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립편집위원
이경립편집위원

‘지못미’,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줄인 신조어로 주로 인터넷 상에서 사용되는 말이었으나, 현재는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음을 선택했을 당시 그의 지지자들이 그를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悔恨)을 담아 사용했던 말로 시민권을 획득한 이후, 어학사전에도 당당하게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지못미 신드롬’은 많은 정치인 팬덤(fandom)현상과 오버랩 되면서 ‘조국 정국’에서는 서초동으로 모였고, 김경수 경남지사가 ‘댓글 조작사건’ 2심판결에서 징역2년을 선고받자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며 노골적으로 사법부를 비난하고, 현재는 추미애 법무부장관을 지키겠다며 윤석열 검찰총장 저격에 올인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고 있는데, 태극기부대가 박근혜 전 대통령은 죄가 없다며 반정부 시위를 선동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이성의 정치는 온데간데 없어졌고, 선동과 파괴의 정치, 능멸과 조롱의 정치가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홍길동이 율도국(聿島國)을 세우던 시기도 현재의 정치사회와 상당히 흡사했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세계에서의 ‘지못미 신드롬’은 ‘노무현 트라우마’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정치문화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점에서는 평가할 만하다. 소위 권위주의 정치에서 탈피하는 정치문화를 선도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지극히 서민의 입장에서 서민을 대변하는 언어와 행동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탈권위주의정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이다.

그런데 그러한 탈권위주의 정치가 불편한 사람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는 건설업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의 ‘노가다판 정치’는 권위주의정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에게 정치는 불도저로 산을 깎아 택지를 만드는 일이었다. 물러서서도 안 되고 되돌아가서도 안 되는 것이 이명박 정치다. 거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리는 없었다. 궁지에 몰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음으로서 자신의 탈권위주의정치를 지켜냈다.

그런데 노무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에게는 그의 죽음이 트라우마로 다가왔다. 죽은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것이고,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뒤집어 쓴 것이라고 믿고 싶어졌다. 종국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죄 없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이 헌화하려고 하는 순간 “어디서 분향을 해! 이명박! 무슨 자격으로 헌화하느냐, 정치 보복으로 살인에 이르는 정치 살인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죄하십시오!”라는 백원우 의원의 외침이 이를 방증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훗날 한 인터뷰에서 당시 백원우 의원과 같은 생각을 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렇다면 ‘노무현 트라우마’의 본질은 명백하다. 또 다시 노무현과 같은 죽음을 맞이하게 해서는 안 된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그리고 노무현의 부활로 탄생한 문재인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은 길로 가서는 안 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는 그를 지켜야 한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은 그들에게 신(神)적인 존재가 되었다.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행동해서도 안 된다. 밑에서 알아서 다 해 주는 것이다. 신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잘 되고 있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알아서 잘 해결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틀렸다. 정치는 신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의 영역이다. 그래서 작금의 정치 혼란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레임덕이 발생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인간임을 자각하고 인간의 정치를 해야 한다. 빠를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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