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된 1월1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이병완 비서실장이 청와대 인근 한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이날은 일요일이어서 조간신문사와 방송사 기자들이 정상 출근해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실장이 “새해 벽두부터 고생한다”며 점심을 산 것이다.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한 기자가 질문했다. “개각 시기는 언제쯤 될 것 같은가?” 이 실장이 답했다. “좀 더 봐야 한다. 구체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어서…. 압박을 느낄 필요가 없다. 연초니까. 내일부터 들어가 봐야지.” 그러나 바로 다음날 노무현 대통령은 4개 부처 장관을 임명하는 ‘1·2 개각’을 전격적으로 단행했다.개각 다음날인 1월3일 국무회의가 열렸다.

회의 시작에 앞서 기자들이 청와대 김완기 인사수석에게 물었다. “시위농민 사망 사건으로 물러난 허준영 경찰청장의 후임 인선은 어떻게 되나?” 김 수석이 대답했다. “이제 막 (인선 작업이) 시작됐다. 다음주 초나 돼야… 이것 저것 확인해 봐야 한다. 적임자가 나타나면 인사추천회의를 거쳐 경찰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행정자치부 장관의 제청을 거치게 된다. 이번 주에는 인사추천회의가 없다. 충분히 확인해 보겠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인 4일 청와대 김만수 대변인은 “노무현 대통령은 신임 경찰청장에 이택순 현 경기지방경찰청장을 지명하고 국회에 인사청문을 요청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청와대 참모진의 수장으로,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비서실장과 정부 요직 인사를 담당하는 실무책임자인 인사수석이 개각과 신임 경찰청장 임명 사실을 하루 전까지도 까마득히 몰라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물론, 비서실장과 인사수석이 다음날 인사 발표 사실을 알면서도 언론에 미리 보도되는 일을 막기 위해 ‘연막’을 쳤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정부 요직 인사 때면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다르다. 여러 채널을 통해 확인한 결과, 실제로 비서실장과 인사수석이 개각과 경찰청장 인사 하루 전에도 구체적인 내용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이해찬 보좌관 출신 유시민
한창 논란을 빚고 있는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의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도 마찬가지다. 유 의원의 입각에 대해 여당 내에서 반대 의견이 팽배하자 청와대 핵심 참모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러면서도 1월4일 오전까지만 해도 “대통령께서 (유 의원을 입각시키려는) 뜻을 접을 것 같다”고 관측하는 기류가 강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그 날 오후 3시에 전격적으로 유 의원을 보건복지부 장관에 지명했다.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여권 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은 이번 일련의 인사가 ‘노무현 대통령과 이해찬 국무총리의 합작품’이기 때문에 다른 여권 인사들, 심지어 청와대 비서실장과 인사수석마저도 몰랐을 것이라고 분석한다.특히 유시민 장관 내정자의 경우 1988년 당시 이해찬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정치권에 처음으로 명함을 내민 인물이다. 장관 임명 제청권자인 이 총리가 열린우리당과 청와대 일각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카드를 끝까지 고집한 이유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결과적으로 이해찬 총리의 손을 들어줬다. 그렇다면 현정부에서 이해찬 국무총리의 파워는 어느 정도일까. 또 역대 정권에서의 국무총리들은 대통령제 하에서 어떤 권한을 행사했을까.

80여명 국무총리 보좌
왕조시대의 재상(宰相)에 해당하는 국무총리는 흔히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로 불린다. 위로는 대통령(왕조 시대에는 임금) 뿐이고, 아래로 만 백성이 있다는 의미다.대통령제 하에서의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 부를 통괄하는 대통령의 제 1의 보좌기관’으로 정의된다.우리나라의 경우 일단 외형적으로는 국무총리실도 막강한 권력집단이다. 국무총리실 구성을 보면 비서실장 산하에 정무비서관실·민정비서관실·공보비서관실·의전비서관실·혁신기획관실이 있다. 한 실에 적게는 10여명에서 많게는 20여명까지의 직원들이 있어, 대부분 고위급인 80여명의 공무원들이 국무총리를 보좌한다.

김종필·박태준 ‘실세형’
초대 이승만 대통령 시절 독립운동가 출신인 이범석 장군이 첫 국무총리에 오른 뒤 9명의 대통령을 거치는 동안 지금의 이해찬 국무총리까지 모두 36명(연인원)의 국무총리가 있었다.특히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5년 동안 국무총리를 모두 여섯 번이나 갈아치웠다. 역대 국무총리의 위상은 다양했다. 국무총리는 보통 개인의 정치적 입지에 따라 ‘관리형’과 ‘실세형’, 그리고 ‘중간형’으로 구분된다.전임 정권인 국민의 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4명 가운데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DJT 공동정권’의 축이었던 김종필·박태준 전국무총리는 ‘실세형’에 해당한다. 반면, 자민련 소속이지만 공동정권의 핵심은 아니었던 이한동 전국무총리는 ‘중간형’이었다.

이에 비해 DJ 정권의 마지막 내각수반이었던 김석수 전국무총리는 정치인이 아닌 법관 출신으로, 철저한 ‘관리형’에 머물렀다.현 정부에서는 관료 출신인 고건 전국무총리가 ‘관리형’ 혹은 ‘중간형’에 가까웠던 반면, 이해찬 국무총리는 철저한 실세형이다. 그렇지만 고건 전국무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의 탄핵을 받아 권한이 정지됐을 때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래도 실질적인 권한은 이해찬 국무총리와 비교될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해찬 의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한 뒤 일상적인 내치(內治)는 총리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장기적 국정과제에 주력하겠다는 뜻을 피력했을 정도다. 또 그런 약속이 어느 정도는 지켜지고 있는 실정이다.

‘포스트 노무현’을 찾아라
이에 따라 정치권에선 이해찬 국무총리가 과거 공동정권 때의 국무총리보다 더 실세 행세를 한다고 보기도 한다.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맞대응할 수 있는 것도 그만큼 대통령의 힘이 실리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이 때문에 일각에선 이해찬 국무총리를 ‘포스트 노무현’, 즉 차기 대권주자로 꼽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해찬 국무총리의 참모들은 “차기에 대한 욕심이 없으니 모든 일에 소신껏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이를 일축한다.

총리출신 대권 주자 많아
국무총리 출신 대통령으로는 최규하 전대통령이 유일하다, 하지만 그는 국무총리였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다가 잠시 대통령직에 오른 것이지, 개인의 능력으로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니었다.국무총리를 지낸 인사 가운데 김종필·이홍구·이수성·박태준·이한동·이회창씨 등이 대권을 노렸지만 모두 실패했다. 지금은 고건 전국무총리가 2007년 대선을 겨냥해 활발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두 차례 이상 국무총리를 지낸 인물로는 장면(2, 7대),백두진(4,10대), 김종필(11,31대), 고건(30,35대)씨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김종필 전국무총리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이어 무려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내각 수반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웠다.


# ●역대 국무총리(서리 제외)

▶제1공화국(이승만 대통령) 이범석(1대), 장 면(2대), 장택상(3대), 백두진(4대), 변영태(5대)
▶제2공화국(윤보선 대통령) 허정(6대), 장면(7대)
▶제3공화국(박정희 대통령) 최두선(8대), 정일권(9대), 백두진(10대), 김종필(11대)
▶제4공화국(박정희·최규하 대통령) 최규하(12대), 신현확(13대) 남덕우(14대), 유창순(15대)
▶제5공화국(전두환 대통령) 김상협(16대), 진의종(17대), 노신영(18대), 김정열(19대)
▶제6공화국(노태우 대통령) 이현재(20대), 강영훈(21대), 노재봉(22대), 정원식(23대), 현승종(24대)
▶문민정부(김영삼 대통령) 황인성(25대), 이회창(26대) 이영덕(27대), 이홍구(28대), 이수성(29대), 고건(30대)
▶국민의 정부(김대중 대통령) 김종필(31대), 박태준(32대), 이한동(33대), 김석수(34대)
▶참여정부(노무현 대통령) 고건(35대), 이해찬(3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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