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세계대전 후 전 세계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간 미국의 대공황은 1929년 10월29일 뉴욕 월스트리트의 주식시장 대폭락으로 시작되었다. 대공황으로 미국의 실업률은 25%에 달했다. 굶주린 사람들은 식당에서 내버리는 음식물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웠고 추위 속에서 텐트 치고 양말도 없이 떨며 지내야 했다.

그런데도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현금을 뿌리는 긴급 구제책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후버 정권의 대응은 고작 식당에서 먹다 남은 음식물을 깨끗한 깡통에 담아 나눠주라는 당부 정도였다. 미국 자본주의체제가 붕괴되고 만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 공포에서 미국을 건져낸 사람은 1933년 1월 취임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그는 대통령선거 유세 중 뉴딜(New Deal:새로운 처방)을 펼치겠다고 약속했다.

“뉴딜”은 2기로 나뉜다. 제1기는 1933-1934년 사이로 노동자·기업인·농민·예술인·종교인 등 모든 계층을 망라한 경기회복 지원책이다. 이어 2기 “뉴딜”은 1935년 연방은행의 매리너 엑클 씨가 주도한 경제정책에 기초한다. 정부가 적자를 감수하면서 과감한 재정투입으로 공공소비를 늘리는 처방이다. “케인즈 혁명”으로 평가되는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 이론과 맞닿는다.

문재인 정부도 “소득주도성장” 정책과 코로나19로 망가져가는 경제위기를 극복키 위해 “한국판 뉴딜”로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문 정부의 “한국판 뉴딜”은 루스벨트의 1기 “뉴딜”처럼 기업을 포함하는 모든 계층을 위한 처방이 아니다. 도리어 기업의 목을 죈다.

기업의 경영권을 흔드는 경제 3법과 집단소송제를 강행 처리코자 한다. 좌파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그 밖에도 정부가 내놓은 “한국판 뉴딜”엔 그전부터 추진되던 국책사업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뉴딜”이 아니라 “올드(구시대)딜”이다. “한국판 뉴딜”이란 명분하에 현실성 없는 사업들을 내놓기도 한다. “뉴딜”이라 말하기 부끄럽다.

정부의 현실성 없는 정책들 중 하나로 11월19일 발표한 전·월세 대책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실책을 거듭하면서 부동산 대책으로 24번째 내놓은 대안이다. 전·월세 대책 중에는 영업이 잘 안 되는 호텔을 매입해 주거용으로 개조, 임대하는 방안이 들어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호텔을 리모델링해서 청년주택으로 하고 있는데 꽤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며 호텔 개조 필요성을 강조했다. 주무장관이 사실을 왜곡한 자화자찬이었다.

야당은 저소득층에게 창문이 한쪽 벽에 하나만 있어 “환기도 안 되는 단칸 호텔 방”에서 살라는 거냐고 꾸짖는가 하면, “닭장 집에 살라는 것” 아니냐고 호통 친다. 부엌은 좁아서 라면 외엔 조리하기 불편하다. 영락없는 값싼 원룸일 따름이다.

“ 뉴딜”이 미국 “뉴딜”처럼 “새로운 처방”이 아니고 편향된 이념에 묶이고 옛날 것들을 재탕하거나 건수 채우기로 그친다면, 당면한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호텔방 전·월세 대안은 후버 정권이 식당 음식물 찌꺼기를 깡통에 담아 나눠 주라던 진부한 대책과 다르지 않다. 문 정부의 “한국판 뉴딜”이 낡은 이념과 “올드딜”로 맴돈다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1기 “뉴딜” 정신대로 노동자와 기업 모두를 위한 “뉴딜”로 나서야만 죽어가는 경제를 살릴 수 있다. 기업을 적대시하며 사회계층 간 갈라치기로 나서는 건 “뉴딜”이 아니다. 좌로 기운 이념의 푸닥거리 굿에 지나지 않는다. 문 정부는 대공황을 극복한 미국 의 “뉴딜”특성부터 간파해야 한다. “뉴딜”을 제대로 이해 못하면서 “한국판 뉴딜”이란 말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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