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장면, ‘왕조시대당쟁’ 재현군 통제력에 심각한 누수현상구파인 윤보선 대통령, 신파 장면 총리라고 하는 동상이몽 정권은 맨 처음 내각 조직 인사부터 난항을 겪었다.당초, 양파는 각료 자리를 각각 5명과 무소속 2명으로 분배하는 거당 내각으로 한다는 원칙에 합의했었다. 그러나 쌍방 모두 이 원칙에 불만이었다.구파는 자파 각료의 임명권을 요구하였다. 장면은 이를 거부했다. 8월 23일 시작된 장면 내각은 신파 10명, 구파 1명, 무소속 2명이라는 신파 단독 내각이 되었다.그러나 신·구파의 젊은 의원들은 원로가 지배하는 당 운영 방식에 반기를 들었다. 조선왕조 시대 당쟁의 재현이다. 장면은 불과 2주 후 내각을 개각, 구파 5명을 각료로 임명하는 등 갈피를 못 잡았다. 구파가 분당을 선언한 9월의 시점에서, 민의원의 세력 분포는 민주당 신파 95명, 구파 86명, 무소속이 모인 민정 그룹 41명, 그 밖에 9명이다.

민의원 과반수는 116명으로 신파만으로는 다수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구파는 11월, 분당을 단행하여 신민당 간판을 내걸었다. 민주당은 결당 5년만에 정권에 앉은 순간 분열된 것이다.노선의 대립과 정책의 이견이 아니다. 즉, 각료 자리와 권리의 분배를 둘러싼 분열이다.민주당의 분열은 윤보선과 장면의 대립으로 번졌다.내각 책임제에서 대통령은 당정을 이탈해야 하며 특히 정치 싸움에 관계해서는 안 된다.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의 대조적인 성격을 말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장면 내각 발족 직후 윤 대통령 비서실은 ‘내일 아침 대통령이 지방 순시에 가니까 각료 전원이 서울역으로 배웅 나오도록’ 지시했다. 총리 이하는 그 지시에 따랐다. 그것이 보도되자 세간은 권위주의 대통령과 싸우길 좋아하지 않는 총리의 대조적인 행동을 왈가왈부하면서 두 사람 다 내각 책임제 정치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논평했다.윤보선은 구파를 옹호하여 각료 인사에 참견하였다. 대통령 관저에 구파를 모아 장면 내각을 자주 비난했다. 전 정권에서 임명된 도지사, 시장 경질에 대해서도 유감이라는 의사를 표명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장면 내각이 ‘대통령이 왜 입을 놀리냐’고 반격하자 ‘국가 대사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발언하는 것이다’라고 응대했다.

61년 1월, 국회의 신년식사에서 윤 대통령은 ‘현시국은 국가적 위기로서 정치 싸움의 휴전과 거국 내각 구성’을 설득했다. 장면 내각은 이 발언이 위기감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반발하였다.양측은 3월 23일 대통령 관저 회담에서 결국 부딪쳤다. 그 전날 밤에 서울에서 반공법, 시위 규제법 제정 반대를 호소하는 횃불시위 행렬이 있었다. 이는 장면 내각 때의 마지막 대규모 시위로서 더구나 야간에 횃불시위 행렬을 했기 때문에 세상에는 큰 충격을 주었다.대통령 관저에는 정계 지도자가 모였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이 상태에서 안 되면, 정권 담당자를 바꾸면 어떨까’라고 발언, 장면은 새파랗게 질려 사태의 추이에 대해 밝혔다. 이것이 외부에 전해져 ‘대통령은 총리에게 정권 이양을 강요했다’고 보도되었다. 민주당은 격노했다. 대통령이 이렇게 국정 간섭을 한다면 당은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며 극언하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악화되었다.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두 사람은 힘을 모아 진압하려고 노력하기는 커녕 서로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신·구 양파의 자리 싸움으로 10개월 동안 장면 내각은 세 번이나 개조되고, 국방부 장관은 3명, 육군 참모총장은 4명이 경질되었다.군의 통제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다.“각하의 결정으로 한국은 오랫동안 군부 통치 아래에 있게 될 것입니다”1916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는 쿠데타 부대가 한강을 넘어 서울을 점거하였다.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은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 음모를 알면서 양다리를 걸쳤다. 장도영 중장은 일본 동양 대학 사학과 재학 중, 학도병으로 나가 일본군 소위에 임명, 광복 후 국방 경비대에 입대하였다. 영어가 유창하여 미군 고문관에게 인정 받은 정권과 밀착한 장군이었다. 장 소장을 참모총장으로 임명한 것은 미군 수뇌부의 의지를 반영시킨 면도 있지만, 장면 총리가 동향·동성인 친분으로 발탁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장면 총리 입장에서는 그 참모총장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당시, 반도 호텔 809호에 묵고 있던 장면 총리는, 쿠데타 부대에 체포되기 직전 자동차로 호텔을 탈출해서 안국동의 미대사관이 숙소(현재의 주한 일본 대사관과 도로 한 칸 건너 북쪽)로 활용하던 곳으로 피난했다.

그러나 신분을 밝히지 않아, 수위는 수상히 여겨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장면 일행은 1킬로 정도 떨어진 혜화동 칼멜 수도원으로 몸을 숨겼다. 그 후, 쿠데타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 18일 낮까지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끊었다. 국군 통수권을 행사할 총리가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다른 각료도 쿠데타 부대에 체포당했다.윤 대통령은 16일 새벽, 쿠데타 보도를 접했지만 대통령 관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16일 낮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 부대 간부를 대동하고 대통령 관저로 찾아왔다. 관저에는 현석호 국방부 장관과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이 대기하고 있었다.윤 대통령은 박정희 소장에게 제일 먼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발언하였다. 이 발언은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윤 대통령이 쿠데타를 기대했던 것 같은 말투였다는 해석이다. 이어서 윤 대통령은 ‘나라를 구하는 데는 이 길밖에 없었다’고 말해 장면 내각을 잇달아 비난하고 쿠데타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설도 있다.그러나 후일 윤보선의 설명은 다르다. 쿠데타 부대 간부를 접견하는 순간 너무도 한심스러워 그런 탄식을 던졌다고 밝혔다.

어쨌든 윤 대통령은 ‘국군간의 유혈 참사가 되지 않도록 사태를 수습하라’고 말을 이었다.전원 물러난 뒤, 박정희 소장 등 쿠데타 부대가 다시 나타나 ‘우리는 대통령에게 과거에도 충성을 다하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다’고 맹세했다. 장면 내각을 내몰면 권력은 윤 대통령에게 인도한다는 말투였다.윤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바로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무성 자료에 의하면, 그 후 윤 대통령은 쿠데타 부대에 사람을 보내, 만일 대통령이 새 총리를 임명하면 군은 권력을 이양하고 철수하겠는지 아닌지 타진하였다. 권력을 장악할 속셈이 엿보이는 일이다. 한편, 미국은 쿠데타 직후부터 장면 총리가 지도하는 합법적 헌법 정권을 지지한다고 미군 방송을 통해 거듭 표명했다.마셜 그린 주한 미국 대리 대사와 맥루이다 미 8군 사령관은 윤보선 대통령을 방문, ‘쿠데타 부대는 4천명도 안되는 병력에 지나지 않는다. 4만명 병력만 동원하면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고 쿠데타 진압을 재촉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군인끼리 싸우면 서울은 불바다가 되고, 그 틈을 노려 북이 남침할 것이다’며 반대하였다. 그린 대리 대사는 ‘각하의 이 결정으로 한국은 오랫동안 군부 통치 아래에 있게 될 것입니다’라는 경고를 남기고 물러났다.그린 대리 대사는 미합동참모본부 앞으로 ‘윤 대통령은 장면 총리를 내쫓으려 모든 법적 절차를 동원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윤 대통령은 16일 오후, 쿠데타 부대가 요구한 계엄령을 승인하고, 다음날 17일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정부 기능을 대행한다’고 성명, 장면 내각 퇴진을 기정사실로 인정했다.또 제1군사령관 등 서울을 포위하는 군단장들에게 대통령 비서관을 파견하여 ‘북한이 남침을 노리고 있다. 귀관은 후방의 어떠한 정치적 변화에도 신경 쓰지 말고 전선 방비에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고 하는 친서를 전달하였다. 윤 대통령은 쿠데타를 묵인이 아니라 방조했다고 할 수 있다.장면은 수도원에서 라디오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였다. 16일 오전 중에 그린 대리 대사와도 연락이 취해졌다. 그러나 통수권을 발동하는 진압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장면은 유혈의 참사를 두려워했다. 오히려 무능한 정치가로 욕먹고, 오명을 감수하는 쪽을 선택했다.그는 18일 낮, 정부 청사에 모습을 나타내 내각 총리 사직을 발표했다. 제2공화국은 실질적으로 10개월의 단명으로 끝났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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