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휴의 재계 원로 탐험 ②

구자경 LG 명예회장
지나는 길에 불쑥 찾아갔지만 뜻밖에도 반겨주니 평소 느낀 대로 시골 인심이다. 일선기자 시절 익힌 얼굴이기 때문인지 “참 오랜만이요”라며 반갑게 맞아준다.
소문은 들었지만 구자경(具滋暻) 명예회장의 요즘 모습은 영락없이 농부 맛이다. 두툼한 장갑을 끼고 모자를 눌러 쓴 차림에 손님을 맞으면서도 정리정돈과 청소 잘못됐다고 일꾼들을 꾸짖으니 재벌회장이 완전 농감(農監)으로 변했다. 상남(上南) 구자경 회장은 “농장회장님이십니까”라는 질문에 “직함 없는 농사일꾼 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주위에 물어보니 실제직함은 없고 “새벽부터 늦게까지 닥치는 대로 일하며 잔소리하는 농감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성환농장의 상머슴이라는 소문은 틀리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 생송이 포장실에 들렀을 때 “주임 어디 갔느냐”고 야단쳐 40대 여주임이 나타나자 “입구 하수구 언저리에 청소 안돼 있으니 무슨 일이요”라고 따진다.

그러자 여주임은 “어이쿠 금방 이런 일이…”라며 안절부절하는 광경을 보여 주었다. 작업 중인 어느 부인이 하는 말이 “손님들이 없었으면 회장님이 아무 소리없이 빗자루를 들고 쓸었을 겁니다”라며 그간의 상머슴이 어떻게 일해 왔는지 짐작케 해 준다.

나지막한 단층 간이 사무실에서 농장 감독직과 서서 회의하던 구 회장은 “여길 어찌 오셨소”라며 기자를 맞는다. 그리고는 잠시 집무실이자 간이침대를 두고 휴식하는 옆방에서 기다려 달라며 안내한다.


“잠시 쉬고 있습니다. 깨우지 마시오”

농장주인 상남 선생의 집무실은 특이했다. 좁은 방에 냉장고와 간이 조리대가 있고 메모지가 수북한 책상과 책장이 있고 응접세트 옆에 딱딱한 침대가 놓여 있다.

팩스 문건은 어느 집에 초상이 났다는 부고였다. 구 회장은 “나한테 오는 소식은 부고 밖에 없다”면서 특유의 너털웃음을 보인다.

“컴퓨터를 켜 놓고 계시는데 혹시 인터넷 검색을 하시느냐”는 물음에 “괜히 궁금해서 주식 움직임이나 지켜본다”는 대답이다. 주식투자를 하자는 것이 아니고 “LG그룹 주식변동이 어찌되나 싶어 짚어볼 뿐”이라 일러준다.

간이침대 위 벽걸이에 맥고모자. 새마을 모자 등이 걸려 있고 파리채와 땀에 전 수건이 눈에 띈다. 모자는 날씨에 따라 바꿔 쓰고 파리채는 ‘아무리 약을 쳐도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벌레 때문에’ 비치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가장 우스꽝스러운 비치품이 ‘잠시 쉬고 있습니다, 깨우지 마십시오’라는 안내판이다. 일하다 지치면 간이침대 머리에 이 안내판을 걸어두고 낮잠을 즐긴다는 말이다. 참으로 꿈같고 그림같은 농장의 상머슴 팔자라는 소감이다. 아무것도 감출 것 없이 자유를 만끽하는 은퇴 회장의 여유와 자족이 아닐 수 없다.


휴일, 국경일 다 쉬고 농사일은 언제

상머슴 상남은 실상 버섯박사가 돼 있다. 버섯재배에 관한 질문을 했다가 줄줄 외워대는 말에 기가 질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팽이버섯, 만가닥버섯, 새송이버섯에 이르기까지 종균 배양에서부터 학술적인 논문까지 줄줄이 쏟아지는 설명을 감당할 수가 없다.

장미와 동양란 재배는 물을 시간이 없었다. 버섯강의가 끝이 없으니 시간에 쫓기고 궁금한 것이 많아 말을 끊을 수밖에 없다. 농사는 수지가 맞는지, 일손은 달리지 않는지, 농협이나 관청업무는 수월한지 많은 질문을 했지만 상남 선생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 숱하게 부어 넣었는데 이제 버섯이 팔려 수지를 맞출 것 같다는 정도다. 농사일 밑진다고 여의도 빌딩에 찾아가 손 내밀 수는 없고 이제 자급자족할 때이기에 새벽부터 일한다고 한다.

농장 인부는 100여명에 달하지만 시골 아낙네가 대부분이다. 중견 부인들이 태반인 촌부들은 작업장에 유행가 테이프를 수북이 쌓아놓고 볼륨을 최고로 높인 채 신명나게 일한다.

농장주가 작업실에 들어왔는지 여부를 알려고도 않는다. 그냥 유행가에 흥을 싣고 기계화 공정에서 맡은 일에만 열중한다. 상남 선생은 일하는 분들이 열심이라 칭찬하면서 ‘주5일제가 전면 시행되면 큰 일’이라고 내뱉는다.

토요일도 일하고 휴일에는 필수 인원들만 특근하지만 “주5일제가 되면 자가발전기 가동이며 기계설비 조작 등 꼭 필요한 농사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푸념한다. 솔직히 주5일제와 같은 한가한 이야기는 농장에 와서 끄집어내지도 말라는 당부다. 농사일이 요일따라 출퇴근하고 휴일 쉬고 국경일 쉬면서 되겠느냐는 말이다. 상남 선생은 아예 농장 구내의 사택에 머물면서 새벽에 출근한다. 인부들은 오전 8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을 지키지만 그래도 농장일이 멎어 있을 수는 없노라고 일러준다. 천성의 농부가 아니고서는 누가 시켜도 안 될 일을 스스로 좋아서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충무로 삼겹살집에서 먹던 버섯

상남 선생은 그 사이 십 수 년 간의 농사일에 이력을 붙었다. 버섯재배야 이미 소문이 났지만 콩과 옥수수 심고 배 가꾸고 개 기르는 시골농사가 아쉬움없이 보람이라 실토한다.

버섯재배가 언론에 소개된 후 여기저기에서 너무 많이 찾아와 시간을 축내니 난감하다고 한다.

메모란에 일본사람 방문 일정이 잡혀 있고 어느 농장사람 이름도 적혀 있다. 버섯재배에 관해 문의하러 오는 분들이라고 설명한다.

“오랫동안 터득하신 노하우 도둑맞으면 어쩌실려고 그러시냐”라는 걱정에 피식 웃는다. “아무리 둘러보고 사진을 찍어가도 잘 모른다” 면서 “찍을테면 얼마든지 찍어라”고 일러준다.

실로 종균배양실에서부터 각종 실험실과 재배실을 일일이 다 구경시켜 줬지만 케케한 냄새 외에 훔쳐올 것이 없다. 상남은 “왜 냄새가 케케하냐”고 핀잔하며 “조금 있으면 구수하고 향기롭게 될거요”라며 껄걸 웃는다. 상남 선생은 손수 ‘클럽카’를 운전하며 구석구석 안내하는 것이 익숙하기 짝이 없다.

가는 곳마다 학술이론에서부터 실험결과를 전문적으로 설명하고 초기 몇 차례의 실패 사례와 그 뒤의 성공결과를 열심히 소개해 준다. 그리고 실험장비와 기구들을 거듭 자랑하며 책을 보고 복습해 가며 자신이 설계하고 농장에서 제작했다고 소개한다. 널찍한 공작실에는 폐기 자재가 수북이 쌓여있다. 각종 공작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다.

상남 선생은 ‘쓸만한 기자재가 많지만 금방 신기술로 개량되기 때문에 부득이 못 쓰게 된 것들’이 아깝다고 혀를 찬다.

상남이 가장 자랑하는 버섯 포장실에 들렀더니 삼겹살집에서 먹던 버섯들이 포장돼 쏟아져 나온다. ‘충무로 소주집에서 먹던 게 이것이로구나’라며 반기니 “단골 고객이 찾아줘 고맙소”라고 인사한다.

상남은 습온도 관리며 형광등 도수 등 버섯재배와 관련해 일일이 설명하며 일본책에 나온 어떤 내용은 맞고 안 맞는다고 일러주기도 하고 자신이 탐구한 신지식으로 어떤 품종을 개량해 내기도 했다고 설명해 준다. 그렇지만 그 말이 무슨 내용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까치잡이 틀’이나 구해주오

상남 선생은 “농사일이 뭐 그리 신명나십니까”라는 질문에 “재미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대꾸한다.

‘콩 심은데 콩 나고 옥수수 심은데 옥수수 난다’는 천연스런 말이다. 토질이 좋아 배도 맛있고 감자와 고구마도 꿀맛이라고 자랑하며 점심을 준비할 테니 먹어 보라고 했지만 시간이 없어 사양했다.

상남은 농사일은 재미있는데 “까치 등쌀에 농사 다 망친다”고 탄식한다. 까치가 쪼아 먹으면 얼마를 먹을까 싶어 물었더니 “농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구박한다. 콩이고 옥수수고 씨만 뿌려도 ‘귀신같이’파 먹고 배가 익을 때면 ‘잘생긴 녀석만 파먹는다’고 한탄한다.

마침 ‘까치잡이 틀’을 고안해 과수원에 설치했더니 금방 수십마리씩 잡히더라는 수신오가피 성광수 사장의 말을 듣고는 “그것 몇 세트 살 수 없소”라고 묻는다.

상남 선생이 까치와의 씨름에 얼마나 고역을 겪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 했다.

성 사장은 4월 중순까지는 서너 세트 시험 설치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대신 버섯종균 배양에 관해 “한수 배울 수 없겠습니까”라고 물으니 “팔지도 않고 가르쳐 줄 것도 없다”고 말하면서 “까치잡이 틀이나 꼭 가져 오시오”라고 신신 당부한다.

듣기로는 전국 과수원에서 입는 까치피해액이 적게 잡아도 연간 50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상남 선생은 까치 피해를 금액으로 환산하기보다 씨 뿌릴 때부터 수확기까지 너무 성가시게 굴기 때문에 신경이 피곤해 못 견딜 지경이라고 호소한다.

그 대신 개를 기르기 시작한 후 풍산개가 밖에 나가 꿩도 잡아오고 족제비도 잡아다 주니 ‘신기하고 재미도 있다’고 말한다. 풍산개뿐만 아니라 진돗개와 몽고개
까지 기르고 있다. 개장에 가둬 두고 기르는 것이 아니라 풀어 놓고 기르기 때문에 한껏 야성을 보인다고 한다.

진돗개는 사냥에 서툴지만 풍산개는 사냥술이 뛰어나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이들 특징 있는 개들을 상호 교접시켜 새로운 명견을 만들어 내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주말 부부로 산다는 것도 재미

상남 구 회장은 본색이 농군이고 선생이다. 진주사범을 나와 진주중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선생님 출신이니 농사일도 공부하고 실습하는 방식이다.

성환농장은 LG그룹 회장시절부터 수시로 다니던 곳이다. 선친 구인회 회장의 아호를 붙인 연암축산전문대학 시절에는 돼지사육에 심취했었다. 그 뒤 동양란과 장미에 몰두했다가 95년 2월 구본무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 준 후 아예 농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외적으로는 LG그룹 명예회장이지만 경영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매주 월요일에는 여의도 명예회장실로 출근하지만 특별한 보고도 받지 않는다.

화요일에는 골프모임이 정례적이다. 능성 구씨 대종회장 자격으로 종친들과의 친선골프다. 대종회 회장직을 맡은 후 유일한 대외활동이 시조비 건립과 시제 주관 등이다.

수, 목, 금요일은 농장에서 머물고 토요일 하루만 귀가한다. 상남 선생은 스스로 “주말 부부로 살고 있다”면서 농사일이 바쁘니 1주일에 하루만 들러도 좋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멀리 떨어져 노후를 즐기기 때문인지 건강은 더욱 좋아 보인다. “보약을 많이 드시느냐”고 물어봤지만 혈압 때문에 조심할 뿐 “보약이 왜 필요하냐”고 대꾸한다.

집무실 냉장고에는 혈압안정과 관련된 한약이 있을 뿐이다. 그 대신 먹고 싶은 것은 가리지 않고 먹는 식성은 그대로라고 한다.

“돼지고기 개고기도 생각나면 먹고 막걸리나 양주도 닿는 대로 마신다”고 털어 놓는다.

농장을 안내 할 때 손수 운전하는 ‘클럽카’가 힘드시지 않느냐는 물음에 “재미있다”고 말한다.

신명나고 힘이 펄펄 솟는다는 말이다. 옆에서 지켜보기로도 상머슴처럼 일하는 것이 바로 은퇴 회장에게 최상의 건강으로 보답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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