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탈당’


최근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대결구도 전개과정이 정치권의 큰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당 잔류파인 친노 직계의원들과 신당 창당파 의원들 사이의 대결구도는 자칫 100년 정당을 꿈꾸며 출발한 열린우리당의 좌초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류 때문인지 노 대통령이 ‘탈당’ 내지는 ‘하야’할지도 모른다는 예측들이 나돌고 있어, 여당의 분란은 동절기 여의도 정가를 꽁꽁 얼어붙게 하고 있다.
‘하야’가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다고 본다면 노 대통령은 ‘탈당’이라는 한 가지 수만 남겨 놓은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도 대선을 코앞에 두고 탈당한 전례가 많다. 그러나 탈당의 명분은 모두 달랐다. 노 대통령과 같이 수세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의 탈당도 있었고, 당과 대선 후보를 위한 배려 차원에서 당을 떠난 경우도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92년 12월 대선을 불과 3개월 여 앞둔 9월18일에 전격적으로 민자당을 탈당했다.
노 대통령의 탈당은 전적으로 YS에 대한 서운함의 표시가 강했다. 이유는 YS가 사사건건 노 정부를 압박했기 때문이다.
당시 YS는 노 대통령과 사돈을 맺은 SK가 ‘이동통신 사업권’을 획득한 것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한준수 연기군수가 ‘관권선거의혹’을 폭로하자 이에 대한 진상조사를 노 대통령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YS, 노태우 사사건건 압박
때문에 당시 정가에서는 YS가 노 대통령을 계속해서 압박할 경우 ‘탈당’이라는 카드를 빼 들 수도 있다는 말들이 돌았다.
당시 필자는 YS와 사석에서 만나, “노 대통령을 계속 압박할 경우 탈당할 가능성이 있다. 노 대통령이 탈당하게 되면 대선전이 YS에게 불리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YS는 “그렇게 되더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설사 그게 문제가 돼서 대선에 영향을 끼친다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후 YS는 한술 더 떠 선거중립을 위한 중립내각 구성을 요구했다.
이에 화가 난 노 대통령은 YS에 대한 어떠한 배려도 하지 않은 채 ‘탈당’을 했다. 대통령이 여당후보의 불충(?)한 행위에 화가 나 그렇게 한 것으로 보면 큰 무리가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탈당카드라는 직격탄에도 불구하고 YS는 대통령선거에서 승리,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 대통령의 지원이 없었음에도 YS가 당선된 이유는 바로 ‘김영삼’이라는 개인적 인기가 튼튼한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결국 노 대통령의 탈당은 YS의 대선 승리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이와는 반대로 여당의 대통령후보가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한 사례도 있다.

YS도 이회창 요구로 탈당
노태우 대통령의 뒤를 이어 바통을 이어받은 김영삼 대통령도 대선을 불과 한 달 앞둔 97년 11월7일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YS가 탈당한 것은 당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의 끈질긴 요구 때문이다.
당시 이 후보의 ‘두 아들 병역비리 의혹’ 등으로 인해 지지도가 하락하자 이 후보는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의 비자금 의혹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를 검찰이 수사할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YS는 ‘공정 대선관리’라는 명목을 들어 ‘수사 불가’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격분한 이 후보는 YS의 탈당을 요구하는 한편, 부산지역 정당대회에서 ‘YS 인형’을 만들어 화형식에 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YS는 ‘DJ 비자금’ 수사를 하지 않고, 탈당으로 맞섰다.
이와 관련한 잘 알려지지 않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DJ 비자금 수사 문제를 놓고 검찰에선 고검장 회의를 했다고 한다. 이때 당시 광주 고검장이던 김태정씨가 “DJ 비자금을 수사할 경우, 대선 자체가 치러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수사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강력히 건의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김태정씨는 DJ 정부에서 검찰총장까지 역임했다. 옷 로비 사건 등으로 ‘김태정’이 위기에 몰려도 DJ는 그를 끝까지 신임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가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으로 인해 ‘김태정’은 어쩔 수 없이 검찰총장직에서 내려와야 했다.

DJ도 대선 앞서 탈당
아무튼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후보는 YS의 탈당으로 인해 대선에서 패배했다. 노 대통령의 전격적인 탈당이라는 악재 속에서도 대권을 거머쥔 YS와는 반대로 낙선의 고배를 마신 것이다. 이 후보 측에서는 YS의 탈당을 통해 반전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지지세력 결집을 도모할 계획이었지만, ‘DJ 대세론’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부산·경남에서의 ‘표심’이 대거 이인제 후보에게 몰린 것을 감안할 때 이 후보의 낙선은 YS 탈당이 큰 역할을 했다. 결국 이 후보는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꼴’이 됐다.
김대중 대통령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그러나 노태우나 YS와 같이 대선을 코앞에 두고 전격적으로 탈당해 당에 물의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DJ의 탈당은 당의 대선 후보를 배려하는 차원에서였다고 보면 타당하다. 때문에 당 인사들로부터 고마움의 인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 캠프에서 당시 작성된 보고서에는 이런 얘기들이 쓰여져 있다.
‘노무현 후보의 대선승리를 위해서는 국정전념이라는 명분하에 DJ의 탈당이 최우선돼야 하고….’
DJ는 대선을 7개월이나 앞둔 2002년 5월6일 탈당을 선언했다.

노태우 대선행보 방해 목적
탈당의 배경에는 세 아들의 비리의혹사건으로 인한 도덕성 문제가 발단이 됐다. 이로 인해 이미 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노무현 후보에게 짐이 되는 것을 우려해 일찌감치 당적을 정리한 것이다.
노태우나 YS의 탈당 이유와는 차원이 다른 선택이었던 것이다. 대통령 세 아들의 비리의혹으로 궁지에 몰렸던 민주당은 DJ의 탈당으로 인해 검찰의 수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며 대선 행보에도 더욱 탄력을 받아 대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DJ의 탈당은 오히려 당과 대통령 후보에게 부담을 줄여주고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계기가 돼 결국 정권 재창출에 성공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됐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통령의 탈당이 대선결과에 미치는 영향은 각기 다르게 나타났다. 노태우 대통령은 YS의 대선행보를 방해할 목적으로 탈당했다면, YS의 탈당은 이회창 후보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반면 DJ의 경우는 여당의 후보를 돕기 위해 탈당카드를 사용했다.
결과도 각기 다르게 나타났다. 노태우의 탈당은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지만, YS와 DJ의 탈당은 대선전에 큰 영향을 줬다.

노무현 탈당 미지수
현재 청와대와 여당의 갈등은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 때와의 상황을 합쳐놓은 것과 비슷하다.
특히 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모두 탈당한 점을 고려한다면, 노 대통령도 그리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여당의 확실한 대권 후보가 있었다는 점이 현재와는 분명하게 다르다.
때문에 여권에 확실한 대권 후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노무현 대통령이 탈당카드를 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현재 노 대통령이 탈당카드를 쓸 경우 오히려 당내 계파 싸움만 가중돼 결국 당이 사분오열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깨질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퇴임 후에도 정치에 손을 댈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 점이 지난 정권의 대통령과는 다른 모습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탈당카드 대신 이 참에 적과 동지를 과감하게 분류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정치생명을 길게 이어갈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 여권의 정권 재창출이 지상과제가 아닐 수도 있다.
과연 노무현 대통령이 유력 대선 후보 하나 없는 열린우리당에서 생존하고 직계조직을 끝까지 거느리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지가 올 겨울 정가의 최대 화두로 떠오를 전망이다.
<언론인 김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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