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준과 헤어진 수원은 천천히 걸어 사무실로 돌아오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김형욱과 박정희, 그리고 아버지 한용국. CIA와 KGB, 대한항공 902편. 아나톨리와 원자력 발전소, 그리고 대한민국. 

수원은 마치 퍼즐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단어가 아버지의 죽음을 푸는 열쇠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수원은 벌떡 일어나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메모지를 꺼내 글씨를 썼다.
A. N. A. T. O. L. Y

수원은 알파벳 일곱 글자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수원은 오후에 정기 확대간부회의에 참석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 임영규 행정실장이 중요한 보고를 했다.

“이미 본부장님께는 보고하였습니다만 여러분이 다 아셔야 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어제 19시 20분께 우리 회사 홈페이지에 이상한 글이 떴습니다. 원전 2호기에 액체 폭탄을 집어넣어 폭파시킬 것이라는 협박문이었습니다. 올린 사람의 아이디는 ‘친구’입니다.”

지난번 일어났던 폭파 사건을 경고했던 자도 ‘친구’라는 아이디를 썼었다. 
“장난으로만 볼 수가 없어 즉각 당국에 보고했습니다. 공표되지는 않았습니다만 비상 체제에 들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여러분도 각별히 조심하고 협조를 당부합니다.”

임영규 실장의 보고가 끝나자 이종문 본부장이 회의 시작을 알렸다. 
“현재 건설 중인 신 고리 발전소의 취수구는 친환경 설계라는 장점이 있지만 종전 취수구와 달리 취약점이 좀 있습니다. 해수면보다 70 내지 100미터 깊이의 해저에서 물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바다 밑으로 길게 취수관이 나가 있습니다. 배수관도 마찬가지로 70내지 100미터 깊이에서 물을 내보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해수 온도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아 친환경적입니다만, 외부 공격에 노출되기가 쉽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수원이 보고를 했다. 
“배수구는 원자로를 돌고 나온 더운 물이니까 그 정도로 길게 설치할 수 있겠지만, 취수구는 그렇게 깊이 들어갈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취수 케이블은 종전 방식으로 하면 어떨까요?”
수원이 보고 뒤에 의견을 내놓았다.

“그것은 본사에서 코펙이나 시공 회사들과 함께 재검토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종문 본부장이 결론을 내렸다.
수원은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김승식 부장에게 물어 보았다.
“그 ‘친구’라는 자가 경고한 액체 폭탄이라는 것이 존재하나요?”

“액체 폭탄이야 많은데 어찌 되었든 용기에 담아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번 경고문의 내용을 보면 용기에 담아서 터뜨린다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에 섞어서 취수구를 통해 내부에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스톱 로그나 스크린 바 같은 것도 아무 소용이 없네요. 그런데 그게 실현 가능한 얘기인가요?”
수원이 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글쎄요, 허황된 얘기라면 그렇게 게시판에다 올리기까지 했을까요?”
“설사 폭약이 흘러들어왔다 하더라도 뇌관이 없는데 어떻게 점화를 시키죠?”
“온도 차로 가능하지 않을까요? 냉각수가 섭씨 2백 도가 넘는 증기 송수관을 냉각시키는 동안 냉각수 자체의 온도가 상당히 높아집니다. 만약 섭씨 백 도 이하에서는 액체 상태로 있다가 백 도가 넘으면 폭발하는 액체 폭탄이 있다면 가능한 얘기죠.”

김승식 부장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설명했다. 
“하지만 냉각수 송수 케이블이 폭발한다고 해도 원자로와는 직접 연결되어 있지도 않잖아요. 원자로와 거리도 꽤 있어서 방사능 누출 같은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을 거예요.”
수원이 자신 있게 말했다. 

사실 바다로부터 직접 끌어들인 냉각용 해수는 터빈을 돌리기 위해 돌고 있는 증기 케이블의 겉면을 식힐 뿐이었다. 증기 케이블은 원자로 안의 고열 경수가 돌고 있는 보일러에 의해 데워지기 때문에 케이블과 케이블을 통해 열전달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방사능 유출이 목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신 고리 원자로는 해수면 70미터 지점에서 물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상천외한 일을 저지르는 것이 테러 기술자들이니까, 모든 경우에 대비해 방어 체제를 갖추어 놓아야 할 겁니다.”

김승식 부장이 입을 꾹 다물며 굳은 의지를 내보였다.
사무실에 돌아오자 뜻밖의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수원 박사님이시죠?”
얼굴이 갸름하고 콧날이 날카로운 젊은 남자였다. 
“그런데요.”

“저는 합동수사본부 수사관입니다. 해운대 경찰서 문동언 경위의 소개로 왔습니다. 몇 가지 도움 말씀을 받고 싶습니다.”
남자가 또박또박한 말씨로 공손하게 말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경찰청 사이버 수사대의 수사관 허견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는 대로 말씀드릴게요.”

수원이 허견 수사관에게 앉으라고 의자를 권했다.
“아나톨리라는 사이트에 대해 잘 알고 계시지요?”
허견이 질문했다.
“아나톨리 사이트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요, 판도라라는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 명칭 가운데 하나예요.” 

허견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을 꺼내 메모하기 시작했다.
“판도라 사이트의 인터넷 주소가 어떻게 됩니까?”
“www.pandora.co.nz이에요. 회원만 접속할 수 있어요.”
“회원 가입 절차가 까다롭습니까?”

“예. 관리자가 뉴질랜드에 있는데 초기 발기인들 외에는 추가 회원을 거의 받지 않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럼 한 차장님 아이디를 공유할 수 있겠습니까? 수사하는 동안만요.”
“네. 그러시죠.”

“혹시 그 사이트 게시판에 한국 원자력발전에 대한 이야기도 올라오던가요?”
수원은 한참 생각해 본 뒤 입을 열었다.
“아니요.”
“아나톨리 조직에 관해서는요?”

“아나톨리 조직이요? 글쎄요. 아나톨리 게시판은 1978년 대한항공 여객기 강제 착륙 사건에 대한 정보를 올리는 방이에요. 따라서 주로 당시 사건과 관계된 이야기만 올라오고 있어요.”
수원은 아는 대로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한 박사님은 아나톨리 조직에 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까?”
“네. 없어요.” 

잠시 생각하던 수원이 덧붙였다. 
“아나톨리 비행 학교에 대한 이야기는 본 적 있어요.”
수원은 비행기 조종사 아나톨리가 나중에 비행학교의 교관이 되어 비행 기술을 전수하고 수많은 아나톨리 2세를 길러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가운데 비행기 납치, 항공테러 같은 짓을 저지르는 단체에 가입한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하더라는 말도 전해 주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아나톨리 조직에 관해서도 아는 게 없으시겠군요?”
“경찰에서 들은 얘기밖에는 아는 것이 없어요. 문동언 경위가 자세히 알고 계실 거예요.”

“아나톨리가 세계적 연계를 가진 테러 조직이라면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있다고 보십니까? 한국수력원자력에도 침투했다고 보십니까?”
“글쎄요. 있다고 해도 흉내를 낸 모방 조직인지, 아님 실제 조직일지⋯”
“아나톨리 조직이 있다면 원조는 어디라고 보십니까?”

허견 수사관의 말에 수원은 메모지를 꺼내 놓고 ANATOLY라는 단어를 크게 썼다.
“이 알파벳 일곱 자를 보세요.”
수원은 허견 수사관이 보기 쉽도록 메모지를 돌려놓았다. 허견 수사관은 메모지의 글씨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동양에서 흔히 사용하는 파자(破字), 즉 글자를 분해해서 다른 의미를 찾는 방법을 잠깐 응용해 볼게요. 예를 들면 한자의 앉을 좌(坐)를 파자하면 人, 人과 흙토(土)로 분해가 되지요. 그러니까 흙 위에 두 사람이 앉아 있다는 뜻이 됩니다.”

“아니, 그런 것도 다 아십니까?”
허견이 신기한 듯 물어보았다.
“퍼즐 푸는 게 제 취미라 파자에도 관심을 가져 보았지요.”
수원이 생긋 웃고 설명을 계속했다.
“여기서 앞의 A자와 뒤의 LY 두 자를 떼 내 볼게요.”
그러자 NATO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NATO가 되는군요. 북대서양조약기구.”
허견이 감탄했다. 

“ANATOLY에서 떼 낸 A. L. Y 세 글자를 재배열해 볼게요. LAY가 되지요?”
“그렇군요.”
“두 단어를 다시 조합해 보면 ‘LAY NATO’라고 할 수 있지요. LAY는 영어로 여러 가지 뜻이 있어요. 놓다, 두다, 눕히다, 낳다, 쓰러뜨리다, 겨누다, 조준하다, 심지어 죽이다는 뜻으로도 활용돼요.”

“으흠, 그러니까 NATO를 조준하라, 쓰러뜨리라는 뜻이란 말씀이군요.”
허견 수사관이 빨리 이해를 했다.
“그렇다면 결국 반전 운동 단체?”
“파자를 통한 저의 추리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회사 게시판에 협박문을 올린 사람의 IP는 추적해 보셨나요?”
“아직은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이라는 주소밖에 찾지 못했습니다. 곧 더 자세한 사항을 알아낼 것입니다.”

“거기에 뭐가 있나요?”
“KT 통신사 주소입니다. KT의 서버는 그곳을 거치니까요. 하나로나 파워콤은 다르지요.”

“ISP로군요. 보통 유저들의 악플이나 게시판 글을 추적하려면 트레이스로우트나 후이스를 이용하는데 잘 되지 않더라고요.”
“많이 해 보셨군요. 거기까지 추적하더라도 고정 IP가 아니고 유동 IP라면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수사를 할 때는 ISP 서버를 수색할 수 있는 압수 영장을 가지고 가니 찾는 게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트릭을 썼다면 위치나 컴퓨터를 찾는 게 좀 까다로울 수 있습니다.”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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