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종점 노래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마포종점 노래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서울 한가운데 용산을 걷는다. 용산(龍山)의 유래에 대해서는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백제 기루왕 때 한강에서 용 두 마리가 나타났기에 용산, 산 형세가 용 모습을 닮아 용산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절두산 잠두봉을 용두봉이라고도 했는데, 용산이 용 꼬리 부분에 해당되어 용산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다큐멘터리 서울정도육백년』, 제3권, 이경재, 서울신문사, 1993년). 어떤 주장이든 모두 ‘용’에 의해 생겨난 이름이다. 고려 때에도 용산이란 지명이 언급되고 있어 오랜 역사가 있음을 확인케 해 준다.

 첫 번째 답사지인 용산 ‘독서당 터(讀書堂址)’를 가기 위한 출발점은 마포역 4번 출구이다. 마포역이 시작점이나 자료조사와 코스 구성은 모두 용산이다. 마포대로 한강 방향을 따라 걷다가 강변북로 샛길로 들어서면 강변한신코아아파트가 나온다. 그곳에서 용산과는 무관한 뜻밖의 공간을 만났다.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누구나 한번은 들었을 듯한 노래, 「마포종점」 그 공간이다. 아파트 끝, ‘마포어린이공원’에 「마포종점 유래비」와 「마포종점 노래비」가 있다. 자신이 살거나 익숙하게 아는 곳이 아니라면, 어디를 가든 늘 새롭고, 발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노래로만 들었던 마포종점을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유래비를 보니, 1907년부터 1968년까지 운행되었던 전차의 종점이 이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 한 밤 중 종점은 웬지 서글프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노래가사도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새벽녘 종점은 출발점이 된다. 그 때 종점은 앉아 가기 가장 편리한 곳이다.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는 곳이다. 삶은 보기에 따라, 생각하기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종점은 누군가에게는 끝이고, 누군가에게는 시작점이다. 어떤 생각을 하던 이왕이면 종점, 종착역, 종착지가 아니라 시작점, 출발점이라고 여겼으면 좋을 듯하다.

 마포종점 표지석이 있는 이 공원은 작은 공원이다. 타지역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기 쉽다. 출발지를 마포역으로 선택한 것은 의외의 수확을 거두었다. 탐방기를 쓰면서 얻게 된 관찰력 덕분이다. 모든 것을 꽉 짜여진 계획에 따라 사는 것은 숨막히는 일이다. 때로는 경계선에 서서 사물을 보고, 사람을 보는 것도 삶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지혜일 듯하다. 마포역은 언제나 시간표에 쫓기는 생활에 작은 삶의 지혜를 주었다.

별영창 읍청루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별영창 읍청루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정조가 한강을 지키는 조선 수군 훈련을 지켜본 읍청루

 아파트 뒤편 대각선 방향에는 석불사(石佛寺)가 있다. 조계종에서 세운 안내판에 따르면, 석불사는 숙종 때 세워진 절인 백운암, 한강변 여덟 정자 중 하나인 풍월정(風月亭), 석불암으로 바뀌었다가 석불사로 중창된 절이다. 안내판에 언급된 풍월정이 있었다는 근거는 알 수 없다.

 마포에 풍월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마포는 조선시대 용산 지역이다. 『성종실록』(성종 8년(1477년) 8월 8일)에는 성종이 형 월산대군이 지은 풍월정을 직접 찾아가 당시 갓 지어져 이름이 없던 이 정자를 ‘풍월’이라고 명명하고, 「풍월정시(風月亭詩)」까지 짓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월산대군의 풍월정이 안국방(安國坊, 현재 재동, 안국동 일대) 서쪽 동산에 있었다고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후대인 정조의 『일성록』(정조 19년(1795년) 3월 17일)에서는 정조가 수군 훈련이 부족하다면서 읍청루(挹淸樓, 용산)에서 수군 훈련을 직접 지켜보겠다면서 수군들을 풍월정 앞에서 대기하라고 명령했다. 『승정원일기』(고종 29년(1892년) 7월 8일)에서도 정조 때 읍청루가 언급되고 있다. 정조의 『일성록』과 고종의 『승정원일기』를 기준으로 한다면, 용산 읍청루 주위에 풍월정이 있었고, 안국방 쪽이 아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현재 석불사 안내판의 “18세기에 백운암이 파괴된 뒤 풍월정이 세워졌다”는 내용도 이로보면 어폐가 있다. 안내판 내용은 정밀한 고증이 필요할 듯하다.

 석불사에서 다시 공원으로 나와 강변북로 옆길을 따라 용산 방향으로 180미터 정도 가면 매직헬스케어 건물과 현대오일뱅크 주유소가 있다. 매직헬스케어 모퉁이에 ‘별영창‧읍청루 터’ 표석이 있다. 별영창(別營倉)은 임진왜란 당시 창설된 군사훈련 기관인 훈련도감 소속 군사들의 급료를 지급하던 한강변 창고이다. 읍청루(挹淸樓)는 정조 때 세운 별영창에 딸린 누각이다. ‘읍청(挹淸)’은 ‘맑은 물을 뜬다’이다. 군량 창고였기에 부정부패가 있을 수 있어 이를 경계하는 청렴한 풍토를 키우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추정된다.

 정조는 읍청루에서 강화도에 유배된 이복동생 은언군을 불러 만나기도 했고, 수군 훈련을 지켜보기도 했다. 읍청루는 그 후 『서울육백년』(김영상)에 따르면, 세관감시소, 영국인 브라운의 별장, 총독부 정무총감의 별장이 되기도 했다. 표석에 따르면, 1934년 도로 개설로 없어졌다.

독서당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독서당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연구하는 공직자를 만들기 위한 아카데미, 독서당

 ‘별영창‧읍청루 터’에서 110미터 직진해 올라가면 버스정거장(청암자이아파트)이 보인다. 정거장 바로 뒤에 ‘독서당 터’ 표석이 있다. 독서당(讀書堂)은 사가독서(賜暇讀書)에서 유래했다.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는 제도이다. 고려 때에도 있었으나, 조선에서는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유급휴가를 주어 실시한 것이 효시이다. 세종 때에는 초기에는 관리 자신의 집, 후기에는 절인 진관사(津寬寺)에서 하게 했다. 세조 때 중단되었다가 성종이 부활시키면서 현재의 독서당 터 인근에 있던 귀후서(歸厚署) 뒤편 옛 절을 이용해 사가독서를 위한 별도의 건물인 독서당을 만들었다. 성종은 독서당의 이름을 직접 지어주고, 궁중의 술과 수정배(水精杯, 수정으로 만든 술잔)를 하사해 줄 만큼 귀하게 여겼다. “현인(賢人)을 키우는 것이 곧 만백성을 키우는 것(養賢所以養萬民)”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조위, 「독서당기(讀書堂記)」). 별칭으로는 호당, 용호당, 남호당이 있다. 연산군 때 다시 폐지되면서 이 용산 독서당은 사라졌다. 중종은 두모포(옥수동)에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세우게 했다.

 청암자이아파트 일대에는 독서당 이외에도 조선시대 장사를 지내기 위해 필요한 관곽(棺槨)을 제조, 판매했던 귀후서도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나무로 관을 만들어 사용하는데, 적당한 재목이 부족하기에 태종이 귀후서를 만들어 장사용 관곽을 전담케 했다고 한다. 귀후서가 있었다는 표석은 찾을 수 없었다. 귀후서 표석 자체가 없는 듯하다.

 ‘귀후’는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어버이가 돌아가셨을 때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루고, 조상에게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면, 백성들이 덕(德)이 점점 후덕하게 될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장례의 중요성을 주목하고, ‘귀후’라는 표현으로 장례관련 물품 준비 관청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코로나 시대의 장례는 그런 점에서 비극이다. 간소화되었지만, 최소한의 전례 된 장례 절차 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독서당터(청암자이아파트 정자)에서 본 한강과 여의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독서당터(청암자이아파트 정자)에서 본 한강과 여의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독서당 터’를 지나면 한강으로 넘어갈 수 있는 횡단보도와 육교가 있다. 육교에 올라 한강과 건너편 여의도를 바라보며 한강으로 내려가면 동쪽 10미터 자전거길 옆에 등대처럼 생긴 건물이 보인다. ‘구(舊) 용산수위관측소’이다. 특별한 안내판은 없다.

 관측소 앞에 있는 자전거길 안내판 하단에 “구용산 수위관측소. 2002년 서울시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된 구용산 수위 관측소는 한강의 수위를 관측하기 위해 한강변에 최초로 세워진 수위관측소이다”란 안내문만 있다. 수위관측소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전거길 안내판에 더부살이하는 무성의한 안내판이다. 안내판의 거리를 살펴봐도 앞뒤가 맞지 않다. 맨 위의 거리표시에서는 뚝섬 13.8킬로미터, 광나루 20.8킬로미터, 반포 37.4km, 흑석초교 40.1킬로미터, 여의도 16.6킬로미터이나, 그 아래의 작은 글씨로 된 거리 표시에는 뚝섬 32.2킬로미터, 광나루 39.2킬로미터, 반포 55.8킬로미터, 흑석초교 58.5킬로미터이다. 하나의 안내판에 거리가 완전히 다르다. 기준이 다르다면, 다른 근거를 제시해야 혼동이 없을 듯하다.

 용산수위관측소는 전국에서 아홉 번째로 1924년에 세워졌다. 1925년부터 1976년까지 관측했고, 1977년에 폐쇄되어 현재는 사용되지 않기에 ‘구’자가 붙었다. 강 속 암반에 철근 콘크리트관을 설치하고 그 위에 육지와 다리로 연결된 관측실을 두었다. 안에 부자(浮子)를 띄워 자동으로 수위를 관측했다고 한다. 세종 때 한강에 설치한 수표(水標)를 일본인들이 현대화‧자동화한 것이다.

옛 한강수위관측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옛 한강수위관측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강가에 모셔진 ‘이성계 무신도’

 서울이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수도보다 더 멋진 수도가 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한강이다. 한강에 내려간 김에 한강을 따라 걷는 것도 아주 좋은 일이다. 바라만 봐도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유유히 흐르는 푸른 물결을 보노라면, 삶이 덧없음도 느껴진다. 또 모든 것이 변하고, 시간이 언제나 미래로 흐른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잠시 한강을 바라보다 다시 한강에서 올라와 예정된 답사길을 떠났다.

 한강변에는 부군당(府君堂)이 많다. 관청 인근에 설치된 제당 또는 한강변에 있는 마을 제당이다. 일부는 나무를 깎아 남자 성기(性器)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제사를 지내 ‘부근당(付根堂)’이라고도 한다.

 『용산의 역사문화 여행』(용산문화원, 2008년)에 따르면, 안전한 물길 운행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를 지내던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신당으로 서울 한강가에서만 ‘부군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봉안된 신들은 마을을 지켜주는 “무신(武臣)적 성격과 함께 풍요신적 성격을 갖고 있고, 수호신은 대부분 무장(武將)”이라고 한다.

청암동 부군당(이성계 무신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청암동 부군당(이성계 무신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독서당 근처에도 부군당이 있다. ‘청암동 부군당’이다. ‘독서당 터’ 바로 옆에 있는 ‘막다른 골목’이란 안내판이 있는 샛길을 따라 40미터 올라가면 왼쪽에 1층 적벽돌집이 있다. 부군당이다. 이 부군당은 이 지역에 있던 태조 이성계를 모신 제당과 옥황상제, 부군신 등 12신 무신도를 모신 부군당을 합친 곳이다. 이성계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 경치가 좋은 이곳에 여러 차례 다녀갔다는 구전을 바탕으로 마을 주민들이 세웠다고 한다.

 대개의 부군당이 그렇듯 행사 때 이외에는 문이 잠겨 안에 있는 ‘이성계 무신도’는 직접 볼 수 없다. 다만 ‘청암동 부군당’ 앞 안내판에 ‘이성계 무신도’와 ‘부군신’을 사진이 있다. 사진 만으로도 민속신앙의 대상 이성계를 만날 수 있다.

 부군당에서 빙돌아 독서당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할 수 있는 언덕 위 청암자이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독서당 터’ 표석이 있는 곳에서는 한강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독서당이 있었던 곳에서, 그때의 젊은 관리들처럼 한강 경치를 보기 위함이다. 또 어떤 경치든 높은 곳에서 보아야 제맛이 난다. 혹시나 했는데, 아파트 안 103동 뒤 한강 쪽에는 역시나 정자가 있었다. 아파트를 지은 사람들이 풍류의 멋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예상처럼 한강이 시원하게 보인다. 잠시라도 앉아 한강을 본다면, 옛 독서인들의 풍류와 여유를 느낄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강변북로로 차량 물결과 소음은 아쉬움을 남긴다. 개발 시대의 졸속과 편의주의 대가이다. 한강변 도로들이 서울의 가장 아름다운 경치, 대동맥을 파괴하는 흉물처럼 느껴진다. 시대가 변했다. 이제는 온전한 한강으로 만들기 위해 고민해야 할 때인 듯하다. 후손들에게 70~80년대의 시멘트 유산을 물려줄 수는 없다. 한강은 가꾸기 따라 세계 최고의 문화컨텐츠로 거듭 날 수 있는 자연유산이다.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미스터리한 ‘왜명강화지처비(倭明講和之處碑)’

 아파트에서 나와 삼개로, 효창원로를 따라 10분 정도 가면, 용산문화원에 도착한다. 용산문화원과 선인교회 사이 언덕 위에 작은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특별하다. 200년 이상이 된 느티나무만 무려 5그루가 있다. 그중에는 680년 된 높이 19미터, 둘레 660센티미터의 어마어마한 느티나무도 있다. 그 느티나무 바로 위에 ‘심원정(心遠亭) 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處)’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용산구가 만든 안내판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심유경(沈惟敬)과 왜군 장수 고니시가 강화회담을 한 장소로 전해진다. 회담 후 일본과 명나라가 강화를 한 곳이란 뜻의 ‘왜명강화지처’비를 세우고 기념으로 백송을 심었다고 한다.”

 ‘심원정터’ 안내판에는 “심원정은 용산구 원효로4가 용산문화원 바로 위 언덕에 있던 정자이다. 이 정자는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패배하던 왜군과 조선에 원군으로 온 명나라군이 화전(和戰)을 위한 교섭을 벌였던 장소이다. 따라서 이곳 용산강 일대는 임진왜란 전쟁사에 있어서 한 전환점을 이룬 전적지로서의 의미가 크다. 그 후 이곳은 고종 때의 영의정 조두순(1796~1870)의 별장이 되기도 하였고, 현재는 정자는 없고 ‘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處)’라고 음각된 비가 남아있다.” 용산문화원 뒤뜰에 있던 백송은 현재는 고사(枯死)되어 표본만 용산문화원에 있다고 한다. 심원정 역시 지금은 사라졌다.

 이들 안내판의 내용을 여러 사료에서 확인해 보면, 안내판 내용과 달리 이 장소에서 강화협상을 했다는 기록을 찾기 어렵다. 당시 관련 기록들인 『선조실록』이나 류성룡의 『징비록』,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징비록』에서는 심유경이 일본군과 강화협상을 위해 “적진에 들어갔다”로 나온다. 『난중잡록』에서는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심유경을 시켜 용산(일본군 진영)에 들어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강화협상을 하게 했다고 한다.

 『선조실록』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용산창(龍山倉)을 지키고 있다”, “(일본군이) 용산에 진(陣)을 친 곳이 12곳”, “강변에 진을 친 왜병이 거의 2만 명”, “(심유경이) 배에 도착해 고니시 유키나가를 불러 함께 말했고,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도 함께 모여 강화(講和)를 논의했다”, “심유경이 (용산의) 적진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은 지 이제 6~7일이 되었다”, “심유경이 고니시 유키나가를 용산창에서 만난 것이 지금 수십 차례이다”라고 나온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심유경이) 강화에서 배를 타고 가서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등과 용산에서 만났다”로 나온다.

 이 기록들로 보면, 심유경이 일본군과 강화협상을 한 곳은 지금의 용산문화원 옆 심원정 자리가 아니다. 따라서 “회담 후 일본과 명나라가 강화를 한 곳이란 뜻의 ‘왜명강화지처’비를 세우고 기념으로 백송을 심었다고 한다”는 것도 근거가 없다. 강화협상장은 여러 기록으로 보면,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한 용산창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1936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비석

 심원정 역시 임진왜란 때에는 존재하지 않던 별장이다. 최소 180여 년 뒤 남공철(1760~1840)이 지은 것이다. 그 후 조두순의 소유가 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의 별장이 되었다.

 누가, 언제, 어떤 이유로 ‘왜명강화지처비’를 이곳에 세웠을까? 여러 기록에서 최소한 1936년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는 점과 이노우에의 별장이라는 점에서 이노우에가 1930년대 후반에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 해방 이후에 세웠을 가능성도 있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런 비석을 적극적으로 세울 까닭도 없다. 일제강점기 심원정과 비석 기록을 추적해 보았다.

 일본 승려 운쇼율사(雲照律師)에 대한 기록(『전쟁터의 꽃(戦場の花)-雲照律師満韓巡錫誌-』, 田中清純, 1907년)에는 운쇼가 1906년 이노우에의 별장인 심원정을 방문한 내용이 나온다. “일행은 용산의 심원정 이노우에 거사(井上居士)의 별저(別邸)로 옮겼다. 정(亭, 심원정)은 또 일파루(一波樓)라는 이름이 있다. 언덕에 위치해 한강에 닿았다. …… 루(樓, 심원정, 일파루)는 구(舊) 한국 귀인(貴人)의 집이다.” 러일전쟁 전적지를 찾아가는 길에 들린 서울에서 운쇼가 이 비석을 보았다면 당연히 언급했어야 할 만큼 중요한 비석이다. 그러나 언급하지 않았다. 심원정에 있던 백송(白松)은 여러 자료에 몇 차례 등장한다. 『별건곤』(제23호, 1929년 09월 27일)에는 “용산 원정(元町) 4정목(丁目) 87, 일인(日人) 정상의문(井上宜文)의 별장 내 600년”이란 내용의 백송이 언급된다. 몇 년이 지난 뒤에는 『조선총독부 관보』(2507호, 1935년 05월 24일)에 천연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고, 그 소유자가 이노우에라고 나오기도 한다.

 『경성부사(京城府史)』(경성부 편, 1936년)에는 “현재 원정 4정목 강기슭에 심원정 터가 있다. 지금도 아직 그 일부가 남아 있다. 정(亭)은 고종 때 영의정이었던 조두순의 별장이었다. 강기슭 작은 언덕에 있다. 고목이 울창하고 강기슭의 장관을 내려다보기에 매우 좋았다”라고 심원정만 언급했다. 비석은 나오지 않는다.

 오다 쇼고(小田省吾)의 「경성에 있어서 문록역(임진왜란) 일본군 제장 진지의 고증(京城に於ける文祿役日本軍諸將陣地の考證)」(『朝鮮古蹟及遺物』, 현대사, 1982년)에서도 용산창은 현재 조선총독부인쇄소가 있는 지역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의 군대가 주둔했고 명나라 심유경도 이 진영에 머물렀다고 나오나, 비석 기록은 없다.

 일제강점기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각종 문화재 등을 조사해 정리해 놓은 『경기도 편찬 경기지방의 명승사적(京畿道 編纂 京畿地方の名勝史蹟)』(조선지방행정학회, 1937년)에도 평양과 함경도에서 후퇴한 일본군 중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 진지(陣地)는 용산창 군자감의 강감(江監)에 있다. 즉 구(舊)조선서적인쇄회사 및 그 부근의 땅으로 이 진에 명나라 사신 심유경이 머물렀다”고 했고, 가토 기요마사 등의 진지도 갈월리에 있었다고 나온다. 즉 현재의 용산 지역에 강화회담의 일본군 당사자인 고니시와 가토가 모두 주둔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게다가 이 책에는 백송도 “용산 원정4정목87번지 정상의문(井上宜文) 별장 안”에 있다고 언급된다.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의 다양한 유적지를 소개하고 있음에도 이 비석은 나오지 않는다.

 침략자와 객이 주인행세를 하는 나라의 비애

 계명대 김명수 교수에게 요청해 받은 이노우에의 사진첩인 의문전기사업기념사진(宜文前期事業紀念寫眞) 부인사기념사진(附人事紀念寫眞)을 보면, 운쇼 율사가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운쇼 율사가 언급한 ‘일파루’, 백송 사진도 확인할 수 있다. 또 심정원 위쪽에 있던 팔각정이 ‘망악정(望岳亭)’인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석 사진은 없다. 이노우에에 대해서는 김명수 교수의 「대한제국기 일본인 기술자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 연구」(『대구사학』, 2018년, vol.131)과 「박물관 유물로 보는 서울Ⅳ-경성, 서울의 도시경관과 생활문화 ⑩ 대한제국시기 전차 기술자 연구」(서울역사박물관대학, 2019년)를 참고하면 편리하다.

 현재 심원정 터에 있는 팔각정에는 이름이 없다. 사진에 근거해 ‘망악정’ 현판을 거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런 자료들로 보면, 최소한 1936년까지는 심원정 터에 비석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 이후에 제작되어 설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설치자는 1899년에 처음 조선에 들어왔다가 일제강점기 내내 심원정을 별장으로 사용하다가 1940년 11월 떠났던 이노우에일 가능성이 가장 가능성이 크다. 또한 비명의 첫 부분 ‘왜명(倭明)’도 ‘왜(倭)’를 우선한 점에서 일본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우리나라 사람이 세웠다면, ‘명(明)’을 앞에 두었을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또 ‘일본’ 대신 ‘왜(倭)’라고 표현한 것은 임진왜란시 강화협상이 일본 입장에서 사실상 평양성과 행주대첩의 패배에 따른 부정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기에 일제강점기 강대국 일본을 연상시키는 ‘일본’ 대신 과거의 ‘왜구’ 또는 조선식 ‘왜란’을 이용한 표현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심원정 백송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는 측면에서 보아도, ‘왜명강화지처비’가 임진왜란 당시에 세워졌다면, 당연히 국가문화재는 아니더라도 경성부 문화재, 향토자료쯤으로는 지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석은 그 어떤 문화재로도 지정되지 않았고, 일제강점기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 결국 이 비석은 1937년에서 이노우에가 떠난 1940년 사이에 심원정 소유자 이노우에가 개인적으로 자신의 별장 근처에 설치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듯하다.

 과거의 치욕을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면, ‘명‧왜(일본)강화협상 터’라는 표석을 새로이 설치할 필요도 있다. 그 장소는 군자감 강감(江監), 즉 용산창이 있었던 현재의 KT 용산IDC 자리가 사료 기록에 부합하는 장소로 볼 수 있다.

 ‘왜명강화지처비’에 대한 안내문의 정확성 여부를 이 비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임진왜란 때, 침략당했던 우리 조선을 배제한 채 강대국인 명나라와 침략자 일본군 사이에 강화협상을 했다는 개탄스러운 역사이다. 이는 현대의 6‧25휴전회담에서도, 지금의 북한의 대미협상 요구에서도 반복되는 일이다. 주인이 주인 역할을 못한 무력한 국가의 현실은 현재진행형이다.

성심여중고와 수녀회 정문(함벽정)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성심여중고와 수녀회 정문(함벽정)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머물렀던 곳, 조선 여성 시인의 해방구

 용산문화원에서 다시 길을 떠난다. 목적지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성심여중고이다. 용산신학교와 원효로성당(원효로예수성심성당)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용산신학교는 1886년 한‧프랑스수호통상조약으로 선교의 자유를 얻은 천주교회에서 1892년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 신학교이다. 건물은 프랑스풍의 고딕 양식으로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을 설계했던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 코스트(E.J.G.Coste) 신부가 설계했다. 명동성당 주교관과 비슷한 구조이다. 조선에 들어와 있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시공했고, 사용한 적벽돌은 용산 와서(瓦署, 기와를 굽던 관청) 고개에서 구운 것이다. 조선과 중국, 프랑스 세 나라의 합작품이다. 신학원 건물 자리는 본래 조선 시대 한강을 바라볼 수 있는 정자 함벽정(涵碧亭)이 있던 곳이다. 현재는 성심기념관으로 사용 중이다. 학교 정문 우측 기둥 옆에는 ‘함벽정’ 표석이 있다. ‘함벽’은 “푸른 강물을 머금고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안내판에 있는 1900년대 정문 사진을 보면, 정문 좌측 기둥 사이 벽돌 담장에 ‘함벽정’이 써 있다. 지금의 정문보다 옛 정문이 훨씬 아름답다. 정문을 옛 정문으로 복원해 놓는 것도 고려할 일이다.

 원효로성당은 신학교 부속성당으로 1902년에 완공되었다. 코스트 신부가 설계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코스트 신부가 1896년에 사망했는데, 성당이 1899년에 착공되었기 때문이다. 이 성당의 가장 큰 특징은 김대건 신부(1821~1846)와의 관련성이다. 성당 출입구 안쪽에는 우리나라 최초 신부, 용산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의 영문 이니셜인 A.K(Andre Kim)와 생몰연대가 새겨져 있다. 김 신부의 유해는 순교 직후에는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되었다가 1902년에 새남터와 가까운 이곳 원효로성당로 옮겨져 1960년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대성당으로 옮겨질 때까지 약 60년 동안 머물렀었다.

 성당이 있기 전에는 삼호정(三湖亭)이란 정자가 있었다. 삼호정은 조선 시대 최초로 여성 시인들인 김금원(金錦園)‧김운초(金雲楚)‧김경산(金瓊山)‧박죽서(朴竹西) 등이 모여 활동했던 해방구였다. 『서울지명사전』(서울역사편찬원, 2009년)에 따르면, 삼호정 주인은 헌종 때 문인 김덕희와 그의 소실이며 여성 시인이었던 김금원이다. 김금원 등은 삼호정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한강의 아름다움과 시를 노래했다고 한다.

 그런데 삼호정 표석은 계성유치원과 ‘산천동 부군당’ 아래 작은 공원에 있다. 용산구청에서 만든 표석 안내문에는 “원래의 위치는 현 용산성당 성직자 묘역 아래로 추정되며”라고 나온다. 용산성당(원효로성당)과는 멀지 않은 거리이다. 굳이 본래 위치 근처에 세우지 않고 별도의 장소에 표석을 설치해 놓은 까닭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억압받고 무시당했던 조선 여성 시인들의 해방구에 신앙으로 순교했던 김 신부의 유해가 머물고, 수녀원과 성심여자중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기묘한 인연이다. 탐방날에는 코로나로 학교 안 신학교와 성당에 들어갈 수 없었다.

청노루 힐 박목월 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청노루 힐 박목월 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박목월을 기억하려는 사람들과 무심한 행정

관청 성심여중고 정문에서 용산문화원 방향으로 70여 미터를 거꾸로 가다가 성심여중고 담장 오른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청노루힐’ 빌라가 있다. ‘청노루’는 박목월 시인의 시 「청노루」에서 따온 이름이다. 박목월은 흔히 조지훈(趙芝薰)·박두진(朴斗鎭)과 함께 낸 3인 시집 『청록집(靑鹿集)』으로 청록파로 알려져 있다.

 빌라 입구 왼편 벽 아래에는 “청노루 :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이 검은 벽에 붙어 있다. 또 그 아래에는 한국문인협회와 SBS문화재단이 설치한 ‘목월 박영종 선생의 문학산실’이라는 표석이 있다. 표석을 보면, “이 곳은 목월 박영종 선생(1916~1979)이 서울에 자리잡고 50년 간 창작 생활을 해 온 유서깊은 문학산실이다”란 내용이 있다. 박목월에 대해 검색을 해 보면, 출생년도와 사망연도가 제 각각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1915~1978’, 네이버 어린이백과에서는 ‘1916~1978’로 나온다. 1915~1978이 맞다. 표석의 생몰연대는 오류이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로 시작되는 동요 「송아지」도 박목월 시인의 작품이다. 박 시인의 등단을 추천한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은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가 날 만하다”고 극찬했다. 그의 작품 중에 「나그네」는 언제나 들어도 좋다. 특히 이곳저곳을 답사 다니는 상황에서 언제나 생각나는 푸근한 노래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그네」가 입가에 맴돈다. 목월의 청노루처럼 나그네가 되어 ‘목월공원’으로 향한다. 청노루힐에서 3분 거리다. 하이트진로 서서울지점과 아인오피스텔과 사이에 있는 1998년에 조성된 아주 작은 공원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목월은 1946년 서울에 상경해 처음에는 원효로 3가 277번지에 살다가 1963년 원효로 4가 청노루힐 자리에 살기 시작해 1978년 사망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공원에는 몇 개의 운동시설이 있고, 나무 몇 그루와 목월의 시, 「달무리」‧「모일(某日)」‧「나그네」‧「구름밭에서」‧「청노루」 등이 세워져 있다.

 「청노루」가 새겨진 목월시비(木月詩碑)도 있다. 시비 옆에는 ‘용산 나루(龍山津) 터’ 표석이 있다. 조선 시대 조운선이 드나들던 용산 나루가 있던 곳을 표시한 것이다.

 목월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는 작은 공원이나, 아쉬움만 크다. 중구난방의 표지판(목월공원, 木月公園, 목월시비)가 오히려 목월이 추구한 자연미를 훼손하는 듯하다. 문화컨텐츠에 목마른 지자체가 한두 곳이 아니다. 용산의 경우 목월이라는 어머 어마하게 큰 시인이 있음에도 이토록 부자연스럽게 만들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마포역에서 목월공원까지는 3시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용산 답사 2편에서는 산천동 부군당, 남이장군 사당, 군자감터, 새남터기념성당, 서빙고, 보안사 서빙고분실터, 서빙고 부군당, 동빙고 부군당, 김유신장군 사당, 무후묘, 이태원부군당, 유관순열사추모비, 이태원터, 당고개 순교성지 등을 돌아볼 예정이다.

목월공원 안 나그네 시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목월공원 안 나그네 시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 마포종점비 : 마포구 마포동 379
* 석불사 : 마포구 마포동 394
* 별영창‧읍청루 표석 : 용산구 청암동 168-24
* 독서당 터 표석 : 용산구 청암동 181. 청암자이아파트 정거장 뒤
* 청암동 부군당 : 용산구 청암동 120-2
* 용산문화원(심원정‧왜명강화지처비) : 용산구 원효로4가 87-2
* 성심여중고(용산신학교, 원효로성당) : 용산구 원효로4가 1-1
* 청노루힐(박목월 옛집 터) : 용산구 원효로4가 2
* 목월공원 : 용산구 원효로3가 250-4
* 삼호정 표석 : 용산구 산천동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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