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제일교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정동제일교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정동길을 이어 걷는다. 사람들은 「광화문연가」나, 덕수궁, 근현대사 역사 현장, 서양인의 공간, 기독교의 공간으로 알고 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620여 년 전으로 돌아가면 전혀 다른 공간이다. 조선 창업가 태조(太祖) 이성계(1335~1408, 재위 1392~1398)와 그의 계비(繼妃, 둘째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1356~1396)의 성공과 좌절, 수백 년 된 피눈물과 한(恨)이 서려 있는 곳이다. 또 다른 창업(대한제국)과 멸망도 그 좁은 공간에 있다.

 1397년에 만들어진 도성(都城) 안 서쪽에 있던 계비 강 씨의 능 호칭 ‘정릉(貞陵, 정숙한 여인의 무덤)’에서 정동(貞洞)이란 명칭이 유래했다. 성북구 정릉동도 같은 어원이다. 태조가 사망하고 반 년 뒤인 1409년, 태종은 정동에 있던 정릉을 당시 성(城) 밖인 양주 사을한(沙乙閑)으로 옮기게 했다. 사을한이 오늘날 정릉동이다.

정동로터리 이영훈 작곡가 추모 노래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정동로터리 이영훈 작곡가 추모 노래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태조의 한(恨)과 신덕왕후의 원한(怨恨)이 서린 곳

 강씨 자녀는 왕자 방번·방석(세자)과 경순공주이다. 태조 첫째 부인은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1337~1391)이고, 6남 2녀를 두었다. 조선 2대 왕인 정종과 3대 왕인 태종(방원) 등이 아들이다. 한씨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망했고, 계비 강씨가 사망한 직후 왕후로 추존되었기에 첫째 부인임에도 후궁처럼 존재했다. 강씨와 태조가 사망하고 한씨의 아들 정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야 비로소 왕후로 추존되었다.

 강씨는 태조가 사랑했던 여인이었고, 조선을 창업한 정치적 동지였다. 야망이 있던 그녀는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과 협력해 자신의 막내아들 방석을 태조의 뒤를 잇는 세자로 책봉케 했다. 그로 인해 또 다른 조선의 창업자였던 한씨 소생 방원과 극심한 갈등을 일으켰다. 그녀가 죽은 2년 뒤(1398년) 그녀의 아들들인 세자 방석과 방번, 협력자 정도전과 남은은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살해되었다.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김정동, 발언, 2004년)에 따르면, 정동은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세워지기 전에 고려 장군 이성계와 강씨가 처음 만난 우물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이성계와 강씨의 사랑이 싹 튼 곳, 태조는 성(城) 안에 무덤을 쓸 수 없음에도 강씨의 무덤을 조성했다. 그런 까닭인지 『실록』에 따르면, 태조는 경복궁에서 가까웠던 정릉에 11차례나 다녀왔다. 그녀의 영혼과 능 관리를 위해 정릉 곁에 흥천사(興天寺)를 건립하기도 했다. 흥천사는 김정동에 따르면 현재의 덕수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조선일보사에서 서울시의회 별관까지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정릉이 옮겨진 뒤에도 절은 남아 있었으나 연산군 때 폐해졌다. 중종 때는 그나마 남았던 사리각(舍利閣, 부처의 사리를 모셔둔 전각이 인근에 있던 서학(西學) 학생에 의해 불태워졌다. 흥천사 종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현재는 덕수궁에 남아 있다.

 태조가 사망하자 태조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던 태종은 정릉을 성 밖으로 이장할 것을 논의케 했다. 강력한 태종의 뜻을 안 의정부(議政府)에서는 “옛 제왕(帝王)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장을 건의했다. 형식은 신하들의 이장 권유이나 실질은 강씨를 미웠던 태종의 의도였다. 『실록』을 보면, 태종은 왕이 된 초기부터 정릉을 내몰 생각이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의정부에서 정릉 묘역이 넓다며 능에서 1백 보 밖에는 사람들이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요청하자 태종은 즉각 받아들였다. 세력가들은 앞다투어 정릉의 좋은 땅을 점령했다. 태종의 최측근이며, 반(反)강씨‧정도전의 핵심인사 좌의정 하륜(河崙, 1347~1416)은 사위 여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정릉 땅을 선점할 정도였다.

 그 직후 허울만 남아 태상왕(太上王, 이성계)으로 있던 태조는 정릉 수호 사찰인 흥천사와 정릉을 돌아보며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사랑했던 여인의 묘자리가 형제를 죽인 아들과 그의 신하들에 의해 훼손되어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 태종은 태조가 사망하자 강씨의 묘까지 멀리 내쳤다.

 그때 정동 정릉의 석물은 땅속에 묻히거나 버려졌다. 일부는 1410년 청계천 광교(廣橋)의 기초가 되었다. 또 일부는 현재 미국대사관 관저에 있고, 또 일부는 영국대사관과 일본으로 유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강씨가 묻힌 정릉의 본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순우의 『근대서울의 역사문화공간:정동과 각국공사관』(하늘재, 2012년)와 김정동에 따르면 현재의 영국대사관, 옛 러시아공사관, 미국대사관저, 조선일보사 신관 일대, 서울시의회, 옛 경기여고 터, 덕수초등학교 등이 꼽히고 있다. 다수설은 영국대사관 자리이나, 김정동은 미국대사관저 안이라고 주장한다.

동서 분당의 명칭이 된 곳, 임진왜란의 비극과 정치 보복

 정동은 조선 시대 당쟁의 출발점인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의 기원이기도 하다. 도성 서쪽인 서대문에 가까워 서부지역 정동에 살던 심의겸(1535~1587)으로 인해 서인, 서울 동쪽 이순신이 태어난 동네인 건천동(현 충무로)에 살던 그의 정적(政敵) 김효원(1542~1590)으로 인해 동인이란 명칭이 생겼다. 당쟁은 조선 500년 역사 중 중후기 300년을 성리학 이데올로기를 빙자한 핏빛 권력투쟁으로 물들였고, 우물 안 개구리 ‘소중화(小中華) 조선’으로 변질시켰다. 끝내는 국가의 멸망을 가져왔다.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는 불 탄 경복궁 등의 옛 궁궐들로 머물 곳이 없었다. 오다 쇼고(小田省吾)의 「경성에 있어서 문록역(임진왜란) 일본군 제장 진지의 고증(京城に於ける文祿役日本軍諸將陣地の考證)」(『朝鮮古蹟及遺物』, 현대사, 1982년)에 따르면, 선조가 머문 정동 ‘행궁(行宮, 현재 덕수궁)’은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부하장수(花房志摩介, 富川紀伊守, 宇喜多左京亮 등)와 그들의 군대가 점령해 머물렀던 곳이다. 행궁은 본래 월산대군(제9대 성종의 형)의 옛집이었다. 심의겸의 집은 동궁(東宮, 광해군 거처)이 되었다. 선조는 1608년 행궁에서 서거했고, 광해군은 다음 날 그곳에서 즉위했다. 광해군이 창덕궁을 새로 지어 옮겨간 뒤에는 ‘경운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뒤 한동안은 서궁(西宮, 도성 서쪽의 궁)으로 불렸다. 광해군에 의해 폐비가 된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1584~1632)가 유폐되어 생활한 곳이기도 하다.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도 광해군처럼 이 서궁에서 즉위했다.

고종의 길(아관파천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고종의 길(아관파천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광해군이 창덕궁을 재건한 뒤 경운궁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즉위하면서 현재의 덕수궁이 되었다.

 현재의 미국대사관저 뒷길은 덕수궁, 영국대사관, 옛 러시아공사관으로 연결이 되는 비밀스러운 길이다. 고종이 일제의 핍박을 피해 경복궁을 몰래 나와 미국대사관으로 피신하려던 ‘미관파천(美館播遷)’을 시도하다 실패(춘생문 사건)한 뒤,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에 성공했던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2.11.~1897.2.20.)길’이다.

 ‘구(舊)러시아 공사관’ 옆쪽에는 ‘아관파천 길’이 ‘고종의 길’이란 이름으로 약 120미터 정도 복원되어 있다. 우측 담 너머는 미국대사관저이다. 가다 보면 길 중간에 벽이 있다, 대사관저 쪽 길은 관저로 인해 막혀 있고, 그 옆길은 구세군 제일교회와 덕수궁 돌담길로 이어진다.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좁은 길을 걸으면 숨죽여 몰래 피신하던 고종의 비애가 절로 느껴진다. 월요일에는 개방하지 않는다. 또 11월~1월은 17시에 입장을 마감하고, 그 외 시기는 17시 30분에 마감한다. 고종은 그 이후 정동을 떠나지 않고 경운궁(덕수궁)에서 대한제국 황제가 되어 머물다 사망했다.

 정동은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 중의 일본군 장수의 거처, 선조와 광해군의 임시 거처, 유폐된 왕후의 거처였고, 조선 말기에는 일제의 위협으로부터 서양제국의 보호를 받기 위해 선택한 고종의 거처였다.

 태조와 강씨의 성공의 결과물인 서울. 아들 이방원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아버지 이성계, 여러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해야 했던 이성계의 한(恨), 죽음 이후이나 두 아들이 죽임당했고, 묘까지 쫓겨났던 강씨의 원한(怨恨)이 맺힌 곳. 동서 당쟁과 피를 부르는 정치 보복이 있었던 곳. 일본군의 점령지였던 곳. 그곳이 조선 역사 속 정동이다.

 강씨의 원한 때문일까. 500년 뒤 조선은 왕비가 살해당했고, 조선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되었으나 정동 덕수궁에서 끝내 왕조의 문을 닫았다.

덕수궁 돌담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덕수궁 돌담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서구 제국주의의 한반도 정치 1번지

 1876년 일본과 체결된 ‘강화도조약’ 이후, 서구 세력들이 물밀듯 조선에 들어왔다. 1883년 미국 초대 공사 푸트(L.H.Foote, 1826~1913) 일행이 1883년 정동 안에 있던 집들을 사서 미국공사관으로 사용했다. 이때부터 정동은 서양인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서양인촌이 되기 시작했다. 이후 1884년 영국공사관, 1885년 러시아공사관, 1889년 프랑스공사관, 1891년 독일영사관, 1901년 벨기에영사관, 외국인 선교사들이 줄줄이 터를 잡았다. 대사관이 아닌 공사관이나 영사관이 설치된 이유는 우리의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영국공사관이 있는 곳은 본래는 강화도조약(1876년)과 조미수호통상조약(1882년) 체결한 신헌(1810~1884)과 그의 아들 신석희의 집이 있던 곳이다. 영국공사관에서는 일제를 지지했던 스티븐스 암살사건을 주도한 전명운‧장인환 의사를 존중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성원했던 대한매일신보사 사장 어네스트 베델에 대한 재판이 진행된 곳이기도 하다. 일제의 집요한 베텔(Ernest Bethell, 1872~1909) 처벌 요구로 영국 측은 베델에게 3주간의 금고형과 해외추방을 처분했다. 베델은 그 영향으로 큰 병에 걸려 1909년 5월 1일 서대문 밖 애스터 하우스 호텔(Astor House Hotel)에서 37세로 사망했다. 남의 나라, 머나먼 이국에서 인간의 존엄과 독립을 지지한 숭고한 삶의 결과이다.

 한 맺힌 왕비의 능 터에,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궁터에 서양인들은 거침없이 자리를 잡고, 그들의 깃발을 내걸었다. 서양인들의 동네가 되었다. 자국 군대에 의지할 수 없었던 왕, 강력한 외세와 외국인에게 기대야 했던 왕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결과 왕은 일제의 총칼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기도 했다. 지금도 정동엔 대한제국의 황궁인 덕수궁과 여러 나라의 대사관이나 관저가 있다. 정동은 여전히 구한말의 진행형의 단면을 유지하고 있다.

 서양 민간인 정착은 선교사 겸 의사였던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이 미국공사관 근처 집을 사면서 시작되었다. 알렌은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을 치료하면서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을 설립했고, 1897년에는 주한미국공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알렌은 188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서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에게 정동의 다른 집을 구매해 주었다. 1885년에는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1856~1922),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가 미국공사관 서쪽에,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 헤론과 벙커, 길모어 등도 정동에 속속 자리 잡았다.

 이들 선교사들은 정동에 배재학당(1885년), 이화학당(1886년), 언더우드학당(1886년, 경신학교), 정동여학당(1887년, 정신여학교) 등을 세웠다.
 
 러시아공사관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공백 기간을 거쳐 1925년 소련의 총영사관이 되었고, 1949년 소련영사관 간첩 사건을 계기로 폐쇄될 때까지 존속했다. 6‧25때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현재 보수중인 전망탑만 남아있다. 경향신문사 자리는 러시아공사관 뒤편으로 러시아정교회의 ‘성 니콜라스 성당’이 있었다. 성당은 1968년에 아현동으로 옮겨갔고, 그 자리에 MBC 문화방송 사옥이 건립되었다가 경향신문사로 바뀌었다. 현재의 러시아 대사관은 옛 배재고등학교 터에 있다. 1990년 소련(지금의 러시아)과 국교를 재개하면서 옛 러시아공사관 터 반환 대신 배재고 터를 준 것이다.

 프랑스공사관은 현재의 창덕여자중학교 자리에 있었다. 프랑스공사관이 1910년 이전한 뒤에는 서대문소학교, 해방 이후에는 서대문초등학교가 있었다. 건물은 완전히 없어졌고, 창덕여중 안에 프랑스공사관 정초석만 남아있다.

 벨기에영사관은 현재의 캐나다대사관 자리에 있었다. 벨기에영사관이 이전한 뒤, 고종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의 주인인 손탁(Antoinette Sontag, 1854~1925)에게 하사했다, 그 뒤 하남호텔이 건립되었고, 1990년대에 캐나다대사관으로 신축되었다. 현재 관악구 남현동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건물은 회현동에 있던 1905년 준공된 벨기에영사관을 해체, 이전한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옛 대법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서울시립미술관(옛 대법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외국인들이 만든 근대 교육의 산실

 정동제일교회 앞 분수광장은 정동의 중심이다. 광장 동남쪽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의 역사는 변화무쌍하다. 1886년에는 조선 정부에서 설립한 영어 및 서구 문물 습득을 위한 미국식 신식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그 뒤로는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를 교육시키는 법어, 아어학교, 독일영사관이 있었다. 1910년대에는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과 총독부 정동분실, 1928년부터 일제의 고등법원, 경성복심법원, 경성지방법원, 해방된 뒤부터 1995년까지는 대법원이 있었다. 이완용은 육영공원 첫 입학생으로 이때는 친미파, 뒤에는 친일파로 바뀌었다. 시류를 타는데 능한 매국노의 모습이다.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북감리회 여자선교사 스크랜턴(M.F. Scranton)이 설립한 우리나라 여성 신교육 발상지이다. 학교 이름은 1887년 민비(명성황후)가 하사했다. 3‧1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유관순 열사가 다닌 학교이다. 학교 안에는 당시 학교 기숙사에 살던 유관순이 사용한 우물이 보존되어 있다. 답사 때는 코로나로 학교 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었다.

배재빌딩 앞 독립신문사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배재빌딩 앞 독립신문사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정동교회 남쪽에는 1885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근대식 사립학교 배재학당이 있었다. 지금은 학교가 이전하고 배재빌딩과 배재공원, 아펜젤러기념공원이 있다. 배재학당이란 이름은 고종이 하사했다. 서재필을 중심으로 점진적 개화‧개혁을 추진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겸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도 초기에 배재학당 안의 활판소에서 인쇄했다. 장규식에 따르면, 독립신문사는 정동제일교회 맞은편 정동 로타리 신아빌딩 근처가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현재는 표석이 서울시립미술관 입구쪽과 배재빌딩에 각각 있다.

 1896년에는 서재필이 학당 안에 토론회 단체인 ‘협성회’를 조직해 대중계몽을 시작했다. 협성회의 토론회는 그 뒤 독립협회의 토론회로 이어졌다. 『서울 근현대 역사기행』(정재정 외, 혜안, 1998년)에 따르면, 우리나라 근대 학생 운동 제1세대의 산실이다. 참가한 주요인물로는 안창호‧오긍선‧이승만‧주시경 등이 있다. 1898년 4월 9일부터 발행한 『매일신문』은 일간신문의 효시이다.
 
 예원여자고등학교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G.Underwood)의 사택과 선교본부가 있던 곳이다. 사택 안에는 1887년 생겨난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교회인 정동장로교회(새문안교회)의 첫 예배당이다. 정동장로교회는 특이하게도 평안도 의주 상인들의 전도로 개종한 사람이 바탕이다. 1895년 지금의 경향신문사 옆 피어선 빌딩 근처로 이전했다. 제중원 여의사 애니 엘러스(A.J.Ellers)가 여자 고아 한 명을 데리고 1887년에 설립한 정동여학교(정신여고)는 예배당 동편에 있었다. 김마리아‧김필례‧유각경 등 여성지도자를 배출했다. 김마리아(1892~1944)는 이화여고의 유관순처럼 정신여고가 자랑하는 민족운동의 상징이다. 그녀는 1919년 도쿄 유학생으로 ‘2‧8독립선언’에 참여했고, 국내로 들어와 3‧1운동에 참가했다. 3‧1운동 이후에는 최대 규모의 항일 여성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그녀는 회장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장규식은 김마리아를 ‘여자 안창호’라고 평가했다(『서울, 공간으로 본 역사』, 혜안, 2004년).

 언더우드학당(경신고등학교)은 맞은편인 지금의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자리에 있었다. 언더우드학당도 정동여학교처럼 고아 한 명으로 시작했다. 민족운동가 김규식, 도산 안창호도 언더우드학당 출신이다.

덕수궁 중명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덕수궁 중명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우리나라 개신교 예배당의 원형들

 정동교회는 1887년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가 세운 교회이다. 정동교회 예배당은 19세기에 지어져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서구식 개신교 예배당으로 장규식에 따르면, 정동교회는 개신교 예배당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대한제국기에는 명동성당과 함께 서울의 명소였다. 1918년 우리나라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하고 성가대를 운용했다. 창립 초기에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이 많아 우리나라 개화운동, 청년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정동교회 출신 목사들의 활약도 눈부시다. 

 현순(玄楯, 1880~1968, 1914~15년 재임) 목사는 1919년 3·1운동 때 목사로서 참여했고, 윌슨(Wilson)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했으며, 상해임시정부 수립의 주인공이다. 손정도(孫貞道, 1882~1931, 1915~1918년 재임) 목사는 1912년 하얼빈에서 일본 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의 암살 모의에 참여했고, 3·1운동에 참여하고 상해로 망명해 현순, 이동영, 박은식 등과 함께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손 목사는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에게 애국애족의 정신을 불어 넣어주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 해군을 설립했고, 초대 해군 참모총장,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던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1909~1980) 제독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필주 목사와 장로 박동안은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참여했다. 교회 정문 우측 길가에 ‘정동제일교회’ 표석이 있다. 교회안 벧엘예배당 앞에는 아펜젤러와 최명헌 목사의 상, 오벨리스크 형태의 ‘감리교회 조선선교50주년기념비’, 이필주 목사의 집터 안내판이 있다. 기념비 앞에는 6각형으로 된 향로석 같은 석물이 두 개 있다. 오른쪽 석물 6면에는 ‘충신부귀효제(忠信富貴孝悌)’, 왼쪽 석물에는 ‘강녕공명수복(康寧功名壽福)’이 새겨져 있다. 기독교를 믿는 이유들이다.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치욕의 장소이다. 1896년 궁중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건물의 하나로 왕실도서관으로 사용되다가, 고종이 외국사절을 접견하거나 연회를 베푸는 장소가 된 곳이다. 11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태프트-가쓰라 각서(1905.7.29.)와 제2차 영일동맹(8.12), 포츠머스 강화조약(9.5)을 바탕으로 미국‧영국‧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보호 권리를 승인받았다. 일본은 그 즉시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서울에 파견했다. 그는 손탁호텔에 머물며, ‘을사5적(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을 매수해 체결했다. 고종은 인준을 거부했고, 옥새의 날인도 없는 불법 조약이다. 일본은 이 조약을 근거로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했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다. 이 조약이 체결되자 민영환과 조병세는 조약 폐기를 주장하며 자결했고,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중명전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했기에 러시아 공사관건물과 비슷하고, 영국인이 설계한 석조전(石造殿)과는 다른 분위기다.

임옥상 서울을 그리다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임옥상 서울을 그리다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정동을 답사하는 여러 코스

 좁다면 좁은 공간이나 정동을 답사하는 코스를 정동로터리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 5개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정동로터리에는 「광화문연가」의 작곡가 이영훈 추모 노래비가 있다.

 첫 번째 구간은 정동로터리-덕수궁 중명전(코로나로 휴관중)-정동극장(백현옥의 「명창 이동백 상」, 전수천의 「혹성들의 신화, 놀이, 비젼」 벽화)-정동제일교회--보구여관 터(미국 북감리회에서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 이화여대 의료원의 전신, 현재 전광수 커피하우스 정동점 입구 맞은 편 돌담 아래 표석)-구(舊)신아일보사 별관(1930년대 미국 싱거미싱회사 사옥)-예원학교—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백주년기념관-정동근린공원‧배재어린이공원-구(舊)러시아공사관-경향신문사 코스이다.

 두 번째는 정동로터리-신아빌딩-중부등기소-배재어린이공원(입구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조형물)-러시아대사관 정문-한양도성순성길 숭례문 방향-아펜젤러기념공원-배재빌딩(간판 옆 ‘배재학당 옛터 표석’, 간판 오른쪽 뒷편 ‘독립신문사 터’ 표석)-평안교회(서울미래유산)-순화빌딩 주차장 입구와 교회 사이 ‘수렛골’ 표석(인현왕후 탄생지)까지이다.

 세 번째는 정동로터리-미대사관저 옆 덕수궁 돌감길-덕수궁 내부 보행로-영국대사관‧성공회 성당.100미터 정도이나, 한적하게 홀로 걷기 좋은 길이다.

 네 번째는 정동로터리-서울시립미술관 올라가는 길-왼쪽 최정화의 「장미빛 인생」 조형물-5미터 위 왼쪽 ‘육영공원’, ‘독일영사관’, ‘독립신문사 터’ 표석–표석 뒤 배현경 작가의 「생각하다」 조각-미술관 정문-정문 왼쪽 기둥 옆 ‘구(舊) 대법원 터’표석까지이다. 미술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야 할 길이다.

김장생, 김집 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김장생, 김집 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다섯 번째는 정동로터리-덕수궁입구‧시립미술관 방향 온기우편함-운교터(고종 때 만들었던 구름다리 흔적)-서울시 시의회의원회관 주차장 입구-서울시 서소문청사 옆 김장생(1548~1631)‧김집(1574~1656) 선생 생가터 표석- 임옥상 작가의 「서울을 그리다」 조형물-덕수궁 돌담길 조망지점-덕수궁 대한문-시청역까지이다.

 정동의 외국 공사관에 대해서는 『근대서울의 역사문화공간:정동과 각국공사관』(이순우, 하늘재, 2012년), 정동과 덕수궁에 대해서는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김정동, 발언, 2004년), 서울의 곳곳에 있는 근현대 역사 현장에 대해서는 『서울, 공간으로 본 역사』(장규식, 혜안, 2004년)과 『서울 근현대 역사기행』(정재정 외, 혜안, 1998년)를 참고하면 좋다.

덕수궁 대한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덕수궁 대한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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