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후보와 인수위 시절에 일했던 사람들을 대통령 특보로 다수 임명하려고 하는 것은 국정과 사적 보은을 구분 못하는 처사다. 선거 때는 표를 얻기 위해서 대통령 후보 특보 직함을 남발할 수 있지만, 대통령 특보는 명함용으로 나눠줄 자리가 아니다. 더욱이 무보수라니! 직위를 사칭해 권력비리를 양산하라는 주문에 다름 아니다.” 노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3년 3월27일 한나라당 배용수 부대변인(현 국회 도서관장)은 논평에서 청와대가 대통령 특보직 신설 계획을 밝히자 이같이 지적했다.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나 최근들어 마침내 ‘대통령 특보’가 여론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이정우 정책특보(전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현 경북대 교수)가 2004년 정책기획위원장 재직 시절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사협의 모형 연구’라는 제목의 연구용역을 정책기획위 산하 국정 과제위 명의로 발주한 뒤 수의계약을 통해 자신을 대표로, 이종오 계명대 교수(전 정책기획위원장) 등 5명과 공동으로 수주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또 김두관 정무특보가 한겨레신문의 제2창간위원으로 참여한 것으로 확인돼 논란이 벌어졌다. 앞서 김두관 특보는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청와대 참모 10여명 징발설을 흘리는 등 여권의 ‘지방선거 올인’을 주도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은 바 있다. 그 자신도 경남지사 선거 출마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대통령 특보(특별보좌관) 제도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0년 12월10일 처음 도입됐다. 박 대통령은 당시 무려 9명의 특보를 임명, 공식 청와대 참모진과는 별도로 외곽참모 역할을 하도록 했다. 박 대통령은 미국의 헨리 키신저 국제정치특보의 활동에 깊은 감명을 받고, 지식과 경험을 갖춘 인사들을 특보로 발탁해 폭넓게 활용했다고 한다.박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의 회고에 의하면 그 때의 특보단은 ‘대통령의 친구들’이었다.

특보들의 주임무는 여론을 수렴하고 정책을 연구하는 것이었지만, 대통령의 말벗이 되는 것도 무척 중요한 기능이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특보들과 밤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고 국가와 역사를 토론했다고 한다.박 대통령 시절 9명 특보단의 초대 멤버는 박종홍 교육문화특보, 함병춘 국제정치특보(연세대 교수), 장위돈 국내정치특보(서울대 교수), 박진환 농업경제특보(서울대 교수), 김명윤 세제개혁특보(고려대 교수), 장동환 사회특보(성균관대 교수), 유재흥 안보특보(전 국방부장관), 김용식 외교특보(전 유엔대사), 임방현 공보특보(전 한국일보논설위원) 등이었다. 이 가운데 박종홍 교육문화특보는 1968년 12월에 선포된 국민교육헌장 제정작업에 깊이 간여했던 인물이다.

최규하, 대통령 특보 출신
박정희 대통령을 이은 최규하 대통령은 대통령 특보 출신이 대통령에 오른 경우다. 최규하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을 거론할 때 항상 과소평가되거나 논외로 취급되고 있지만 그는 평생 정당에 가입하지 않고 직업 공무원으로서의 길을 고집스럽게 걸어 온 인물이다. 정부 부처 과장-국장-차관-장관-대통령 특보-국무총리서리-국무총리-대통령 권한대행을 차례차례 거쳐 마침내 대통령에 선출됐다.그가 박정희 대통령 외교담당특보를 맡은 것은 1971년 6월부터 75년 12월까지였다. 그는 72년과 73년 두 차례에 걸쳐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 위원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또 외교담당특보 재임 기간 동안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모두 7회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이란·이디오피아 등을 비롯한 27개국을 순방했다는 기록도 있다.

YS·DJ ‘정치특보’ 양산
이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곁에 특보를 두는 것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이는 두 사람이 군대처럼 단선화된 조직을 선호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의 장세동씨,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박철언씨 같은 핵심 측근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참모 조직이 더 체질에 맞았다는 것이다.반면, 정치인 출신으로 수많은 측근들에 둘러 싸여 있었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특보정치’를 즐겼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특보는 역시 DJ 시절의 박지원 정책특보였다. 국민의 정부 2인자였던 그는 문화관광부 장관과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에 이어 청와대 비서실장에 오르는 중간 과정에서 정책특보를 지냈다. 그러나 당시 특보 직함을 갖고 있었지만 비서실장을 제치고 사실상 청와대를 장악했다는 것이 국민의 정부 청와대 사람들의 전언이다.

박 실장은 정책특보 시절 다른 특보들이 외부에 머물면서 대통령의 부름이 있을 때 달려갔던 것과 달리 청와대에 상주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따라서 소관업무가 유사한 정책기획수석비서관과 마찰이 있을 법 했지만 당시 두 사람 사이의 중량감이 워낙 달라 오히려 쉽게 교통정리가 됐다고 한다. 즉 정책특보실이 정책기획수석실의 상위에 있었다는 얘기다.DJ 시절에는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이 대통령 특보 직함으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했다. 임동원 특보는 회담 마지막 날 오찬 답사를 하기도 했다. 그는 이후 통일부 장관을 거쳐 외교안보통일특보로 정식 임명돼 다시 대북협상의 최선봉에 나섰다가 현정부들어 대북송금 특검에 걸려 곤욕을 치렀다.

노 대통령, ‘경력관리용’ 비판
노무현 대통령은 특보 자리를 주로 ‘경력관리용’이나 ‘자리보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대표적인 인물이 얼마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전격 발탁된 이병완 전 홍보문화특보다. 노 대통령은 홍보수석직을 수행하던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명하자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홍보문화특보직을 신설해 청와대와의 연결고리를 유지토록 했다.당시 그는 주로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상대하는 홍보수석직을 맡으면서 연일 이어지는 술자리 등으로 건강을 망쳤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이를 감안해 몸을 관리할 기간 동안 비교적 한가한 특보 역할을 맡겼다가 어느정도 건강이 회복되자 임기 반환점을 도는 시점에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전격 기용했다.현재 노무현 대통령의 특보단은 이정우 정책특보와 김두관 정무특보 외에 김혁규 경제특보, 김화중 보건복지특보가 있다. 이 가운데 김화중 특보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특보란 기록을 갖고 있다. 이들 외에도 노 대통령은 취임 이후 김원기 정치특보(현 국회의장), 문희상 정치특보(현 열린우리당 의장), 오영교 정부혁신특보(현 행정자치부 장관) 이병완 홍보문화특보(현 청와대 비서실장)를 잇달아 임명했다가 ‘자리’를 찾아준 뒤 해촉한 바 있다.

무보수 명예직 전환 논란
특히 노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3년 3월7일 대통령특보에 대한 장관급 예우를 폐지하고 무보수 명예직으로 전환할 뜻을 밝혀 논란을 낳은 바 있다. 취지는 ‘대통령과 자유롭게 만나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야당은 권력비리의 온상이 될 것이라며 반발했다.이 때문에 노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큰 도움을 받았지만 번듯한 자리를 주지 못한 이강철 전 민주당 조직강화특위위원(정무), 이기명 전 후원회장(문화), 김영대 전 개혁국민정당 사무총장(노동)을 특보로 내정했다가 결국 정식 임명하지 못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한 때 특보단을 김한길 전 문화관광부 장관과 민노당 공천으로 울산시장에 출마했던 송철호 변호사, 이성재 전 의원 등을 포함해 10여명선으로 꾸리는 방안까지 구상했던 것으로 알려진다.결국 노 대통령의 그런 구상은 여론에 밀려 무산됐지만 당시 내정됐던 인물 가운데 일부는 지금도 경력난에 ‘대통령 특보’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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