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국가에 대한 신념, 원전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자신의 일에 대해서도, 심지어 연인한테조차 일정한 거리를 두고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는 성민과 대조적이었다.

수원은 몇 주 전에 들은 소문이 생각났다. 회사 내에 핵무기 개발을 옹호하는 비밀 동아리가 있다는 말이었다. 영준이 그 동아리의 주축 멤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신념과 자부심이 방향을 잃고 질주하면 맹목적 애국심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 왔습니다.”
수원은 영준과 함께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영준이 컴퓨터를 켰다. 암호 화면이 나타났다.
“암호를 쳐 주세요.”
수원이 암호를 넣었다.
“로그온 시간이 기록되나요?”
“네.”

로그온 시간을 살펴봤지만 수원이 접속한 것 외에는 다른 흔적이 없었다.
이튿날 서울 본사 감사실의 팀장 한 사람과 컴퓨터 해킹을 방어하는 전문가 두 사람이 수원을 찾아왔다.
“감사실의 엄진탁 팀장입니다.”

얼굴이 희고 눈이 차가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수원에게 보고서를 작성하게 된 경위와 그동안 작업한 경로 등을 자세하게 물었다. 사무실에 찾아온 사람, 집에 다녀간 사람 등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컴퓨터를 좀 보겠습니다. 혹시 해킹을 당했을지도 모르니까요.”
함께 온 컴퓨터 전문가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수원은 접속 암호를 알려 주었다. 메일 발송 여부를 체크하기 위해 개인 메일까지 모두 오픈해야 했다. 전문가 둘이서 두 시간 가까이 수원의 컴퓨터를 뒤졌지만 해킹이나 자료 유출 흔적은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일행은 다시 문제의 파일이 저장된 컴퓨터를 보기 위해 해운대 수원의 오피스텔로 이동했다. 한참 동안 문제의 파일을 열어보고서도 전문가는 별다른 문제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해킹 흔적이나 암호를 풀고 열어 본 흔적도 없었다. 웹상의 보안은 최상을 유지하고 있었고, 트로이 목마건, 백오피리스건 어떤 바이러스의 침입도 없었다.

그러자 전문가는 드라이버를 꺼내 컴퓨터 본체의 나사를 풀기 시작했다.
“한 박사님, 최근에 본체를 뜯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뇨. 구입한 후에 하드웨어는 한 번도 건드린 일이 없습니다.”
전문가가 본체를 열고 하드 디스크를 꺼내 조심스럽게 살폈다.
“드디어 알았습니다. 누군가가 하드를 꺼내 자기 컴퓨터로 복사해 갔군요. 하드를 뽑아서 복사하면 흔적이 남지 않지요.”

전문가는 고도의 두뇌전에서 이긴 사람처럼 흐뭇해했다.
“여기 보십시오. 파워 서플라이나 케이블, CPU 팬에도 먼지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하드 디스크는 방금 닦은 것처럼 깨끗합니다. 이럴 수는 없지요.”
“하지만 패스워드가 걸려 있었는데요.”

수원이 말허리를 끊었다. 그러자 전문가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건 OS에 걸려 있는 것이지요. 시스템 부팅 때 작동하는 것이라 하드 디스크의 OS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까지 막으려면 훨씬 고급의 보안 프로그램을 깔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그걸 사용하셔야 하겠습니다.”

수원은 등줄기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자신의 컴퓨터에서 자료가 유출된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오피스텔에 누군가가 침입했다는 뜻인데?’
번호키 고장 사건 때는 침입에 실패했었다. 그러나 이후에 침입에 성공해 정보를 빼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니면 오피스텔에 다녀간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수원은 자료 유출 사건 이전에 오피스텔에 다녀간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배성민, 주영준, 고유미, 정세찬뿐이었다. 모두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컴퓨터를 해체하고 하드를 빼내 복사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 컴퓨터는 당분간 우리가 보관하겠습니다. 하드에 남은 지문이나 DNA 채취를 좀 의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여기 저장된 파일은 다른 디스크에 옮겨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컴퓨터의 모든 파일을 CD에 복사해 주고 수원의 컴퓨터를 가지고 떠났다.

다음 날부터 수원에 대한 여러 가지 내부 조사가 까다롭게 진행되었다. 회사에 들어오게 된 경위부터 폭파 리모컨을 눌러 수중 폭발 사고를 일으킨 사고에 대해서까지 여러 각도에서 원점부터 다시 조사가 진행되었다.
수원의 오피스텔에 와서 가택 수색도 샅샅이 했다. 지문 채취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있는 체모도 수집해 갔다.

수원은 창피하고 억울했다. 그러나 애써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차분하고 담담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영준은 예전보다 자주 수원을 찾아왔다. 둘의 대화는 주로 회사에 관한 것이었다.
“저번에 액체 폭탄 공격 얘기가 나왔잖아요.”
“예”

“실은 제가 친분 있는 화학자들에게 그에 관해 문의를 해 놓았거든요.”
“그랬군요. 답변이 왔습니까?
영준이 흥미를 보였다.
“명확한 답은 없었어요.”

-물에 섞여 있으면서도 성질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다가 섭씨 100~200도에서 폭발하는 물질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수원의 질문 내용이었다. 제일 먼저 답을 보내온 사람은 KAIST 대학의 변 교수였다. 수원은 교환 교수로 와 있던 그를 파리 제6대학에서 처음 만났었다.
- 액체 폭탄 중 가장 강력한 폭탄은 여자의 눈물이지.

변 교수는 농담부터 한 줄 적어 놓고 뒤에 전문적 소견을 달았다.
- 물속을 흘러 다니면서 폭발하는 물질이라. 세상에 그런 물질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물속에서도 용기에만 담겨 있다면 폭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물질은 많다네. 보통 폭발물로 많이 쓰는 글리세린 같은 것이 그것이네. 러시아 군에서 개발한 C-14 프로토타입이라는 액체 폭탄도 있지. 폭발력이 대단하나 자네가 찾는 것 같이 물속에 흘러 다니며 폭발하는 물질은 아닐세. 이만하면 답이 되었나?

또 다른 답은 프랑스에서 왔다.
- 액체 폭발물로 볼 수 있는 것은 글리세린, 황산, 아세톤, 탄화수소, 액화수소 등입니다. 황산과 아세톤 등을 합성해서 만든 액체 폭발물은 열과 빛이 40초 이상 닿으면 폭발하는 성질이 있으나, 이것도 용기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국인이 보내온 메일도 흥미로웠다.
- 액화 폭발물이 실제로 사용된 예가 있습니다.

1987년 바그다드 발 대한항공 858기가 미얀마 상공에서 폭발하여 사라졌습니다. 범인은 북한이 보낸 김현희로 밝혀졌습니다. 김현희는 체포되어 한국에 와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때 김현희가 기내에서 사용한 폭탄이 술병에 든 액체 폭탄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세한 성분과 폭발 방법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것도 액체 폭탄이기는 하지만 폭발 장치가 있었고 용기에 담겨 있었다는 점입니다. 바닷물 속에 섞여 있으면서 온도 차이로 자동 폭발하게 되는 물질은 아직 없을 것입니다.

그 외의 답변도 상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수원은 아나톨리가 주의를 딴 데로 돌리려고 교란 작전을 펴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17. 열강 첩보기관의 음모

수원은 며칠 새 몸이 수척해졌다. 자료 유출로 회사에 피해를 끼친 것이 괴로웠다. 동료 직원들의 의혹 어린 눈초리도 견디기 힘들었고, 자신을 함정 속에 몰아넣은 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것도 불안했다.

수원은 저녁 식사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입맛이 없을 때 먹기에 적격이었다.
식사를 마친 수원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메일이 몇 개 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쟝 폴이 보낸 메일에는 엄청난 내용이 담겨 있었다.
- onesil님. 장 폴입니다.

여러 군데서 수집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재구성한 무르만스크의 KAL 902편 강제 착륙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첨부 파일로 보냅니다.
수원은 첨부 파일을 열었다. 역시 프랑스어로 쓰여 있었다.
- 1978년 4월 20일, 파리 오를리 공항 출발 한국 여객기 902편은 무르만스크 아만드리 호수에 강제 착륙 당했다. 그 배경은 참으로 놀랍고 복잡한 냉전시대의 첩보전이었다.

당시 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미국 카터 정부와 핵무장 문제로 극도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주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카터의 공약이 언젠가는 현실화될 것이라고 생각한 박정희는 한국이 독자적으로 살아남는 길은 핵무장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미국에 핵개발 지원을 요청했으나 철저하게 거부당한 박정희는 자체적으로 핵을 개발할 꿈을 꾸게 되었다. 박정희는 곧 해외에 있는 핵물리학자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미국이 아닌 제3국에 핵 개발 기술 지원을 은밀히 타진했다.

그 중에서도 원전 발전소 건립을 협의 중이던 프라마톰 회사의 소속 국가인 프랑스에 협조를 요청했다.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박정희는 믿을 만한 심복이 필요했다. 미국을 속일 수 있을 만큼 배짱이 두둑하고 영리한 사람이어야 했다. 박정희가 선택한 사람이 바로 전 KCIA 부장을 지낸 김형욱이었다.

“임자, 나는 임자만 믿는다. 나라를 구하는 길이 임자의 몸에 달렸다. 꼭 성공해야 한다”
“각하,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끝까지 나를 배신한 척해야 한다. 미국의 의심을 피하려먼 모질게 배신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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