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물자 [뉴시스]
구호물자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UN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

고베 지진 시 구호물자 지원

-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UN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감회가 있는 나라인 것 같다. 아주국 유일 대표가 되어 압도적인 득표도 했다. 
▲ 그렇다. 그렇게 1996~1997년 임기를 보냈다. 그래서 박수길 대사가 임기 중에 주로 오래 활동을 했는데, 다시 9년 후에 우리가 2015~2016년 했지요? 1995년 당시 장관 보좌관인 오준 대사가 이때 대사로 활약을 하게 된다. 당시 스리랑카 로드리고 대사가 1994년 무렵에는 차관보였다. 제가 호주에 있을 때 같이 있어서 안면이 있다. 그때 아주그룹에 세컨드 맨 그룹이라고 해서 한 달에 한 번씩 같이 오찬을 하는 모임이 있었다. 로드리고 대사가 1995년에는 UN 대사로 와 있어서 많이 도움을 받았다. 스리랑카 내부에 여러 가지 사정도 들을 수가 있었고, 요새 어떻게 됐는지 그 후에 소식은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UN 가입 5년 만에 비상임이사국으로서 2년간 UN에서 활동했다.

- 상당히 전방위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얻은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비동맹국가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걸친 활동도 했고, 또 제일 중요한 스리랑카가 출마를 철회하고 한국을 지지하게 된 것까지 말이다. 
▲ 그렇다. 아주 요령 있게, 순조롭게 진행됐다. 시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이나 인도 같은 나라들하고 경합을 했으면 어떻게 됐겠나. 다행히 스리랑카가 그러한 국내적인 전환을 맞았다. 

- 그러한 기회를 잘 포착하고, 또 적시에 경제협력을 제공했다.
▲ 그렇다. 스리랑카도 실리를 택하는 정책으로 나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 덕분에 우리 외교가 상당희 성공을 거두었다. 
▲ 이때 우리나라의 UN에서의 위치를 볼 때는 우리 인구나 GNP 면에서 세계 18위쯤 되는데, UN에 의무분담금은 0.69%밖에 안 된다. 1%가 안 된다. 이때가 약 700만 달러였다. 저개발국에 대한 기여금도 0.1%라서 UN에 있는 우리 직원들은 너무나 인색하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 다자외교를 시작하는 걸음마 수준이었나. 
▲ 글쎄다.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외무부 예산은 적었다. 요새 1%는 넘었나. 

- 그런 것으로 알고 있다. 저희 GDP는 11위정도 된다고 알고 있는데 아마 기여금은 15~16위 정도지 않을까 한다. 
▲ 내가 있을 때만 해도 외무부 예산이 우리 GDP의 0.7%, 0.8%가 안 됐다. 다른 중견국가들에 비해서 우리는 외교에 대한 투자가 너무 약했다. 우리같이 외교가 중요한 나라가 또 없는데 말이다. 4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준엄한 국제환경 속에서 우리 외교에 대해서 국민께서 이해를 하시고 지지해주셔야 한다. 벌써 우리가 1992년에 UN 안보리 회원국이 된 이후, 15년 만에 상임이사국을 두 번이나 하게 됐다. 

- 장관님 재임 중에 고베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 재일동포들도 피해를 많이 받았는데, 당시 우리 정부의 대처는 어떠했나. 
▲ 일본 사람들이 한신·아와지대지진이라고 이야기하는 고베대지진은 간토대지진 이후 72년 만에 일어난 대지진이었다. 1995년 1월17일, 제가 장관으로 부임하고 한 달이 채 안 되는 시점에서, 새벽 5시46분에 일어났다. 지진이 났다는 소식이 수 분 내에 아마 일본 NHK 방송을 통해 알려졌을 것이다. 그때 청와대에서 대통령 전화라면서 바로 연락이 왔다. 저는 잠이 막 깼을 땐데, 이 어른이 벌써 뉴스를 보시고 일본에 대지진이 난 걸 아냐고 물으셨다. 아직 못 들었다 했더니, 대지진이 났다고 했다. 

결과적으로는 6.300여 명의 인명피해가 생기고, 피해액은 1,400억 달러였다. 엄청난 규모의 대지진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웃나라로서 누구보다도 먼저 우리가 구호의 손길을 뻗어야 한다고, 긴급히 구호대책을 강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상황에서 벌써 구호에 대한 생각까지 하면서 민첩한 대응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참 천부적인 정치인이라는 인상이 지금도 강하다. 그래서 저도 사무실 나가자마자 수배를 했다. 대한적십자사는 항상 창고에 구호물자를 쌓아놓고 있다. 그래서 즉각 보낼 수 있는 태세가 돼 있기 때문에 일본하고 구호물자에 대한 교섭을 하고, 결과적으로는 구호물자 선발대가 지진 발생 나흘 후인 21일에 갔다. 그래서 제1진으로 당시 이재춘 정무 제1차관보가 단장으로 정부대표단을 꾸려서 갔다. 인명 구호를 위한 소방요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차적으로는 라면·식수·담요 등 30만 달러 상당의 구호물자를 비행기에 실어 보냈고, 그 후에 점차 배편으로도 보내서 총 500만 달러 상당의 구호물자를 보냈다. 

이 대지진 후에 일본은 고속도로 지주(기둥)를 전부 보강했다. 고베에서 지주가 무너지면서 고속도로가 무너졌다. 엄청난 보수작업을 전국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걸 봐도 참 미증유의 대 지진이었다. 교포들도 많이 희생됐다. 더군다나 한신 지역에는 우리 교포들이 밀집해 있고, 고베에 특히 많은 피해가 있었던 지대가 소위 말하는 마치고바, 공장들이 다닥다닥 들어선 곳인데, 거기에도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 우선 일본에 있는 한국신용조합 이희건 씨가 회장인 관서흥은, 고베상은 같은 신용조합에 우리 정부, 당시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에서 교포들의 복구 지원을 위하여 융자금으로 수백만 달러를 대여해줬다. 

- 3·11대지진(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때도 우리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 그렇다. 지난 번 후쿠시마 원전 피해가 일어났을 때, 대해일 때도 국민적 모금이 대대적으로 있었다. 그처럼 우리가 너그럽게 일본 관계를 생각할 수가 있어야 할 텐데. 사안에 따라서는 관용이라는 말을 잊어버린 것 같은 측면이 있어서, 참 가늠하기가 어렵다. 역시 과거 문제는 피해를 본 쪽은 용서한다는 너그러운 마음이 있어야 하고, 피해를 준 사람들은 항상 그 사실에 겸허하고 반성을 해야 하고, 이 두 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했다. 어느 한쪽만 해도 소리가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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