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에 ‘딥 스로트’가 생긴 것을 보면 우리나라도 그만큼 ‘선진국화’ 돼 가는 것 아닌가.” 최근 청와대를 긴장시키고 있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문서의 잇단 유출 사건에 대해 비서실 고위 관계자가 농담삼아 한 말이다. 그러나 곧 그는 정색하며 다시 말했다. “이번 사건은 물론, 진상이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다만 이 일이 참여정부들어 본격화된 권위의 포기, 권력의 분산 등과 관련해서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본다.”이 관계자의 말처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협상과 관련한 청와대 외교문서가 유출돼 여당인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과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의해 잇달아 공개된 것은 청와대의 분위기 변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정부 내 ‘반미 자주파’와 ‘온건 자주파’의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역대 정권에선 볼 수 없던 현상이지만, 청와대 문건이 ‘의도적으로’ 유출됐다는 자체는 상당히 충격적이다.

‘딥 스로트(Deep throat)’는 ‘익명의 제보자’를 뜻하는 용어다. 1972년 미국 워싱턴포스트지의 칼 번스타인, 밥 우드워드 기자에게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의 단서를 제공했던 정보제공자의 암호명이었다.이 암호명은 1970년대 당시 인기를 끌었던 포르노 영화 ‘딥 스로트’(목구멍 깊숙이)’에서 따온 말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나중에 알란 J 파큘라 감독의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에서 재현됐다. 이 영화를 통해 ‘딥 스로트’란 내부고발자, 은밀한 밀고자, 익명의 제보자를 뜻하는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그러나 진작 워터케이트 사건의 딥 스로트는 베일에 싸여 있다가 지난 2005년 5월31일, 사건 이후 30년만에 딥 스로트는 전직 FBI 부국장 마크 펠트였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펠트가 딥 스로트가 된 것은 FBI 국장을 꿈꾸던 그의 야심과 백악관과 FBI 간의 갈등, 그리고 정보기관 종사자로서의 양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서실 분위기 보안에 걸림돌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 같으면 청와대 또는 정보기관 내부의 정보, 그것도 문서로 만들어진 대통령과 직접 관련된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혹, 어떤 경로를 통해 정보가 유출되더라도 그 정보는 여론화되기 전에 폐기되고 관계자들은 크게 다쳤다.그렇지만 이번 NSC 문건 유출 사건을 계기로 청와대는 내부에 ‘딥 스로트’가 존재함을 인정하고 조사에 착수했다. 참여정부들어 하나 둘씩 성역이 무너지는 데 이어, 이번에는 청와대 역시 더 이상 정보의 비밀창고가 아님을 고백한 셈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그동안 조사 결과, 사안의 성격상 기밀문건 내용을 알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비서실과 NSC 직원을 합쳐 10명이 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정수석실에서 이들을 대상으로 유출 여부를 집중 파악하고 있는 단계다.청와대는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후반기로 들어가는 시점에서 통치권 누수를 차단하고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서도 반드시 유출자를 색출, 일벌백계 한다는 방침이다.그러나 청와대가 실제로 유출자를 찾는다 해도 이를 공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유출자의 신분이 밝혀지고, 문건을 유출하게 된 원인 등을 분석하다 보면 여권 내부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까닭이다.

YS정권때 비서실장 서류 ‘슬쩍’
역대 정권에서의 청와대는 모든 것이 ‘기밀’이었다. 대통령의 일정, 특히 외부 일정은 혹시 출입기자가 알았더라도 기사화하지 못한다. 경호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출입기자들이 다른 경로를 통해 대통령의 중요한 외부 일정을 취재하고 보도한 뒤 일정 기간 ‘기자실 출입 정지’를 당한 사례도 많다.또 대통령의 주말 휴식 일정도 마찬가지였다. 역대 대통령들도 주말이면 서울을 떠나 청남대나 청해대(진도 저해)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골프를 즐기기도 했지만 사전이나 사후에나 모두 ‘기밀 사항’이었다.참여정부들어서야 노무현 대통령이 주말을 이용해 고향 진영에 다녀오거나, 군 휴양시설에서 지냈다는 일 등이 사후에(대통령이 청와대에 도착한 시점) 기자실에 공개되고 있다.그러나 참여정부 청와대도 초기부터 ‘보안’에 많은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출범과 동시에 출입기자들의 비서동 출입을 금지시킨 이유 가운데 하나가 ‘보안’이었다.

비서실 일과시간에 기자들이 아무런 통제 없이 불쑥불쑥 들이닥치면 국가 기밀이 새 나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김대중 대통령 시절까지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오전과 오후로 나눠 하루 두 차례씩 비서동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시간은 각 한 시간씩으로 제한됐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시간이 초과되더라도 별 문제는 없었다.그러다보니, 사실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컴퓨터를 이용해 중요한 작업을 하던 참모들은 기자들이 오는 시간이 되면 작업을 중단해야 했다. 또 그 시간 동안에는 자리를 함부로 비우지도 못했다. 이것저것 뒤지는 기자들의 습성 때문에 자칫 기밀 서류가 빠져 나가 곤욕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실제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 비서실장실에서 출입기자들과 비서실장이 소파에 앉아 간담회를 하는 사이, 모 언론사 기자가 비서실장의 책상 위에 있던 인사 관련 서류를 발견하고 아무도 모르게 슬그머니 낚아 채 나가 기사화 한 적도 있다.

1년전에도 2급기밀 문건 유출돼 파문
이밖에도 청와대에선 기밀로 치는 것이 많다. 대통령 경호실의 정확한 인원에서부터, 대통령이 요즘 담배를 피우는지 안 피우는지도 ‘기밀’이라며 연막을 친다.그렇지만 특히 참여정부 들어서 이런 저런 청와대내의 기밀들이 밖으로 알려지는 경우가 잦다. 기자들의 비서동 출입을 제한하면서 까지 보안을 강조하지만, 비서실 분위기가 워낙 자유로운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또 가급적 모든 정보를 공유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도 기밀이 잘 지켜지지 않는 이유가 된 듯하다. 이번 NSC 문건 유출 사건이 터지기 꼭 1년 전인 2005년 2월에도 2급 비밀로 분류돼 있는 NSC ‘일일정보’ 문서가 언론에 유출돼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이 보안 감찰조사를 벌인 적이 있다.

당시 유출된 문서는 NSC 사무처의 정보관리실이 매일 국정원·외교통상부·통일부· 국방부, 그리고 미국과 중국 등 주요국 해외공관에서 보고한 외교안보와 관련된 중요 정보를 취합해, 20여개 기관에 배포하는 것이었다.또 2004년 5월에는 고건 전총리가 ‘사표를 내기 전에 각료 제청권을 행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각계 의견을 담은 문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는 기사가 한 신문에 실린 뒤 문서 유출의 주체와 배경을 두고 갖가지 해석이 난무한 바 있다.당시 이 문건은 고 전총리가 24일 사표를 내기 전 각료 제청권 행사를 세 번째로 요청하기 위해 서울 삼청동 총리 관저를 찾은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이 문건이 유출돼 공개되는 바람에 풍파가 일었다. 여권내에선 문건이 총리실에서 유출됐는지, 아니면 청와대로 넘겨진 뒤에 빠져나갔는지 설왕설래가 벌어졌었다.

정보 공유로 부작용 재검토 필요해
과거 정권 시절에도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이 없지 않았는데, 당시는 주로 ‘언론대책’에 관한 것이 많았다.국민의 정부 시절 언론사에 대한 국세청 조사 및 공정위 조사에 이은 검찰 고발 등 일련의 작업이 이뤄지던 1999년 당시 한나라당은 여권이 대선 직후부터 언론공작을 기획해 왔다고 주장하면서 98년 2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진 ‘새 정부 언론정책 추진계획’ 등 일련의 언론문건을 폭로했다.어쨌든 이번 NSC 문건 유출 사건을 거치면서 국가 주요 문서 관리가 새로운 이슈로 떠 올랐다. 특히 청와대 비서실은 내부 인터넷망을 통한 정보 공유에 역점을 두고 있지만 현시점에서 부작용도 검토해 봐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