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립편집위원
이경립편집위원

10인으로 시작했지만 한사람이 유명을 달리하여 9인이 된 단톡방에 제일 윗선배가 글을 올렸다. “나뭇잎이 떨어져 주워보니 세월이더라. 늙어가는 길은 처음으로 가보는 길이니 아프지 말고 천천히 조심조심 갑시다.” 시구(詩句) 같기도 해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여러 사람들의 블로그나 카페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글귀였다. 누가 원작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참 좋은 글귀라고 생각했다.

내년에 정년을 맞이하는 선배는 이 글귀에 사진 한 컷을 덧붙였다. 2016년 12월 광화문 광장에서 4인의 중년남자가 광화문구치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외치고, 탄핵을 외치고, “구치소에 처넣어라!”는 구호를 외치던 그 당시의 사진이다.

선배가 정년이 다가오니 ‘마음이 허해서 저런 글귀를 올리고 저런 사진을 올렸는가보다’ 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단톡방에 올리던 선배의 글과 사진들을 보면 꼭 그래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반백의 중년남자들이 추운 겨울에 무엇을 위해 촛불을 들었는가?” 다시금 생각해보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한 달에 최소한 한번은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던 사이였지만, 코로나19로 얼굴을 못 본지 서너 달이 넘었다. 안부도 전할 겸 겸사겸사 이야기를 하다가 살짝 사진을 올린 의도를 떠보았다. 선배가 에둘러서 표현했지만 선배의 의도는 나에게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우리가 이런 세상 보려고 그 추운 겨울에 촛불을 들었나?’라는 탄식(歎息)이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선배는 국내 유수의 외교안보관련 연구기관에 20여 년간 근무하고 있는 학자다. 그런 선배에게 몇 년 전 큰 시련이 닥쳤었다. 박근혜 정권의 홍위병을 자처하던 기관장이 학자로서의 소신 있는 발언과 연구기관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던 선배에게 정권의 나팔수가 될 것을 강요하였고, 선배는 의연히 맞섰지만 기관장의 저열(低劣)한 공작을 버텨내지 못하고 해고를 당한 것이었다.

박근혜 정권의 잔당들이 아직은 힘을 쓰고 있던 문재인 정권 초기의 일이었다. 선배는 해고가 조작된 자료에 근거하여 이루어졌고, 이 문제가 공론화되면 곧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은 선배의 해고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다.

결국 법정투쟁에 나선 선배는 1년여의 공방전 끝에 1심에서 ‘해고 전면무효, 원상태로의 복직, 해고기간 미지급 급여 지급, 소송비용 피고전액부담’이라는 전면승소 판결을 이끌어 냈다. 패소한 기관이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선배는 1년 반전 복직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한 선배가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이 겨우 이정도 밖에 못하냐고 사진 한 장으로 우리들에게 화두(話頭)를 던진 것이다.

돌이켜보면 부동산 폭등문제, 빈부격차, 일자리 문제 등 우리들의 삶을 위협하는 문제들은 해결은커녕 더욱 심화되었다. 선거제도개혁, 검찰개혁, 국정원개혁 등은 소리만 요란했을 뿐 용두사미로 그치거나 개악이 되었다. 촛불로 태어난 정권임을 자임하던 이들은 권력은 나눌 수 없다며 편 가르기에 열중하고 국민통합은 개에게 줘버린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야당은 4년 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문제에 대해 옥신각신 중이다. 4년 동안 반성과 혁신은커녕 감나무 아래에서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런데 그것도 자리를 잘 못 잡아 터져 문드러진 감 파편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만 덧나고 있다. 선배는 그런 제1야당을 보며 흐뭇해하는 정부여당이 답답한 모양이다. 국민을 상대로 정권을 운영해야 하는 촛불정권이 제1야당만을 상대로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 안쓰러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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