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 장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체유심조 장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가장 번화하고 땅값이 비싼 신도시 강남구와 서초구에도 뜻밖의 역사 유적이 있다.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곳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고승이며 학자, 예언가였던 탄허(呑虛) 대사(1913~1983), 조선을 실질적으로 건국한 주인공들인 태종(太宗, 1367~1422)과 그의 정적(政敵) 삼봉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자취가 있는 곳이다. 

 지하철 3호선과 수인분당선이 만나는 수서역이 출발점이다. 6번 출구 성남, 분당, 세곡동 방면으로 나오면 5미터 앞 큰 길가에 ‘서울둘레길(양재시민의숲) 10.2km’․‘강남 둘레숲길4코스 9.1km’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방향을 따라 몇 걸음 가면, 다시 ‘서울둘레길 대모산구간’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양재천과 탄천을 걷는 1코스, 탄천과 세곡천을 걷는 2코스, 서울둘레길을 도는 4코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 걸을 수 있는 출발점이다. 이번 답사는 2코스와 일부 비슷하다. 대모산을 올라가는 입구에 선 ‘명품 강남둘레길’안내판은 코스만 나열해 놓았다. 문화유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기왕 만드는 안내판이라면, 설명문을 넣어 의미를 담아 걸을 수 있도록 했으면 더 친절했을 듯하다.

 오른쪽을 보면 ‘SRT 수서역’이 보인다. 서울역에서 KTX를 이용하는 관계로 이 ‘SRT 수서역’은 처음이다. 첨단의 SRT가 출발하는 역치고는 역사도 그저 그런 모양이다.

탄허기념불교박물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탄허기념불교박물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갈등의 시대, 희망을 노래한 탄허 대사

 첫 번째 답사지는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이다. ‘SRT 수서역’을 지나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길가 기둥마다 태극기와 세계 여러 나라 국기가 걸려있다. 400미터 정도 가면 SK주유소가 있다. 그 앞 횡단보도를 건너면 ‘자곡동 쟁골마을’을 안내하는 표석과 그 옆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장승이 있다. 장승 가슴에는 탄허 대사의 흔적이 이 근처에 있다는 듯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새겨져 있다.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이는 『화엄경』에 나오는 문장이다. 탄허는 “나는 『화엄경』을 우리 민족의 교전(敎典)으로 삼았으면 한다. …… 나는 우리의 지혜스러운 청년들에게 이 법(화엄)을 가르치고 싶다”고 할 정도로 『화엄경』을 중요시했다.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부처의 가르침은 『화엄경』에 나온다.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되기를 꿈꾼 탄허는 『화엄경』을 알리기 위해 10년 동안 『신화엄경합론』을 번역하기도 했다.

 장승의 미소에서 “일체유심조”를 다시 새기고 탄허를 찾아간다. 40미터쯤 가면 버스정거장 위쪽에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에는 ‘교수마을’ ‘탄허기념관’이 표시되어 있다. ‘자곡동 교수마을’은 대학교수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교수마을 길을 택해 왼쪽길을 택해 계속 왼쪽으로 계속 들어가면 그 끝에 ‘탄허기념박물관’이 나온다. 서울시건축상, 한국건축가협회상,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한 건물, 박물관답게 멋지다. 건물 입구 위를 보면, 한자가 무수히 건물 바깥을 장식하고 있다. 『금강경』이란다. 『금강경』은 2층에 있는 ‘보광명전’ 정면 벽에도 써 있다. 답사 때는 마침 특별기획전인 「탄허呑虛 : 허공을 삼키다」란 탄허 대사 유묵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여러 유묵 중에서 “즉심시불(卽心是佛 : 마음이 곧 부처님이다)”,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 :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나, 천하 통치는 여기에 들어있지 않다)”, 이순신 장군 검명(劍名)인 “삼척서천(三尺誓天) 산하동색(山河動色), 일휘소탕(一揮掃蕩) 혈염산하(血染山河) : 석 자 장검 높이 들어 푸른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바다가 함께 기뻐하네. 단칼에 더러운 무리 깨끗이 쓸어버리니, 산과 바다가 핏빛으로 물드는구나.”가 눈에 띈다. 이순신 검명 유묵에서는 그가 휘두른 칼 기운까지 전해 온다.

 박물관 3층 방산굴 붓다홀 대웅전으로 가면 “발원 코로나 퇴치”라는 지금 시대의 염원이 쓰인 꽃등이 가장 먼저 반긴다. 부처님 뒤 벽면에도 한문이 가득하다. 이는 『원각경』이라도 한다. 건물 입구 바깥 벽면과 보광명전의 『금강경』과 달리 『원각경』이 있는 이유를 부처님 곁에서 공부하고 계시던 보살님께 여쭈었더니, 『원각경』은 부자가 되게 해 주는 경전이란다. 지혜를 상징하는 『금강경』과 부자를 만들어 주는 『원각경』. 둘 다 생활인들에게 소중하다. 그러나 『원각경』이 있다고 깎아내릴 일도 아니다. 오히려 솔직해서 좋다. 모든 사람의 큰 소망 가운데 하나이니 말이다. 보광명전의 부처님 위쪽에는 천정을 통해 햇빛이 들어온다. 보광명전은 석굴암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만든 듯하다. 쏟아지는 빛 아래 부처님도 평안하고 자비롭다. 불교 신자라면 꼭 한 번 가볼 만하다. 보광명전에서 반대편, 즉 올라왔던 곳 앞쪽에는 벽에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이라고 쓰인 곳이 있다. 보광명전이 크게 보여 처음에는 그곳은 막힌 곳인 줄 알았다. 혹시나 하면서 슬쩍 들어가 보니, 탄허 대사의 삶과 그의 유물을 전시한 공간이었다. 각종 원고와 저서, 유묵, 보이차를 담았던 도자기, 향로 등이 있다. 또 탄허 대사가 출가하기 전에 직접 그린 「천문분야도」도 있다.

탄허 대사가 쓴 이순신 장군 검명
탄허 대사가 쓴 이순신 장군 검명

 특별기획전인 「탄허呑虛 : 허공을 삼키다」는 오는 12월 31일까지다. 월요일은 정기휴관일이다. 오전 10시에서 오후 5시까지 전시한다.

 탄허 대사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은 『탄허록』(탄허 지음, 한겨레출판, 2012년)이다. 탄허 대사 말과 예언 몇 개를 소개한다.

 “모든 발전은 인화(人和)과 바탕이 되어야 한다. 좋은 국운을 번영으로 연결시키는 데는 지도자의 역량과 그릇이 인화로 이끄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한 꺼풀 벗기고 나면 그 속에는 오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눈 앞에 천하의 양귀비가 있다 해도 그녀의 뱃속에 들어 있는 오물을 상상해 보면 마음이 홀리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을 ‘백골관(白骨觀)’이라고도 하는데, 사람의 해골은 하나같이 보기에 흉측하다. 아무리 천하의 절세미인이라도 그 사람의 겉만 보지 말고 백골을 상상하면 탐심이 동하지 않는다.”

 “일본 영토의 3분의 2가 침몰할 것이고, 중국 본토와 극동의 몇몇 나라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파멸의 시기에 우리나라는 가장 적은 피해를 입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우리나라에는 위대한 인물이 나와서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평화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이다. 중․러 전쟁과 중국 본토의 균열로 인해 만주와 요동 일부가 우리 영토에 편입되고, 일본은 독립을 유지하기에도 너무 작은 영토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 영향권 내에 들어오게 되며, 한․미관계는 더욱 더 밀접해질 것이다.”

탄허기념불교박물관 안 방산굴
탄허기념불교박물관 안 방산굴

조선 3대 왕 태종과 23대 왕 순조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에서 나와 다시 태종이 잠든 헌릉, 순조가 잠든 인릉으로 향했다. 보통은 두 능을 합쳐 헌인릉으로 부른다. 태종은 조선 3대 왕, 순조는 23대 왕이다. 성남 방향으로 걷다가 못골 한옥 어린이도서관, 못골생태공원, 해찬솔공원, 세명공원을 거쳐 갔다. 걸어서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못골 한옥 어린이도서관’은 이름에 있는 것처럼 한옥으로 된 도서관이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이 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답사라면 들려서 책도 보고 쉬었다 가도 좋다. 해솔찬공원에는 귀여운 문인상 또는 석상이 공원 안에 있는 문 앞에 4개 서 있다.

 세명공원 끝에는 대모산 정상으로 가는 길과 서울둘레길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안내판을 보면, 공원에서 산을 넘으면 헌인릉으로 갈 수 있는 듯했다. 조금 빠르게, 또 숲길이 주는 평안함을 택했다. 산길 입구에 놓인 계단을 올라가 산으로 들어가면 헌인릉 850미터라는 방향 표지판이 나온다. 그 방향을 따라갔으나, 더 이상의 표지판은 없었다. 길 없는 숲속의 길을 헤매며 헌인릉 방향을 향해 갔다. 역시나 세상에는 ‘빠른 길’이란 없다. 또 삶이 그렇듯 빨리 가려고 한다고 빨리 가지지도 않는다. 어떤 일이든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낙엽 쌓인 숲에서 배운다.

헌릉과 절하는 소나무들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헌릉과 절하는 소나무들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숲에서 내려와 비닐하우스로 만든 원예농장들 사이를 지난다. 봄에 지나간다면, 여러 종류의 꽃과 모종들의 유혹에 넘어갔을 듯하다.

 그 끝에 헌인릉 재실(齋室, 제사를 준비하는 곳)이 있다. 재실을 지나 헌인릉 입구로 가다보면, 신식 건물이 보인다. 네이버 지도에 없는 건물이다. 매표소에 따르면 국가정보원 건물이란다.

 매표소 입구 근처에는 ‘헌릉․인릉’ 표석과 ‘조선왕릉 세계유산’이라는 표석이 서 있다. 세계유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지칭한다. ‘헌릉․인릉’ 표석의 뒷면은 조금 황당하다, 앞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헌릉․인릉. 사적 제194호인 이곳의 헌릉은 조선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며 인릉은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능임.” 뒷면에는 “양재 동산말(5,090m) ⇐ 헌릉․인릉 ⇒ 원지동 미륵당(4,500m)”라고 되어 있다. 뒷면에 꼭 그것을 써 넣어을 만큼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다음 목적지인 ‘원지동 미륵당’까지 1시간 정도 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가 하나의 봉분에 모셔져 있는 합장릉이다. 반면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봉분이 각각 나란히 있는 쌍릉(雙陵)이다.

 입구로 들어가면 먼저 인릉이 나온다. 순조는 정조의 아들로 11세 왕위에 올랐다. 세도정치가 극성했다. 자연재해가 빈번했고, 홍경래의 난,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와 을해박해도 있었다.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는 조선의 왕비 중 유일하게 두 번(헌종, 철종)이나 수렴청정을 한 왕비이다. 조선왕릉 중부지구 관리소에서 제작한 ‘서울 헌릉과 인릉’ 팜플렛에 따르면, 인릉의 경우는 명당자리라고 한다. 그러나 순조 이후 4대째인 순종황제 때 조선은 망했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풍수 답사하는 분들을 가끔 보게 된다. 조선의 여러 왕릉에 가면 늘 드는 생각이 있다. 왕릉 자리가 어떤 내용의 명당인지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가 어떤 인품으로 국가를 어떻게 다스렸는지가 궁금했다. 조선의 왕들을 보면 명당이 위대한 왕을 만들지도, 위대한 국가를 만드는 것도 아닌 것이 확실하다. 명당 자리에 자리 잡았다고 하는 개인 묘소도 마찬가지다. 왕릉과 여러 유명인의 묘소를 보면, 명당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사느냐가 그 사람과 그 후손의 삶을 결정한다. 헌릉과 인릉도 월요일에는 쉰다.

 왕릉의 경우는 대부분 홍살문을 지나면 정자각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비각이 있다. 왕릉은 정자각 위 언덕에 있다. 홍살문은 붉은 색칠을 한 문이다. 신성한 영역을 표시한다. 정자각은 제례 때 제향을 올리는 ‘정(丁)’ 모양의 건물이다. 비각은 신도비를 보호하는 건물이다.

 인릉을 지나 헌릉으로 갔다. 인릉과 헌릉 모두 두 개의 신도비가 있다. 인릉의 비문을 보면, 하나는 ‘조선국(朝鮮國) 순조대왕(純祖大王)’으로 시작하고, 다른 하나는 ‘대한(大韓)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로 시작되는 비문이 있다.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 후 순조가 왕에서 황제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비석을 추가로 세웠다.

 헌릉의 비각은 다른 이유로 두 개의 신도비가 있다. 본래의 신도비(1424년)가 임진왜란 때 훼손되자 숙종 때(1695년) 새로 만들어 세웠기 때문이다. 옛 신도비는 보물 제1804호이다. 비석을 받치는 귀부(龜趺, 거북이 모양 받침돌)를 보면 새 신도비와 달리 거북이 머리가 없다. 임진왜란 때 파손되었다. 거북이 등의 귀갑(龜甲)에는 6각평 문양에 ‘왕(王)’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나,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비석 자체는 본래 흰색 대리석이었으나 붉게 변색되어 있다. 신도비 전체 높이는 520센치미터이다. 구리 건원릉(태조 이성계)의 신도비보다도 크다. 『백제구도(百濟舊都) 남한비사(南漢秘史)』(백록사, 1956년)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가 철퇴로 신도비를 치자 갑자기 뇌성벽력이 일면서 비석이 깨진 곳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일본군 장수가 크게 놀라 쇠줄로 신도비를 얽어매고, 제사를 지내고 사죄했다고 한다. 그 쇠줄과 비석에 피가 흐른 자국은 『백제구도 남한비사』가 저술될 당시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정자각 뒤편에서 헌릉을 살펴보면, 거리가 멀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으나 쌍릉(雙陵)은 확인할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쌍분 앞의 소나무 모습이다. 쌍분 옆의 소나무들이 모두 쌍분을 향해 절을 하듯 허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다. 옛 왕들의 눈으로 보면, 모두 정2품송에 해당될 듯하다.

 헌릉의 홍살문 맞은 편에는 비닐하우스들이 있어 어수선하다. 밖으로 나가는 철제문이 있다. 관람객은 출입할 수 없다. 현재의 인릉과 헌릉과 관리소, 주차장, 매표소 등의 위치를 보면, 인릉이 주인이고 헌릉은 마치 손님처럼 보인다. 조선 왕조의 창업자라고 할 수 있는 태종의 헌릉을 이렇게 대우하는 것이 타당한지 모르겠다.

원지동 미륵당 경내 석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원지동 미륵당 경내 석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원지동 미륵당과 하늘과 관악산을 담은 양재천

 다음 코스는 ‘원지동 미륵당’이다. 청계산 원터골 입구쪽에 있다. ‘서초 역사문화탐방’ 코스의 하나이다. 헌인릉에서 도보로 1시간 정도 걸린다. 미륵당은 원터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인 돌로 된 미륵부처가 모셔진 공간이다. 영험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하려다 실패하고, 미륵불의 배꼽을 쪼아내는 바람에 영험한 능력을 잃었다고 한다. 답사날에는 문이 닫혀 미륵부처는 볼 수 없었다. 마당에 있는 작은 3층 석탑만 볼 수 있었다. 또한 미륵당에는 울타리가 쳐 있어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도 누군가 담을 넘어 들어갔던 듯하다. 석탑 옆 둥근 돌 위에 막걸리 한 병이 올려져 있다. 간절한 그 무엇이 있어 미륵부처에게 빌고자 막걸리를 올리고 갔나 보다. 원터골에서 청계산을 올라가는 경우라면 잠시 들렸다가도 좋을 듯하다.

하늘과 관악산을 담은 양재천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하늘과 관악산을 담은 양재천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미륵당에서 양재역으로 출발한다. 걸어서 대략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도보 답사 여행이라 걸어갔지만, 독자들께서 만약 수서역에서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 헌인릉, 그리고 미륵당까지 필자처럼 걸었다면 이곳에서는 지하철 신분당선을 타고 양재역까지 가기를 권한다. 미륵당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청계산입구역이 있어 편리하다. 네이버 지도로는 수서역에서 미륵당까지 약 2시간 30분 정도 걸리나, 실제로는 이리저리 살피고 다니다 보면 5시간 가까이 걸리기 때문이다. 미륵당에서 양재역까지 가는 길은 주로 큰길 옆이기에 별 운치도 없다. 물론 중간중간 공원들이 있기는 하다. 도보 답사가 목적이기에 다시 걷기 시작했다.

 청계산입구역 앞 ‘하나로마트 청계산역점’ 앞에는 영주축산농협과 영주시가 설치한 ‘영주 한우’ 조형물이 있다. 어미소와 송아지이다. 이동식인지 바퀴가 달린 판 위에 있다. 소를 처음 보았을 때는 생뚱맞았으나, 그 뒤에 농협이 있는 것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지방 사람들의 홍보 노력이 눈물겹다. 차라리 서울과 경기도 사람들의 산행 주 코스인 청계산 입구 쪽이 훨씬 더 홍보에 도움이 될 듯하다. 바닥에 고정되어 있지 않으니, 서초구와 협의해 옮기면 좋을 듯하다. 

 청계산입구역에서 양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청계산 수변공원’이 있다. 종합안내도로 보면 길의 모양이 바람개비처럼 생긴 곳이 있다. 갈대가 길 양쪽에 서 있다. 불과 몇 미터 되지 않으나 갈대 사이를 걷는 느낌은 생각하기 따라 순천만 갈대밭이나 다름없다.

 40분 정도 직진하면 ‘양재시민의숲’이 나온다. 숲에는 1995년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희생자를 위한 ‘삼풍참사위령탑’,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이 있다. 이번 답사에서는 최종 목적지인 ‘삼봉 정도전 묘 터’ 도착시간이 땅거미가 질 때라 시간이 부족해 기념관은 제외했다.

 윤봉길 의사의 흔적은 다른 답사 때 소개할 예정이다. 청계산입구역에서 지하철을 탄 답사자라면 양재시민의숲역에서 내려 잠시 들리면 좋을 듯하다.

 시민의숲역에서 양재역 방향으로 여의천 길을 따라 500미터 걸으면 양재천을 건너는 다리가 나온다. 석양의 황금빛 노을과 멀찍이 떨어진 관악산이 냇물에 그대로 복사되어 있다. 그 좁은 냇물에 하늘과 관악산이 담겼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한 종지의 물그릇에도 우주가 담겨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다시 10여 분을 걸으면 양재역(良才驛)이 나온다. 조선 시대에도 이곳은 양재역이었다. 물론 지금의 지하철역은 아니다.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들에게 말과 숙식을 제공했던 곳이다. ‘양재역 터’ 표석은 양재역 11번 출구 앞 가판대 옆 우측 화단 위에 있다. 대부분의 표석이 그렇듯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다. 양재역은 『고려사』에서는 양재(良梓驛)으로 나온다. 한자가 다르나 같은 역이다. 양재역은 충주를 거쳐 영남지역으로 가는 중요 거점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는 역이며, 지금도 교통 요지이다.

 1547년(명종 2년)에 일어나 ‘양재역 벽서(壁書)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권력을 장악한 소윤(小尹) 윤원형 세력이 정적들을 숙청케 한 근거가 양재역 벽서이다. 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와 이기(李芑)가 권력을 휘두르기에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 벽서를 근거로 윤원형의 소윤은 세자의 외숙인 윤임 등 대윤(大尹)과 사림 세력을 제거했다. 그때 유배 간 사림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다. 조선 주리철학의 선구자로 퇴계 이황의 주리론에 영향을 미쳤다. 이언적은 돌아오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동국여지지』․「과천현」 중 ‘정도전 묘소’ 부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동국여지지』․「과천현」 중 ‘정도전 묘소’ 부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머리만 남아 있는 전설의 정도전 묘

 양재역 표석을 지나 12번 출구 방향으로 가서 서초구청과 국립외교원 사잇길로 들어서면 양재고등학교 정문이 있다.

 정문 오른쪽에 손바닥만한 공원이 있다. 학교 담장 주변을 보면, 흰색 화강암 위에 검은색 조형물이 서 있다. 자세히 보면 봉우리가 세 개 있다. 정도전의 호(號) ‘삼봉(三峯, 세 개의 봉우리)’을 활용한 듯하다. 왼쪽 작은 봉우리에는 “삼봉 정도전 산소터”가 써 있다. 그러나 정도전 묘소로 전해온 묘소의 위치는 공원의 이곳 아니다. 그 옆 양재고등학교 운동장이다. 평택 진위면 은산리 문헌사 인근에 있는 정도전 묘소는 가묘이다.

양재고 정문 옆 정도전 묘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양재고 정문 옆 정도전 묘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양재고 운동장 자리에 정도전 묘소가 있었을까? 실학자 유형원이 1656년에 저술하고 편찬한 『동국여지지지(東國輿地誌)』의 「과천현」에는 “정도전묘(鄭道傳墓) 재현동십팔리(在縣東十八里) : 정도전 묘는 과천현 동쪽 18리에 있다”라고 나온다. 다른 문헌으로는 『봉화정씨족보』의 “정도전묘(鄭道傳墓) 광주(廣州) 사리현(士里峴), 배경숙택주(配慶淑宅主) 최씨묘(崔氏墓) 양재역 상초리(霜草里)”이다. 위의 기록들은 모두 우면산 자락을 지칭한다. 우면산에 걸친 현재 양재고 위치의 ‘묘 터’는 구전의 영향이 크다. 또 정도전의 아들 정진(鄭津, 1361~1427)과 그 후손들의 무덤 역시 양재역과 가까운 강남역 지역에 있다가 강남이 개발되면서 평택 진위로 이장되었다. 또 1920~30년대에 후손이 이 묘소를 발굴했을 때 지석(誌石, 죽은 이의 인적사항 등을 기록한 판석)도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행방이 묘연해 지석이 실제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발굴조사 보고서 정도전 추정 묘터(한양대 박물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발굴조사 보고서 정도전 추정 묘터(한양대 박물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봉화 정씨 종중의 요청으로 한양대 박물관에서 1989년 3월 정도전 묘소로 알려진 묘소를 발굴했다. 『전(傳)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선생(先生) 묘(墓) <발굴조사보고서>』(한양대박물관, 1990년)에 따르면, “단언할 수는 없으나 삼봉 묘 가능성 있다. 현재 우면산 일대 산재한 분묘 중 상석, 장대석 등의 석물로 보아 조선 시대 지배계층 묘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이번 발굴 조사한 묘가 가장 대표적이다”라고 정도전 묘소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특히 발굴에서 놀라운 것은 목관에 안치된 유해에서는 머리카락과 두개골만 있고 신체의 다른 부위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태조실록』의 정도전 참형 기록과 일치한다. 정도전은 남은의 집에서 모여 이야기하던 중에 이방원(훗날 태종)이 기습 공격해 정도전의 “목을 베게 했다(令斬之)”고 한다. 실록에 언급된 정도전의 죄목은 이방원의 이복 동생 방석을 세자로 추대하고 종친을 배척했다는 죄이다. 실제로는 태조와 태종의 대결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권과 왕권의 충돌이었다.

 머리만 있는 무덤은 그 결과로 추정할 수 있다. 보고서에서도 “1호분(정도전 추정 묘소)의 목관에 안장되어 있는 수부(首部, 머리)의 유해와 상기 태조실록의 참형 기록이 일치하고 있어 피장자는 정도전 가능성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무덤에서 나온 명기(明器, 무덤에 넣는 기물)의 경우 제작기법과 정교함이 주문생산된 고급품이고, 조선 초기 제품이고, 그로 보면 피장자가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2호분(정도전 추정 무덤 옆 무덤)은 정도전의 부인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1호분과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해가 남아 있다고 한다. 보고서에서는 이 무덤이 조선 초기 정승급 신분을 가진 인물의 무덤이나, 정도전의 묘소라고 단정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가 없는 한계도 있으나, 또 그와 반대로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도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지금까지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있는 1920~30년대에 발굴했다는 지석이 세상에 나오면 이 무덤이 정도전의 진짜 무덤인지 아닌지 확실해질 수 있다.

발굴조사보고서 정도전 추정 묘터 발굴 백자 명기 이미지(한양대 박물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발굴조사보고서 정도전 추정 묘터 발굴 백자 명기 이미지(한양대 박물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조선 설계자 혁명가 정도전, 정도전의 비극 

 정도전은 조선의 설계자이다, 조선 개국 1등 공신이며,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대가이다. 특히 1394년 개성에서 한양 천도시 궁궐과 종묘의 위치를 정했고, 각 궁전과 궁문의 칭호, 도성의 8대문과 성내 48방의 이름을 짓기도 했다. 그는 전 왕조의 역사인 『고려사』를 저술했고,  『조선경국전』,  『경제문감』을 저술해 훗날 500년 조선의 틀을 만들었다. 그는 민본주의를 주창했다. 왕이나 관리는 지배자가 아니라 봉사자이며, 민본정신을 거스르는 군주는 천명에 의해 바꿀 수 있다는 역성혁명을 주장했다. 그의 역성혁명론이 고려를 전복하고 조선을 세운 이론적 배경이다. 그는 “한(漢) 고조(유방)가 장량(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한 것”이라고 할 만큼, 조선 건국의 실질적 주인공이었다.

 박봉규 건국대 교수는 정도전을 보면 16세기 이탈리아의 사상가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가 떠오른다고 한다(『광인 정도전』, 박봉규, 아이콘북스, 2014년). 정도전에 관한 책은 많다. 조금 깊은 내용을 알고자 한다면 앞의 박봉규 교수의 책과 박홍규 고려대 교수의 『삼봉 정도전 생애와 사상』(선비, 2016년)을 추천한다.

 탄허 대사에서 태종, 정도전에 이르는 길에는 비움의 도(道)와 혁명가의 길(태종과 정도전), 혁명 이후의 처절한 권력투쟁의 모습이 있다. 적절한 비움과 부조리한 현실을 개혁하려는 자세, 그리고 과신과 과욕에서의 멈춤의 지혜를 생각할 수 있다. 이 답사길은 도보로 7~8시간이 걸린다. 그들의 삶을 미리 살펴보고 걷는다면 지루하지 않을 길이다. 서대문구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현판 글씨는 정도전의 글씨이다. 자신은 명부전 글씨를 썼으나, 무덤조차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비극의 주인공 정도전. 태종과 정도전의 충돌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지금은 5년마다 정도전의 죽음과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안타까우나 지금의 정치인과 정당의 행태로는 누구도 그 굴레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을 듯하다. 

*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 : 강남구 밤개로 14길 13-51 
* 헌릉과 인릉 : 서초구 내곡동 1-2449
* 원지동 석불입상과 석탑, 미륵당 : 서초구 원지동 362-4
* 삼풍참사위령탑 : 서초구 양재동 234 
*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 : 서초구 양재동 236
* 정도전 묘소 터 : 서초구 서초동 1376-6, 양재고등학교 정문 우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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