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하게 열한 시가 되자 키가 작고 목이 짧은 여자가 후지엘렉트릭 사무복을 입고 나타났다.
“나쓰에 상, 고찌라데쓰.”
유미가 손을 들고 일어서자 여자가 미소를 띠고 다가왔다. 수원도 일어서서 함께 나쓰에를 맞았다.

“바쁘신데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전화를 건 고유미입니다. 여기는 제 친구 한수원이고요.”
“모리무라 나쓰에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쓰에는 한국말로 공손하게 인사하며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숙이며 명함을 두 손으로 건네주었다. 기술 담당 이사 대우라고 직책이 쓰여 있었다. 수원과 유미도 명함을 건네주었다.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수원이 유미를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와도 괜찮을 걸 그랬다는 눈빛이었다.
“아, 서울에서 10년 살았어요.”
“그러세요? 그럼 부군께서는...”
유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쓰에가 대답했다.

“주인이 사장이에요.”
나쓰에는 남편을 주인이라고 부르는 듯했다.
“한국수력원자력이면 혹시 전기 기술 분야이신가요?”
세 사람은 함께 웃었다. 처음 만났지만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았다.
나쓰에가 수원의 명함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예, 원전 관계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도 한국전력 같은 회사와 협력하는 일이 많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쓰에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이 스즈끼 씨 맞죠?”
“네, 돌아가신 지 20년도 넘었어요.”

“아버님이 1978년 무르만스크에서 불시착한 대한항공 902편에 타고 계셨다고요?”
수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네.”
나쓰에는 약간 긴장하는 것 같았다.
“그때 일을 아버님이 기록해 두셨다면서요?”

“예. 마치 눈으로 보듯 자세히.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나쓰에가 물었다.
수원은 정보를 얻게 된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아버지는 참 좋은 분이었어요. 아버지 생각을 하면 눈물만 나요. 그 비행기만 타지만 않았어도 그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나쓰에는 토마토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른 승객들과 함께 소련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아버지는 일본에 돌아온 뒤 불안증에 시달렸어요. 밖에 외출을 맘 놓고 못하시고, 집에만 숨어 계셨어요. 마치 누구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그러면서도 매일 일어나는 일을 일기장에 꼬박꼬박 적으셨죠. 주로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쫓아온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랬군요. 그러다가 어떻게 돌아가셨어요?”

“친척 집 결혼식에 가셨다가 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괴한 습격을 받았어요.”
“범인은 잡았나요?”
수원이 물었다.
“아뇨. 빼앗긴 물건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강도는 아닌 게 분명해요. 그렇지만 누구에게 왜 습격을 받았는지는 지금도 몰라요. 어쨌든 아버지 일기장을 몇 번이나 읽으면서 느낀 것이 아버지의 죽음이 그 비행기 탑승과 관계있는 것 같았어요.”
“그 일기 속에 주로 어떤 내용이 들어 있던가요?”

“사건 당일의 경험과 생환되기까지 겪었던 일 등이 주된 내용이에요. 귀국 후 여기저기에 보도된 당시 사건 기록을 옮겨 놓기도 했어요. 주로 탑승객 명단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더군요.”
“명단이요?”

“가령 탑승객 숫자가 109명이냐, 110명이냐 하는 것이지요. 아버지 기록에 의하면 당시 소련 발표에는 110명이고 서방 측 발표에는 109명으로 되어 있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기장에 정확히 110명이었다고 적어 놓았어요. 한 명이 차이가 나죠.”

“그 한 명이 바로 30년 전에 실종된 저희 아버지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나쓰에 상을 찾아온 거예요.”
수원은 아나톨리 게시판에서 읽은 내용을 전해 주었다. 거기에서도 탑승객 숫자에 차이가 있으며, 그 한 명이 용국 한, 즉 수원의 아버지 한용국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수원은 아버지를 잃고 의혹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온 어머니의 삶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 만에 태어나 자라온 자신의 성장과정도 말해 주었다. 나쓰에는 수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일기장에 재미있는 내용도 있었어요. 비행기를 검색하던 소련 요원들이 창고에서 엄청나게 많은 코카콜라와 말보로 담배, 플레이보이 잡지를 한 아름씩 안고 가며 웃음을 터뜨리더랍니다.”
소련 최북단 무르만스크 기지에 근무하던 군인들로서는 그런 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 같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러시아말을 약간 할 줄 아셨어요. 귀국 후 소련에서 발행되는 시사 전문 잡지를 종종 사 보셨지요. 대한항공 사고 비행 후의 이야기를 알아보기 위해서인 것 같았어요.”
“혹시 마리아 바소로뮈나 쟝 폴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으세요?”
수원이 물었다.
“아니오. 처음 듣는데요.”

나쓰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버님 일기장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대한항공에 관한 것만 입력해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어요.”
수원은 반가워 얼굴이 환해졌다. 하루 빨리 스즈끼의 일기를 보고 싶었다.
“제가 좀 볼 수는 없을까요? 무례한 부탁입니다만...”

수원이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하자 나쓰에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기꺼이 보여드리지요. 어쩌면 저희 아버지가 한 박사님 아버님을 위해 기록해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보여 드리는 것이 아버님 뜻인 것 같아요.”

아버지를 생각하는 수원의 마음을 헤아린 것 같았다.
“일기를 한국어로 저장해 놓으셨나요?”
잠자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유미가 중요한 질문을 했다.
“아니요. 일본말로 저장했는데요.”

나쓰에의 말을 듣고 수원이 난색을 표하자 유미가 나섰다.
“그럼 저한테 메일로 보내주시겠어요? 제가 일본어를 아니까 한국말로 번역해서 수원에게 보내면 될 것 같은데요.”
유미가 제안했다.

“그렇게 하지요. 메일 주소는 이 명함대로 적으면 되겠지요?”
나쓰에가 유미가 건네준 명함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버님 일기장에 대한 얘기가 어떻게 해서 인터넷상에 떠돌게 됐을까요?”
수원이 궁금하던 것을 물어 보았다.
“아버지가 러시아 친구와 서신 교환을 한 적이 있는데, 그게 나중에 알려진 것 같아요.”

이야기를 마친 뒤 세 사람은 63 빌딩 스카이라운지로 자리를 옮겼다. 한강을 내려다보며 함께 점심을 먹고 있으려니, 수원은 나쓰에가 오랜 친구라도 된 듯 친밀감이 느껴졌다.
“우리 헤어지기 전에 기념사진이나 한 장 찍지요.”

유미가 늘 어깨에 메고 다니는 카메라 백에서 작은 디지털 카메라를 꺼냈다.
“그렇게 작은 카메라 넣고 다니는데 저렇게 큰 가방을 메고 다녀야 하니?”
“치한 퇴치용 호신용 무기도 함께 넣느라고...”
수원의 물음에 유미가 웃으면서 셔터를 눌렀다.

유미한테서 긴 메일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근무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 편안한 마음으로 컴퓨터를 열자 유미의 메일이 와 있었다.
- 수원아, 메일 늦어서 미안해. 잡지사 일이라는 게 워낙 정신없이 돌아가서 말야. 내 나름대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추려서 번역했어. 더 궁금하면 연락해. 
그럼 또 연락할게.

참, 어제 성민 씨 만났어. 블루 문이라는 재즈 바에 가서 한잔 했지. 야, 성민 씨 멋지더라. ㅋㅋㅋ.
수원은 마지막 문장이 신경 쓰였으나, 첨부 파일부터 열어 보았다. 엄청난 분량이었다.
스즈끼는 대한항공 902편의 사고 경위에 대해 정말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듯 자세하게 적어 놓았다. 군데군데 나쓰에가 러시아 인터넷에서 캡처한 듯한 내용도 함께 있었다.

1978년 4월 20일.
우리는 파리 오를리 공항을 출발했다. 비행기가 궤도에 오르자 기장 김창기가 안전하게 모시겠다는 인사를 했다. 한국어와 영어였다.
나는 비행기가 고도에 다다랐을 때쯤 스르르 잠에 빠졌다.
얼마를 지났을까?

눈을 뜨니 창밖에 아름다운 노을 같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오로라였다. 환상적인 백야를 보고 있으니 마치 천국과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왼쪽으로 보이던 오로라 빛이 오른쪽에 나타난 것이다. 비행기가 거의 180도 방향을 틀었다는 이야기였다. 북극점에 가까운 곳에서 방향을 거의 반대로 바꾸면 목적지로 향하는 알래스카 방향과는 멀어지는 것이었다.

비행기는 그런 상태로 계속 항진하고 있었다.
밑을 내려다보았다. 이 시간쯤이면 밑에 그린란드가 나타나야 했다. 그런데 바다만 보였다.
북극항로 여행을 많이 해 본 나는 항로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스튜어디스를 불렀다. 그리고 일본말로 공손하게 물었다.

“지금 비행 노선이 맞게 가고 있습니까? 기장에게 한번 물어 보시겠어요?”
스튜어디스는 별 이상한 승객도 다 있다는 듯이 한참 나를 보다가 승무원석으로 가서 전화를 했다. 다시 돌아온 스튜어디스가 나직하게 일러주었다.
“항로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저희 보잉 707기는 자이로 콤퍼스에 의해 자동 항로 안내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뒤에 내가 확인한 것이지만 이때 자이로 콤퍼스는 고장나 있었고 항법사는 비행로를 착각하고 있었다. 만약 고장난 게 아니라면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여 인공위성이나 지상 유도 장치를 조작, 비행항로에 착오를 일으키게 만든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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