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정무 참모

참여정부 청와대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인사 난맥상이 잇달아 노출된 가운데 사행성 성인 오락물 ‘바다이야기’ 파동까지 겹쳐 정권의 명운을 흔들고 있다. 그럼에도 노무현 대통령은 여론의 강한 반발을 외면하고 이재용 전 환경부 장관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에, 김완기 전 청와대 인사수석을 공무원연금관리공단 이사장으로 임명하는 등 ‘오기(傲氣) 인사’를 강행했다.
동시에 청와대는 지난 27일 대통령 비서실의 정무기능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정무비서관을 팀장으로 하는 ‘정무팀’을 신설한 것이다. 정무비서관에는 정태호 대변인, 기존의 기획조정비서관 직제를 개칭한 정무기획비서관에는 소문상 기획조정비서관을 발탁했다. 또 윤태영 연설기획비서관이 다시 대변인을 맡았다.


정무팀 신설은 노무현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임기 초반에 스스로 ‘탈(脫)정치’를 선언하고 정무수석 직제를 없앴던 노 대통령이 다시 비서실의 정무기능 강화를 지시한 배경은 무엇일까.


이강철 특보 역할 주목
그 해답은 최근들어 잇달아 발생하고 있는 청와대를 겨냥한 여당의 도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병준 전교육부총리의 낙마, 문재인 전민정수석의 법무부 장관 임명 불발, ‘바다이야기’ 파동에 대한 정부의 대국민사과 요구 등 최근 일련의 과정에서 여당은 사사건건 청와대를 자극했다.
그럼에도 대통령 비서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정무수석직 폐지 이후 국회나 정당과의 연결고리가 약했던 것이 표면적인 이유다. 그동안 청와대에서는 정책실과 홍보수석실, 비서실장 직속의 기획조정비서관실에서 정무기능의 일부를 담당했지만 정치권을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청와대를 장악하고 있는 ‘386 참모’들로는 김근태 의장과 김한길 원내대표 같은 노련한 여당 지도부를 상대하기 벅찼다.
그러던 차에 임기 말로 접어들었고 차기 대선을 겨냥한 여당의 차별화 전략에 따른 공세가 강화됐다. 노무현 대통령 입장에서는 레임덕을 최소화시키고, 차기 대선 과정에서 일정 부분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도 정무기능 강화가 필요해졌다. 나아가 퇴임 후 안전판 마련을 위해서도 지금부터 정치권과의 관계 설정에 나서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탈정치를 선언하면서 폐지했던 정무수석직을 부활할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일단은 정무비서관과 정무기획비서관으로 구성되는 정무팀을 만들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태호 정무비서관(43)과 소문상 정무기획비서관(42)도 386 참모의 일원으로, 국회와 여·야 정당의 노련한 정치인들을 맞상대하기는 벅차다. 그래서 부각되는 인물이 이강철 정무특보(59)다. 노 대통령도 최근 이강철 정무특보에게 적극적인 정무 활동을 주문했다고 한다.
이강철 특보는 자타가 공인하는 노 대통령의 측근 인사다. 그러면서도 여당은 물론, 야당에서도 두루 신망을 얻고 있어 ‘정무직’을 수행하는 데는 적임자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비상근 특보 입장에서, 특히 정권의 임기 후반기에 정치권을 상대로 얼마나 역량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당 따로 청와대 따로’
‘청와대의 마지막 정무수석’은 유인태 열린우리당 의원이다. 거침없는 언행으로 ‘엽기수석’으로 불렸던 유인태 수석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정무수석 직제를 없앴다. 2004년 유 수석이 17대 총선 출마를 위해 정무수석직을 내놓자 후임을 임명하지 않다가 아예 직제 자체를 폐지해 버린 것이다.
노 대통령은 출범 초기부터 청와대가 정무수석실을 통해 당과 국회를 장악하는 구시대적인 정치관행을 없애겠다고 여러차례 밝힌 뒤 마침내 정무수석실 폐지를 단행했었다.
그 이후 정무기능은 실무차원으로 떨어지고 일상적인 교류와 의견조율은 약화됐다. 이로 인해 ‘당 따로 청와대 따로’ 현상이 나타났고 ‘당·청 갈등’이 일어나도 조정에 나설 채널이 희미해졌다.
이해찬 전총리시절에는 ‘8인회의’나 ‘11인회의’ 같은 비공식적인 회동을 통해 그 공백을 어느정도 메웠다. 그러나 이 전총리가 골프 파동으로 퇴진한 이후에는 이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최근 인사파동 이후 ‘당·정·청 4인회’를 열기로 했으나 효율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은 게 사실이다.


막강했던 이원종수석 기자에 고급정보 제공
그 이전까지 청와대 정무수석은 그야말로 ‘실세’ 자리였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행정부의 정무1, 2장관 직제를 없애면서 생긴 청와대 정무수석은 무소불위의 힘을 가질 정도로 막강했다.
청와대를 출입했던 기자들은 대통령의 신임이 가장 두터웠고 힘도 막강했던 정무수석으로 YS 시절의 이원종 정무수석을 기억한다.
‘상도동 가신’ 그룹이었던 이 수석은 청와대 재임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들을 완전히 장악했음은 물론, 야당 의원들까지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위세를 부렸다. 그가 YS의 차남 현철씨와 함께 정부 요직 인사를 좌지우지함은 물론, 검찰과 안기부 등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정치권 사람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민정부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대통령의 참모들이 머물고 있는 비서동으로 매일 오전에 들어가 정무수석과 약20~30분 가량 ‘티 타임’을 가졌다.(참여정부 들어서는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비서동 출입이 완전히 봉쇄됐다)
이 자리에서는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최고급 정보들이 아무 여과없이 다뤄졌다. 정부와 정치권 이야기는 물론, 대기업 후계구도 등과 관련한 민감한 사안들도 거리낌없이 화제에 올랐다.
어떤 때는 이원종 정무수석이 응접 탁자에서 기자들과 대화 도중 칸막이 저쪽에 있는 자신의 책상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를 받으러 황급히 가곤 했다. 바로 대통령이 그를 찾을 때 사용하는 ‘핫 라인’이었다.
그럴 때면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정보를 주곤했다. 기자들로서는 기사로는 쓸 수 없지만, 회사 고위층에 고차원적인 정보보고를 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정무수석과의 아침 티 타임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당시는 비서실장을 비롯한 다른 수석비서관실도 하루에 두 차례 출입기자들에게 개방됐지만 항상 정무수석실만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실세 정무수석의 위세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정무수석의 면면에 따라 정무수석실의 위상이 크게 달랐다. 남궁진 정무수석 같은 동교동 가신 출신들이 있을 때는 그 자리가 빛났지만 비중이 약한 정치인 출신이 맡았을 때는 활동이 미미했다.
그 중에서도 실세 정무수석으로 꼽혔던 김정길 수석은 참여정부 들어서도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인맥’의 핵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대한체육회장을 맡는 등 실세 대접을 받고 있다.
앞서 정무장관 시절에도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이 정무장관에 임명됐다. 노태우 대통령 때의 박철언 정무1장관이 대표적이다.
당시 박철언 정무1장관은 ‘여소야대’ 국회에 시달리던 노태우 대통령의 ‘특명’을 받아 민정당·민주당·공화당의 3당 통합을 앞장 서 추진했다. 그렇지만 이후 YS와의 파워게임에서 패하는 바람에 치명상을 입고 다시는 권력에 복귀하지 못했다. 3당 합당 후 그가 맡았던 정무장관 자리도 YS의 오른팔인 김동영 장관에게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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