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사회 ‘플랫폼’ 역할 하고 싶다

[사진=김주성 작가 제공]
[사진=김주성 작가 제공]

[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수는 3만 명을 넘어섰다. 이들 중 상당수는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고군분투중이다. 주변 사람들의 차별적인 시선, 사회 시스템 적응의 어려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 정착을 어렵게 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다가올 통일에 대비해 ‘먼저 온 통일’인 탈북민들의 사회 정착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일요서울은 한국사회에 잘 정착한 이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릴레이 인터뷰]로 전하고자 한다. 지난 26일 서울 모처에서 탈북 작가 김주성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北서 보낸 학창 시절, ‘쪽발이’ ‘째포’ 차별받아 
- 한국사회 치열한 경험·고민 담은 책 출판…함께 사는 사회 만들고파

-자기소개를 한다면.
▲ 일본 도쿄 출신 재일조선인 3세다. 1979년 조부모님과 함께 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정착했다. 북한에서 ‘쪽발이’ ‘째포(재일교포)’라 불리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커서는 조선작가동맹의 현직 작가로 활동하며 여러 편의 작품을 출판하기도 했다. 2008년 탈북해 한국에서의 정착까지 경험하고 난 후 이를 바탕으로 1년 전 책 ‘한국이 낯설어질 때 서점에 갑니다’를 출판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 지난해 책을 냈고, 꾸준히 방송활동과 함께 유튜브 채널의 진행을 맡고 있기도 하다. 통일교육원 통일교육 전문 강사로서도 10여 년째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올해 코로나19로 모든 게 중단됐다. 마침 아내가 일을 시작하면서 난생처음 육아 아빠를 경험해보기도 했는데 딸의 유치원 등·하원을 돕고 집안일을 경험해 보니 재미를 느꼈다. 최근에는 유튜브 ‘김주성TV’를 시작했다. 

-책을 출판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 북한에서 조선작가동맹에 소속돼 작가로 활동할 정도로 글 쓰는 걸 좋아했다. 한국에 왔을 때 북한에서보다 더 자유로운 글을 마음껏 쓸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다. 문학인들이 모이는 단체에 가보기도 했는데 그때 책을 몇 권 받아 서평을 써 냈더니 ‘보수냐 진보냐’하면서 지적이 들어왔다. 문학계조차 양극화된 정치적 성향을 갖고 논하는 상황에 실망해 그때부터 글을 안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 문학평론가를 만나 다시 펜을 잡았다. 신문에 3년간 연재 글을 써보기도 하고 한국 사회 문제를 꼬집은 책의 서평을 쓰기도 했다. 출판사와도 우연찮게 연이 닿아 지난해 한국·한국인·한국사회에 대한 그동안의 경험과 치열한 고민을 담은 책을 출판하게 된 것이다. 그즈음 일본에서 만화 ‘짱구’를 만든 회사에서도 연락이 와 책 ‘뛸 수 없는 개구리(일본어판)’도 출판했다. 

[사진=김주성 작가 제공]
[사진=김주성 작가 제공]

-북한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당시는 어떤 학생이었나. 
▲ 일본 출신이니 친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긴 했지만 왕따 취급을 받는 학생이었다. 북한에 간 지 2,3년 됐을 때는 정말 혼란스러웠다. 일본 집에 가고 싶고 부모님도 보고 싶었다. 조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는 일찍이 북한으로 건너가셨던 큰아버지 집에 얹혀살면서 주워 온 고양이처럼 살아야 했다. 방황하고 싶어도 방황할 수 없는 외로운 소년시절을 보냈다. 

-북한에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뭔가.
▲ 가장 가슴 아팠던 게 일본에 계신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도 답장에 내가 처한 현실을 그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간접적으로나마 나의 상황을 글로 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게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됐다. 글 쓸 때 가장 좋은 점은 내가 만든 허구의 세상 속에 잠시나마 들어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일본이라는 배경을 두면 내가 일본에 간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나.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버팀목이 됐다. 

-탈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 북일 관계가 나빠진 게 가장 큰 요인이 됐다. 2001년 김정일과 일본 고이즈미 총리가 만났을 때 북한이 일본 납북자 문제를 인정했고, 일본은 독자적 제재로 유일한 북송선인 만경봉호를 막았다. 당시 1,2년에 한 번씩은 일본에 있는 가족으로부터 돈을 받았는데 그게 어려워지자 삶도 막막해졌고 결국 탈북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 정착했을 때 40대 초반이었는데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게 어렵진 않았나.
▲ 처음에는 한국에 오는 게 목표였다. 와 보니 파라다이스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릴 때 일본에서 살며 경험한 것이 있고 외부 정보도 접했던 터라 한국사회가 낯설진 않았지만 지하철 타는 법이나 은행 거래법, 명칭 등은 배워야 했다. 그러고 나서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할지 고민했다. 그 과정에 다양한 유혹이 많았다. 탈북민 정착기관인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강남의 한 다단계 회사에 취업했는데 다단계에 대해 모른 채로 회사 지시에 따라 열심히 일만 했다. 그러다 한국외국어대 사이버대학 일본어과에 입학하게 됐는데 회사에 이를 자랑삼아 말했더니 한 팀장이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꼭 붙잡고 회사를 그만두라고 말해 줬다. 그 덕분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진=김주성 작가 제공]
[사진=김주성 작가 제공]

-상당히 다양한 직업들을 경험한 것 같다. 작가, 방송인, 강연자, 유튜브 진행, 북한자유연맹 이사, 국제 PEN망명작가센터 이사 등 다양한 일을 했는데 그러는 동안 고충이나 어려움은 없었나.
▲ 한국에 와서 가진 직업은 대부분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까지는 경제적으로 아주 부족하진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던 건 돈의 가치보다 ‘사람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 나는 돈 5만 원과 100만 원의 가치를 똑같이 놓고 본다. 단돈 5만 원짜리 일을 하더라도 어떤 사람과 함께 일을 하고 어떻게 인연을 쌓아갈지 등 사람과의 관계와 관련된 부분들이 나에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처음 와서 잘 모를 때는 돈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 사람의 가치를 간과할 때가 있다. 후배들에게도 이런 것에 대해 조언해 주는 편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 궁극적으로 탈북민들 사이에 ‘플랫폼’ 역할을 하고 싶다. 나는 살아온 날이 많다. 그런데 젊은 청년들은 앞으로 더 많은 날을 살아가야 하지 않나. 이들이 한국사회에 정착해 할 수 있는 일들이 무궁무진한데 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때가 많다. 그래서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이다. 올해 초 청년들과 함께 하는 프로젝트를 구상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각자 재주가 있는 탈북민들이 함께 일하면서 돈을 벌어가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요식업 자격증을 따고 손재주가 있는 친구들이 많은데 임대료가 없어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게 정말 안타깝다. 함께 잘 사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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