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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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자기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미래가 없다”

“내셔널리즘에 갇혀 진실 보지 못하면 안 돼”

- 길지 않은 시간동안 주일대사로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해주셨는데, 재임 기간 중에 특히 기억나는 일이 있으신가. 주일대사 같은 경우에는 동포사회가 상당히 많이 연결되어 있고 관련된 일도 많을 거라고 생각된다. 
▲ 대사 재임 기간이 짧았는데, 국교정상화 후에 1964년부터 동북아과 근무를 하면서 3년간 일본 근무를 했다. 2등서기관 때 근무를 했는데, 그 후에 아주국에서 아주국 심의관, 아주국장을 했기 때문에 일본 문제에서 떠난 적은 별로 없다. 그러니 물리적으로는 짧았지만 정신적으로는 계속 일본 문제에서 떠난 적은 별로 없다. 

재일한국인 사회 문제는 항장 커다란 문제다. 사실 지금은 우리 국민들이 해외에 많이 진출해서 500만 동포들이 사는 사회가 일본 외에도 여기저기 있고, 미국·러시아 등 큰 사회들도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60만 한국인들이 사는 건 일본뿐이었다. 더군다나 남북 대립이 그대로 우리 교민 사회에 옮겨져 있었다. 민단 단원들이 북송을 반대한다고 니카타로 가는 철도 레일 위에 눕기도 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유를 찾아서 넘어오는데, 자유세계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간다는 게 말이 되냐는 것이었다. 북송 내용을 들여다보면 조총련의 교묘한 공작으로 완전히 감언이설에 넘어가서 갔다. 그런 남북대결에서 반공에 앞장섰던 게 민단이다. 

오늘날에도 남북대결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지금은 일본 사회에서 그렇게 가혹한 대결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민단은 그러한 이데올로기 대립의 연장선상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만, 한편에서는 친목단체가 아니냐는 이야기를 많이 하기도 한다. 민단은 임의단체이기 때문에 법적지위가 모호한 건 사실이다. 조직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혈관이 있어야 하고, 혈관에 공급하는 피가 필요하다. 그동안 유지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되어서 지역에 따라서 잘되고, 낙후되고 편차가 심했다. 그래서 국교정상화 이후에 민단 기간요원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정부보조금이 나가기 시작했다. 그게 1970년대에 시작돼서 벌써 반세기 이상되어가다 보니,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또 일본 사회에도 지금 민단 소속교민이 30만~40만 명 있는데, 본국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사는 경우도 있을 거 아니겠나? 10만~20만 명으로 추정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저는 민단사회는 이미 본국에서 간 사람들과는 이질적인라고 생각한다. 뿌리는 같은 한민족이지만 벌써 일본에서 3~4대째 살아오는 사람들이다. 문화·언어적인 점에서 쉽게 융합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로 통합하기는 어렵고, 그대로 병립해야 하며, 우리 공관이 일본에 여기저기 있으니까, 공관이 연경망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민단을 보면, 민단을 우리가 어떻게 육성해가야 할지 그 방향성이 나오지 않을까 한다. 지금 현안을 깊이 들여다보고 파악하는 이야기는 아닌데ㅔ, 제가 느꼈던 생각은 이런 거다. 

- 재임하시던 중에 특히 인상에 남았던 일본 측 인사들이 있었나.
▲ 아베 총리는 제가 재임할 때는 못 봤다. 연표를 보면 제가 주일대사로 있을 때, 아베 총리가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돼서 나왔다고 한다. 제가 아주국장이 끝나고 카이로총영사로 나갈 때 후쿠다 다케오 총리가 박정희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서 왔다. 그래서 계시는 동안에 일을 도우라고 해서 청와대 의전 수석을 도와서 경주를 여행했는데, 그때 아베 신타로, 아베 총리 아버지가 같이 왔었다. 그래서 후쿠다 총리 내외분과 후쿠다 총리의 아들이 비서관으로 있었다. 요코테 비서관은 그후 일찍 돌아갔다. 아베 신타로 씨는 기시 전 수상의 사위뿐만 아니라 차기 수상을 노리는 후보였기 때문에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그런 분들도 지금 다 돌아가셨다. 요새 일본 가면 고농 장관은 가끔 찾아가고 만난다. 당시 외무장관 하던 하다 전 총리도 몸이 좋지 않고, 그 후에는 찾아보지 못했다. 

- 이후에는 장관으로 부임하게 됐다. 혹시 한·일 관계에 관련하여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조언이 있나.
▲ 저는 기본적으로 우리나가 생존하는 데 있어서 중국과의 관계, 일본과의 관계 그리고 이 지역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는 미국과의 관계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웃인 일본·중국과의 관계는 우리의 생존과 밀접하다. 때문에 외교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는 한·일 관계, 한·중 관계에 대해서 깊은 공부를 해야 한다. 우선 언어를 공부해야한다. 언어를 모르고는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를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언어 공부를 열심히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특히 생각해야 할 게 지금 중국이 부상을 하면서 우리의 안보를 담보하고 있는 미국과 상당히 경쟁적인 관계이며, 어떤 면에서는 대립적인 측면이 강하고, 특히 요새는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팽창주의 정책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인접국인 우리에게 커다란 문제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 우리 단독으로는 절대 안 된다. 김영삼 대통령이 “사람이 한 발로 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일본과도 밀접하게 관련을 가져야 하는데, 현재는 일본과 안보적인 협력이 거의 안 된다. 하려고 해도 국민감정 등으로 과거의 역사가 자꾸만 발목을 잡고 있으니, 우리가 이것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 지도력이 필요하다. 

우리 지도자들이 이런 정치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리더가 정치 지도력을 발휘한다고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또 아니다. 오늘날의 민주사회에서는 국민이 호응하고 지지해주어야 할 텐데, 이를 위한 바른 역사인식이 필요하다. 너무 내셔널리즘에 갇혀서 진실을 보지 못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경제가 발전한 토대는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 그건 우리가 잊어선 안 된다. 

자기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 있다. 특히 일본 관계에 있어서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우리는 과오가 하나도 없는데 일본이 나빠서 우리가 국가를 뺏겼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분들이 있는데, 19세기 우리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리들의 선인들(특히 지배층)이 너무나 바깥세상에 대해 무지했다는 생가을 한다. 특히 1840년 아편정쟁을 전후한 때 일본과 한국의 상황을 비교해봐라. 그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눈뜬 일본은 유신을 하고 우리에게 국교를 새롭게 하자고 알려왔을 때 그 문서를 7년간이나 받지 않았다. 우리가 국서를 받지 않자 일본에서 정한론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지점에서 일본의 침략이 발생했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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