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이 지난 15일 구속됨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대통령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특히 DJ 입장에서는 현정부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질 만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참여정부 출범 첫 해인 2003년에 대북송금특검이 실시됐고, 수사 결과 박지원·권노갑씨 등 DJ의 최측근들이 구속됐다. 그러다 이번에는 김영삼 정부 시절 불거진 대선자금 X파일로 시작된 도청수사가 엉뚱하게 김대중 정부 시절 불법 도청 문제로 불길이 번져 DJ의 또다른 핵심 측근인 임동원 전국정원장이 구속됐다. 이런 상황을 두고 민주당 한화갑 대표는 “지금 ‘김대중 죽이기’가 본격 시작됐다”며 “대북송금특검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탄압으로 동교동은 종자도 안 남았다”고 성토했다. DJ 역시 격노했다.

김 전대통령은 한 대표 등의 예방을 받은 자리서 “흑백과 진실은 가려질 것이며 이들을 구속하는 것은 (현정권이) 무리한 일을 하는 것이다”, “(현정권은) 사실이 아닌 것을 억지로 만들어 내고 있다”며 노 대통령을 직접 공격했다. 두 전직 국정원장이 구속되기 불과 1주일 전에 DJ는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 등 지도부에 “전통적 지지층을 회복하라”고 훈수했다. 당장 열린우리당에서는 민주당과의 통합론이 부상했고, 민주당도 “노 대통령이 탈당하면 통합논의가 가능하다”고 화답했다. 비슷한 시점에 김영삼 전대통령도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건강악화설이 나도는 DJ에게 병문안 전화를 한 것인데, 두 사람의 통화 후 정치권에선 ‘영·호남 결속에 의한 한나라당 포위론’ 등 그럴듯한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DJ와 YS 모두 대통령직을 마지막으로 현실 정치를 떠났지만 정치적 위력이 여전함을 뚜렷이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DJ, 건전한 문화 정립 노력
정가에선 “우리나라엔 ‘전직 대통령 문화’가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무주택자에게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 운동에 열중하는 등의 미국 경우와 곧잘 비교된다. 사실 DJ는 건전한 전직 대통령 문화를 정립해 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한 유일한 전직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아태평화재단(The Kim Dae-Joong’s Foundation)’을 만들어 자신만의 노하우와 인맥을 활용해 세계평화에 기여하려 했다. 아태평화재단 설립에 대해선 자금출처 등 의문점도 없지 않다. 그 재단의 ‘김대중도서관’이 기증 형식으로 연세대 소유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아태평화재단 설립 초기엔 이를 전직 대통령 문화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하는 여론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도서관 개관식에 직접 참석한 데서도 당시의 그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그 때 청와대측은 “청와대 안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노 대통령의 행사 참석 건의가 올라왔다”며 “현직 대통령으로서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고 새로운 ‘전직 대통령 문화’를 지원한다는 차원”이라고 개관식 참석 배경을 밝혔었다.DJ는 또 현직 대통령에게 깍듯한 예우를 차리는 몇 안되는 전직 대통령이다. YS의 경우 퇴임 뒤 자신의 뒤를 이은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임기 처음부터 끝까지 독설을 퍼부었던 것으로 유명하다.DJ가 자신보다 20살이나 적은 노무현 대통령을 예우한 대표적인 사례는 노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3년 4월22일 청와대에서 열린 노 대통령 부부와 DJ 부부의 만찬에서 찾을 수 있다. 퇴임 이후 고령에 따른 심장질환으로 쇠약해진 DJ는 대북송금 특검까지 겹치면서 심신이 극도로 피곤한 상태였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 노 대통령은 자신이 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동교동 사저로 DJ를 직접 찾아뵙겠다는 뜻을 몇 차례 타진했다고 한다. 그러나 DJ는 “노 대통령이 현직이고, 취임 뒤 나와 처음 만나는 것인데 우리가 청와대로 가는 게 예의”라면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청와대를 찾았다.이 자리에선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만찬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 DJ가 고통을 호소해 만찬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자 청와대 기자실에선 “DJ가 대북송금 특검이 실시되는 데 대해 분노를 표출하다가 울화가 치밀어 갑자기 쓰려졌다”, “DJ가 구급차에 실려 청와대 인근의 대통령 전용병원으로 옮겨졌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이는 루머인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전직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무리하게 만찬에 참석한 과정에서 발생한 일종의 ‘해프닝’ 정도라는 것이 정설이다.

퇴임후 ‘노후설계’ 전두환 최고
역대 대통령 가운데 퇴임 후의 계획을 가장 거창하게 짠 인물은 전두환 전대통령일 것이다. 그의 ‘노후설계’는 대단했다. 임기 초반인 1983년에 일찌감치 자신의 아호를 딴 ‘일해재단’을 설립했다. 또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것을 만들어 전임 대통령이 의장을 맡도록 했다. 현직 대통령에게마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종의 ‘상왕(上王)’을 꿈꿨던 것이다.전 전대통령은 ‘제2 청와대’ 격인 일해재단에 각국의 전·현직 지도자들을 초청해 ‘세계평화’ 같은 격조높은 담론을 나누며 말년을 보내려 했다. 이를 위해 재임 중 기업들로부터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긁어모았다.그러나 이런 야망은 권좌에서 물러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다, 노태우 대통령의 ‘5공 청산’ 정책에 의해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백담사로 유배 당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전직 대통령 예우까지 박탈 당했고, 일해재단과 일해연구소는 지금의 세종재단과 세종연구소로 바뀌었다. 이후 그는 법원이 부과한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면서 간혹 돌출 언행을 하는 등 전직 국가원수로서 국민의 존경을 받기는커녕 조롱의 대상으로 추락했다. 현재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 당한 사람은 전 전대통령 외에 노태우 전대통령이 있다. 두 사람 다 12·12와 비자금 조성 때문에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적용 대상에서 배제된 상태다.두 사람을 제외한 최규하·김영삼·김대중 전대통령에게는 매년 1억2천만원의 연금이 지급되고 있다. 또 해외여행 경비와 경호경비, 교통·통신·사무실 비용과 가족 의료비 등이 별도로 나간다. 이와 함께 1급 상당 1명, 2급 상당 2명의 별정직 국가공무원이 전직 대통령을 보필한다.

또 퇴임 후 7년 동안은 청와대 경호실에서 현직 대통령에 준하는 경호 서비스도 해 준다.이런 가운데 생존한 전직 대통령 외에 작고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도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한나라당 이인기 의원은 얼마 전 국회 행정자치위에서 “일부 전직 대통령들의 지원을 위해 수억원 규모의 예산 항목을 신설하고 있으나 이미 작고한 대통령들에게는 별도 지원되는 예산이 없다”며 “특히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우 기념관 건립 사업을 위해 이미 지원된 교부금도 회수해 가는 등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어쨌든 전직 대통령들이 그런 막대한 국가 지원을 받으면서 ‘나라의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노대통령의 ‘서민이미지’긍정
미국의 경우 지미 카터 전대통령 외에, 빌 클린턴 전대통령도 퇴임 후 강연과 저술 등으로 왕성한 대외활동을 하고 있다. 통일 독일을 이뤄냈던 폰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은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유럽통합을 위해 정열적으로 일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 등은 오히려 퇴임 후의 활약이 더 돋보이기도 한다.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전직 대통령들은 망명하거나(이승만), 재임중 사망하거나(박정희), 퇴임 후 비리 혐의로 구속(전두환·노태우)되는 등 시련과 비운의 역사를 되풀이했다. 또 최근의 두 전직 대통령인 YS와 DJ는 퇴임 후에도 종종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리면서 부정적 이미지만 남겼다.

특히 YS는 퇴임 직후부터 “김대중 대통령은 독재자다. 우리나라 독재자 중 불행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독설을 퍼붓는가 하면 “국민이 힘을 합쳐 나라를 바로잡는 데 최선을 다하면 이런 독재자는 하루 아침에 물러날 수 있다”며 김대중 대통령의 하야를 거론하기도 했다. 전직 대통령 문화가 실종된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얼마전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임대주택에 살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8·31대책 발표 직후 나온 발언이어서 8·31대책에 힘도 실어주고, 임대주택 공급을 확산하겠다는 의지로 보였다. 어쨌거나 형식파괴의 대명사이자, 아직 나이가 젊은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 어떤 전직 대통령 문화를 보여줄지 벌써부터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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