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 돈이 삶의 수단 아니라 목적으로 뒤바꿔 비극자초노태우 “정치자금 안 받겠다” 하고선 뒤로 거액 받아 챙겨“어릴 때부터 참을성은 있었나 봐요”80년초 한창 안개정국일 때 언론계에서는 “과연 누가 실세냐”는 퀴즈풀이가 한창이었어. 신군부 측은 하루가 멀다하고 언론사 데스크들-주로 정치 사회부-을 불러 ‘애국언론 브리핑’이라는 걸 했지. 그 때 나타난 인물 중 데스크들의 표적에 든 사람이 노태우 소장이었어. 틀도 그럴듯 하고 상당히 정치적인 말도 하고 깊숙한 눈매는 무엇인가 뒤에서 도모하는 듯한 인상이었지. 전두환 소장이 주로 전면에 나서 시국 안정 협조와 돌아가는 일을 얘기했지만 ‘저 사람은 아니다’는 생각들을 했어.

5·16 때 ‘육군 중장 장도영’이 계속 표면에 나오다가 반혁명 혐의로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박정희 소장이 나타난 것을 목격한 경험 때문이었는지도 몰라.그러나 더블 캐스트로 전개되는 모양새를 보이던 신군부의 지휘탑은 그냥 전두환 체제로 굳어지고 노태우는 한 발짝 뒤에 서 있게 되었어. 권력 투쟁에서 1인자와 2인자의 대결이 피를 부른 역사가 많고 현대 정치에서도 2인자는 정치적 희생물이 되는 경우가 허다함에도, 노태우씨가 대통령을 승계에 성공한 것은 특별한 경우라고 보아도 될 듯 싶어.전-노의 특수한 관계도 있겠지만 ‘참을성’ ‘기다림’이라는 그의 개인적 성격이 그런 과실을 얻어냈다고 할 수 있고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그의 선임자였다는 행운이 결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어.

TV연속극 <제국의 아침>에 나오는 고려 3대와 4대의 정종과 광종이라고나 할까. 신군부라는 동일 정치모계에서 나와 우호적 동맹으로 권력을 찬탈해 가는 시나리오를 집행한 거지.노태우가 민정당 대표시절 함께 한성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한 적이 있는데, 이런 얘기를 들려주더군. “제가 어릴 적이었어요. 동네 아이들과 강에 나가 누가 오래 물 속에서 견디나 내기를 했어요. 그냥 머리만 박으면 밀려서 떠오르게 되니 내기에 질 게 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 무거운 큰 돌맹이 하나 움켜쥐고 물 속에 들어갔어요. 한참후 물 밖으로 고개를 들었더니 친구들이 없어요. 아주 오래 동안 내가 안 나오니까 먼저 간 줄 알고 가 버린 거예요. 어릴 때부터 참을성은 있었나 보아요.”“각하(전두환)와 나(대통령 후보인) 사이를 놓고 말씀들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친구죠. 각하가 부모상을 당했을 때 내가 상주 대역 안 했습니까. 각하는 그 당시 주월 사령부에 나가 있어 내가 대신 합천으로 내려가 묘지 작업도 시키고 장례 행사도 주관하다시피 했어요.”그런 얘기를 흘린 것도 용의주도한 계산이 있었을 듯 싶다.

우리는 ‘도원결의’는 안 했지만 정치적 갈등 정도는 극복할 수 있는 관계라는 거지. 하지만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이런 ‘우정의 무게’도 별 것 아님이 드러나게 되었지. 엄청난 세론의 파도가 몰려든 원인도 있지만 그는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냈어.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지. 그때 군부세력 핵심부에서는 이런 소리도 나왔지. “노태우가 먼저 하고 전두환이 나중 했으면 전두환이 노태우를 백담사로 그렇게 쉽게 쫓아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노태우가 먼저 잡았으면 전두환은 후계자도 못 되었을 것이다” 그랬지. 그래도 노태우가(家)에는 전두환 멘탈이 있어. 대통령에 막 당선이 되었을 때야. 모 대기업의 J사장이 새 당선자쪽에 줄을 연결하고 무엇으로 생색을 낼까 고민 중이었지. 사실 재벌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동력을 발휘하는 부문이 있어. ‘어떻게 하면 빨리 말을 갈아 탈 것이냐’ 하는 문제야.박 대통령이 제1차 5개년 계획을 입안할 때 참여했던 P씨의 증언이지. 말을 갈아타는 데는 돈만으로 안돼. 연결 인맥이 있어야 하고 또 생색이 나는 근사한 프로젝트도 제공되어야 해. 그래, J사장이 생각해 낸 것이 영부인의 이름으로 고아원을 도와주는 일이었지.

TV 수상기 20,30대를 영부인 김옥숙 여사의 이름으로 기부한다는 거지. 그래도 ‘갸륵한 봉사’를 상대에게 알려야 하겠기에 김 여사쪽에 “이런이런 일을 할 참입니다”고 알렸어. 그랬더니 그 쪽에서 펄쩍 뛰었어. “아직 대통령 취임도 안 했다. 그 쪽(이순자 여사)에서 알면 좋을 게 없다. 가만히 안 있을 거다(아직 현직 대통령과 그의 부인이므로). 기탁하려거든 그 쪽 이름으로 하라”는 응답이었어.J회장은 어떻게 하였을까. 자신의 기업과 이름으로 TV 수상기들을 고아원에 기증했어. 진실의 내막이야 어쨌거나 좋은 일을 했지. 이 이야기가 전파되자 권력 가족 주변에서는 “그게 돈이었다고 해도 그랬을까” 하는 야유가 나오지 않겠어? ‘연희동 댁들(이순자와 김옥숙)’은 어느 쪽도 돈 안 싫어한다는 거지. 그때부터 “부동산 투기 현장에 나타났다던 장본인이 ‘빨간 바지’냐, ‘빨간 잠바’냐” 하는 소리가 배회하기 시작했어.

박봉의 육군 장교 부인으로 그래도 자식 교육시키고 가계 제대로 꾸려가려면 딱지도 사고 아파트 전매도 할 수 있다고 봐. 그땐 수 천억 원을 손쉽게 주무를 수 있는 권력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걸 예상할 수 없었을 터이니까 말야. 문제는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된 이후에 돈이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뒤바뀐다는 데 있어. 워낙 공짜로 그것도 수월하게 그리고 거액이 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권력자들은 돈으로 카리스마를 만들어내곤 하지. 안방 마님들도 그런 권력의 병에 감염되는 수가 많아.청와대 안주인의 부름을 받고 인테리어와 실내환경 용역을 맡았던 한 업자는 영부인이 준 팁 봉투를 열어 보고 깜짝 놀랐어.

‘대통령 부인이니 이 정도 주시겠지’ 하는 예상액에 0이 하나씩 더 붙은 거야. 아마 이 소식이 언론에 공개된다면 보통 구설수에 오를 일이 아닐 거야.하지만 상류사회와 고급업자들 세계에서는 팁의 규모가 위치를 선정해 주지. 하나의 과시 수단으로 통하지. “대통령 부인씩이나 돼 가지고 검약이나 할 것이지” 하지만, 지배계급 사회의 안방들은 그 팁의 규모에 그야말로 야코가 죽어버려. 나중에 옷 로비사건으로 고급관료의 안방들이 사법적 차원의 호된 심판을 받았지만, 내밀한 이너서클 안방의 비밀스런 회로와 행태와 시스템은 언론에 의해 추적되지 못했어.

청와대 곳간 비자, 세무조사 통해 정치자금 수금
“나는 일전 한푼도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보통사람의 대통령’은 선언을 했지.돈하고는 먼 대통령이 되겠다니 재계가 얼마나 좋아했겠어. ‘이제야 정치가 바로 서는구나’ 하고 순진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척은 했지. 손해 날 것도 없고 워낙 정치자금으로 해서 시달려 왔으니까. 그래서 진짜로 돈 싸들고 청와대로 들어가는 짓이 줄어들었어.문제가 생겼어. 청와대에 가뭄현상이 일어난 거야. 일시적인 게 아니라 돌아가는 기미가 좀 이상해졌어. 진짜는 정상으로 돌아가는 거지만.그러던 89년 12월 어느 날 모 유력신문의 1면 톱으로 <14개 재벌기업에 강력한 세무조사> 제하의 기사가 등장했어. 우리 사회야 반(反)재벌의 정서가 있으니 “세무당국이 ‘정의의 칼’을 빼어들었구나” 하고 박수는 안 칠지라도 국세청 편이 돼. 그러나 그 내막과 진실을 알고 보면 황당하지.

이게 바로 그런 케이스였어. ‘청와대의 가뭄’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였던 거야. 한 푼 두푼도 아니고 크게는 수천억 원의 세금추징이 걸리는 문제니 재벌들은 정치적 해결을 시도할 수밖에 없어. 이 정도 수준이면 국회의원이나 각료의 힘으론 안돼. 청와대가 ‘직방’이야. 직방의 대가는 물론 돈이지. 대통령은 국세청장을 불러들여 감세나 면세를 고려해 보라고 하는 거지. 그건 형식이고 규모가 이쯤 공개적이고 대대적이면 당측과도 협의하고 적절한 세정 타협안을 청장이 만들어 내도록 지시하지. 지시보다는 묵시적 명령이지.당시 현대재벌의 경우 2천억 원의 세금이 추징된다는 설이 사전에 새 나갔는데, 이런 세무기밀 사전누설도 실상은 시나리오라는 냄새가 나는 거야. 신문에 흘리는 게 아니라 현대쪽 고위 채널에만 극비로 알려주는 형식인데, 이걸 알았으면 ‘뛰어’하는 암시지. 가령 1백억 원을 들고 청와대로 들어가 추징 세액을 1천억 원으로 감액 받으면 당해 기업으로는 9백억 원을 건져내는 셈이 돼.

실제로 K회장은 정주영이한테 물어보니까 “2천억 원 맞는다고 하는데 그럼 내가 보기엔 1천억 원이야. 당신 국세청장 하구 친구지? 한 50억 원 가져다주고 (청와대에) 한 5백억 원 정도로 봐 줄 수 없는지 말해 볼 수 없느냐”고 그러더라는군. 기업은 일단 당하면 이렇게 바로 ‘장사’로 들어가. 50억 원으로 450억 원을 건지는 셈법이야. 이른바 TK(대구·경북)의 울타리를 세력 삼아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노통은 이 협박을 통해 비어가는 청와대 금고를 채울 수가 있었어. 이건 꽤 그럴 듯한 시나리오지. 우선 국세청은 ‘정의의 칼’을 빼어들었으니 그럴 듯 해. 재벌은 청와대에 ‘헌금’을 하고 세금 덜 때려 맞으니 혼은 잠깐 났지만 큰 손해를 작은 손해로 만들어 좋고, 대통령은 권력 유지와 추종세력에 대한 지원금을 마련하는 한편, 재벌들에게는 힘을 과시하는 기회까지 제공되니 정말 그럴 듯 하거든. 흔히 언론이 사실과 진실의 낙차를 논하는데, 이게 그 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어.

이너서클에 침투하여 증거를 포착하기는 힘들어도 언론은 탐사보도를 할 수 있지. ‘세수가 매년 계획치를 초과하고 있는데 왜 거액의 세금을 더 거둬들이는 세정 조치를 취하는가?’ 뭐 이런 의문으로부터 출발하면 실체규명에 접근할 수가 있다고 봐.그게 왜 안될까. 탈세 하면 재벌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고, 물론 그런 원인 제공을 재벌이 해 왔지만 말야. 또 하나는 그런 의문은 언론이 재벌 편에 서 있다는 인식을 주기 때문에 자기 도덕적 측면의 알리바이 입증이 어렵게 되거든. 또 국회는 국회대로 재벌을 물고 늘어져야 업적도 크게 부각되고 정치자금도 쏠쏠하게 입금지부에 올라가게 되지. 언론이 제대로 긁으려면 ‘이 세무조사에 흑막은 없는가. 다음 조사작업은 제대로 하는가. 최종 결론은 정치적으로 수정되고 있지 않는가. 추징과정에 금품 수수의 흑막은 없었는가’를 두고 탐사보도가 확대되어야 마땅하다.또 유사한 일은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하나의 이벤트로 살아남아야 사회가 진화된다는 점에서 생산적이지.<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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