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야기 담은 노래가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닿기를”

▲ 가정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음반 <우리, 이젠> 티저 [제공=한국여성의전화 / 촬영 및 제작: 이솜이]

[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마주할 수 없었던 기억조차 담담하게 만드는 울림과 파동.” 가수 강허달림은 지난달 25일 발매된 가정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자작곡 앨범 <우리, 이젠>에 수록된 5곡의 노래를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해에 이어 피해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한 자작곡을 만들고, 그 곡을 바탕으로 공연 무대를 꾸미는 문화·예술 치유 프로그램 ‘마음대로, 점프!’를 진행했다. 가정폭력을 개인의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는 사회 분위기를 바꾸고 피해자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마련된 프로그램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열 명이 참여했다. 일요서울은 지난 1일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두 명의 출연자 이루리·마리(활동명) 씨를 만나 삶과 공연 이야기를 들어봤다. 

- 자작곡 앨범 <우리, 이젠> 발매…‘마음대로, 점프!’ 무대 진행
- 마음속 깊은 상처 춤·노래로 치유, 희망과 용기 전해

한국여성의전화가 진행한 ‘마음대로, 점프!’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노래와 무용을 연습하고 있다. [사진=한국여성의전화 제공·김희지 촬영]
한국여성의전화가 진행한 ‘마음대로, 점프!’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노래와 무용을 연습하고 있다.
[사진=한국여성의전화 제공·김희지 촬영]

‘마음대로, 점프!’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시간

이루리 씨는 “다 같이 모인 첫날, 테이블에 앉아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나이만 다를 뿐 피해 당시 상황이나 느낀 점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감정이 북받쳤다”면서 “이 친구들이 또 다른 나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그래서 서로를 더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루리 씨는 가정폭력 피해를 겪고 이혼한 지 5년이 됐다. 이혼 당시에는 트라우마가 심해 누군가의 터치나 큰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혼 후 양육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양육비 미지급 관련 비영리단체인 ‘배드파더스’에서 활동했다. 가해자를 찾아가 대면하는 상황도 있었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았다.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생각에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일상에서는 티 나지 않았지만 마음 한 편에 있던 트라우마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는 가정폭력 피해를 입었을 당시 도움을 받았던 한국여성의전화를 통해 우연히 이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같은 경험을 한 친구들과 함께 노래와 춤을 통해 상처를 극복해보고자 비영리단체 활동과 공연 연습을 병행했다. 그 결과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가해자를 당당하게 맞설 수 있게 됐고 더욱 대담해졌다. 다친 마음을 치유하는 계기도 됐다.

마리 씨도 마찬가지였다. “가정폭력을 당해 온 사람들 대부분은 가해자에게 제재를 많이 당해 정신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한다. 나도 27년간 가정폭력을 당하면서 차단된 삶을 살아왔다”며 “매스컴에서 가정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했지만 내 근처에 또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나와 똑같은 상황을 겪었다는 것에 놀랐고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이겨내려고 여기에 온 사람들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마리 씨는 30여 년 동안 가정폭력 피해를 당했다. 가해자는 일부러 얼굴만 빼놓고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도록 폭력을 가했다. 마리 씨는 자녀들이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지울 수 없는 아픔을 겪어도 참고 또 참아 냈다. 어머니와 언니, 딸이 ‘이건 아니다’라며 신고해 줘도 들리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피해를 당한 감각이 무뎌졌을 때쯤 쉼터를 택했다. 쉼터에 온 지 얼마 안 돼 우연히 마음대로 점프 팀의 공연을 관람하게 됐다. 마음 정리도 안 돼 있었지만 이들이 몸으로 표현하고 소리 지르고 마음대로 춤추는 모습에 매료됐다. 그렇게 신청하게 된 이번 프로그램은 마리 씨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줬다. “처음엔 나의 마음을 몸으로 표현하는 게 너무 어렵고 어색해서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몸짓을 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점차 시간이 지나니까 비로소 ‘마음의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내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만드는 노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냐 / 없다고 생각했던 두려움 / 없다고 생각했던 슬픔 / 내겐 없다고 생각했던 순간들 / 괜찮지 않은 나는 내게 / 괜찮아 괜찮아 말해왔어 / 그렇게 나를 밀어냈어 / 그렇게 나와 멀어졌어” (앨범 수록곡 ‘골목’ 중)

“한 걸음 걸어도 제대로 걷고 싶어 / 당신의 목소리 이 밤을 새우는 / 흔들리는 불빛들 / 그중에 하나로 손 꼭 잡고서 밤길을 걸어가네” (앨범 수록곡 ‘밤길’ 중)

이루리 씨는 자작곡 앨범 <우리, 이젠>에 수록된 5곡의 노래들 전부가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 같다고 했다. 그는 “노래 전부가 나에게 해주는 말 같아서 마음에 와 닿았다”면서 “내년에는 다른 친구들처럼 자작곡을 만드는 것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마리 씨도 “노래를 듣다보면 아픈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고 내 이야기 같기도 해서 눈물이 많이 난다”며 “자작곡을 만들려면 피해 당시의 기억을 소환해야 해서 힘들고 어렵다. 최근 음악 감독님이 ‘눈 없는 말’이라는 노래 제목을 지어주셨는데 순간 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겨 내년에 도전해 보려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다”고 했다.

지난달 25일 가정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마음대로, 점프!’ 첫 단독 공연이 열렸다. [사진=한국여성의전화 제공·김희지 촬영]
지난달 25일 가정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마음대로, 점프!’ 첫 단독 공연이 열렸다.
[사진=한국여성의전화 제공·김희지 촬영]

‘개인의 사소한 일’로 치부하는 사회적 분위기 문제

이들은 가정폭력 피해를 당했을 당시 주변에 도움을 받을 만한 곳이 없어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가정폭력을 범죄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취급해 단순 주의만 주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가해자의 편을 들어주면서 피해 여성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이는 경찰과 사법부가 피해자의 보호를 신경 쓰지 않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루리 씨는 “피해 당시 포털 검색창에 ‘남편이 때리는데 이게 뭔가요?’라고 검색해 보고나서 비로소 가정폭력이라는 것을 인지했다”면서 “이에 대한 대처방법은 보이지 않아 처음엔 신고 생각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폭력을 당해도 이해하고 넘기면 며칠은 잘해주니까 잠깐 화나서 그랬나 싶다가 (폭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폭력을 막아보고자 경찰에 신고했지만 현행범으로는 어렵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피해자 보호가 어려운 건 병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쉼터에 가게 된 그는 신변 문제로 임시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하면서 어린 자녀를 데리고 병원에 갔지만 아무도 이 같은 과정을 이해하지 못해 애를 먹은 적도 있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자 결국 가정법원 재판을 시작했지만 막상 이혼을 하기까지 지난한 시간을 거치며 또 한 번 상처를 입어야했다. 이루리 씨는 “법원은 피해자에게 피해사실을 입증하라고 한다”며 “증거가 명백한데도 가해자가 항소할 수 있게 만드는 건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마리 씨도 딸의 신고로 경찰이 찾아왔지만 갈비뼈에 실금이 갈 정도로 폭력을 당한 모습을 목격했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해 주지 않았다. 마리 씨는 이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마음의 병이 깊어졌고 삶을 포기할 결심까지도 했다. 그는 “재판이 길어질수록 숨어 지내야 하는 기간도 늘어나게 돼 힘들다”고 했다. 그는 또 “법원에서 대질조사를 할 때, 조사관이 가해자가 사랑해서 그랬다는데 그래도 이혼을 하겠느냐는 말을 했을 때도 불쾌했다”면서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말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5일 가정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마음대로, 점프!’ 첫 단독 공연이 열렸다. [사진=한국여성의전화 제공·김희지 촬영]
지난달 25일 가정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마음대로, 점프!’ 첫 단독 공연이 열렸다.
[사진=한국여성의전화 제공·김희지 촬영]

‘나에게 점프란’

‘점프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루리 씨는 “오래 묵은 때를 밀어내는 개운한 시간”이라고 답했다. “때를 안 밀어도 티는 안 난다. 그런데 때가 오래 축적되면 몸이 간지럽기도 하고 찝찝하기도 하지 않나. 가정폭력 기억이 그랬던 것 같다”면서 “겉으로 보이지 않아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혼자 찝찝하고 간지러운 기분이고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면서 “마음대로 점프를 통해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었고, 보이지 않은 상처를 밀어서 털어버릴 수 있게끔 만들어준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마리 씨는 “다시 움직이게 해주는 원동력”이라고 답했다. 그는 “죽음의 시간을 버텨오면서 지금은 비로소 마음껏 꿈틀거리고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됐다”면서 “앞으로 더 잘 살아가려면 기(氣)가 필요한데 이번 프로그램이 나에게 힘을 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역할을 했다. 점프 공연은 내가 순간적으로 시동을 걸게 하는 원동력이다”라고 말했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괜찮다’ 피해 여성들 위로

“우리 안의 걱정과 두려움이 / 언제까지 계속될까 / 기대와 희망을 가지면 / 내일이 나아질까 (중략) / 오늘에야 여기서 만난 우리들 / 우리는 서로의 용기 / 내 손을 잡아봐” (앨범 수록곡 ‘우리, 이젠’ 중)

이루리 씨는 “주변에서 폭력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니 정신 차리고 신고하라고 조언한다”면서 “폭력은 절대 참아서 될 일이 아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니 자책하지 말라고 괜찮다고 말해 준다. 폭력을 당했을 때 누군가 나에게 ‘괜찮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해 줬다면 빨리 일어났을 텐데, 가정폭력은 개인의 일로 치부해 조언조차 해주는 걸 꺼려하는 분위기다”라고 말했다. 

마리 씨는 “최근에 경찰이 된 조카에게 나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 신참 경찰들이 이런 일에 잘 대처해야 한다고 조언해 준다”면서 “앞으로 살아갈 첫 번째 목표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을 한 명이라도 구제하는 일을 하고 싶다. 경찰서나 기관을 돌아다니면서 이 문제를 드러내고 알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가정폭력 피해는 경찰(112)과 24시간 운영하는 여성긴급전화(1366), 한국가정법률상담소(1644-7077) 등을 통해 상담 및 신고를 할 수 있다.

** ‘마음대로, 점프!’ ​​​​팀의 자작곡 앨범 <우리, 이젠>은 음원사이트를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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