념해 조성된 공원이다. 공원 주변에는 당시 수영장, 체조경기장은 물론 조각공원, 한성백제박물관, 소마미술관, 세계평화의문 등의 시설이 있다. 1916년에 학계에 보고되었으나, 체계적인 발굴 조사는 이 지역이 서울올림픽경기장 부지로 확정된 1983년부터 시작되었다. 지금도 토성 안에서는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풍납토성에서 성내유수지 축구장을 지나 올림픽공원 북1문을 통해 몽촌역사관으로 먼저 간다. 대략 1.3킬로미터 거리다. 북1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앞에 성내천에 놓인 무지개다리가 있다. 다리 밑을 보면, 개울 옆에 버드나무와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있어 잘 가꿔진 정원처럼 느껴진다. 다리를 지나면 역사관이 나온다. 인근 암사동 구석기 유적,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방이동, 가락동, 역삼동, 아차산 고구려보루 등 이 일대 선사 및 고대 문화유적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초․중등학생들과 함께 하는 답사라면 필수코스다. 복제품이나 역사나 사회 교과서에서 나오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백제 수도 한성(漢城)은 북성과 남성 2개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풍납토성은 북성, 몽촌토성은 남성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개로왕 21년(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북성을 7일 동안 공격해 함락시켰고, 이어서 남성(몽촌토성)을 공격했다. 남성에 있던 개로왕은 북성이 함락되자 남성에서 나와 도망치다가 고구려군에게 붙잡혀 죽었다. 그 뒤 아들 문주왕은 수도를 공주로 옮겼다.

북성이 왕성 그 자체였다면, 남성은 위급한 경우 피난지 역할을 하는 성이었다. 북성 방어 실패는 남성에 영향을 미쳐 큰 손실 없이 고구려에 빼앗기고 말았다. 몽촌토성은 표고 45미터 타원형 구릉을 활용한 토성이다. 길이 약 2.3킬로미터, 내부 면적은 22만 제곱미터, 평시에는 1만 명, 전시에는 2만 명이 머무를 수 있는 크기다. 성 바깥에는 해자(垓子)도 있다. 발굴된 유물을 기준으로 대략 4세기 중반에 축조되었다고 추정한다.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는 ‘소뼈로 만든 갑옷’도 있다.

1988년 몽촌토성 발굴팀장으로 활약했던 현 충남대 박순발 교수는 몽촌토성 서북쪽 지역에 정전(正殿)을 비롯한 백제 왕궁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는 한성백제 왕궁 건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직도 땅속에 묻혀 있다는 의미다(『국보를 캐는 사람들』, 김상운, 글항아리, 2019년).

몽촌토성 밖 몽촌호(해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몽촌토성 밖 몽촌호(해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뉴욕 센트럴파크야 물렀거라! 몽촌토성이 나가신다!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올림픽공원 안에는 다양한 산책코스가 있다. 겨울철 갈대가 멋있는 호반의 길, 전망이 좋은 토성의 길, 백제 유적지를 도는 추억의 길, 데이트 장소로 좋은 연인의 길, 마라토너가 사랑하는 젊음의 길이다. 어느 코스로 가던 우리나라에 이런 공원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200년도 안 된 센트럴파크에 비하면, 이곳은 2천년 된 최고(最高) 공원이다. 하늘과 맞닿은 언덕, 성 터에 자리 잡은 널찍한 잔디밭, 곳곳의 나무와 숲, 해자로 만든 물길, 게다가 500년 역사 공간이다. 인간과 자연이 만든 공간이다. 인위적, 졸속의 센트럴파크가 어디 명함을 들이밀 수 있을까.

역사관에서 나와 서쪽에서 남쪽으로 도는 ‘추억의 길’로 간다. 나무는 거의 없다. 탁 트인 잔디밭과 같다. 가는 중에 서북쪽 언덕 위를 보면, 580년 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다. “이곳의 주인은 나다!”라고 선언하듯 당당하다. 그 오랜 세월을 비바람과 천둥번개에도 굴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홀로이다. 그 모습이 대견하다 못해 신령스러움까지 일으킨다.

토성 길을 따라 가면 토성 언덕 바깥 아래쪽에는 작은 숲들이 있다. 한성백제박물관 쪽으로 가다 보면 ‘충헌공 김구(1649~1704) 묘역’이 나온다. 풍수지리는 모르나, 지금의 위치로 보면 최고의 명당이다. 양지 바른 곳에다가, 서울 시민이든 세계인이든 누구라도 무덤 곁을 지나다보면 숙연한 마음을 지니게 되니 말이다. 

핑크뮬리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핑크뮬리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묘역을 지나면 요즘 생태계 교란 논란이 있는 미국 원산지 식물 핑크뮬리 군락지가 나온다. 처음엔 거대한 핑크색 솜 과자처럼 보였다. 연인들과 가족 산책객들이 군락지 곳곳에서 열심히 인증사진을 찍고 있다. 빛을 제대로 본지 얼마되지 않은 역사의 공간 몽촌토성에 꼭 외래종 식물을 심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이왕이면 미선나무 같은 우리 고유종을 심었으면 어땠을까. 

박물관 앞 광장에는 여러 조각품이 있다. 흉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서울올림픽과 아시아 경기대회조직 위원장을 지낸 박세직씨의 흉상이다. 두 대회 모두 성공했으니 흉상을 세워둘만도 하다. 그러나 흉상에 씌여 있는 마지막 구절, “우리의 영원한 동행자여 영웅이시어!”는 낯설다 못해 간지럽다. 그 시절을 살아본 입장에서 진정한 영웅은 올림픽 준비와 성공을 위해 한마음으로 노력했던 국민과 유무명의 선수들임을 알기 때문이다.

박물관에서는 한성백제와 관련한 다양한 사료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한성백제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필수코스다. 또 「발굴, 그 후 – 청진지구」라는 2020 국가귀속유물특별전도 열리고 있다. 전시기한은 11월 29일까지다. 종로구 청진동 일대에서 발굴된 조선 초기에서 현대까지 유물들이다.

몽촌토성과 올림픽공원만 답사 또는 산책한다면 8호선 몽촌토성역, 9호선 한성백제역이 편리하다. 5호선 올림픽공원역은 조금 멀다.

신라 왕릉과 백제 무령왕릉 닮은 방이동고분군

서울에서도 경주 왕릉, 백제 무령왕릉, 중국 땅 장군총을 만날 수 있다. 그들과 아주 비슷한 분묘들이 방이동과 석촌동에 있다.

전통시대의 무덤들을 표현하는 용어는 다양하다. ‘왕릉’의 ‘릉(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지하철 선릉역의 선릉은 조선 성종의 무덤이다. ‘원(園)’은 세자나 세자빈과 같은 왕족 무덤이다. ‘묘(墓)’는 그 외의 보통 사람들의 무덤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경우는 왕위에서 쫓겨났기에 일반인처럼 ‘연산군묘’처럼 불린다. 장군총의 ‘총(塚)’과 ‘고분군’에서 1호분․2호분할 때 ‘분(墳)’은 무덤 주인공을 알 수 없을 때 쓰는 호칭이다. ‘총’은 특별한 유물이 출토된 경우에 사용한다. 경주의 ‘천마총’과 ‘호우총’ 같은 경우다. ‘분’은 주인공도, 특징도 없을 때 숫자로 구분하기 위한 표현이다. 무덤을 세는 단위는 ‘기(基)’이고, 여러 기가 모인 경우는 ‘방이동고분군’의 ‘군(群)’처럼 표시한다. 

1917년 작성된 석촌동․가락동․방이동 지역 ‘고분 분포도’에 따르면, 약 300기 이상의 큰 봉분이 있었다. 그동안 도시 확장과 개발 등으로 대부분 파괴되고 이제는 극소수만 남았다. 그래도 그나마 있는 몇몇 고분에서는 고구려, 웅진백제, 신라의 짙은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먼저 방이동고분군으로 간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9백미터 거리다. 오늘날 봉분이 있는 일반인 무덤처럼 보이나 규모는 훨씬 크다. 10기가 있었으나 개발로 2기(4․5호분)는 없어졌다. 그 중 조사된 것은 1․4․5․6호분이다. 1․4․5호분은 백제, 6호분은 신라 무덤으로 보는 주장과 1호분 백제, 4․5․6호분 신라 무덤 주장이 있다. 1호분은 웅진백제(공주) 송산리 제5호분과 비슷하다. 일부 연구자들은 1호분이 공주 고분으로 이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고분군에 오르면 전망도 좋다. 특히 잠실역 쪽은 차분히 내려다볼 수 있다. 둘러보다 보면 언덕 위에 있는 고분이고, 해질 때라 그런지 이미 기시감이 든다. 너무 익숙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경주 왕릉 분위기다. 방이동고분군이 있는 언덕 자체가 경주의 커다란 왕릉을 닮았다. 또 고분 사이를 걷어보면 문화재 보호를 위해 결코 오르면 안될 왕릉에 오른 듯하다. 

석양 무렵 방이동 고분군은 서울에서 맛보는 경주 왕릉이다. 제1호분 경우, 무덤 안에 돌로 굴을 만들었다. 송산리 5호분과 비슷하나, 벽돌식 굴이 있는 공주 무령왕릉과도 닮았다.

전통적 묘지 분위기의 봉분형 무덤들이나, 이 방이동분묘군에서는 그런 선입견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서울에서 경주와 공주 왕릉을 한꺼번에 경험할 수 있는 기회다. 먼 경주까지, 또 공주까지 가지 말자. 방이동에서 경주와 공주을 느껴보자. 

고구려 장군총, 서울에 나타나다

방이동에서 경주와 공주를 보다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석촌동고분군으로 간다. 3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고분군 안으로 들어가면 중국 집안현에 온 듯하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고구려 장군총과 닮은 분묘들이 나타난다. ‘석촌동’이란 이름도 피라미드식 돌무지무덤(적석총)이 많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석촌동고분군에는 대형 돌무지무덤(적석총) 7기와 널무덤 등 30여 기 이상 있었다고 한다. 1980년대 초 지금의 ‘백제고분로’를 조성하면서 한반도내 유일 돌무지무덤군이 있는 석촌동 3․4호 고분을 파괴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피라미드 무덤은 잘렸고, 심지어 무덤 속 인골은 후손들의 포크레인에 파헤쳐질 정도였다. 이형구 교수의 집요한 노력으로 대통령 특별지시가 있었고, 그에 따라 지금처럼 돌무지무덤 아래로 지하터널이 뚫리게 되었다. 이 교수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현재 우리가 보는 돌무지무덤이 사라졌을 듯하다. 

학자들은 이 무덤군을 백제 왕과 귀족 무덤으로 추정한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제3호분은 한 변 길이가 50.8미터, 사각형 3단 기단형식 돌무지무덤이다. 이 3호분과 기타 돌무지무덤들의 겉모습은 확실히 고구려 장군총과 유사하다. 그러나 장군총은 높이 13미터, 한 변 길이는 32미터로 3호분에 비해 규모가 작다. 한성백제 시기와 무덤 규모로 보아 일부 학자들은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무덤이 닮은 이유는 한성백제 지도층이 고구려와 같은 연원을 갖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무덤들은 한성백제 리더그룹이 『삼국사기』 기록처럼 고구려 혹은 부여와 관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특이한 점도 있다. 정치영 백제학연구소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최근 발굴하고 있는 석촌1호분 북쪽 연접돌무지무덤에서는 화장(火葬)한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한백소식』 2020년 6월, 한성백제박물관). 이는 한성백제 왕실이나 귀족층에 불교가 전파되었고, 그에 따른 화장문화가 생긴 것을 보여준다.

시조 온조와 최강 백제국 근초고왕의 땅

백제는 특이한 나라이다. 고구려는 물론 후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신라, 가야조차 존재하는 개국 신화가 없다. 고구려 주몽은 아버지가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로 알에서 태어났다. 신라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고 왕비는 용 갈빗대에서 태어났다. 신성하고 특별한 존재, 영웅이 고구려와 신라를 열었다. 반면 백제에 대한 기록을 보면, 백제는 이미 집단을 이뤄 별일 없이 살던 사람들이 내부 갈등을 피해 이주해 세운 나라이다. 또 국가 창업자도 애매하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창업자 비류와 온조는 졸본부여 주몽의 서자 또는 북부여왕 해부루 서손 우태의 아들들로 엉켜있다. 그럼에도 여러 사료 공통점은 비류와 온조가 북방지역(부여) 세력가 주몽의 후처 아들이고, 본처 아들 등장으로 자신들이 살던 지역을 떠나 남방(한성백제)에서 새로운 정착지, 국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온조는 하북위례성에 각각 정착했다. 온조 14년(기원전 5년), 온조는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터를 잘못 잡은 비류는 뒤에 온조 집단에 합류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한성시기에 왕성이 네 차례에 걸쳐 옮겨졌다고 하나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 현재 일치된 견해 없다. 풍납토성만이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하남위례성이라는 주장이 다수설로 인정되고 있다.

백제 13대 왕 근초고왕(346~374년 재위)은 한성백제 전성기를 만든 정복 군주이다. 남쪽 마한을 정복했다. 366년에는 신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가야를 통해 왜국과 교류했다. 369년에는 고구려 고국원왕의 침략을 격퇴했고, 371년에는 3만 명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케 했다. 현재 황해도와 강원도 일부,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지역 전체를 장악했다. 국외로는 372년. 당시 동북아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동진에 사신을 보내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같은 해 왜왕에게 왕세자(훗날 근구수왕) 이름으로 나뭇가지 형상의 「칠지도(七支刀)」를 하사하기도 했다. 「칠지도」는 현재 일본 국보이다. 백제 유물 중에서 현재까지 확인 가능한 최초의 한문 문장이 새겨져 있다. ‘백 번 단련한 철’로 만들었다. 현대의 우리나라와 일본 장인들이 복원 과정에서 수차례에 실패했을 만큼 만들기 어렵다고 한다. 4세기의 철제 칼이고, 게다가 한문 문장이 금으로 상감(象嵌)되었기에 5세기에나 자체적으로 철을 생산한 왜인들 눈에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 첨단 기술 문명국 백제 모습을 보여주는 최고의 하사품이다. 국내에서는 박사(博士)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백제 역사책 『서기(書記)』를 편찬케 했다. 또 왕인(王仁)을 왜국에 보내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 『한국사6-삼국의 정치와 사회2:백제-』(국사편찬위원회, 탐구당, 2003년)에 따르면, 고흥과 왕인은 백제에 흡수된 중국계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개로왕과 한성백제의 멸망 

『삼국사기』에는 개로왕 때 한성백제의 멸망이 나온다. 근초고왕 때 번성했던 백제는 그 뒤 쇠퇴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근초고왕에게 죽임당한 고국원왕 후예들인 고구려 소수림왕, 광개토왕,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복수를 오래 준비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광개토왕 원년(391년) 7월. 10개 성을 함락시켰다. 10월에는 백제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392년과 393년에는 침입한 백제군을 패퇴시켰다. 394년에는  패수에서 싸워 8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475년, 장수왕 63년에는 드디어 한성백제 왕성(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함락시켰다. 백제 21대 개로왕도 죽임당했다. 백제는 한강 유역에서 퇴출당했다.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의 성공 내용만 간략히 나온다.

그러나 「백제본기」에는 개로왕 패배 원인이 자세하게 나온다.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첫째는 대외정세에 무지한 외교정책 실패이다. 개로왕은 중국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위나라는 오랜 친교 관계를 이유로 백제의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그 사실을 고구려에 전했다. 백제의 의도를 안 고구려는 철저히 준비했다. 둘째는 개로왕의 무능한 리더십이다. 그는 고구려가 한성백제 왕도(풍납토성, 북성)를 포위하고 공격할 때 피난성인 남성(몽촌토성)에 있다가 도망쳤다. 그 전에는 장수왕이 보낸 간첩 승려 도림의 감언이설에 빠져 분별없는 욕망을 자제치 못했다. 각종 성곽을 새로 쌓거나 보완했다. 궁궐을 건설했다. 죽은 아버지를 위해 왕릉을 새로 크게 수축했다. 국고는 연이은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바닥났다. 백성의 삶은 피폐했다. 그가 새로 짓고 보수한 성(城)은 허울뿐이다. 그 성(城)을 지킬 민심(民心)의 성은 이미 무너졌다. 백성들은 고구려로 도망치기도 했다.

개로왕은 총체적으로 실패한 왕이었다. 그 결과가 패망이다. 고구려 장수 재증걸루는 도망치던 개로왕을 발견하고 먼저 말에서 내려 인사를 했다. 그가 본래 백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뒤 왕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죄목을 헤아린 뒤, 묶어서 아차성으로 보내 죽였다. 침을 뱉고 죄목을 헤아렸다는 것은 백제 출신 재증걸루가 왜 고구려로 갔는지를 보여준다. 백제가 인재를 버렸거나, 인재를 핍박했기 때문일 듯하다. 「백제본기」에는 이 전투에 참전한 장수가 3명 언급된다. 그 중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백제 출신이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 재증걸루의 행동은 개루왕의 멸망의 원인을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역사에서 망한 나라를 살펴보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성공법칙은 일반적이거나 공통점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망하는 집단은 언제나 똑같은 이유가 있다. 백제 개로왕에게 보여지는 리더 모습이다. 

석촌동 3호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석촌동 3호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석촌호수와 롯데타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석촌호수와 롯데타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천호역에서 시작해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을 거닐며 한성백제의 성공과 실패의 길을 걸었다. 역사의 교훈을 잊는 나라는 조금 더 빨리 사라진다. 천호역 공원 앞 「송파도보여행길」 안내판에는 천호역에서 시작해 석촌동 고분군까지 이어지는 ‘한성백제왕도길 1코스’를 약 9킬로미터, 3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또 답사 준비시 활용한 네이버 지도에서도 3시간 정도이다. 그러나 무엇을 보고, 느끼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이번 답사 코스는 안내판 코스와 비슷했으나, 산책 겸 역사 공부였기에 실제로는 7시간 이상 걸렸다. 하루를 잡고 넉넉히 다니는 것이 좋은 코스다.

답사 다닌 곳곳 모두에서 여전히 땅속 깊은 곳에 묻힌 한성백제의 옛 모습을 드러내 달라는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풍납토성 
주소 송파구 풍납동 72-1
몽촌토성 
주소 송파구 올림픽로 424(방이동) 올림픽공원 안
방이동고분군 
주소 송파구 방이동 125번지 일대
석촌동고분군 
주소 송파구 가락로7길 21(석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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