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호정 터 표석 (서울시 제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삼호정 터 표석 (서울시 제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원효로 3가 목월공원(木月公園)을 출발점으로 용산을 이어 걷는다. 이 코스는 옛사람들의 염원 공간이고, 근현대인들의 삶과 죽음의 공간들이다. 그 길을 걷노라면 그 자체가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놓여있는 삶을 걷는 듯하다. 작은 언덕길을 지나면 평지가 있고, 또 배를 타지 않고는 건너기 막막한 큰 강이 곁에서 손짓하기도 한다. 찬바람에 실려 걷는 강변옆에는 근대 문명의 상징과도 같은 철길이 무겁게 첨단 도시와 1960년대에 머문 듯한 공간을 나누고 있기도 하다. 도심으로 들어오면 남산 자락 언덕이 굽이친다.
 

산천동 부군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산천동 부군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삼호정에서 꽃 피운 한 많은 조선 여성 시인들 

 목월공원에서 ‘산천동 부군당’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다. 성심여중고 후문 앞 4거리, 계성유치원 아래에 작은 공원이 있다. 그 공원 한켠에 용산 1편에서 언급했던 ‘삼호정(三湖亭) 터’ 표석이 있다. 표석은 두 개나 된다.

 서울시에서 만든 표석에는 “김덕희의 별장으로 조선 말기 여성들이 시사(詩社) 활동을 한 무대였다. 김덕희의 첩인 김금원을 비롯한 여성 다섯 명이 이곳에 자주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다”고 나온다. 용산구 표석은 “금원은 자신의 처지와 같은 여인들과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 문학인 모임인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를 만들어 조선 후기 한시문학을 꽃피웠다. 한국여성문학사에 있어 매우 의미가 깊은 이곳, 삼호정은 ……”라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서울시의 ‘첩’ 대신 ‘소실’로 표현했고, 김금원의 시 ‘강사(江舍, 강가의 집)’ 일부도 써 놓았다.

 두 개의 표석을 보면, 서울시 표석은 표석을 세워야 뭔가를 했다는 생색내기 또는 행정편의주의적 발상 외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내용에도 꼭 꼬집어서 ‘첩’이라고 써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어도 ‘첩’이라는 표현은 부정적이다. 게다가 시인들의 공간이라면서 시(詩) 한 편도 언급하지 않았다. 시 몇 줄 더 넣는다고 예산이 더 들어가는 것도 아님에도 그렇게 대충 만들어져 있다. 아름다운 시 한 편이 주는 감동과 울림의 의미를 모르는 기계적 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하다. 같은 목적을 지향해도 열정과 지식의 유무에 따라 표현 방식이 얼마나 큰 차이를 나타내는지 보여주는 실사례이다. 그럼에도 두 표석 모두 실제로는 삼호정이 있던 곳에 세워진 것은 아니다. 그나마 옛 여성 시인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뿐이다.

 『용산사료편람(2)』(용산문화원, 1999년)에 따르면, 김금원(1817~?)은 원주 사람으로 시문에 능했다. 그녀는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슬퍼하면서 남자로 변장하고 금강산과 명승지를 유람하고 시문을 지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다. 1845년 김덕희와 서도와 금강산을 유람하고, 1847년 돌아와 김덕희의 용산 별장 삼호정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녀와 교류한 김운초․경산․박죽서․김경춘은 모두 양반의 소실이다. 김금원은 『죽서시집』 발문에서 후생에 죽서와 함께 남자로 태어나 서로 시를 짓고 노래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조선 시대 여성의 한계를 토로했다. 그녀의 시집으로는 『호서동락기(湖東西洛記)』가 있다.

남이장군사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남이장군사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여자 귀신을 내쫓아 부인을 얻은 남이 장군

 표석 5미터 위에 기와집 한 채가 보인다. ‘산천동 부군당’이다. 행사 때 외에는 문이 닫혀있다. 안내판에는 “마을 신인 부군(府君)”으로만 기록되어 어떤 신이 모셔져 있는지 알 수 없다. 『용산의 역사문화 여행』(용산문화원, 2008년)을 보면, 남이(南怡, 1443~1468. 족보 기준) 장군 부부와 세 분의 제석신(帝釋神)이 이 제당의 부군들이다.

 남이 장군은 조선 개국공신 집안의 후예로 태종의 외증손주이다.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貞善公主)가 할머니이다. 18세인 1460년에 무과에 급제(『세조실록』)했고, 25세인 1467년 6월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 토벌과 9월의 평안도 북쪽의 여진족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붙잡아 죽이는 등 여진족 토벌에 큰 공로를 세워 공조판서(工曹判書, 오늘날 국토교통부‧산업통상자원부 등의 장관)에 임명되었다. 26세인 이듬해 1468년 8월과 9월에는 세조와 예종에 의해 각각 병조판서(兵曹判書,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불과 10여 일 만에 유자광(柳子光, ?~1512)의 역모 모함으로 영의정 강순(康純, 1390~1468)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권력의 한복판에서 소년 출세가 가져온 26세 병조판서의 비극이다.

 부군당 안내판에 따르면, 400년 전에 산천동 한가운데 세워져 있다가 1980년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현재 자리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한강가에 있는 부군당들이 그렇듯 마을의 안녕과 여름철 물놀이 사고, 배의 침몰사고 등의 액운을 없애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주신(主神)으로 남이장군 부부 등이 모셔져 있으나, 『용산의 역사문화 여행』에 따르면, 이 부군당은 남이 장군 첫째 부인이 실제 주인공이다. 그녀는 나쁜 귀신이 죽이려던 것을 남이 장군이 살려내 첫째 부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용문동 남이 장군 사당을 중심으로 거행되는 ‘남이장군 대제(大祭)’가 시작될 때에는 ‘꽃받이’라 하여 이 부군당에 와서 미리 꽃을 가져가 대제를 시작한다고 한다. 이 부군당에도 남이 장군이 모셔서 있으나, 실제 주신(主神)은 부인이고, 용문동 남이장군 사당과 짝이 된다. 그런데 『용산향토사료편람(1)』(용산문화원, 1998년)에 따르면, 이 부군은 옛날부터 그냥 부군당이었고, 당내 신상도 부군님을 모시고 있어 남이장군이나 그 부인과 관계가 없었던 듯하다고 한다. 남이장군 사당까지는 10분 거리다.

 남이 장군 첫째 부인은 실록과 다른 사료로 보면, 조선 개국공신 권근(權近)의 손자로 세조 때 공신이며 우의정을 역임했던 권람(權擥, 1416~1465)의 넷째 딸이다(『예종실록』․『동문선』).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남이가 젊었을 때 거리에서 놀다가 여자 귀신이 앉아 있는 보자기를 갖고 가는 어린 종을 보고 뒤따라간 곳이 권람의 집이었다고 한다. 그 집 딸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남이가 그 집에 들어가 보니, 귀신이 딸 가슴에 앉아 있어 남이가 귀신을 내쫓아 딸을 살려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에게 장가갔다고 한다.

 김시양의 『부계기문(涪溪記聞)』에 따르면, 권람은 자신의 딸과 남이의 결혼에 대해 점을 보았는데, 딸은 남이보다 일찍 죽고, 남이는 죄로 인해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 예언이 사실인지는 모르나, 그녀는 남이 반란사건 전에 사망했다.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따르면, 권람의 집은 남산 아래에 있었는데, 철종 때 영의정이었던 박영원이 그 터에 녹천정(綠泉亭)이라는 별장을 지었다고 한다. 이로 보면, 산천동 부군당은 남이의 부인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듯하다. 권람의 집터는 세월이 흘러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공사관, 통감관저, 총독관저가 잇따라 세워졌다.

 남이가 귀신을 쫓아가 내쫓은 그 공간은 몇백 년 만에 귀신보다 더 나쁜 일제 수괴의 터전이 되었다.

 남이 장군 사당이 용문동에 왜?

 산청동 부군당에서 사거리로 내려와 효창공원역 방향 효창공원로를 따라가면 그다지 높지 않은 고갯길이 나온다. 고개 넘어 몇 걸음 가면 ‘용문 국수’집이 있다. 국수집 우측 골목으로 들어서면 축대 위에 ‘병조판서 충무공 남이 장군 추모비’가 보인다. 1998년 ‘남이장군 대제사업회’가 건립한 것이다. 최근에 만든 비석이라 한글로 된 남이 장군의 내력이 쓰여있다. 비석 한쪽 면에는 그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품은 시가 새겨져 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에게 먹여 없앤다.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고 불러주리오.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

 이 시는 한 두 글자가 전해져 오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지봉유설』‧『연려실기술』에서는 ‘豆滿江波(파)飮馬無’, 허균의 『성소부부고』‧「학산초담」에는 ‘豆滿江流(류)飮馬無 男兒二十未平北(북)’, 정범조(丁範祖, 1723~1801)의 『남이장군전(南將軍怡傳)』에서는 ‘流(류)’와 ‘賊(적)’, 허전의 『성재집』․「남장군시장(南將軍諡狀)」에서는 ‘波(파)’와 ‘賊(적)’으로 나온다, 앞의 ‘水(수)’와 ‘波(파)’, ‘流(류)’는 의미에서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뒤의 ‘國(나라 국)’과 ‘북(北, 함경도와 평안도의 북방 여진족)’, ‘적(賊)’은 완전히 다르다. ‘나라를 평정한다(平國)’는 것은 반역 또는 혁명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반면, ‘북쪽을 평정한다(平北)’와 ‘도적을 평정한다(平賊)’는 것은 나라에 위협이 되는 북쪽 여진족을 평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水(수)’자로 언급된 것은 고전문헌에는 없고, 『독립신문』 1922년 8월 29일이 처음인 듯하다. 그 글자의 의미를 떠나 이 시는 청년 남이의 원대한 꿈과 도전정신이 담겨있다.

 지금 시대에서는 청년이나 기성세대나 모두 남이처럼 ‘평국(平國)’이나 ‘평북(平北)’을 꿈꾸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남이처럼 기개가 없어서인지, 꿈조차 꾸지 못할 정도로 삶이나 환경이 어려워서인지, 혹은 패배주의에 물들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답답한 세월이다.

 추모비를 지나 올라가면 ‘충무문(忠武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한옥이 있다. 남이 장군 사당 정문이다. 이곳 역시 평상시에는 문이 닫혀있다. 문틈으로 보면, 사당 본건물에 ‘남이(南怡) 장군(將軍) 사당(祠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사당 입구 길가에 있는 안내판에 따르면, 이 사당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문헌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300년 전부터 있었고, 본래 위치는 원효로 2가 거제산에 있었으나 1904년 철도 부설과 함께 이곳으로 옮겼고, 1935년에 영정을 봉안했다고 한다. 1467년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남이가 용산(현재의 삼각지 부근)에서 군사 300명을 모아 훈련했고, 1468년 반역죄로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되었기 때문에 그 연고로 용산에 사당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 안내판 내용을 고증해 보면, 전설처럼 여겨진다. 남이가 군사를 모아 훈련했다는 것은 문헌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예종실록』에 따르면 남이 등 반역죄에 걸린 사람 7명이 모두 시장(市)에서 환열(轘裂, 두 개의 수레가 몸을 양쪽에서 잡아당겨 찢어 죽이던 형벌)을 당했고, 머리도 잘려 7일 동안 장대에 매달리는 처벌을 받았다고 나온다. 새남터 처형장이 아니라 서울 도성 안의 시장에서 처형되었다.

 남이의 어머니도 환열을 당했다. 남이 어머니와 관련한 『실록』 기록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역사의 패배자에 덧씌운 더러운 글로 보인다. 관련자들의 가족도 모두 노비가 되었다. 남이의 딸은 한명회의 노비, 그의 소실 둘은 남이 사건과 관련한 다른 공신(功臣)들의 노비가 되었다. 그렇게 부인과 자녀 등이 노비가 된 관련자는 27명이나 되었다. 재산 역시 모두 몰수되어 공신이나 국가기관에 나눠주었다. 남이와 그들의 맺힌 한(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을 듯하다. 참혹한 죽음과 엄청난 피해를 당한 남이가 제당의 신이 되지 않을 까닭이 전혀 없다. 남이는 처형된 지 350년 만인 순조 18년(1818년)에야 유자광의 시기와 모함에 의한 억울한 죽음으로 인정되었다.

 여러 정황을 보면, 용산과 남이 장군의 관계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안내판에 있는 것처럼 ‘당굿’을 해 왔던 것으로 보아도 전국 곳곳에 있는 최영 장군과 임경업 장군 신당(神堂)과 같은 성격으로 남이 장군을 신(神)으로 모신 부군당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규태는 『역사산책』(신태양사, 1986년)에서 혜화동 남이 장군의 옛 집터에 세워진 사당과 탑과 관련해 “남이의 원한이 온 한국인에게 공감되어 전국 각지의 토속신으로 좌정하게 된 것이다. 서열의식의 아웃사이더요, 모난 것을 부정하는 한국사회의 질서감에서 아웃사이더인 남이 장군은 한국인의 영원한 공감 속에서 인사이더가 된 것이다”라며 그가 신이 될 수밖에 없는 남이의 삶을 안타깝게 보았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 야만적인 시기와 질투가 만연한 사회는 결코 미래로 갈 수 없다. 남이의 처절한 죽음은 조선의 우물안 개구리 조선과 조선 기득권 세력의 한계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남이 장군이 용산 사당의 주인공이 된 까닭은 조선 시대 형장이 있던 새남터가 가까운 곳이라는 지리적 환경, 물길인 한강이라는 특수성에 누군가가 엄청난 무용(武勇)을 자랑했으나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어 한(恨) 덩어리가 된 남이 장군을 접목했기 때문인 듯하다.

 남이 장군이 충무공(忠武公)? 10명의 충무공들

 사당 앞 비석에 새겨진 ‘충무공’, ‘충무문’을 보면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 ‘충무공’하면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으로 일체화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순신 장군 이외의 다른 충무공들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충무’는 시호(諡號)이다. 임금과 정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사람들에게 국가에서 내려주는 이름이다. 본래 중국 제도이다. 이순신 장군은 인조 21년(1643)에 ‘충무(忠武)’ 시호를 받았다. 시호에 쓰이는 글자에는 일반 한자의 의미와 다른 특별한 뜻이 부여되어 있다. 같은 글자라도 시호를 받는 사람마다 글자에 부여하는 뜻이 다르기도 하다. 또 같은 시호를 받은 사람들도 많다.

 이순신의 ‘충무(忠武)’의 경우, ‘충(忠)’은 ‘자신의 몸이 위태로울지라도 임금을 위해 몸을 바친다(危身奉上)’, ‘무(武)’는 ‘적(敵)의 창끝을 꺾어 나라의 욕됨을 막는다(折衝禦侮)’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1906년에 발표된 『청선고(淸選考)』에 실린 충무 시호를 받은 인물을 보면, 고려 시대 장수 조문주(趙文柱, ?~1269, 의병장 조헌의 선조)와 조선시대의 조영무(趙英茂, ?∼1414), 이준(李浚, 1441~1479, 남이 장군과 함께 여진족 토벌), 이순신(李舜臣, 1545~1598),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이수일(李守一, 1554∼1632), 정충신(鄭忠信, 1576~1636), 구인후(具仁垕, 1578~1658), 김응하(金應河, 1580∼1619)가 있다. 고려 1명, 조선 8명으로 총 9명이다. 『청선고』에는 남이 장군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청선고』가 저술된 이후인 순종 4년(1910)에 충무 시호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남이를 포함하면, 우리나라 충무공은 모두 10명이다. 언론 보도에 언급된 고려시대의 다른 충무공으로는 최필달(崔必達, ?~?), 박병묵(朴炳默, ?~?), 지용수(池龍壽, ?~?)가 있고, 홍위(洪瑋)가 저술한 『서담선생문집(西潭先生文集)』에는 신라 문성왕 때 인물인 홍신제(洪愼濟)가 충무공으로 나오나, 그분들의 충무 시호 부여 여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중국에도 충무공이 있다. 중국 삼국시대 제갈공명과 당나라 때의 곽자의․이성, 송나라 때의 악비와 문천상, 명나라 때 계금(季金) 등이 있다. 계금은 정유재란 때 조선에 들어와 이순신과 함께 바다에서 싸웠고, 노량대첩에도 참전했던 명나라 장군이다.

 남이 장군이 살았던 집은 현재 혜화동 서울대학교 병원 일대에 있었다. 남이 장군 무덤과 관련해 강원도 춘천 남이섬에는 남이 장군 묘소가 있다. 그러나 이 묘소는 전설인 듯하다. 또 『경향신문』(1970.7.27)에 따르면, 마포구 염리동 공사장에서 조선 초기 장군의 묘가 발굴되었는데, 그 묘의 지석(誌石)에 “의령 남공(南公) ’휘(諱) ○장군(將軍) 행(行)”이라고 쓰여 남이 장군의 묘라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하나 이 역시 검증되지 않았고 그 지석의 구체적인 내용도 정확히 전해지고 있지 않다. 정범조의 『남이장군전』에는 남양부 치북 대전리에 묘소가 있다고 한다. 오늘날 묘소가 있는 화성시 비봉면 묘소 그곳이다. 정범조의 기록으로 보면 화성 묘소가 진짜로 볼 수 있다.

군자감 터 표석 등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군자감 터 표석 등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디지털 데이터를 보관하는 조선 시대 군사물류창고 

 남이 장군 사당에서 용문시장을 지나 KT 용산IDC로 간다. 정문 앞에는 이곳의 역사를 말해 주는 네 개의 표석이 있다. ‘군자감 강감(江監) 터’, ‘3‧1운동 용산인쇄소 만세 시위지’, ‘대한제국 용산전환국’, ‘군량미 창고에서 디지털 데이터 창고가 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군자감 본부는 서부 여경방, 분감(分監)은 숭례문 안, 강감은 용산강 북쪽에 있다고 한다. 선공감(繕工監, 토목과 영선 담당 관청)의 강감도 용산강에 있었다고 하나 선공감 강감의 위치는 알 수 없다. 군자감(軍資監)은 군량과 군대 물품의 저장과 출납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금이 한강을 통해 왔기에 용산 한강가에 강감을 두었다. 군자감은 1392년에 설치되어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고 강감은 1413년에 세워져 1744년까지 존속했다. 강감터 표석에는 1395년~1898년으로 되어 있다.

 용산전환국은 대한제국 시대에 화폐 제조 기관이다. 여기서 제조한 화폐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화폐 뒷면에 독수리 문양이 새겨져 있다. 1904년 한일협약으로 폐지되었다. 3‧1운동 때는 이곳에 있던 인쇄소 노동자들이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용산 군자감 강감 공간처럼 각 시대의 요구를 적극 반영해 변신한 곳은 드물 듯하다. 전환국 시대 이후 이 공간에는 탁지부 인쇄국, 총독부 인쇄국, 조선서적주식회사, 한국인쇄주식회사, 국립체신학교, 정보통신부공무원 교육원, 국립전파연구원, KT원효지사, 현재의 KT용산 데이터 센터(IDC)가 들어섰다.

 ‘군자감 터’에서 원효대교 방으로 나오면 1편에서 언급했던 목월공원이 나온다. 공원 앞 횡단보도를 건너 ‘새남터기념성당’으로 간다. 약 30분 정도 걸린다. 용산 한강변 길을 걷다보면, 곳곳에 한강공원으로 나갈 수 있는 샛길이 있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그냥 한강공원으로 나가 걷는 것도 좋다.

새남터기념성당 김대건신부 동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새남터기념성당 김대건신부 동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종교와 신념을 위한 순교자들의 피와 땀이 베인 곳

 새남터기념성당은 1950년 한국천주교에서 땅을 매입해 1981년에 세운 성당이다. 성당 입구 왼쪽에는 ‘새남터기념관’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주문모 신부(1752~1801)의 동상과 한복을 입은 성모 마리아와 소년 예수상이 연이어 있다. 마리아는 우리나라 사람 얼굴로 보이나 소년 예수는 서양인 모습이다. 마리아와 소년 예수 모두 우리나라 사람 모습이든 서양 사람 모습이든 통일시켰다면 좋았을 듯하다. 엄마와 아들이 각각 다른 나라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것은 부자연스럽다.

 현대적인 한옥인 새남터 성당에는 9분의 성인(聖人)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성당 2층 난간 정면에는 ‘순교성지 새남터’, 2층 처마 아래에는 ‘천주교’ 현판이 있다. 1층 입구 계단에는 “삶은 순교입니다. 순교는 사랑입니다”란 글과 붉은 글씨의 “이곳은 새남터 형장입니다”란 글이 있다. 그 모두 이 새남터가 어떤 공간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용산향토사료편람(Ⅱ)』(용산문화원, 1999년)에 따르면, “서부이촌동 한강변 모래사장은 일명 노들 또는 새남터라 부르며, 한문자로 음역해 사남기(沙南基)라고도 한다. 본래 무녀들이 제사 지내던 곳으로 새남터란 죽은 사람의 넋을 하늘로 보내기 위해 ‘지노귀새남’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 시대에는 군사훈련장이기도 했고, 때로는 사형장으로 사용된 공간이다. 천주교 순교지로서는 최초의 박해였던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 등이 처형된 것을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 때 앙베르, 모방, 샤스탕 신부가, 1846년 병오박해 때는 김대건 신부 등이, 1866년 병인박해 때는 프랑스 신부 베르뇌 주교 등이 순교했다. 우리나라의 많은 신자들도 순교했다.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 신부가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구원 요청하면서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새남터에서 단종복위 운동을 했던 사육신(死六臣,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 유응부 또는 김문기)이 처형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사육신은 새남터에서 처형당하지 않았다. 『용산향토사료편람(Ⅱ)』에 따르면, 사육신 중 박팽년은 옥중에서 사망했고, 유성원은 자신의 집에서 자결했고, 성삼문 등 나머지 인물들은 지금의 서울 시청 부근에 있었던 군기감(軍器監) 앞길에서 처형당했다.

 성당 안 1층에는 순교자들과 관련한 각종 자료, 그들의 의복, 지녔던 십자가, 관련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성당 우측에는 갓을 쓴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있다. 성당 맞은편 한강철교 울타리에는 조광호 신부가 제작한 ‘김대건 신부의 축복’이라는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걸려 있다. 김대건 신부를 포함해 새남터에서 순교한 12명의 성인(聖人)‧복자(福者)가 그려져 있다. 그들은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 순례자들을 축복해 준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 동상 뒤편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서울 시내를 향해 두 팔을 활짝 편 흰색의 예수상이 반가이 맞아준다. 한편으로는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 때때로 소돔과도 같은 서울과 고통받는 서울 사람들을 향해 “나에게로 오라”고 하는 듯하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과 순교자들의 땅에 온 순례자를 위로하며 포옹해 주려는 듯하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가 계단 옆으로 돌면 16개의 기도처 표석이 있다. 그 각각 예수의 사형선고를 시작으로 십자가를 매고 가는 모습, 예수의 죽음 등, 예수의 고난의 길을 그린 동판이 붙어 있다.

 성당 옆 건물은 1945년에 세워진 이촌동교회이다. 정면 상단에는 길 잃은 어린 양을 앉고 있는 목동 예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성당과 교회가 한때 죽음의 공간이었던 새남터를 생명의 공간, 믿음의 공간, 부활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서빙고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서빙고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수양대군(세조)이 놀던 곳, 보안사 분실이 있던 곳

 성당에서 나오면 육교를 건너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육교를 건너 강변북로길을 따라 한강대교 앞까지 갔다가 이촌역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이촌역, 국립박물관과 국립한글박물관을 지나면, 이제는 반환된 옛 미군기지가 있다. 여전히 담장에는 “US Government Property 미군용시설 No Trespassing 무단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담장 위에는 둥근 철조망이 있다. 몇 미터 가면 ‘용산기지 미군장교숙소 부지’라는 표석이 담장 아래 있다. 이 부지는 현재 반환되어 개방되어 용산가족공원의 일부분으로 활용되고 있다. 반환되었을지라도 담장 위의 철조망은 오랫동안 이곳이 우리 땅이 아니었던 곳이었음을 확실히 깨닫게 해주는 장치들이다. 먹먹하다.

 미군기지 끝 서빙고역 앞 삼거리 부근은 ‘서빙고’가 있던 곳이다. 성당에서 1시간 정도 걸린다. 서빙고역에서 동쪽으로 대각선 방향 ‘용산구장애인커뮤니티센터’ 1층, I got everything 커피숍 정문 왼쪽 아래에는 조선 시대 서빙고가 있었다는 ‘서빙고 터’ 표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빙고는 겨울에 한강의 얼음을 잘라내 저장해 놓는 곳이다. 서빙고는 이 지역, 동빙고는 두모포에 있었다. 서빙고 얼음은 궁궐에 사용하거나 2품 이상 관료들에게 나눠주었고, 동빙고 얼음은 나라 제사용으로 사용했다.

 센터 정문 우측 끝 화단에는 ‘창회정 터’ 표석이 있다. 센터 뒤 언덕에 조선 시대에 유명했던 창회정(蒼檜亭)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경지략』에 따르면,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항상 이곳에 행차해 놀다가 권람(남이 장군의 장인)을 만난 곳으로 나온다. 홍직필은 한강 배 위에서 창회정을 보며, “다른 날에 내가 은거하게 되면(異時容我成眞隱), 창회정의 백 척(尺) 수루에 서겠다(蒼檜亭頭百尺樓)”고 노래했다(『매산집』). 수양대군이 놀고, 홍직필이 숨어 살고 싶었을 만큼 아름다웠던 곳이 창회정이다. 현재는 대원서빙고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서빙고 표석에서 왼쪽 큰길로 40미터 가면 대원서빙고아파트 정문이 나온다. 차가 들어가는 길을 막 지나 바닥을 보면, 하트 모양 또는 역삼각형 모양의 작은 동판이 있다. “‘빙고호텔’ 터. 1957~1990. 민주인사 등에게 고문 수사를 했던 국군보안사 서빙고분실 자리”. 군사독재 시절 악명높았던 그 음습한 곳을 표시해 놓은 것이다. 풍류의 터 ‘창회정’을 독재의 마수로 변질시킨 공간이다. 지금은 보통사람들의 일상 공간인 아파트가 들어서 그 흔적조차 없지만, 길바닥에 붙은 동판이 그 사실을 전하고 있다.

서빙고 부군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서빙고 부군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이성계‧단군‧김유신이 모셔진 강변 부군당들

 센터를 지나 반포대교 방향으로 190미터 정도 직진하다 부동산 사무실 옆 골목으로 들어가 10미터 정도 올라가면 왼쪽에 ‘서빙고 부군당’이 있다. 태조 이성계와 왕비 강씨가 주신(主神)이다. ‘청암동 부군당’처럼 태조만 있는 것과 다르다. 1910년대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된 것이나, 이 부근당은 1635년에 고쳐 지은 내용을 기록한 현판이 남아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다. 또 안내판에 청암동 부군당과 달리 태조 영정 같은 그림이 없어 아쉽다. 오랜 역사를 갖은 부군당이고, 대부분 닫혀 있는 상태이기에 부군당이 보유한 영정을 답사자들이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도록 청암동 부군당 안내판처럼 만들면 어떨까 한다. 『용산의 역사문화 여행』(용산문화원, 2008년)에 따르면, “태조 그림은 깃털이 달린 붉은 갓을 쓰고 청색 도포를 입고, 오른쪽 어깨 위로 화살이 담긴 화살통을 메고, 오른손에는 붓, 왼손은 붉은색 옷소매를 잡고 호랑이 가죽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런데 『용산향토사료편람(1)』에서는 복장 등으로 보아 “과연 태조인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고 평가하고 있다. 태조든 아니든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면 그걸로 족할 뿐이다.

 ‘서빙고 부군당’을 보았으니, 당연히 ‘동빙고 부군당’도 보아야 한다. 동빙고동에 있는 동빙고 부군당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다시 서빙고로로 내려와 반포대교 방향으로 가면 한강공원으로 내려갈 수 있는 이정표가 있다. 동빙고 부군당으로 가려면 녹사평대로를 건너야 한다. 육교로 건너가거나 그 밑에 있는 횡단보도로 건너가면 된다. ‘동빙고 부군당’은 동네 가운데 있다. 네이버 지도를 켜고 가면 편리하다.

동빙고 부군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동빙고 부군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동빙고 부군당’은 본래 두 개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산 위에 있던 ‘윗당’과 현재 위치에 있는 ‘아랫당’이다. 윗당은 6‧25 전후로 파괴 및 노후화되었고, 현재는 이 아랫당만 남아있다. 이 부군당은 특이하게도 단군할아버지와 단군할머니를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있다. 600년 또는 4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하나, 근거는 알 수 없다. 『용산향토사료편람(1)』에 따르면, 일설에는 구한말에 호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단군신을 모시는 신당을 세운 것이라고도 한다. 이곳 역시 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다. 안내판에도 단군신 사진은 없다.

흥무대왕 김유신 사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흥무대왕 김유신 사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강변 큰길로 나와 10분 정도 걸으면 오산중‧고등학교가 나온다. 고등학교 정문 바로 옆에 삼성리버빌아파트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 옆에 ‘흥무대왕 김유신 사당’ 안내판이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사당이 있다. 이곳 역시 부군당의 일종이다. 삼국통일에 기여한 김유신 사당이 한강가에 있는 이유는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이 부근의 한강물이 얕아 이곳을 통해 한강을 건너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 이곳 주민들에게 잘 대해 주었기에 주민들이 그를 부군당 주신으로 모셨다고 한다. 사당 입구의 문은 ‘용화문(龍華門)’, 사당 본전은 명화전(明和殿)이다. 김유신을 포함해 15명의 신상이 모셔져 있다. 이곳 역시 다른 부군당처럼 문이 닫혀있고 사진도 없다. 리버빌 아파트쪽에서 간다면, 101동 뒤편에 사당으로 연결되는 계단 통로를 이용하면 된다. 김유신은 최영, 남이 보다는 전국적인 신당 주인공은 아니다. 강릉과 충북 진천, 경북 군위 정도에만 신당이 있다고 한다.

보광사 무후묘 안 제갈공명 초상화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보광사 무후묘 안 제갈공명 초상화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삼국지』의 제갈공명 사당과 유관순 열사 추모비, 이태원 터

 다음은 중국 촉한(蜀漢)의 전략가이며 재상이었던 제갈공명(181~234, 제갈량)의 사당으로 간다. 보광동에 있는 ‘무후묘(武侯廟)’이다. ‘무후’는 제갈공명을 지칭한다. 시호는 이순신과 같이 충무(忠武)이고, 본명은 제갈량(諸葛亮), 공명(孔明)은 자(字)이다. 김유신 사당에서 아파트로 들어가 큰길을 따라 가다가 알파약국 맞은편에서 달맞이공원길로 들어가면 된다. 15분 정도 걸린다. 골목이 복잡하니 네이버 지도를 활용하면 편리하다.

 용산에 난데없는 제갈공명 사당이다. 우리나라 전체로 보아도 몇 개 되지 않을 정도로 희귀한 사당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용산에 주둔하면서 주둔지 마을 사람들을 이곳 보광동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마을에 있던 ‘무후묘’도 함께 옮겨 왔다고 한다. 제당 안에는 『삼국지』의 주인공인 제갈공명이 주신으로 모셔져 있다. 『용산향토사료편람(1)』에 따르면, 옛날 중국상인들이 한강으로 올라와 이곳을 지나며 서울로 들어갈 때 제갈공명을 모신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사당 곁에 있는 절인 보광사는 무후묘 인근에서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사당터가 세다는 이야기가 있어 기(氣)를 누르고 무후묘의 관리를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태원부군당 역사공원 안 유관순열사 추모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이태원부군당 역사공원 안 유관순열사 추모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네이버지도에서는 ‘보광사’(용산 장문로)로 검색하면 되고, 카카오맵에서는 ‘보광동 무후묘’로 검색해야 하면 된다.

 다음 코스는 ‘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이다. 이태원 앤티크 스트리트를 지나 해밀턴호텔, 이태원역을 거쳐 녹사평역 방향으로 가다가 다이소 옆 언덕길을 따라 100미터 올라가면 역사공원이 나온다. 25분 정도 걸린다. ‘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은 기묘한 조합이다. 본래 부군당만 있었는데, 부군당 곁에 ‘유관순열사 추모비’를 세우면서 ‘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이 되었다.

 부군당은 남산 중턱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훈련소가 생기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최초의 부군당은 광해군 때 생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의 주신은 다른 곳들처럼 이성계, 김유신과 같은 특정한 인물은 아니고, ‘부군당’ 명칭 그대로 ‘부군님’이 주신이다. 현판은 부군당이 아니라 부군묘(府君廟)로 되어 있다. 부군당 앞에는 남산타워에서 63빌딩까지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 서울을 바라보면, 이런저런 건물들로 깔끔한 풍경은 아니다. 때문에 밝은 낮 보다는 야경이 멋진 곳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전망대 바닥에는 ‘이태원부군당 역사공원 서울 밤풍경’이라는 동판이 있다.

 이 공원에 ‘유관순열사 추모비’가 있는 것은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뒤에 용산에 있던 ‘이태원공동묘지’에 안장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태원 공동묘지는 약 12만평으로 서울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였다. 그 뒤 열사의 묘소는 잊혀졌고, 이태원공동묘지도 도시화 진행에 따라 망우리로 옮겨졌다. 그런 역사를 안 용산 사람들이 2015년에 열사를 기억하고자 이 공원에 추모비를 세우고, 역사공원으로 만들었다.

 공원에서 서북쪽으로 내려오면 청년들의 성지와 같은 ‘경리단길’이 나온다. 그 길을 거쳐 ‘해방촌’ 방향으로 가다가 보성여중고 뒷길, 미군부대 담길을 통해 돌면 용산고등학교가 나온다. 정문 우측 담 아래에는 ‘이태원 터’ 표석이 있다.

 원(院)은 조선 시대 관리들의 여행 편의를 위해 숙식을 제공하던 국가기관이다. 남대문 밖 용산의 이태원(梨泰院), 동대문 밖 보제원, 서대문 밖 홍제원, 광희문 밖 전관원 등이 있었다. 이태원은 서울에서 경상북도쪽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이용했다. 『용산의 역사문화 여행』에 따르면, 용산고 북쪽 지역이 이태원 마을이었다고 한다. 梨泰院은 효종 때 배나무가 많아 생긴 한자이다. 이태원의 다른 한자 표기는 異胎圓이다. 이 지역에 여승들이 수도하던 운종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여승을 겁탈해 잉태하게 했다고 해서 생겨난 한자이다. 또 임진왜란 때 이곳에 항복한 일본군이 모여 살아 이곳을 ‘이타인(異他人)’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의 비극은 임진왜란 때만이 아니다. 『용산향토사료편람(4)』(용산문화원, 2001년)에 따르면, 청나라의 침입(정묘,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잡혀갔다 돌아온 양반집 부녀자들이 집에서 쫓겨나 이곳에 모여 살았다고도 한다. 환향녀(還鄕女)로 불리던 비극적인 여인들이다. 침략당한 책임을 지지 않고 피해자인 여자들에게 뒤집어 씌우는 비겁하고 한심한 조선 기득권 남성들. 그런 남성들과 그런 생각에 동의하는 여성 리더들은 오늘도 우리 사회 곳곳에 넘친다. 어느 날에나 사람이 사람답게 존중받을까.

당고개 순교성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당고개 순교성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다음 목적지는 ‘당고개 순교성지’이다. 신계역사공원 안에 있다. 숙대입구역, 남영역을 거쳐 약 40분 정도 걸린다. 당고개는 용산구청에서 성산교회에 걸친 지역의 옛 고개로 당집이 있어 당고개로 불렸다. 현재는 고개는 없어졌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천주교인 10명이 순교한 곳이다. 1846년 병오박해 때는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가던 김대건 신부가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10명 중 1명은 복녀(福女), 9명은 성인(聖人)‧성녀(聖女)로 시복시성(諡福諡聖)되었다. 복녀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마리아)이다. 그녀는 어린 자식들로 인해 배교했고 그 때문에 복자(福者)로 추대되지 못하다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로 인정받았다. 성지 서쪽을 제외하고 아파트가 둘러싸고 있어 답답한 느낌을 준다. 순교성지 정문 왼쪽에는 이해인 수녀의 「당고개 성지에서」 시비(詩碑)가 있다.

당고개 순교성지 이해인 수녀 시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당고개 순교성지 이해인 수녀 시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 춥고 아픈 겨울 이겨낸 천상의 매화 향기 맡고 싶어 기도의 산과 언덕을 넘어 당고개 순교성지에 왔습니다. 사랑하는 법을 삶으로 보여주신 님들처럼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 기도가 오직 사랑이게 해 주십시오. …… 옹기처럼 깨어지고 부서지고 낮아지는 사랑의 순교를 일상의 삶터에서 실천하는 가난하고 겸손한 순례자가 될 수 있도록 늘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 사랑의 성인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시를 읽노라면, 이해인 수녀가 썼지만, 그 시 자체가 순교자 자신의 이야기인 듯하다. 또 그들의 기도이며, 한없는 사랑과 믿음 그 자체인 듯하다. 이 시는 또한 당고개 순교성지의 순교자뿐만 아니라, 사람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시인의 헌시이기도 하다.

 아침 10시 마포역에서 출발해 저녁 6시까지 8시간의 답사를 마치는 이 순교성지에서 만난 뜻밖의 고귀한 시비는 그날의 모든 것을 정리해 주었다. 발걸음이 날아갈 듯하나 가슴에는 순교자들이 준 숙제가 나도 모르게 담겨있다.

 * 삼호정(三湖亭) 터 : 용산구 산천동 200
 * 산천동 부군당 : 산천동 199
 * 남이장군사당 : 용문동 106
 * 군자감 강감(江監) 터․ KT용산IDC : 원효로3가 1-2
 * 새남터기념성당 : 이촌동 199-1
 * 서빙고 터․창회정 터 : 서빙고동 199-3 용산구 장애인커뮤니티센터
 * 보안사 서빙고 분실 터 : 서빙고동 235-10
 * 서빙고 부군당 : 서빙고동 195-3
 * 동빙고 부군당 : 동빙고동 62
 * 흥무대왕 김유신 사당 : 보광동 155
 * 보광사(용산 장문로) 무후묘 : 보광동 419
 * 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유관순열사 추모비 : 이태원동 191-3
 * 이태원 터 : 용산동2가 1

 * 당고개 순교성지 : 신계동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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