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은 책상 정리를 대강 해 놓고 잠시 자리에 앉아 쉬었다. 컴퓨터를 들고 와서 선까지 다 연결해 주고 간 영준이 은근히 고마웠다. 무뚝뚝하지만 필요한 때는 말없이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오늘 점심 제가 살게요. 괜찮으시지요?”

점심때가 되자 수원은 영준에게 전화를 걸어 제의했다. 그러나 영준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게 전화를 받았다.
“벌써 부장님하고 약속이 돼 있어서 안 되겠습니다.”
수원은 더 이상 말을 못 붙이고 전화를 끊었다.

오후 세 시쯤 되어서 영준이 사무실로 불쑥 찾아왔다. 수원은 점심 초대에 응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러 온 줄 알았다. 그런데 영준은 엉뚱한 말을 했다.
“저어, 차 좀 빌려 주실래요?”

영준은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차 열쇠를 달라는 말이었다.
수원은 아무 말 없이 자동차 열쇠를 건네주었다.
퇴근 무렵, 차를 다 썼는지 영준이 자동차 열쇠를 갖고 사무실로 왔다.
“고맙습니다.”

영준은 간단한 인사만 남기고 자동차 열쇠를 책상 위에 놓고 갔다.
퇴근하기 위해 주차장에 내려간 수원은 자동차 운전석에 앉다가 잠시 멈칫했다. 운전대 앞에 내비게이션이 설치되어 있었다.

수원은 주영준이 한 일이라고 짐작했다. 낮에 느닷없이 자동차를 빌려 달라고 하더니 이런 깜짝 선물을 남겨 놓은 것이었다. 일전에 ‘내비게이션 좀 달라’고 했던 건 성민이었는데, 정작 달아 준 사람은 주영준이었다. 수원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수원은 곧바로 영준에게 핸드폰을 걸었다.
“주 차장님, 정말 고마워요. 그렇잖아도 내비게이션을 달았으면 했는데. 고마워요. 비용은 내일 아침 출근해서 드릴게요.”
“아닙니다. 자리 옮긴 기념으로 선물한 겁니다. 친구가 마침 내비게이션 가게를 열어 팔아 주어야 하기도 했고...”

영준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저녁을 같이å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수원은 영준과 함께 가끔 들르던 간절곶 칼국수 집에 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영준이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한 차장님,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차에 내비게이션을 달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상한 것이라니요?”
“차 시트 밑에 도청장치가 있었습니다. 내비게이션 후방경 줄을 잇다가 발견했습니다.”
“예? 도청 장치요?”
수원은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누가 그랬을까요?”
“알 수 없지요. MP3 도청기에는 특별한 단서가 없었습니다. 하여튼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안토니오 조직과 관계된 일은 아닐까요? 요즘 수사는 어떻게 되어 가나요?”
수원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오피스텔의 번호 열쇠를 망가트린 일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장 안토니오와 이경만에게 엄청난 배후가 있나 봅니다. 장 안토니오의 통장에서 뭉칫돈이 드나든 흔적을 찾아냈답니다. 사건의 규모가 커지니까 수사본부를 서울 합동 수사팀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합동이라니요?”

“경찰과 국정원, 검찰 등이 함께 수사한다는 뜻입니다. 국내에 아나톨리 조직이 실제로 있다고 가정하고 그들의 목적과 조직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 회사 경비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자, 배고픈데 국수나 먹읍시다.”

영준이 먼저 칼국수를 후루룩 마시기 시작했다. 입맛이 뚝 떨어진 수원은 영준의 거침없는 젓가락질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리를 옮기고 며칠 뒤 수원은 강병욱 정책처장의 호출을 받고 서울 본사로 올라갔다.

“한 차장, 내일 오후 사장님이 중요한 손님을 만나는데 같이 좀 갑시다.”
강병욱 처장이 서류를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터키 경제 정책을 자문하고 있는 프랑스 사람인데...”
“통역도 하고 우리 원전 APR+나, NUTEC 2012의 장점도 설명하라는 말씀이군요.”

수원이 자기를 부른 이유를 금방 알아차리고 미리 말했다.
“하하하. 맞네, 맞아.”
강병욱 처장은 한참 동안 웃다가 설명했다.
“이번에 터키와 아랍 국가에서 원전 여러 개를 건설하는데 세계 원전 강국들이 모두 수주하러 나섰거든. 거기서 우리 신 개발품이 어깨를 겨루고 한판 승부를 벌일 판이야.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보라고.”
“알겠습니다.”

수원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각오를 내보였다.
수원은 오후 미팅과 만찬에 참석해 김종호 사장을 보필했다. 김종호 사장은 수원의 업무수행에 대만족해 휴가와 함께 금일봉을 선사했다.
일정을 마치고 수원은 고유미의 집으로 향했다. 서울에 올라온 김에 유미의 집에서 묵기로 한 것이었다.

그때 배성민이 전화를 걸어왔다. 빈에서 돌아온 뒤로 처음 온 연락이었다.
“휴가 얻었다며? 금일봉, 얼마 들었어?”
벌써 배성민에게 소식이 닿은 모양이었다.
“나도 며칠 휴가를 낼까 했는데 잘 됐어. 함께 가자.”
“어딜 가요?”

“비행기 타고 스카이 드라이브 한번 하자고.”
“스카이 드라이브요? 그런 게 있어요?”
수원은 성민다운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내일 만나요.”åå
“어? 오늘밤은 만나면 안 되나?”

성민이 실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수원이 유미의 집에 도착해 보니 정세찬이 와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아예 함께 사시는 거예요?”
수원은 유미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정세찬에게 짓궂게 물었다.
“수원 씨가 오신다고 해서 일부러 왔습니다.”

유미는 조그만 오피스텔을  빌려 자취 생활을 하고 있었다. 월세로 있던 방을  청산한 것을 보니 형편이 나아진 것 같았다.
“해운대 오피스텔은 잘 썼습니다. 덕택에 돈 좀 굳었지요.”
정세찬이 공치사를 했다.

“세찬 씨는 곧 갈 거야. 학교서 퇴근하는 길에 네가 온다니까 잠깐 들른 거야.”
유미가 변명처럼 말했다.
“유미 씨가 카레라이스 만들어 준다고 하니까 먹고 가야지요.”
정세찬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했다.

“카레? 그냥 나가서 피자나 먹자.”
수원은 유미가 집에서 저녁 대접하는 게 번거로울까 봐 제안했다.
“모처럼 정 박사님 만났으니 내가 쏠게. 국제 정치 이야기도 좀 듣고...”
“아닙니다. 저는 유미 씨 카레가 꼭 먹고 싶은데요. 맛없는 음식 먹는 연습을 미리미리 해 놔야지요.”

정세찬이 평소와 달리 익살을 떨었다.
결국 세 사람은 유미가 만들어 온 카레를 먹었다. 제법 맛이 났다.
식사가 끝난 뒤엔 오징어를 안주 삼아 맥주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때 수원의 눈에 유미가 하고 있는 팔찌가 들어왔다. 낯익은 디자인이었다.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은 백금 제품. 워낙 독특한 디자인이라 금세 기억이 났다.

미국에서 성민과 헤어지기 며칠 전 샌프란시프코의 티파니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수원은 이 독특한 디자인의 팔찌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맘에 들면 사주겠다고 성민이 권했으나, 워낙 비싼 가격이 부담스러워 사양하고 말았다.
“팔찌 멋있네. 어디서 샀어?”

“응. 이거, 이거 말이지. 누가 선물한 거야.”
유미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수원은 며칠 전에 유미가 보냈던 메일이 생각났다. 마지막 문장에 유미가 성민과 재즈 바에서 만났다는 내용이 있었다.

정세찬은 두 사람 대화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오징어만 씹었다.
그 때 텔레비전에서 8시 뉴스를 시작했다.
- 이번에 북한이 쏘아 올린 미사일에 핵탄두는 싣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언젠가는 탑재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한 행동이었습니다.
“저런 일이 언젠가 생길 줄 알았다니까. 역시 핵이 문제야.”

정세찬은 뉴스에 귀가 번쩍 뜨인 것 같았다.
“1970년대에 핵무기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때 기회를 놓친 게 한스러워. 그 때 우리가 핵을 보유했더라면 북한이 저렇게 나올 수가 없지.”
정세찬이 혼잣말로 탄식했다.

“김일성은 겉으로는 ‘북한은 절대로 핵무기를 만들지 않는다, 핵무기를 만들 능력도 없고 만들 생각도 없다’고 강조했지만 뒤로는 핵무기 개발을 향한 작업을 계속 했지요. 그러다가 2003년에 마침내 NTP를 탈퇴한 겁니다.”
“핵확산 금지 조약에서 탈퇴했다는 건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선언이지요.”
수원이 말을 받았다.

“북한이 NTP에 서명한 것이 1991년인데 국제적으로 약속을 해놓고도 뒤로는 2003년까지 70차례 이상 핵폭발 실험을 했습니다. 이제 미국과 함께 자기들도 핵보유국이라고 자랑하고 있죠.”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사태가 올 것을 예감하고 어떻게 하든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일이 그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수원을 정세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1974년, 박정희는 청와대에서 기자 회견을 하면서 북한의 오판을 막기 위해 한국의 핵무기 개발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기겁한 건 김일성이 아니라 미국이었습니다.”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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