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련은 이런 경우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기획실에 근무하는 박연실 언니에게 상의할까도 생각해 봤으나 도저히 그 일만은 상의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에서부터 화장품 하나 사는 일도 박연실 언니와 이야기 했는데, 어쩌면 중대하다고보면 그렇기도 한 이 일을 상의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은 상대방도 상대방이지만 우선 자신의 평판에 관한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상대방이란 혜련이 근무하는 영업2과의 천용세 과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혜련은 입사한 지 1년도 채 안 된 초년생인데다 부사장실에 근무하다 여기로 온 지도 아직 한 달이 안 된 과의 막내였다.  

그에 비해 천용세 과장은 우선 나이가 아버지뻘인 데다 매너 좋기로 회사에서 이름난 간부였다.
그런 천 과장이 요 며칠 사이 혜련에게 취한 행동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어제 퇴근 무렵만 해도 그랬다. 모두 퇴근한 뒤 혜련은 전화 올 데가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던 사람은 천용세 과장뿐이었다.
한참 동안 서류를 뒤적이던 천 과장이 혜련의 옆자리로 슬그머니 다가와 앉았다.

“과장님은 퇴근 안 하세요?”
혜련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 나야 뭐 일찍 퇴근해서 할 일이 있어야지. 집에 가니 반겨 줄 여편네가 있나...”

천 과장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시무룩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사모님이 어디 가셨어요?”
잉꼬부부로 이름난 천 과장이었는데 뜻밖의 이야기였다.
 "가긴 갔지. 어차피 우린 안 맞는 사이였는데 잘된 건지도 몰라.”
“잘된 거라뇨?”

혜련이 어리둥절해졌다.
“병원에 입원하고 집에 없어”
“네? 어디가 편찮으신가요?”
그러나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물어 본 것이 잘못이란 것을 금방 혜련은 알았다.

“내가 싫대. 아니 나하고 한 침대에서 자는 게 싫대.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할까? 그래서 정신병원에 들어간 지 오래돼. 남자하고 자는 것 싫어하는 병 들어 봤어?”

천 과장은 히죽히죽 웃으며 혜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말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혜련은 면구스러워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이때란 듯이 천 과장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혜련 씨도 처녀지만 알 건 다 알 테니깐 얘긴데... 마음 내키지 않는 사람과 육체관계를 갖는 건 참 고통스러운 일일 거야. 여자들 입장에선 그렇지 않아?" 혜련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으나 그럴 용기도 나지 않아 그냥 어색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하하하. 그냥 해 본 소리야. 이담에 헤련 씨도 남편과 한 침대 속에 들어가 보면⋯ 아니 참 혜련 씨 시집 안 가?”
“전 아직...”
혜련은 시선 둘 곳을 몰라 쩔쩔매면서 말했다.
“애인도 없어? 동해안 콘도 같은 데 같이 가서 며칠 밤을 새우며  젊은 육체를 불태울 그런 힘 좋은 애인 말이야⋯”

혜련이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있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혜련 씨 손좀 내봐. 내 언제 시집갈지 봐 줄테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혜련의 손을 덥석 잡았다. 깜짝 놀란 혜련이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이 손도 예뻐라.”

그는 혜련의 손을 이리 저리 만지면서 말했다. 그런 그의 표정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느끼하고 불쾌했다. 그러나 직장의 상사에게 무안을 줄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에 그냥 참고 있었다.
그는 혜련의 젖가슴을 음흉한 시선으로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그뿐 아니라 손금을 들여다보며 얼굴이 화끈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려 혜련을 곤경에서 구해 주었다.

이튿날까지 혜련은 기분이 나빠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천용세 과장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근엄한 표정으로 결재를 했다. 
그날 오후 선배 여사원 한 사람이 은밀히 천과장 이야기를 했다. 
“천 과장님 음흉한 데가 있으니 조심해. 깜짝 놀랄 일을 저지를 정도로 용기가 있지도 않으면서 여사원들을 괴롭게 한다구. 미스 리한테는 아직 이상한 소리 한 일 없지?”

선배 언니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제 퇴근 무렵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쩐지 쑥스러웠다. 그러나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날 점심시간이었다. 혜련은 가져온 도시락을 여사원 휴게실에서 먹고 사무실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텅빈 천용세 과장 자리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혜련이 얼른 받아 들었다.  “당신이야? 난데 오늘 일찍 들어와요. 나 오늘 멋진 잠옷 한 벌 새로 샀거든. 기분좀 내자구⋯”
혜련은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저어 천 과장님은 안 계신데요⋯”하고 중간에서 말을 끊었다.

“아이고 미안해요. 난 또 우리 아빤 줄 알고... 들어오시면 집에 전화 좀 넣어 달라고 전해 주시겠어요?”
명랑하고 구김살 없는 천과장 사모님의 목소리였다. 

“뭐?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잠자리를 거부한다고?”
혜련은 기가 막혔다. 사모님의 말씀을 천 과장에게 그대로 전해야 할지 모른 척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