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 제5대 선거 때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와 격돌, 15만표의 근소한 차로 승리한다. 1967년 5월 3일에 실시될 제6대 대통령 선거 역시 안심할 수 없었다. 야당세가 강하였으며, 군사 혁명이 정착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불안했다.혁명 주체 세력들은 어떻게든지 박정희 후보를 당선시켜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의 정세 파악 보고서는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압승할 수 있다’는 좋은 판단이 아닌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대통령 선거 준비보다는 정보부 자체 문제에만 전념했던 감찰 실장 방준모를 김형욱 정보부장이 4월 어느 날, 호출한다.“방 실장! 박대통령의 혁명 과업 완수와 경제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지 이번 선거에서 재선해야 되지 않겠소. 윤보선을 암살할 준비를 하시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요. 한국이 사는 길이니 철저히 준비하시오.”이렇듯 혁명 주체는 극단적인 방법을 모색했던 것이다.

명령을 받은 감찰 실장은 대통령이 될 지도 모를 윤보선을 죽여야 한다는 엄청난 현실 앞에서 고민에 빠진다.조준경이 달린 레밍톤 22㎜ 구경 5연발 카빈’을 소지시킨 저격수를 대통령 후보인 윤보선씨 집 건너편에 상주시켜 놓은 상태에서 선거전은 열전을 뿜기 시작했다.윤씨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지도 모를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방실장은 죽이지 않고 해결할 방법을 모색, 부하들에게 세 가지 와해 공작을 지시한다.‘첫째, 윤씨의 선거 참모진을 후퇴시키고 가능하면 일간지에 사퇴 성명을 발표시켜라. 둘째, 윤씨 당락의 결정 요인인 5백만 기독교 신자를 정치 중립화시켜라. 셋째, 기독교 단체인 염광회를 분쇄시켜라’였다.특히 이중에서 5백만 기독교 신자의 정치 중립화는 박 대통령의 당락과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이기에 중요했다. 그래서 기독교 정치 단체의 활동을 사전에 방지해야만 했다.

‘염광회’를 저지하기 위해서 ‘염광회’를 이끄는 P목사를 배후 조사하여, P목사가 신학 과정을 제대로 밟지 않은 약점을 잡았다. 교단 차원에서 P목사는 ‘가짜 목사’였던 것이다. 그의 약점인 ‘가짜 목사’로 기독교 신문에 정보를 유출, ‘염광회’가 가진 신비감을 파괴한다. 정치에 중립을 지키도록 쐐기를 박는 데는 충분한 역할을 한 것이다.선거가 종반전으로 접어들수록 감찰 실장은 초조했다. 박 대통령과 윤보선의 인기는 비슷했던 것이다.개표가 진행되고 있던 시기, 여전히 윤보선을 겨눈 총구는 그대로인 상태였다.윤보선과 박정희의 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박정희 후보가 훨씬 앞서는 시간이 왔다. 부산을 포함한 경상도 지역에서 박 대통령의 몰표가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이렇게 윤보선 암살 계획은 막을 내린다. 1967년 5월 4일 박정희 대통령이 116만표 차이로 승리한 것이다.(방준모 전 중앙정보부장 감찰 실장 고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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