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누구나 한번은 들어봤을 덕수궁 돌담길에 관한 노래들이 있다.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주목받던 시대의 산물이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 갔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이영훈 작사·작곡, 최현주·이문세·이수영 노래, 「광화문연가」)

 “덕수궁의 돌담길 옛날의 돌담길. 너와 나와 처음 만난 아카시아 피던 길. 정동교회 종소리 은은하게 울리면은 가슴이 뭉클해졌어 눈시울이 뜨거웠어. 아아 지금은 사라진 정다웠던 그 사람이여.”(길옥윤 작사·작곡, 혜은이 노래, 「옛사랑의 돌담길」)

 “비내리는 덕수궁 돌담장 길을 우산없이 혼자서 거니는 사람. 무슨사연 있길래 혼자 거닐까. 
저토록 비를 맞고 혼자 거닐까. 밤비가 소리없이 내리는 밤에”(정두수 작사, 한산도 작곡, 진송남·나훈아 노래, 「덕수궁 돌담길」)

 이문세, 혜은이 그리고 요즘 다시 뜬 나훈아의 노래를 들으면, 예전 그 노래를 들었던 청춘의 시간으로 돌아간 듯하다. 물론 오늘도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에는 저녁 무렵이면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노래 속 주인공들은 한때는 그 길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사랑을 속삭였지만, 이제는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며 쓸쓸하게 그 길을 걷고 있다. 어느 길이라고 만남과 헤어짐이 없을까만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에는 노랫말 때문인지 연인들이 그 길을 걸으면 이별한다는 속설까지 생겨나기도 했다.

 연인의 길, 남은 사람의 고독한 길. 그 길에는 연인만의 만남과 헤어짐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길에는 역사 속 만남과 헤어짐도 무수히 켜켜이 쌓여 있다.

성공회 성당 안 순교추모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성공회 성당 안 순교추모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노래와 역사를 따라가는 길

 이번 답사는 노래와 시간을 따라간다. 다만 연인들의 노래 길이 아닌 역사에 새겨진 길로 간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 선조, 그리고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걸었던 길,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이다.

 출발점은 시청역이다. 출구로 나오면 덕수궁 앞 돌담길은 과거와 현재가 뒤범벅된 깃발과 소음으로 가득하다. 주의․주장을 부르짖는 소리, 거친 군가가 귓전을 때린다.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는 그 노래들은 없다. 발걸음이 무겁다.

 주요 코스는 덕수궁 입구에서 서울특별시의회~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동화면세점~흥국생명빌딩(세화미술관)~경향신문사~성프란치스코회~국토발전전시관~창덕여자중학교~구(舊)러시아공사관~이화여자고등학교까지다.

 나머지 구간은 덕수궁 중명전~정동제일교회~아펜젤러기념공원~덕수궁 돌담길~서울시립미술관~덕수궁 입구까지는 2편에서 이어간다. 덕수궁 자체는 훗날 조선의 궁전 시리즈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이 일대는 서울 중심부 어느 곳이나 그렇듯 알면 알수록 너무 많은 삶이 있는 곳이다. 책으로 써도 수십 권을 써야 그나마 제대로 소개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글은 KTX 안에서 본 풍경에 불과하다. 또 답사 코스도 수십 개로 만들 수 있는 미로 같은 곳이다. 그냥 걷기만 한다면 불과 1시간도 걸지 않을 좁은 공간이나, 마음먹기에 따라 하루도 모자라다.

서울시의회 입구 부민관의거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서울시의회 입구 부민관의거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부끄러운 역사 인식, ‘부민관 폭파 의거 사건’

 시청역 3번 출구로 나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바로 앞에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이 있다. 코로나로 현재는 비대면 운영 중이란다. 코로나 시대에 어딜 가나 자주 보는 풍경이다. 내년엔 코로나 탓을 하지 않을 때가 올 수 있으려나. 전시관 옆 건물은 서울특별시의회 건물이다.

 두 개의 표석(안내판)이 보인다. 건물의 붉은 색 페인트 밑에 있는 것은 시의회 건물이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경성부민(京城府民, 서울시민)의 문화공간으로 만든 것이었고, 해방 이후에는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는 내용이다.

 한글전용이 되면서 어딜 가나 사람을 혼동시키는 표현이 있다. 순 한글만으로는 뜻이 불분명하게 전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안내판은 ‘태평로 구국회의사당’으로 되어있다. 일기에 따라 ‘구국 회의 사당’처럼 될 수 있다. 이 ‘구’는 한자 ‘옛 구(舊)’자이다. ‘옛 국회의사당’이나, ‘구(舊) 국회의사당’이라고 해야 분명해진다. 한글이 만능키는 아니다.

 시의회로 들어가는 계단 옆에는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의 3분의 1만한 ‘부민관 폭파 의거 터’ 표석이 있다. 8·15해방 직전인 7월24일 대한애국청년당 유만수·강윤국·조문기 의사(義士)가 친일부역자 박춘금 일당과 일제 고위관리를 제거하기 위해 폭탄을 터뜨린 곳이다. 변절자, 매국노가 넘치던 깊은 어둠의 시기에도 좌절하지 않고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뜻깊은 곳이다.

 표석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부민관 폭파 의거는 …… 폭탄을 터뜨린 사건이다.” ‘사건’이란다! 사건, 국어사전에서 사건(事件)은 대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거나 사법 작용의 대상이 되는 일을 뜻하는 부정적 표현이다. 의사(義士)들의 ‘의거(義擧)’를 후손들이 ‘사건’으로 깎아내렸다. 당장에라도 바꿔야 할 단어이다. 작은 크기의 ‘부민관 폭파 의거 터’ 표석과 ‘사건’이란 표현을 보면, 건물 입구에 붙은 금색으로 번쩍이는 ‘서울특별시의회’ 간판이 왜 필요한지 의문이다. 

성 세례 요한 성당 내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성 세례 요한 성당 내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성당 안 동판의 비밀 : 성공회 주교 조마가의 무덤

 전시관과 시의회 사잇길로 들어가면 전시관 지붕에 설치된 ‘서울 마루’ 공간이 있다. 정면에는 서울시청과 한국프레스센터, 뒷면에는 1926년에 건축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보인다. 파라솔을 설치해 오가는 시민들이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서울 마루’에는 조형물이 아닌 조형물이 있다. 녹슨 철근이 드러난 기둥 하나가 마치 어떤 예술가의 작품처럼 서 있다. 기둥에 붙은 안내문을 보면, 82년 만에 새로 터를 닦았다고만 나온다. 무엇이 있던 곳인지, ‘서울 마루’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 기둥의 잔해가 어떤 건물의 잔해인지는 아무 내용이 없다. 전시관 건물임에도 무성의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잠시 앉아 쉬면서 서울의 풍경을 느껴보기에는 좋은 곳이다.

 ‘서울 마루’에서 성당을 보면, 성당 안에 있는 철모처럼 생긴 녹색의 바윗돌과 흉상이 보인다. 흉상은 우리나라 첫 성공회 사제인 김희준 신부(1866~1946)이다. 녹색 바윗돌은 6‧25전쟁 중에 교회를 지키다 순교한 3명의 한국인 신부와 2명의 영국 신부 그리고 아일랜드 수녀를 기리는 ‘순교추모비’이다.

 까치 한 마리가 한가롭게 추모비 위에 앉아 흉상을 바라보고 있다. 한쪽 끝에 십자가가 비스듬히 붙어있는 추모비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아름답다. 자신의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기리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녹색의 철모를 닮은 추모비는 마치 전쟁 중에 순교한 사람들과 전쟁의 당사자인 군인의 푸른 제복을 상징하는 듯하다. 순교자들이 그들을 죽인 군인들을 용서하겠다는 듯.

 성당은 ‘성 세례 요한 성당’과 ‘대성당’ 두 개가 있다. 대성당은 코로나 등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성 세례 요한 성당’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자주색과 황금색 동판이 보인다. 자주색은 뻥 뚫린 의자 바닥과 정면의 신부님이 강론하는 탁자를 덮은 보이다, 황금색 동판은 양쪽 의자 사이 바닥에 있는 세례자 요한을 새긴 것이다. 보라색과 황금빛 동판, 그리고 창에 반쯤 걸린 소박한 스테인글라스가 경건함을 더 깊게 만든다.

 그 동판 아래에는 3대 교구장 조마가(Mark N. Trollope, 1911~1930) 주교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성당이나 교회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이국적 풍경이다. 누군가의 묘가 건물 한복판에 있고,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면, 그 위를 그냥 밟으며 지나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공회 사제관 앞 돌부처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성공회 사제관 앞 돌부처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6‧10 항쟁의 발화점, 사제관과 불상의 공존

 성당을 나와 대성당을 지나면 한옥으로 지은 사제관이 있다. 사제관 앞 정원 좌측에는 ‘유월민주항쟁진원지’ 표석이 있다. 1987년 6‧10민주화운동 기념비이다. 6‧10항쟁의 기폭제가 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날 이 성당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로부터 우리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6‧10항쟁이 일어났다. 지금은 그때의 주도세력 중 일부로 인해 퇴색했지만, 그날은 분명 새로운 시대, 민주주의의 시대의 새 날을 열었다.

 사제관 앞에는 눈길을 끄는 두 개의 장면이 있다. 하나는 돌담에 기와를 두세 겹 쌓은 작은 공간이다. 그 가운데를 살펴보면 나무 밑둥이가 보인다. 신부님에 따르면, 본래 큰 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가 쓰러져 죽고 밑둥이만 남았기에 그 나무를 기념하기 위해 그렇게 해 놓았다고 한다. 또 하나는 사제관에 오르는 돌계단 좌측에 조용히 앉아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는 작은 돌부처다. 사제관 앞 정원 장식품이라고 볼 수 있으나, 돌부처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다른 종교, 문화를 인정하려는 포용력으로 보인다.

 사제관 왼편에는 또 하나의 한옥이 있다. 고종 때 ‘경운궁’을 고쳐 지을 때 새로 세운 ‘양이재’란 건물을 1920년에 성공회가 매입해 현재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양이재에서 왼쪽으로 나가면 ‘주한 영국대사관’이 있다. 정문은 비록 시멘트 기둥에 철문을 달았으나, 지붕은 한옥 기와가 덮힌 한옥 형태이다. 대사관 안 바로 옆에는 한옥 한 채가 들어서 있다. 대사관 건너편은 덕수궁이다. 성공회 땅도, 영국대사관 땅도 모두 본래는 덕수궁 일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영국대사관 옆 미국대사관저 역시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왕궁을 뚫고 들어온 강대국의 대사관들. 그리고 그 땅은 치외법권지역이다. 즉 우리나라 땅이 아니다. 어제의 약소국의 피눈물나는 흔적이다.

 성당 우측 정문으로 나와 위쪽으로 올라가면 조선일보사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세종로파출소 앞이다. 이곳에는 ‘도로 원표(道路元標)’가 있다. 도로의 기점(起點)·종점(終點) 또는 경과지를 표시한 것이다. 이 원표는 서울과 전국 주요 도시 사이의 거리를 표시하는 기준점이다. 방향은 땅을 지키는 ‘십이신상(十二神像, 쥐‧소‧호랑이‧토끼‧용 등 12동물)’으로 12방위로 나누고, 그 사이 사이에 해당되는 방향의 우리나라 도시와 외국 도시와의 거리를 표시해 놓았다. 말과 양 사이에는 우리나라는 군산(260km)에서 마라도(579km), 외국은 마닐라와 자카르타와의 거리가 나온다. 쥐와 소 사이에는 직선거리로 함흥(269km), 온성(650km), 토끼와 용 사이에는 독도(435km)가 있다. 나라가 크지 않다는 것을 숫자로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동화면세점 뒷길을 따라 새문안로로 나가면 ‘광화문 오피시아’ 건물이 있다. 그 앞 구두 수선 박스 오른편 큰 길가에는 ‘선공감(繕工監) 터’ 표석이 있다. 조선 시대 토목과 건축물 보수를 담당했던 관청이다. 세종 때에는 세종이 성균관 학생들이 습질(濕疾)에 많이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공조(工曹)에게는 학생들이 머무는 건물에 온돌을 놓아주게 했고, 선공감에는 목욕탕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세종의 자상한 배려를 느낄 수 있다.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해머링 맨(Hammering Man」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해머링 맨(Hammering Man」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노동의 고귀함을 알리는 거구의 ‘해머링 맨’

 서대문역 방향, 서울역사박물관 방향으로 150미터 정도 올라가면 흥국생명빌딩 옆 왼쪽에 커다란 검은색의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가 만든 「해머링 맨(Hammering Man, 망치질하는 사람)」이다. 높이 22미터, 폭 10미터, 무게 5톤으로 세계 11개 도시에 설치된 같은 이름의 작품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주경림 시인은 그에 대해 “품 안에 드는 것이면 무엇이든 망치질한다. 햇빛, 어둠, 빗줄기, 사랑. 붉은 악마의 물결 함성까지도. 지금 그는 떨어지는 해를 망치질하고 있다. 왼손의 모루 위에 햇살이 수북하다. 오른손으로 들어올린 망치를 천천히 내리친다. 햇살은 황금빛 가루로 부서져 허공에 번쩍 튀긴다.”(「망치질 하는 사람」)고 노래했다.

 소설가 조경란은 「최초의 꽃, 최초의 도시」라는 글에서 “거대한 한 남자가 망치 든 손을 한시도 쉬지 않은 채 천천히 들었다 내렸다 하는 고독한 움직임을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보고 있노라면 새삼 노동의 신성함 같은 것이 떠오르고는 한다. 글이 안 써져 도망치듯 나온 날에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 책상 앞에 앉아야 할 것 같은 의무감도 불쑥불쑥 든다.”(『나의 도시, 당신의 풍경』, 임재천, 김경범, 문학동네, 2008년)라며 노동의 신성함을 보았다.

 손수호 인덕대 교수는 “작가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들은 북유럽의 친절한 거인 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보는 사람들은 단순하게 실루엣으로 표현된 이미지를 통해 묵묵히 일하는 노동의 가치, 혹은 현대인의 고독을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평가했다(손수호, 『도시의 표정』, 손수호, 열화당, 2013년).

 손 교수가 저술할 때는 35초마다 한 번씩 하루 17시간 동안 망치질을 했으나, 지금은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10시간 망치질하고, 토‧일요일은 쉰다. 큐레이터의 이야기로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상황 변화에 따라 「해머링 맨」의 망치질 시간도 줄었다고 한다. 최초의 작품 이름이 「워커(Worker, 일하는 사람)」인 것을 보아도 작가가 노동을 중요시한 것은 확실하다.

 화이트칼라가 가득한 광화문 일대에서 망치질하는 사람은 어울리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화이트칼라 역시 노동자다. 모든 노동은 고귀하다. 노동의 신성함과 가치는 차별할 수 없다.

 보로프스키의 다른 작품은 소격동 국제갤러리 옥상에 설치된 「워킹 우먼(Walking Woman)」,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싱잉 맨(Singing Man)」도 있다. 서울 시내를 비롯해 전국 곳곳 대형 빌딩 앞의 의미를 할 수 없는 무수한 조형물에 비하면 확실히 차원이 다르다.

 『길섶의 미술』(손수호, 한울, 1999년)은 의미가 있는 멋진 조형물에 대한 확실한 소개서이다. 공공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최수정의 「달빛이 비추는 땅」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최수정의 「달빛이 비추는 땅」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흥국생명빌딩 앞 스테인리스 기둥으로 만든 버스정류장도 작품이다. 하태석 작가의 「흐름」이다. 빌딩 3층에는 세화미술관이 있다. 그래서인지 건물 안에도 다양한 작품이 많다. 답사 당시에는 「손의 기억」(김순임‧정문열‧조소희 등)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2021년 2월 28일까지 전시이다. 모든 예술가가 손으로 작업을 하지만, 이 전시회 작가들은 특별하다. 현대 미술을 몰라도 그냥 보면 느끼고 알 수 있다. 최수정의 작품들은 「달빛이 비추는 땅」이라는 대주제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들이나, 캄캄한 동굴에서 달빛이 만들어낸 신화 속 세상을 보여준다. 정문열의 작품은 제임스 카멜론 감독의 영화 「아바타」 속 나비족의 ‘신성한 나무’를 과학자의 기술과 작가의 통찰력으로 확장, 재구성했다. 그 속을 걷다 보면 먼 우주의 어느 신성한 나무 숲에 서 있는 듯하다. 두 사람의 이어지는 작품은 신화 속 동굴을 지나 신비로운 숲에 있는 느낌을 준다. 그 외의 작품들도 새롭고 작가들의 손이 만든 기억을 거꾸로 찾아보게 한다.

 코로나로 휴관할 수 있으니 사전에 인터넷으로 확인하고 가는 것이 좋다. 미술관이 닫혔을 경우는 건물 1층 로비 등에 있는 작품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성 프란치스코와 평화의 소녀상

 빌딩을 나와 서대문 방향으로 올라가면 정동 사거리 언덕 위 한 기둥에 국토발전전시관‧배재학당역사박물관‧창덕여자중학교‧서울시립미술관‧예원학교‧경찰박물관을 알리는 이정표가 붙어있다. 이정표 왼쪽은 경향신문사이다. 경향신문사 정문 바로 아래에는 ‘천주교 작은형제회(프란시스꼬회)’, ‘프란치스꼬 교육회관’, ‘수도원성당’이 있다.

 ‘작은형제회’ 차량 출입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흰색의 요셉‧마리아‧어린이 예수상이 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앞의 요셉과 마리아, 예수와 달리 ‘한복 입은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앉고 있는 상(像)’이 보인다. 두 상 모두 경건하나, 한복 성모와 예수상이 투박하나 훨씬 친근하고 예전의 젊은 어머니 모습을 보는 듯하다.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정문 앞에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상’이 있다. 작은형제회를 시작한 천주교 성인(聖人)이다. 두 손바닥에는 구멍이 뚫린 채 하늘을 향해 눈을 감고 기도하는 모습이다. 손바닥 구멍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생긴 5개의 상처처럼 그도 같은 상처를 갖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프란치스코 상’ 뒤편에는 익숙하되, 익숙치 않은 상이 하나 보인다. 2015년 ‘학생의 날’에 53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힘을 모아 세운 ‘평화의 소녀상’이다. 이 소녀상은 일본대사관 앞의 앉아있는 소녀상과 달리 일어서 있는 소녀상이다. 누군가 소녀의 머리 위에 뜨개질로 뜬 주황색 모자를 씌워주고, 분홍색 목도리도 둘러놓았다. 세상이 차갑고 거친 듯해도 어딜 가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프란치코 상’ 앞 길가쪽에는 검은 벽돌 바탕에 ‘어서각 터’ 동판이 붙어있다. ‘어서각’은 영조 때 최규서가 영조로부터 받은 글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현재는 경기도 안성시에 이전되어 있다.

 ‘작은 형제회’ 차량 출입구 맞은 편에는 ‘한성(漢城) 교회’가 있다. 화교(華僑) 한의사였던 처따오신(車道心)이 1912년 미국인 유디스 데밍(E.M.Deming) 선교사와 함께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화교 교회이다. 지금의 건물은 1958년에 지은 것이다. 한국 화교의 역사가 서린 곳이다.

 한성교회에서 몇 미터 내려가면 오송빌딩과 한식당 장수회관 사이에 골목이 있다. 이 골목길은 경향신문사 위쪽 정동사거리 국민은행 앞 ‘돈의문 터’에서 시작하는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 중 숭례문(남대문)까지 구간의 시작점이다. 숭례문까지는 1.62킬로미터이다. 문화일보와 창덕여중, 농협중앙회, 이화여고 뒷길을 거쳐 가는 길이다.

국토발전전시관 내 언덕 위 집, 달동네 이야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국토발전전시관 내 언덕 위 집, 달동네 이야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10미터 내려가면 캐나다 대사관이 있고, 맞은 편은 ‘국토발전전시관’이다. 국토발전전시관은 이웃의 창덕여자중학교와 함께 1895년 법어학교(프랑스어 학교)가 있던 자리이다. 최근에는 서울지방국토관리청이 있었다. 전시관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 아래로 내려오는 코스 방식이다. 4층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언덕 위 집, 달동네 이야기’ 모형이다. 1950~70년대까지 가난한 도시 서민의 삶을 재현해 놓았다.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금방 공감할 수 있다. 3층은 도로와 교통이 주제다. 어린이와 함께라면, ‘차세대 고속열차 해무 430X’를 아이에게 체험케 할 수 있다.

 죽 둘러보고 1층으로 나오면 지하주차장 입구와 장애인전용 주차구역 사이에 버섯을 닮은 ‘탑’이 있다. 보기에 따라 남사스럽기도 하다. 어떤 이유로, 어디서 있던 것인지 아무런 맥락이 없어 그저 서 있다. 이 전시관 역시 무심하다.

국토발전전시관 내 버섯 닮은 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국토발전전시관 내 버섯 닮은 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정동길을 걷다 

 전시관 맞은 캐나다 대사관 앞에는 약 564년 된 회화나무가 서 있다. 대략 조선 세조 때부터 서 있던 나무이다. 높이 17미터, 지름 5.15미터이다. 이 회화나무 아래에는 “근대유산 1번지 정동”이라는 동판으로 된 안내판이 있다. 근대 정동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임을 알린다.

창덕여자중학교 안 프랑스공사관 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창덕여자중학교 안 프랑스공사관 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대사관 맞은편에는 창덕여자중학교가 있다. 정문 외쪽 아래에는 ‘관립법어학교 터’ 표석이 서 있다. 1895년 개교한 프랑스어 교육기관이라고 한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면 운동장이 보인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면 끝에 ‘프랑스공사관 터’ 안내판과 1896년 건립된 프랑스 공사관의 머릿돌을 볼 수 있다. 또 여중 경계 지점에는 한양도성 성벽 유적이 땅속에 있다는 ‘한양 도성 성벽 유적’ 안내판도 보인다. 동쪽(좌측) 방향으로 몇 걸음 더 가면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 안내판이 나온다. 그러나 후문 문이 닫혀 왕래할 수는 없다. 운동장 둘레길 동쪽 길을 따라가면 끝부분에 ‘서울 서대문초등학교 교적비’가 나온다. 1914년에 세워진 서대문공립심상고등소학교가 1945년 서대문국민학교로 바뀌고, 1973년 폐교되었다고 한다.

 다시 거꾸로 돌아가 학교 본관으로 간다. 앞 정원에는 둥근 연못을 중심으로 대략 150센치미터 크기의 쌍둥이 석탑이 마주보고 있다. 또 어느 무덤에서 가져온 것인지는 몰라도 크기는 작으나 세련된 장명등(長明燈, 삿된 기운을 쫓기 위해 묘 앞에 세우는 등)도 있다. 대부분의 장명등이 화려하거나, 크기가 크거나 당당하다면, 이 장명등은 수줍은 소녀 같다. 부드러움으로 강한 사기(邪氣)를 꺾으려는 듯하다. 쌍둥이 석탑과 장명등은 모두 넘치지 않는다. 성장하는 여중생들에게 딱 맞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간의 힘, 부드러움의 힘을 깨닫게 해 주기에 충분하다.

 창덕여중 바로 옆은 이화백주년기념관과 이화박물관(심슨기념관), 이화여고 한 울타리에 연이어 있다. 코로나로 들어갈 수 없었으나, 정문 지하주차장 입구 왼쪽 아래에는 “손탁호텔 터. 한말에 러시아에서 온 손탁이 호텔을 건립, 내외국인의 사교장으로 쓰던 곳”이란 표석이 있다.

옛 러시아 공사관 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옛 러시아 공사관 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이화여고 맞은편에 있는 예원학교 옆 길로 가면 ‘구(舊)러시아 공사관’으로 갈 수 있다. 길가 기둥에 있는 안내판을 보면, 공사관 방향에는 뉴질랜드대사관, 노르웨이대사관, 네덜란드대사관도 있다. 언덕 위의 러시아공사관 쪽으로 가면 ‘정도근린공원‧배재어린이공원’이 마중 나온다. 공원 입구 쪽에는 ‘대한제국의 길 사진전 1897~1910 오얏꽃 핀 날들을 아시나요’란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한 것을 시작해 대한제국 선포 등등 정동과 관련한 내용을 옛 사진들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공원에는 여러 조각품이 있고, 중앙에는 세련된 서양식 흰색 팔각정이 있다. 공원 한켠에는 ‘한국가톨릭수도원 첫 자리’ 표석이 있다. 1888년 7월 서울에 온 세 명의 프랑스 수녀와 한 명의 중국인 수녀가 이곳에서 처음 수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정동길에 대한 소개는 2편에서 이어간다.

* 서울특별시의회 : 중구 덕수궁길 15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 중구 세종대로21길 15
* 서울도시건축전시관 : 중구 세종대로 119
* 광화문 오피시아 : 종로구 새문안로 92 (선공감 터)
* 흥국생명빌딩 : 종로구 새문안로 68
* 국토발전전시관 : 중구 정동길 18
* 한성교회 : 중구 정동길 8
*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 중구 정동길 9
* 창덕여자중학교 : 중구 정동길 22 
* 구(舊)러시아 공사관 : 중구 정동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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