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사생활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을 철회한 배경에 대해 “임기동안 직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이런 저런 타협과 굴복이 필요하다면 해야 할 것”이라며 “다만,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한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발언을 하면서 울먹이는 노 대통령의 모습이 TV를 통해 전국에 퍼져나가자,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했다.
특히 노 대통령은 “현재 대통령이 갖고 있는 정치적 자산은 당적과 대통령직 2가지뿐이다. 만일 당적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몰리면 임기 중에 당적을 포기하는 4번째 대통령이 될 것이고 이는 아주 불행한 일이다”라고 언급하자, 대부분의 국민들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처럼, 임기 말이면 언제나 각종 사건과 비리, 또는 게이트를 통해 비쳐지는 대통령의 우울한 모습이 국민들에게는 마치 증명사진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사건들 속에서의 대통령 모습은 언제나 공적(公的)인 모습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정치적, 사회적인 사건을 떠난 대통령 개개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대통령의 사생활이 지인들의 짧은 몇 마디로 채워지기에는 궁금한 것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노무현 숨은 특허 달인
노 대통령은 일각에서 발명 특허의 달인이라 불린다. 지난 74년 사법시험 준비 시절 높이와 경사를 마음대로 조절해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게 한 ‘개량 독서대’를 고안해 특허를 출원, 이듬해 특허등록을 받기도 했다.
의자 등받이를 높게 한 의자도 발명했다. 의자 윗부분을 옷걸이 모양으로 해 웃옷을 걸 수 있게 한 ‘옷걸이 의자’도 있었지만 빛을 보진 못했다.
94년에는 정치인을 위한 인명록 통합관리 프로그램인 ‘한라1.0’을 개발했고, 이를 몇 년 후 ‘노하우 2000’으로 업그레이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청와대 행정업무 처리 표준화시스템인 ‘e지원’에 대한 국유특허를 지난 2월13일에 내기도 했다.
정치적인 난맥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발명에 대한 열정을 보이는 노 대통령이 대단할 따름이다.

김대중 알려진 독서광
김대중 전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잦은 투옥과 연금으로 인해 별다른 취미나 사생활이 대외적으로 공개된 적은 없다.
단, 투옥생활 동안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게 특이한 점으로 남는다. 그는 투옥생활 중의 공부로 인해 결과적으로 일어와 영어를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은 아니지만 국제회의에서 영어와 일본어로 곧잘 연설을 하곤 했다. 지난 92년 대선을 앞두고 야당총재 자격으로 DJ는 뉴질랜드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때 필자는 취재차 동행한 적이 있는데, DJ는 각종 연설을 영어로 했다. 물론 ‘콩글리시’ 수준이었지만 열심히 원어로 연설했다.
연설 후 필자는 DJ에게 “영어솜씨가 대단하다. 해외 나가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연설을 하느냐”고 물었다.
이때 DJ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고, 배운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있어 그렇게 한 것 뿐이다”며 쑥스러워했다.
DJ는 투옥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경제논리를 책으로 발간해 현재도 일부 대학에서는 그의 경제저서를 교제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대외적인 활동을 통해서 대통령의 자질을 키우는 대신 그는 투옥생활을 통해 내공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김영삼 조깅과 서예 즐겨
김영삼 전대통령은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조깅 습관이 있었다. 때문에 정치부 기자들이 취재를 할라치면 같이 조깅을 하면서 인터뷰를 받아내곤 했다. 이런 습관 때문에 인연을 맺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문민정부 시절 부속실장을 지내던 장학로다.
중앙대학교 학생이었던 장씨는 학교가 YS 자택과 가까워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즉 장씨는 학교 근처에서 YS와 조깅을 함께 하면서 인연을 쌓아 결국 청와대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YS는 박정희 전대통령과 함께 서예 즉, 붓글씨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휘호를 쓴 박 전대통령과는 달리, YS는 주요 외국 사절이나 국가원수들이 방문했을 때 기념으로 글씨를 써주곤 했다.

노태우 늦게 배운 골프광
노태우 전대통령은 골프를 좋아했다. 노 전대통령은 전두환 정권시절, 초대 체육부 장관에 임명된 이후 골프에 공을 들였다. 아침마다 집근처 골프연습장에 들러 대략 200타를 치고 출근하는 습관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이후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수시로 골프장을 찾았는데, 이때 언론을 피하기 위해 토요일 오후 헬기를 타고 남성대로 향했다고 한다. 그의 골프 습관은 단타 위주라고 한다. 평소 노 대통령의 이미지와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장타가 아닌 단타 위주로 치는 바람에 성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치는 것만 즐긴 셈이다. 금진호, 박철언 전의원이 주된 골프 친구였다고 한다.

전두환 빅게임 권투 즐겨
전 전대통령은 평소 권투를 좋아했다. 박 전대통령 시절 함께 권투 중계를 보면서 직접 중계까지 할 정도로 권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 시절에는 해외에서 열리던 타이틀매치 경기를 보다가 우리 선수의 움직임이 둔하다 싶으면 바로 국제전화를 걸어 감독을 야단치고 훈수를 두기도 했을 정도다.
국내에서 경기가 열릴 때면, ‘빅게임’이라 판단되면 만사를 제쳐두고 경호원을 데리고 경기장으로 달려가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때문에 주요경기 때에는 경기 관계자들이 언제 대통령이 올지 몰라 항상 귀빈석을 비워두고 깨끗하게 청소해 두었다고 한다. 보는 것과 함께 전두환은 직접 권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단장 시절 부하 장병들과 함께 난투극에 가까운 권투를 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박정희 서예에 남다른 재주
박정희 전대통령은 메모하는 습관이 남달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같은 메모는 군사쿠데타 이후 정책의 아이디어가 되기도 했다.
그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는 순간까지도 메모를 남겼다.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경북 구미 금오산 상공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영남에 솟은 영봉 금오산아 잘 있거라, 삼차 걸쳐 성공 못한 흥국일념, 박정희는 일편단심 굳은 결의 소원성취 못하면, 쾌도할복 맹세하고 일거귀향 못하리라.’
박 전대통령은 서예에도 남다른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의 서예 스승은 고(故) 김용하씨로 대우그룹을 창업한 김우중 회장의 부친이다. 이 같은 인연으로 그는 김우중 회장과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박 전대통령이 전문적인 서예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붓끝에 힘이 나고 독창적인 필체를 지녔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그가 집권한 18년 동안 남긴 친필은 모두 1,200여점으로 이는 매년 86점 이상, 매주 1점 이상씩의 친필 글씨를 쓴 셈이 된다.
이 같은 친필 글씨로 인해 박 전대통령이 방문하는 곳마다 서로 글씨 한 점을 부탁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박 전대통령은 이를 모두 거부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 전대통령이 남긴 글씨는 광화문현판(1968년), 진해공설운동장(1965년), 언양~울산고속도로(1969년) 등 다수다.

이승만 폭주의 카레이서
이승만 대통령은 한때 폭주를 즐겼던 카레이서였다. 미국 망명 시절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 결혼에 골인한 ‘이승만’은 곧잘 이런 폭주로 인해 아내를 공포로 몰아넣기 일쑤였다고 한다.
34년 어느 날 워싱턴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기로 되어 있었던 ‘이승만’은 뉴욕에서 볼일을 보다가 뒤늦게 워싱턴으로 향했다. 시간이 촉박한 나머지 ‘이승만’은 아내 프란체스카를 옆 좌석에 태운 채 태연한 얼굴로 130km의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경찰의 단속에 걸리고 말았다.
아내는 차를 세울 것을 요구했으나 ‘이승만’은 “돈 워리”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결국 경찰을 따돌리는데 성공하고 워싱턴 프레스클럽에 도착해 연설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경찰은 그가 연설을 마칠 동안 연설장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경찰과 눈이 마주친 이승만은 긴장했다. 그러나 의외로 경찰은 그에게서 승리의 ‘V’자를 보이며 악수를 하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이승만’의 연설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승만’의 폭주생활은 그가 귀국할 때까지도 이어졌다고 한다.
그 당시 미국사회에서는 속력을 내는 것 자체가 죄가 될 정도로 차량을 과속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는데 ‘이승만’은 외국인 신분으로서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드라이브 생활을 만끽한 것이다.
<언론인 김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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