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청사 [뉴시스]
UN청사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UN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

“운도 따랐지만 그것만 믿고 있지 않았다”

- 장관으로 부임하시고 나서 저희가 UN 안전보장이사회에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꾀하게 되는데, 그런 외교를 시도하게 되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가. 
▲ 1993년 5월4일에 우리가 아주(亞洲)그룹 회의에서 한국의 입후보를 천명한다. 그런 방침을 결정하고, 그 토대 위에 우리는 9월2일 대통령 재가를 얻었다. 그래서 9월29일 UN 기조연설에서 한승주 당시 장관이 우리나라의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출마를 선언한다. 그리고 한승주 장관이 UN 가기 전 9월22일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의 입후보 의사를 국내적으로 밝힌다. 비상임이사국 자리는 10개인데, 우리 아주 지역에서는 결과적으로는 그중 하나가 오는 거다. 아프리카와 아주그룹 전체 안에서 5자리가 있다. 아주그룹에는 그 당시 49개 나라가 있었다. 그리고 서유럽이 2자리를 가지고 있고,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합쳐서 2자리, 동구권이 1자리. 이렇게 해서 10자리인데, 아주그룹에 돌아오는 자리는 하나 밖에 없는 거다.

아주 지역 가운데 중국은 상임이사국이 됐으니까 안 하지만, 일본·인도·인도네시아 등 외교력이 강한 나라들이 있기 때문에 사실 실질적으로는 50년에 1번이라는 찬스도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이때 우리가 운이 좋았던 것은 1995년 시점에서 출마하는 나라 가운데 강적이었던 인도네시아·일본이 출마를 하지 않은 거다. 한 텀이 지나고 나야 출마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스리랑카인데, 라닐 위크레미싱게 스리랑카 총리가 1994년 5월에 당시 이영덕 총리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오게 된다. 경제협력이나 통상 증진 방안 등을 이야기하고, 스리랑카와 과학기술협정에 서명하기 위해서였다. 

위크레미싱게 총리는 전 정부 총리다. 스리랑카 출마를 결정한 그 정부인데, 1994년 8월에 스리랑카에서 총선거가 있었고, 스리랑카 야당인 자유당이 승리한다. 찬드리카 쿠마라퉁가가 대통령이 되는데, 시리마보 반다라이나이케 수상의 딸이다. 쿠마라퉁가가 수상이 되고, 또 그해 11월에 대통령에 출마해서 대통령이 됐다. 그래서 그 수상 자리는 자기 어머니인 반다라나이케에게 돌아간 거다. 콜롬보의 명가 중 명가니까. 이렇게 정권이 교체되면서 쿠마라퉁가 정부가 내정에 치중을 하게 됐다. 그래서 외정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는 자세를 취했다. 경제건설, 또 경제협력을 추구하는 쪽으로 정책이 전환되기 때문에 우리가 그 틈새를 타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시다시피 스리랑카는 비동맹의 창설멤버다. UN에서 50여 개국이 있는 이 비동맹그룹의 막대한 세력이고, 또한 영연방회원국이다. 영연방이 자기 회원국에 대해서는 항상 동정적으로 표를 던질 수가 있다. 스리랑카는 약소국가 중의 하나 아니냐? 그래서 강대국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 약소국가 간에 지지하는 상황이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는 들지 못했다. 그래서 스리랑카는 조그만 국가지만, 우리로서는 외교적으로 결코 경시할 수 없는 그룹에 속했다. 그래서 아주 지역 49개 나라 중에 비상임이사국을 해온 빈도수를 보면 일본이 2년 임기로 7번 했다. 인도는 6번을 했다. 인도 다음에 또 어디가 강하겠나?

- 인도네시아인가.
▲ 파키스탄이다. 5번이나 했다. 따라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문이 좁지만 다행이었던 게 국내정치적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새로운 정부가 UN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출마에 대해서는 별로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안보리 이사국에 입후보하고 나면 총회에서 3분의 2의 찬성표를 얻어야 하는 과제가 생긴다.

- 상당히 크다.
▲ 그렇다. 그래서 그 관문을 넘지 못한 나라들이 있다. 쿠바와 콜롬비아가 1979년에 같은 라틴그룹 안에서 경합을 했다. 총회에서 무려 154회나 투표를 했다. 그런데도 3분의 2 관문을 못 넘었다. 그래서 이듬해에 멕시코가 출마해서 된 사례가 있었다. 그 약소국들이 뭉쳐 발휘한 힘 속에서 고배를 마신 게 일본이다. 일본이 1978년에 안보리에 출마했다가 방글라데시에게 졌다. 방글라데시가 비동맹그룹을 등에 업고 있으니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 우리 환경에 아주 천운이 따랐다.
▲ 스리랑카 국내 정치의 변화 다음에 둘째는 인도네시아가 1994년에 출마를 했기 때문에 1995년에는 출마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1996년 선거에는 인도와 일본이 출마하게 됐다. 그래서 그 틈새, 시운이 우리를 도와주었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시운만 믿고 있던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가 1994년 총회에서 UN 안보리 이사국 출마를 선언했는데, 이는 시급한 우리의 긴요 과제다. 그래서 점검을 해봤더니, 러시아·폴란드·나이지리아·케냐 등 60여 개국이 지지를 표시했고, 독일·폴란드 등 50여 개국이 호의적으로 검토한다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약 110개국이 우리를 지지하거나 호의를 보이는 국가로 판명이 됐다. 

그래서 충분히 싸움을 할 수 있는데, 우선 아주그룹 내에서 추천을 받아야 하는 거다. 스리랑카하고는 아직 경합하는 상태였다. 그래서 우선 이시영 차관과 이상옥 전 장관, 노영찬 대사를 1~2월 중에 특사로 파견했다. 노영찬 대사는 프랑스어를 하니까 아프리카로, 이시영 차관과 이상옥 전 장관은 다른 지역으로 순회했다. 그리고 2월7일에 미국에는 제가 갔다. 뉴욕에 가서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과 조찬을 했다. 부르토스 갈리 총장은 제가 카이로에 총영사로 있을 때 외무담당 국무상이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그 외에 일본에 오와다 히사시 대사,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UN대표대사 등 40여 개국 대사들과 만났다. 

스리랑카 외상과도 UN 본부에서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스리랑카가 경제협력에 대해서 상당히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즉각 정부와 협의해서 스리랑카에 우리 경제협력사절단을 보내기로 했다. 그래서 상공부차관이 단장으로 스리랑카에 가게 됐다. 그렇게 측면 로비도 하고 직접 스리랑카에 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스리랑카에 대해서 ODA(공적개발원조) 자금으로 한 25년에 걸쳐서 상환하는 조건으로 2억 달러 규모의 사회기반시설 건설을 위한 자금을 협력하기로 했다. 또 스리랑카 북부지역 복구 작업을 위해서 우리가 500만 달러 상당의 무상지원을 ODA 가운데 EDCF(대외경제렵협력기금)에서 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스리랑카 정부가 4월19일에 방문하고 있던 우리 경제협력사절단에 UN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출마를 철회한다고 이야기하고, 동시에 UN 본부에서 스리랑카대사가 49개국 아주그룹 내에서 정식으로 철회를 성명하게 됐다. 

- 그렇게 우리가 유일 대표가 된 것인가. 
▲ 그렇다. 그렇게 11월8일 UN 총회 기간 중에 177개국이 유효 투표를 했다. UN에 180여 개국이 있지만 회비를 내지 못해서 투표권이 없는 나라들이 있다. 그중에 3분의 2 이상이 118표인데, 우리가 156표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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