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ReSET(리셋)’ 제공]
[사진=‘ReSET(리셋)’ 제공]

[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지 1년이 지났다. ‘박사방’ 조주빈과 ‘부따’ 강훈 등 관련 공범자들이 아동·청소년 성착취 영상을 제작·판매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구형을 선고받았지만 여전히 온라인 커뮤니티와 랜덤채팅방, 각종 SNS 등 다양한 창구를 통해 제2, 제3의 n번방이 생겨나고 있다. 일요서울은 지난 11일, 1년여간 디지털성범죄 사례를 추적·신고하고 최근 통과한 양형기준안 입법 청원과 수사공조 활동 등에도 참여하고 있는 ‘ReSET(리셋)’ 활동가들과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 “성 착취물 공유·거래 ‘여전’…‘지인능욕’도 비일비재”
- “올바른 사회 교육 이어져 ‘법제화’까지 돼야”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ReSET(리셋)’은 어떻게 생겨나게 됐나. 
▲ ‘ReSET(Reporting Sexual Exploitation in Telegram)’은 한겨레신문의 텔레그램 성착취 연속 보도를 접하고 문제의식을 느낀 개인이 처음 만들었다. 초반에는 단순 프로젝트 팀으로 시작해 현재는 다양한 활동을 하는 비영리 임의단체 ‘리셋’이 됐다. 일회성 신고로는 텔레그램 채널 제재 등에 한계가 있었고 수십 개의 채널 링크를 혼자 찾아내 신고하고 독촉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조직화의 필요성을 느꼈다.

-1년여간 어떤 활동들을 이어왔나.
▲ 리셋은 ‘디지털 성범죄 모니터링’과 ‘신고총공(신고 총공격)’을 하던 작은 모임으로 시작했다. 각자 자리에서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해 조금씩 노력하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 리셋이 결성된 것이다. 현재는 텔레그램과 디스코드 이외에 다른 애플리케이션들도 주목하고 있고 피해자지원팀 인원도 확충해 범죄자들이 최대한 많이 검거될 수 있게 돕고 있다. 또 공론화와 청원 등의 필요성을 느껴 지난 2월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 해결에 관한 청원’ 국민동의청원 1호를 달성했고, 160페이지가량의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및 디지털 성범죄 관련 자료집’을 제작해 여성가족위원회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서 브리핑 등을 한 바 있다. 

이후 여성가족부 등 유관기관을 대상으로 자문회의 등을 진행하고 eNd(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과 함께 디지털 성착취 가해자 엄벌 릴레이 탄원을 진행해 시민들의 엄벌 요구를 법원에 전달하기도 했다. 활동 초기부터 현재까지 모니터링을 통한 채증과 수사 협조를 계속 진행하고 있으며 경찰청과 간담회를 갖거나 정기회의에 참여하는 등 수사 공조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공론화 된 지 1년 정도 지났다. ‘디지털 성범죄’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 1년 전과 비교하면 큰 차이를 체감하긴 어렵다. 다만 3~5년 전과 비교했을 때는 비약적으로 변화했다. 이전에는 디지털 성범죄가 범죄라는 인식조차 부족해 그저 불쾌한 일, 장난쯤으로 취급돼 왔다. ‘소라넷 아웃’ ‘DSO(디지털 성폭력 아웃)’가 활동할 당시만 해도 인터넷상에 떠도는 불법촬영물 등의 ‘증거’를 신고하면 경찰들조차 ‘진짜로 일어난 줄 어떻게 아느냐’고 말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지금은 디지털 성범죄를 명확한 범법행위로 인식한다. 심각성에 대한 사회 전반적 인식은 부족하지만 ‘장족의 발전’을 이루지 않았나 생각한다.

-여전히 제2, 제3의 파생방이 나오고 있다. 기존과 달라진 범죄 양상이 보이나.
▲ 범죄의 세부 방식들이 달라지긴 했지만 큰 틀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박사방’ 주범 조주빈의 검거 이후 잠시 범죄 행각이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다가 현재는 이전과 똑같은 정도와 빈도로 돌아왔다. 게다가 증거 인멸, 수사 회피, 형량 줄이는 방법 등을 공유하고 성착취 단체방에서 ‘잼까츄’ 등 이미 검거된 디지털 성범죄자들의 선처 탄원서를 모집하는 것도 목격했다. 여전히 성 착취물을 공유·거래하고 온라인 언어 성폭력(지인능욕)을 가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디지털 성범죄 관련해서 다양한 강연을 다니고 있다고. 청중들의 반응은 어떤가. 
▲ 사법연수원 강연에서 어떤 남성 판사가 ‘어린 범죄자들이 고의성을 가지고 있겠느냐’라는 취지의 질문을 받은 게 기억에 남는다. 디지털 성착취 단체방에 속해 있는 초·중·고등학생 미성년자 남성들의 고의성과 악의성은 조주빈과 같은 성인 범죄자들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형사사법절차 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다른 범죄자들 또한 미성년자 남성들을 부럽다고 한다는 내용을 설명하자 판사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실태를 접하는 일은 매우 어렵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과 강훈에게 징역이 선고됐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 조주빈은 현재 검찰에서 무기를 구형한 후 1심에서 40년을 선고 받았고 강훈은 현재 검찰에서 30년을 구형 받은 상태다. 현재로선 어느 누구에게도 이 이상의 판결을 내리기가 어려워진 상황이다. 검찰에서 무기징역을 구형해도 재판 결과가 그에 반 토막도 안 되게 선고된다면 구형 형량이 아닌 선고 형량이 앞으로의 ‘기준’이 될 뿐이다. 일부 지법에서는 기존에 비해 높은 선고를 내리고 있는 듯 보이지만 전반적인 상황을 봤을 때 사법부의 처벌 의지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정부 차원에서 디지털 성범죄 대응 및 감시를 위한 예산을 증액하고, 관련 전담부서를 만드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하겠다고 밝혔는데 실효성 있는 방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 리셋에서 주장한 다양한 내용들이 지난 4월 국무총리실에서 발표한 디지털 성범죄 근절대책에 다수 포함된 바 있다. 정부가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해 다양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또 이를 실현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은 알겠다. 다만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관련 전담부서를 만들더라도 현재 일부 경찰들과 같이 피해자 탓을 하거나 소장조차 접수해 주지 않으려 한다면 무용지물이다. 

-얼마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을 확정했다. 2017년 아동 성 착취물 제작 등 사건의 1심 선고 유형의 38.5%가 벌금형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전보다는 어느 정도 진전이 있는 것 같은데, 적절한 기준안이라고 생각하나. 
▲ 나아지긴 했지만 부족하다. 우선 현재 양형기준안은 진지한 반성과 피해확산방지를 위한 실질적인 조치라는 항목을 ‘감경인자(형량을 낮추는 사유)’로 두고 있다. 이는 굉장히 가해자중심적인 생각으로, 피해자의 용서나 의견을 구하지 않고 오롯이 판사가 가해자의 반성여부를 종이 몇 장으로만 판단하는 것이다. 또한 감경인자에 포함돼 있는 범행 가담에 특히 참작할 사유 역시 이러한 현실에 대한 자각이 부족함을 말해준다. 종전 판례에서 ‘피고인의 처가 피고인을 용서’하고 ‘피고인이 피해자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데서 범행이 비롯됨’이라는 가당치도 않은 내용을 참작 사유로 적용한 바도 있다.(2017고단5282 판결) 디지털 성범죄를 행하는 데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만약 양형위원회가 그러한 사유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면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할 일이지, 단지 판사의 감수성에만 기대 가해자에 대한 감정이입을 불러올 수 있는 상황을 가벼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외에도 양형기준 자체의 하한 형량이 매우 낮아 상한 형량과의 격차가 크다. 때문에 기준에 대한 실효성 역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똑같은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 제작범죄자더라도 누군가는 2년6월을 선고받는다면 이는 디지털 성범죄자들을 가볍게 처벌할 면피용 기준이 될 뿐이다. 양형위원회는 가해자를 걱정할 시간에 피해자에 대한 배려를 선행하여 기준을 세우고 이것이 실효성을 가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또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만 집중하지 않고 성인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성범죄 역시 엄중히 다뤄 분석해야 한다. 현재의 양형기준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성범죄가 근절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디지털 공간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無’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어디에서든 손가락 하나로 몇 초 만에 수백수천건의 유포가 가능하고, 익명성 확보가 다른 범죄에 비해 훨씬 용이하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편리성은 일상생활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범죄에도 적용되고, 악용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선 보다 정밀하고 세심한 기술적 대처가 필요하다. 정부와 국회, 검찰 등을 비롯한 공공기관은 한발 먼저 누구보다 빠르게 애써야 한다. 

또한 왜곡된 성 인식 때문에 계속 피해자가 양산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실제로 이 사건이 처음 대중의 분노를 샀을 때 리셋에서 주도한 ‘n번방 챌린지’와 같이 텔레그램 내 디지털 성범죄를 자행한 모든 자들에게 강력 처벌을 요구하는 내용의 해시태그가 SNS 상에서 유행했었는데, 챌린지에 동참한 여성들의 사진을 캡처하고 가계정을 생성해 성적 모욕과 욕설을 퍼붓는 남성들이 있었다. 우리 사회가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할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성범죄의 근절을 위해선 사회전반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올바른 사회 교육이 건전한 인식을 형성하고 이것이 법제화로 이어지는 게 아주 이상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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