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행 석수점 앞 평화 브론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기업은행 석수점 앞 평화 브론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지금은 서울시에 포함되어 있으나 예전에는 경기도에 속했던 곳들도 서울에는 많다. 대개는 서울이 확대되면서 서울 경계 경기도 지역이 서울에 편입된 결과이다. 이번 탐방지는 금천구이다. 과거에는 일부는 경기도에 속했고, 일부는 서울시 구로구에 속했던 곳이다. 금천구에도 많은 유적이 있으나 자료조사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띈 곳은 호암산 꼭대기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는 ‘한우물’이다.

 대개의 산에는 절이 있고, 절이 있으면 우물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한우물’을 산 위에 있는 절의 우물이나 산 중턱 등에 있는 흔하디흔한 약수터와 비교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직접 가 보고 발굴조사보고서 등을 보면, 일반적인 우물이나 약수터와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고고학으로 일부 규명된 바에 따르면 신라 시대에 그 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우물을 중심으로 금천구를 탐방한다. 금천구 코스는 두 편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이번 첫 편에서는 ‘시흥행궁 터’, ‘장택상 별장 터’, ‘한우물’까지다. 한우물에서 시흥향교까지는 2편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출발점은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지하철 1호선 석수역 1번 출구이다. 금천구청역을 출발점으로 호압사, 한우물까지의 코스를 정할 수도 있으나 너무 가팔라 등산이나 다름없게 된다. 주말의 가벼운 산책, 가족과 함께 하는 역사탐방을 위해 완만한 코스인 석수역을 출발점으로 정했다.

천주교시흥동성당 피에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천주교시흥동성당 피에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산업의 실핏줄 현장과 노사평화를 꿈꾸는 곳
 
 1번 출구 ‘시흥유통상가‧시흥산업용재유통센터’ 쪽으로 나오면, 시흥대로를 건너갈 수 있는 육교가 있다. 육교 끝에는 어떤 의도로 세웠는지 알 수 없는 흰색 기둥이 서 있다. 조형물인 듯, 육교를 튼튼히 지지해주는 건축물인 듯 오리무중이다. 도시를 걷다 보면 가끔은 이 작품(?)은 뭐지? 하는 때가 많다. 그런 경우이다. 기둥 주변을 살펴보면 그 의문을 풀어줄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초행길에 산 정상까지 다녀와야 하는 상황이라 갈 길이 바빠 눈을 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육교 건너 왼쪽 길(서울 방향)을 택해 시흥대로를 따라 올라갔다. 육교 아래 오른쪽 지역부터 시흥대로 위쪽은 서울시 금천구 지역이다. 그 때문인지 30미터쯤 앞 대로에는 ‘서울특별시. 어서 오십시오. 금천구’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걷다 보면 1번 출구 이정표에 있던 ‘시흥산업용재유통센터’란 말을 실감한다. 각종 금속 관련 중소기업들이 있다. IT, BT, AI 등 4차산업이 우리를 다 먹여 살릴 듯 해도 그 산업들은 70~80년대 우리 산업을 일으킨 주역이었고, 지금도 우리 산업의 뿌리이고 동맥이다. 낡은 건물과 간판 속에서 기계에 칠해진 윤활유와 땀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거친 쇳소리와 노동자들의 가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200여 미터쯤 가면 서울 시내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은행 지점이 보인다. ‘IBK기업은행 석수역 지점’이다. 중소기업에 혈액을 돌게 해 줄 은행이기에 현장인 그곳에 지점을 둔 듯하다. 은행 입구 왼쪽에는 브론즈로 만든 남녀의 상이 있다. 여인이 남자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다. 1987년 6월, 박동화 작가가 만든 ‘평화’란 작품이다. 다양한 갈등이 일어나는 시대에는 평화의 종류도 많다. 이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와 공간의 특수성으로 보면, 이 작품이 말하는 평화는 ‘노사(勞使) 평화’인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람과 사람들, 노동자와 경영자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에 의지하면서 함께 미래로 가는 과정 그 자체가 노사 평화가 아닐까.

천주교시흥동성당 안 이남규(루카, 1931~1993),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천주교시흥동성당 안 이남규(루카, 1931~1993),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빛이 있으라! 무지개가 드리운 성당

 곧바로 다시 길을 간다.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 밑 횡단보도를 건너 700미터쯤 가면 작은 오르막길이 있다. 봄과 여름, 가을에는 꽃들로 수가 놓였을 듯한 길이다. 겨울이라 입구 한쪽에 놓인 의자 뒤 나비와 작은 하트만이 꽃을 대신해 반긴다. 이 꽃 길은 시흥3동 주민들이 가꾸는 ‘장미길’이다. 장미꽃이 필 때 걷는다면 장미 향기에 취할 듯하다.

 언덕을 넘자마자 ‘금천폭포공원’이 있다. 표석에 따르면, 인공폭포로 금천구 관문 역할을 하는 랜드마크 상징성이 있고, 독산동‧가산동‧시흥동을 상징하는 세 줄기 폭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겨울철이라 폭포는 그저 생경하고 차가운 바윗덩어리일 뿐이다.

 물이 떨어져 내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아도 경사진 언덕 부근에 있는 이 폭포가 그런 랜드마크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곳에 꼭 많은 비용을 들여 이런 폭포를 만들어야 했을까.

 폭포를 지나자마자 오른편 ‘금천문화원 입구’라는 이정표를 따라 계단으로 오르면 문화원이 나온다. 서울 외곽 카페와 비슷한 모양이다. 급히 지은 듯 ‘문화’의 향기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폭포와 문화원 모두 알맹이가 빠진 듯하다.

 문화원 바로 아래에는 ‘천주교 시흥동 성당’이 있다. 성당에는 두 개의 문이 좌우에 있다. ‘생명의 문’과 ‘은총의 문’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교회미술 선구자 이남규(루카, 1931~1993) 공주대 교수가 성당 뒷벽을 활용해 제작한 스테인글라스 작품,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2100×513cm, 1979년)가 형형색색으로 맞아준다. 성당에 들어가기 전, 그 뒷벽을 밖에서 우연히 보았을 때는 벌레가 나뭇잎이 완전히 갉아 먹어 방충망처럼 되어 버린 듯, 혹은 정신줄 놓은 거미가 만든 거미줄, 혹은 벽이 그냥 어떤 추상화 작품인 줄 알았다. 그렇게 여겼던 그 벽면이 안에서는 햇빛을 온갖 색을 변주해 뿜어댄다. 빨강, 파랑, 노랑 등의 유리는 성당 바닥에 다시 무지개 다리를 만들고 있다. 이 성당의 신부들은 그 앞에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재림을 느끼면서 강론할 듯하다. 신도들 역시 이 성당에서는 언제나 무지개 다리를 건너며 소망을 빌 듯하다.

 성당 밖 오른쪽 모퉁이에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의 「피에타(Pieta, 연민)」와 꼭 닮은 조각품이 있다.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의 시신을 안고 있는 흰색의 조각품이다. 슬픈 듯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하는 듯한 마리아, 하늘을 향해 눈을 감고 있는 죽은 예수의 모습이다. 어느 누군들 자식의 죽음이 아프지 않을까만 마리아의 모습은 차분하고 평화롭다. 사랑이 가득한 모습이다.

 로마 산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진품을 직접 보는 것이 당연히 좋겠지만, 이 작품 역시 같은 정신을 담은 것이다. 멀리 로마까지 가서 「피에타」를 보지 않아도 마음으로 본다면 이 작품 역시 진품이다. 예수의 죽음과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 그 자체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든 누구든 누가 만든 것이 중요할까. 이 크지 않은 성당, 화려하지 않은 성당에서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피에타」를 만난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된다. 모든 것이 다 마음먹기 나름이다.

880년된 은행나무와 선정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880년된 은행나무와 선정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선정비(善政碑)가 진짜 선정의 결과일까? 

 성당에서 시흥대로로 내려와 서울 방향으로 직진하다가 우측 독산로, 은행나무로를 거쳐 가면 ‘은행나무시장 5거리’가 나온다. 10여 분 거리다. ‘은행나무시장’이나 ‘카멜리아스포츠센터’로 검색해 찾아가면 편리하다. 이 지역은 금천현 관아와 정조(正祖, 조선 22대 왕, 1776~1800 재위)의 ‘시흥 행궁(行宮, 왕이 임시 머문 곳)’이 있던 곳이다. 또 수령 880년의 은행나무 세 그루가 카멜리아를 중심으로 대각선으로 서 있다. 신령한 힘과 마을 사람들의 보호가 없었다면 지금껏 살아남았을 수 없는 1천 년이 되어가는 고목들이다.

 교차로부터 살펴보면, 교차로 한쪽 길 중 카멜리아 앞 도로 가운데에 은행나무 한 그루(높이 8.5미터, 둘레 6.1미터)와 ‘시흥현령 선정비’ 4개가 줄지어 있다. 선정비로 인해 동네에서는 ‘비석거리’로 부른다. 네이버나 카카오지도에서 ‘비석거리’로 검색하면 나오지 않는다.

 선정비는 1879년부터 1892년까지 재임한 현령 중 4명에 대한 비석이다. 비석 명칭은 한 사람은 ‘청덕애민선정비(淸德愛民善政碑, 맑은 덕과 백성을 사랑해 착한 행정을 한 것을 기리는 비석)’, 다른 세 사람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는 비석)’이다. 재임 기간은 최소 9개월, 최대 3년이다. 평균 1년 반 정도이다. 현령들이 그 짧은 기간 동안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이곳 백성들이 그들의 ‘공로나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비석을 세웠을까?

 요즘의 각급 선출직 임기는 최소 4년 이상이다. 또 공공기관장들도 최소 2년 이상이다. 현실에서 그들 선출직이나 공공기관장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정비는커녕 임기 뒤에 감옥에나 가지 않으면 다행인 경우가 많다. 늘어선 조선 시대 선정비는 오늘의 모습과 대비되어 혼란을 준다.

 ‘시흥현령 선정비’ 주인공들의 선행 여부는 확인하지 않았다. 굳이 확인하고 싶지도 않다. 선정비와 관련한 여러 기록을 보면, 『춘향전』의 변사또와 같은 수령들로 인해 백성들이 흘린 피눈물의 반어법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악독한 수령이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빨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거나 일찍 파직되는 것이 그 수령의 공로이며 공덕이었던 듯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가고 나면 다른 악독한 수령들이 부임해 오는 것도 일상인 시대이기도 했다. 참된 수령은 잊혀지고, 가짜 수령들만이 비석으로 살아남아 진짜가 되어버리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의 선정비에 그렇게 남아있다. 그래도 금천구 향토사학자들은 혹시 모르니, 이 선정비 주인공들의 삶을 확인해 진짜인지 가짜였는지 안내판에 기록해 놓아야 할 듯하다.

 우리 시대 선출직들에 대해서도 선정비를 세우는 것을 한 번은 생각해 봐야 할 듯하다. 더 나쁜 사람들이 우리의 수령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어떤 사람을 우리의 선출직으로 뽑을지 더 고민하며, 그들이 그저 감옥이나 가지 않을 정도까지만 일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정조의 시흥행궁과 매연에 갇힌 880년 된 은행나무들

 길옆 카멜리아 앞에는 두 번째 은행나무가 있다. 높이 14미터, 둘레 8.6미터이다. 이 나무 근처에는 ‘동헌관아 자리’라는 표석이 두 개 있다. 금천현(시흥현) 관아 동헌 자리로,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융릉(隆陵)에 행차할 때 행궁(行宮)으로 사용했던 곳이라고 한다. 정조는 1795년에 두 번, 1797년에 두 번 시흥 행궁에서 머물렀다. 이로 인해 금천현은 ‘일어난다’는 뜻의 시흥(始興)으로 개명되었다. 현재의 시흥행궁이 있는 시흥동은 경기도 시흥시와는 관계없다. 정조가 세 번이나 머문 ‘시흥행궁 터’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위치가 고증되지 않은 듯하다. 은행나무가 있는 이곳 외에 ‘시흥5동 926’도 시흥행궁이 있었던 곳이라는 주장이 있다.

 세 번째 은행나무는 카멜리아 좌측 골목으로 몇 미터 들어가면 보인다. 높이 10.8미터, 둘레 7.3미터이다.

 지금껏 살아남은 세 그루의 은행나무들은 정조가 오고 갈 때, 정조가 머물 때 정조와 그 시대 사람들을 직접 지켜본 나무들이다. 심지어 고려와 조선 시대,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나무들이다. 그러나 그 나무들이 서 있는 공간을 보면, 우리의 수준과 한계를 정확히 보여준다. 그 나무들은 모두 특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로 인해 매연과 소음 속에서 연명해 가고 있다. 한 그루는 길 한복판 일부를 섬으로 만들어 가두었고, 다른 한 그루는 건물 앞 모퉁이에서 보도블럭에 갇혀있다. 다른 한 그루는 그나마 형편이 나으나 주변 건물에 포위되어 있다. 이 나무들이 우리 시대까지 살아남는다면 기적일 듯하다.

 880살! 아니 천 살이라고 해도 큰 차이가 없다. 100년도 못 사는 우리가 ‘보호수’라는 팻말 하나 덜렁 붙여놓는다고 제대로 보호하는 것일까. 서울 시내에 880살 이상이 된 나무가 몇 그루나 있나! 세 그루 합치는 무려 2,500년이나 된다. 그런 엄청난 역사를 갖은 나무를 이렇게 홀대하다니. 은행나무들은 최소한 산업화 시대 이후 단 1분 1초도 제대로 숨 쉬거나 잠들지 못했을 듯하다.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면서도 죽이는 줄 모르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서울시와 금천구 모두 반성해야 한다. 이 나무들은 연륜이 말하듯 그 어떤 멋진 예술 작품보다 위대하다. 게다가 살아있는 생명이다. 말로만 생명 존중을 떠들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행동해야 할 때이다.

장택상 별장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장택상 별장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동네 이곳 저곳에 흔적이 남은 ‘장택상 별장 터’

 다음 코스는 독립운동가이며 우리나라 초대 외무부장관, 제3대 국무총리였던 장택상(張澤相, 1893~1969)의 ‘별장 터’이다. 은행나무시장 5거리에서 카멜리아 건물 대각선 방향에 있는 ‘쌀통닭’ 골목으로 들어가 곧바로 직진한다. 300미터쯤 가면 ‘별장길어린이공원’이 나온다. ‘별장길’ 표현이 바로 예전에 이 근처에 장택상 총리의 별장이 있던 흔적의 하나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 동네에는 ‘별장’이 들어간 상호 등도 많다. 장택상 별장이 동네의 여러 명칭에 사용된 것을 보면, 최소한 장 총리는 이 동네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남은 듯하다. 그가 동네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다면 ‘별장’이란 말 자체가 지워졌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공원에서 계속 직진해 ‘건우한마음아파트’를 지나 끝까지 가면 산기슭이 나온다. 이정표에는 두 방향이 나온다. 산으로 올라가면 관악산(서울둘레길), 내려가면 시흥사거리이다. 마을 어르신들에 따르면, 그 산기슭 일대가 별장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아무 흔적도 없다. 또 표석도 그곳에 있지 않다.

 ‘장택상 별장 터’ 표석은 산기슭에서 왼쪽 길을 따라 100미터 가면 우측에 있는 생태공원주차장 옆 계단 위로 올라가면 찾을 수 있다. 주차장 위는 금천구에서 조성한 공원인 ‘금천녹색광장’이다. 표석은 1번 어귀마당 입구, 신도브래뉴아파트 102동 뒤편에 있다. 안내판의 별장터 주소는 시흥동 411-1이나 그 주소를 지도에서 찍어 찾으려면 찾으면 찾을 수 없다. 카카오지도에서 ‘금천녹색광장’을 검색하거나, 네이버지도에서 금천녹색광장의 주소를 찍어 활용하는 것이 좋다. 네이버지도에서는 ‘금천녹색광장’은 검색되지 않는다.

 유적지를 다니다 보면, 가장 많이 활용하는 지도가 네이버와 카카오지도이다. 그 각각 장단점이 있다. 두 개 모두 공통으로 나올 때도 있으나, 때때로 어느 한쪽에만 나오는 경우도 의외로 많다. 위치도 전혀 다를 때도 있다. 두 지도 모두를 활용해 비교해 보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구글 지도는 우리나라 실정을 구체적으로 반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유적 답사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다수이다. 지도 만큼은 ‘신토불이(身土不二, 몸과 땅은 하나)’가 맞다. 우리 것이 최고다.

 장택상 총리는 자신의 가족들 일부가 저명한 친일파였으나, 그 자신은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특이한 이력을 갖은 인물이다. 해방 이후의 활동은 각종 의혹과 논란이 있다. 이념과 폭력의 시대, 인간성 파괴의 시대를 좌충우돌하며 살았던 한 사람이다. 정의로운 시절과 불의했던 시절이 오락가락하기도 했다. 권력과 명예를 추구했던 지식인의 한계도 여실히 드러낸 인물이다.

산복약수터 하늘로 나아간 대나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산복약수터 하늘로 나아간 대나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약수터에서 만난 생명의 존엄함과 돌무더기들

 이제사 본격적으로 ‘한우물’로 출발한다. 40분 정도 걸린다. 처음 이 공원에 올라왔을 때 있었던 공원 끝 화장실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걷는다. 산길을 따라 6분 정도 올라가면 ‘산복약수터’가 있다. 물 한 모금 받아 마시고 석수역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몸을 쉬며 숨 한번 편히 고른다.

 이곳 약수터를 약수터로만 보기엔 아깝다. 물이 흘러내리는 곳 위를 보면 대나무 한 줄기가 서 있다. 남쪽 지방의 두꺼운 왕죽(王竹)은 아니다. 엄지손가락 두께 정도이다. 물을 뜨다가 얼핏 보았을 때는 그냥 가느다란 대나무였다. 약수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비와 눈으로부터 피하게 해 줄 수 있는 반투명 플라스틱 벽과 천장이 있는 곳에 대나무가 있어 의아했지만 거친 숨을 쉬는 마당에 달리 다른 생각도, 관찰력도 발동되지 않았다.

 잠깐 쉬자 눈길은 자연스럽게 대나무 줄기를 따라갔다. 대나무는 천정을 뚫고 하늘로 나가 있다. 탄성이 나온다. 천정의 반투명 플라스틱판 한 개가 없다. 그 빈칸으로 대나무가 뻗어 나갔다. 처음부터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그 뒤로 대나무를 위해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모른다. 이유가 뭐든 이 산속에서 흔하디흔한 대나무 한 줄기를 위해 누군가 그렇게 공간을 비워놓고 그리로 대나무 줄기를 하늘로 오르게 했다.

 그 옆에, 그 뒤에도 대나무가 있다. 굳이 그럴 까닭도 없다. 누가 시킨다면 귀찮다고 당장에 잘라낼 만큼 하찮은 대나무이다. 특별하지도 않은 가냘픈 한 가닥일 뿐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한 가닥 대나무를 위해 천정의 플라스틱을 한 개를 드러냈다.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이 하늘을 열었다. 탐방길에서는 가끔은 사소한 듯 보이나, 큰 감동을 주는 일들을 이렇게 만나곤 한다. 그게 탐방에서 얻는 기쁨이고 생명력을 키우는 방법이다.

 약수터 왼쪽 길로 다시 몇 걸음 올라가면 ‘호암로’ 아래에 난 굴다리가 나온다. 굴다리를 지나 산으로 계속 오르면 길 곳곳에 돌무더기, 돌탑이 있다. 돌무더기는 크지 않다. 돌탑 역시 소박하다 못해 그저 그렇다. 자연 그대로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렇게 돌무더기가 많은 곳은 처음이다. 이 길은 ‘신선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안내판에 따르면 시흥동 지역의 토템신앙으로 기도를 올리던 장소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누군가 소원을 빌기 위해 쌓았던 작은 돌무더기가 계속 다른 어떤 이들에 의해 물감이 번지듯 번져나간 듯하다. 무엇을 빌기 위해 그렇게 돌을 모았을까. 사람마다 사정이 다 다르다. 그래도 대개는 비는 목적은 거의 같다. 특히나 이곳의 소박한 돌무더기를 보면, 고관대작이나 부귀영화를 꿈꾸는 기도 목적은 확실히 아닐 듯하다.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소망인 가족의 건강과 안녕이 최대한의 꿈일 듯하다.

 다른 보통사람들처럼 소망하면서 돌 하나를 돌무더기에 올려놓고 길을 간다. 이곳저곳 답사를 다니다 성당이나 교회, 혹은 절을 가기도 한다. 그런 곳들이 주는 엄숙함과 고요함과 달리 신선길 돌무더기에서는 자연과 함께 하는 평온함이 가슴을 열어준다. 그 어떤 절대적인 신에게도 매달리지 않아도 충분히 소원이 이뤄질 듯하다. 그저 마음으로 빌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함께하면 소망도 자연(自然)하게 될 듯하다. 그뿐이다. 의례와 절차, 누군가의 가르침도 없다. 홀로 걷는 길이나 뭔지 모를 든든함에 가쁜하다. 돌무더기들이 잇따라 등장한다. 그 돌무더기에 마음으로 돌을 얹으며 간다. 몇 분 더 가면 옹달샘약수터가 나오고, 왼쪽 길로 간다. 돌무더기는 계속 곳곳에서 반긴다. 얹은 돌도 계속 늘어간다. 소원이 이뤄지리라!

금천의 토템신앙 돌무더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금천의 토템신앙 돌무더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돌무더기와 돌탑을 닮은 불영암 부처

 곧이어 ‘호압사 산책길’ 이정표가 나온다. 가던 방향으로 조금 더 가면 다시 불영암과 시흥계곡 이정표가 나온다. 한우물이 있는 불영암까지는 800미터란다. 그 바로 위에는 ‘호암산 등산로 안내도’, ‘한우물 전망길’ 등의 안내판이 있다.

 10여 분 계속 걸어 올라가면 ‘칼바위 조망점’이 나온다. 멀리는 광명시, 가산디지털단지, 목동, 난지공원, 여의도, 인왕산이 보인다. 답사날에는 미세먼지가 많아서인지 먼 거리 풍경은 흐릿했다. 그 아래 칼바위도 보이나, 칼바위 전체 전체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조망점에서 칼바위를 보면, 바위가 칼날을 뉘어 놓은 모습이다. 맞은 편 거대하게 서 있는 관악산벽산타운아파트가 칼바위를 초라하게 만든다. 아파트가 없었다면, 금천구 시내를 향해 예리한 칼날을 번득일 텐데 아쉽다. 마찬가지로 조망점의 위치도 뭔가 부족하다. 바로 앞 아파트로 탁 트인 시원한 맛이 없다. 날씨라도 맑았다면 좋았으련만 이래저래 답답하다.

 칼바위에서 호암산성 안에 있는 한우물까지는 180미터 거리다. 먼저 8분쯤 가면 호암산성의 ‘서측 추정문지’가 나온다. ‘서쪽문으로 추정되는 터’을 뜻한다.

 호암산성은 금천구의 주산인 호암산(347미터) 정상을 둘러싼 산성으로 둘레 1,547미터, 마름모꼴 형태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에 신라가 삼국 통일할 때 군사전략거점으로 건축했다고 한다. 수원과 한강을 잇는 육로와 남양만에서 들어오는 해로를 방어 및 공격하기 좋은 장소이다. 당시 한강 유역의 18개 신라 산성 중 북한산성, 남한산성, 이성산성에 이어 네 번째로 긴 산성이다. 산성 안에는 한우물(제1우물지)과 제2우물지, 건물터, 석구상(石狗像)이 남아있다.

 ‘서측 추정문지’를 지나 3분 정도 가면 불영암이 나온다. 사찰이다. 한우물은 불영암에 거의 붙어 있다. 한우물이 불영암의 연못처럼 보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우물이 주인이고 불영암이 객인데도 지금은 그렇게 보인다.

불영암 바위위의 부처님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불영암 바위위의 부처님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불영암 입구에는 올라오는 길에서 보았던 돌무더기와 돌탑을 합성한 듯한 모습의 돌무더기탑들 줄지어 서 있다. 탑이나 탑이 아니고, 돌무더기이나 돌무기도 아니다. 크고 다른 돌덩이를 모아 돌무더기를 만들고 그 위에 넓적한 돌들을 몇 층 쌓아 올렸다. 못났으나 인공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전국 대부분의 크고 작은 절에 있는 세련된 탑과 비교할 수 필요조차 없다. 원시적인 탑이며, 탑이 아닌 탑, 돌무더기가 아닌 돌무더기들이나 이 돌탑과 돌무더기에는 호암산 돌무더기와 돌탑신앙이 그대로 들어있다. 이 불영암의 주인인 부처님도 다른 곳의 멋진 탑들보다 이 탑을 더 귀하게 여길 듯하다. 거칠고 투박하나 보통사람들의 신심(信心)이 쌓인 탑이기 때문이다.

 불영암 대웅전 옆을 보면 커다란 부처님 머리가 바위에 얹혀 있다. 큰 바위를 몸뚱이로 하고, 그 위에 머리만 새로 시멘트로 빚어 올려놓았다. 특별한 장인의 솜씨는 아닌 듯하다. 또 바위와 조화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들 어떠랴. 이 역시 돌무더기와 돌탑의 연장선으로 보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

 부처님은 금천구와 서울 서북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서울을 바라보며 부처님은 무슨 생각을 할까. 부처님 머리 옆에는 바위를 둘러싼 비닐하우스 형태의 산신각이 있다. 산신령 곁에 호랑이 한 마리가 마치 반려견과 같이 앉아있다. 여러 절의 산신각에 있는 호랑이들 중 가장 귀엽다. 거칠고 무서운 호랑이를 닮은 이 산 이름 호암산(虎巖山)과는 전혀 다르다. 호암산을 호령하는 호랑이가 아니라, 산신령을 모시는 호랑이라 그런가 보다.

한우물(제1우물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우물(제1우물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서울 안 최고(最古, 最高) 우물 또는 연못(한우물)

 절 바로 옆에는 이번 1편 탐방의 시작과 끝인 한우물(제1우물지)가 있다. 안내판에 따르면, 한우물은 ‘큰 우물’ 또는 ‘하늘 연못(天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호암산성에는 두 개의 우물이 있다. 한우물은 복원되었고, 한우물에서 200미터 옆에 있는 복원되지 않은 제2우물지가 있다. 그 모두 서울에서 만큼은 하늘 아래 첫 우물 또는 연못이다. 서울 하늘 아래 이렇게 높은 곳에, 이렇게 오래된 연못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등산객들은 그저 그런 연못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연못의 역사를 알면 단순한 연못이 아니다. 비록 규모는 백두산 천지에 비해 새발의 피에 불과할지라도 서울에 있는 백두산 천지라고 평가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한우물이 있는 호암산은 『선조실록』[선조 26년(1593년) 10월 22일]에 기록된 류성룡의 언급, “광주의 남한산성, 수원의 독성(禿城, 독산산성), 금천의 금지산(호암산)은 기이하게 험해 이곳을 지키면 호남을 방어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던 것처럼 서울 근교의 핵심 요새지이다.

 류성룡의 통찰력처럼 서쪽이 절벽이기에 동쪽에 성을 쌓는다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이유로 신라는 6~7세기경에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성을 쌓고 연못도 쌓았다.

 호암산성과 한우물을 문헌에서 찾아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금천현」에서는 호암산이 있는 이 지역은 처음에는 백제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점령해 잉벌노현(仍伐奴縣)으로 삼았고, 신라 경덕왕 때 곡양이 되었다고 한다. 또 호암산은 금천현의 동쪽 5리에 있고 호랑이 형태의 바위가 있어 호암산이라고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호암산에는 돌로 쌓은 옛 성이 있는데, 둘레가 1,681자이며, 성 안에는 큰 연못(大池)이 있어 가물 때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현재도 사실이다.

 『경기지방의 명승사적(京畿地方の名勝史蹟)』(조선지방행정학회, 1937년)에서는 “금지산(衿芝山, 호암산) 위 암자 근처에 옛 성 터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가 판 연못이 현존하고 있다고 하는데 사실로 여길 수 있는 근거는 없다”고 했다. 두 문헌 모두 호암산에 옛 산성이 있고, 연못이 있다는 이야기다. 『경기지방의 명승사적』의 언급처럼 한우물은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가 판 것은 아니다. 고고학 발굴조사에 따르면 신라의 연못이고 조선 시대에 개조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 2월, 전라병마절도사 선거이(宣居怡, 1550~1598) 장군은 이 호암산성에서 진을 치고 전라순찰사 권율 장군(權慄, 1537~1599)의 행주대첩에도 기여했다. 그때 선거이 부대도 호암산성의 우물을 활용했다고 한다.

 한우물과 한우물 주변의 유적은 『한우물-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총간 제16책-』(서울대학교박물관, 1990)에 따르면, 1989년 서울시와 당시 관할 지자체였던 구로구에서 정비복원 계획을 세우면서 1989년과 1990년 두 차례 발굴조사를 했다.

 한우물의 경우, 신라 때 연못은 17.8미터, 너비 13.6미터, 깊이 2.5미터이다. 조선 시대 연못은 서쪽으로 약간 이동시켜 길이 22미터, 너비 12미터, 깊이 1.2미터 규모로 바뀌었다. 한우물과 제2우물지, 그 인근 건물터 등에서 다량의 통일신라시대 토기와 기와 조각도 출토되었다. 한우물은 제2우물지보다 더 오래된 우물이다.

 『문화의 산길 들길』(정재훈, 화산문화, 1996년)에 따르면, 신라 축조 한우물의 경우 경주 안압지의 돌쌓기 기법과 같다고 한다. 서울에서 안압지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연못이기도 하다.

 특히 제2우물지 바닥에서는 “仍伐內力只乃末....(잉벌내력지내말....)”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 숟가락 1점이 출토되어 이 유적이 최소한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임을 밝혀 주었다. 또한 한우물의 경우, 발굴과정에서 찾은 조선 시대에 쌓은 한우물 석축 남쪽 맨 위의 돌에 새겨진 ‘석구지(石狗池, 돌로 만든 개 연못)’로 인해 한우물의 본래 이름이 ‘돌개 못’인 것을 알 수 있고, 또 그 위에 있는 석구상(石狗像)이 구전과 달리 ‘해태’가 아니라 ‘개’인 것도 알려주었다. 현재의 ‘한우물’은 그 뒤 생긴 이름인 듯하다.

 한우물은 서울 하늘 아래 첫 우물이다. 가장 오래된 우물이다. 서울 주변 그 어느 산 위에 이렇게 큰 우물 또는 연못이 있나.

석구상(돌로 만든 개)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석구상(돌로 만든 개)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호암산과 선거이 장군

 선거이 장군이 임진왜란 때 현재의 호암산에 머물렀는지를 살펴보면, 신흠(申欽, 1566~1628)은 「권율신도비(權慄神道碑)」 비문에서 권율이 선거이와 군사를 나누었고, 권율은 행주산성으로 가고 선거이는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도록 했다고 나온다. 권율의 사위였던 이항복은 『백사집』에서 권율이 선거이로 하여금 “금주산에 군영을 만들어 멀리서 성원”하게 했다고 한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는 ‘금천산(衿川山)’으로 나온다. 『선조수정실록』[선조 26년(1593년) 2월 1일]에는 “금천(衿川) 광교산(光敎山)”으로 나오기도 하나, 광교산은 오류인 듯하다. 또한 선거이와 직접 관련은 없으나 같은 산으로 볼 수 있는 다른 사례로는 류성룡이 언급한 “금천의 금지산(衿之山)”이 있다. 금주산, 금천산, 금지산 모두 같은 산이며, 한우물이 있는 현재의 호암산으로 추정된다. 금주산은 『금양잡록』 발문에도 언급될 정도로 보편적인 명칭있던 듯하다. 호암산이란 명칭이 조선 중기에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보면, 후대에 만들어진 명칭으로 볼 수 있다.

 선거이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의 군관으로 1587년 이순신이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이었을 때, 이순신과 함께 녹둔도에서 여진족을 막았다. 1588년 1월 여진족 토벌전인 시전부락 전투에도 이순신과 함께 참전했다. 1588년 거제 현령을 거쳐 성주 목사, 1591년에는 진도 군수에 임명되었다. 1593년 1월에는 전라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경기도 오산의 독산산성 전투에서 전라 순찰사 권율과 함께 승리했다. 2월에는 금천 금주산(호암산)에 주둔해 권율의 행주대첩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독산산성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9월에는 함안에 주둔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기도 했다. 1594년 9월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의병장 김덕령과 곽재우 등과 함께 거제도 장문포 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1595년에는 충청 수사에 임명되어 수군대장으로 이순신과 함께 했다. 안타깝게도 1598년 제2차 울산성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이순신 만큼이나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며 온갖 부상을 겪다가 결국엔 이순신처럼 전쟁터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이순신보다 항상 한발 먼저 관직 생활을 했고, 이순신처럼 북방과 남방에서 활약했다. 임진왜란 때는 때로는 육군으로, 때로는 수군으로 전국 각지의 전쟁터를 누볐던 백전노장이다. 그와 이순신의 관계는 친구이며, 동료이고, 또 선배이며 동시에 후배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전쟁터에서 동고동락했던 진짜 친구이다.

 이순신의 1595년 9월 14일 일기에는 충청 수사였던 선거이와 작별하며 지은 시도 남길 정도로 몸과 마음이 하나였던 친구이다.

 [1594년 9월 14일. 선 수사(선거이)와 이별하면서 선물로 짧은 시를 짓기를, “북쪽에 올라갔을 때, 같이 애쓰며 고생했고(北去同勤苦, 북거동근고), 남쪽에 내려와서도 더불어 죽고 삶았네(南來共死生, 남래공사생). 한 잔 술, 이 밤의 달과 함께 마시고 나면(一盃今夜月, 일배금야월), 내일은 헤어져 아쉬운 정(情)만 남으리(明日別離情, 명일별리정).”라고 했다.](이순신, 『난중일기』, 박종평 번역, 글항아리, 2018년)

 칼바위, 팽이바위 전설과 선거이 부대

 이순신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안다. 그러나 이순신과 함께 했던 사람들, 또 그 전란의 시대를 이겨낸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호암산의 선거이 역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선거이 장군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선거이 장군은 언제 현장 최일선에서 가장 충실히 자신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국가와 백성을 위해 온 몸을 던진 분이다. 그의 고귀한 삶을 호암산에서 만날 수 있다. 여기 호암산에는 그와 조선의 군사가 국가의 존망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건너편 행주산성의 전황을 주시하고, 수원과 한강에 이르는 길을 관찰하며 불퇴전의 결의를 다졌던 그날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한우물에 오르다가 보았던 칼바위는 임진왜란 때 선거이 군대의 흔적이 전설로 남은 곳으로 볼 수도 있다. 또 칼바위 밑에 있는 팽이바위에도 관련 전설이 있다.

 호암산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이 마주치자 장수끼리 싸움 대신 칼바위에서 턱걸이 내기를 했다고 한다. 누구든 100회를 하면 패배한 쪽이 물러가기로 했다고 한다. 조선군 장수는 100번을 채웠고, 일본군 장수는 99번을 했으나 100번째는 힘이 빠져 칼바위에 오르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약속대로 일본군은 싸움 없이 물러갔다. 조선군 장수는 승리한 뒤 기념으로 칼바위 밑으로 오줌을 누었는데, 줄기가 세차 바위 한가운데가 패였다고 한다. 그 바위가 ‘팽이바위’라고 한다. 전설이나 장수의 기개가 꽉 찬 곳이 칼바위와 팽이바위다. 칼바위 조망대에서 큰 호흡 한 번 하면서 옛 전설 속 장수의 호연지기를 들이마시면 좋을 듯하다.

 그런데 칼바위의 조선군 장수는 선거이 장군이라고 볼 수는 없을 듯하다. 선거이 장군은 바로 직전 독산산성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 전설은 아마도 선거이 부대가 호암산성에 주둔하면서 생긴 전설인 듯하다. 전설일망정 일본군과의 혈전 없이 지혜와 힘으로 일본군을 물리쳤다는데 의의가 있다.

아직 복원되지 않은 제2우물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아직 복원되지 않은 제2우물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산꼭대기에 있는 동물상과 하늘 아래 최고(最高) 연못

 한우물 끝 계단 위 헬기장을 지나 동쪽으로 50미터 동쪽으로 가면 석구상(石狗像, 돌로 만든 개)이 있다. 길이 1.7미터, 폭 0.9미터, 높이 1미터이다. 조선 시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 호랑이를 담은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바위 북쪽에 ‘돌로 만든 사자’를 묻고, 남쪽에는 ‘돌로 만든 개’를 묻었다고 한다. 석구상은 바로 그 ‘돌로 만든 개’이다. 오랫동안 ‘해태’로 알려져 있었으나, 한우물의 조선 시대 석축에서 발견된 ‘석구지’로도 ‘해태’가 아니라 ‘개’인 것이 확인되었다.

 해태설은 경복궁의 해태와 마주보게 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용도였다는 풍수설에 기초한 주장이나, ‘석구지’ 발굴로 화기설은 근거를 잃었다. 또 개의 방향을 보아도 경복궁 방향 보다 훨씬 동쪽이다. 다른 용도, 즉 호랑이 기운을 누르는 풍수 관점이 적용된 듯하다.

 그런데 ‘돌로 만든 개’의 얼굴과 몸매를 자세히 보면, 보통의 개라고 보기 어렵다. 물개나 바다사자를 더 닮았다. 개가 같지 않기에 해태설이 나온 듯하다. 북쪽에 묻어두었다는 ‘돌로 만든 사자’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문화재 발견자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 산의 북쪽 어딘가에 놓여 있을 사자가 탐방객, 등산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산을 다니는 분들이라면 석구상 만한 돌덩이를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또한 ‘돌로 만든 사자’는 석구상과 달리 인위적인 조각이 아닐 수도 있다. 사자처럼 생긴 바위일 수도 있다. 인위적인 사자상이든, 돌로 만든 사자상이든 찾아서 전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등산하는 분들의 밝은 눈을 기다린다.

 석구상에서 다시 불영암 뒷길로 가면 호암산성의 성벽을 볼 수 있다. 일부만 남아있지만, 이 높은 곳에 성벽을 쌓았던 사람들의 고생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성벽길을 따라가다 보면, 넓은 공터가 나온다. 산성을 방어하는 군사들이 머물던 건물이 있던 곳이다. 통일신라 시대 기와 파편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신라 때부터 만들어졌고, 그 이후에도 빈번히 새로운 건물이 서 있었던 듯 복잡한 역사가 있다고 한다.

 건물지의 서울 방향 앞쪽에는 웅덩이처럼 보이는 곳이 있다. 탐방 때는 웅덩이 일부에 물이 고여 얼음이 얼어 있었다. 또 웅덩이 한쪽에는 성벽처럼 돌을 쌓은 공간있다.

 ‘제2우물지’이다. 한우물을 기준으로 보면 남동쪽 200미터 떨어진 곳이다. 길이 18.5미터, 너비 10미터 이상, 깊이 2미터 정도의 큰 우물 또는 연못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숟가락으로 이 유적이 통일신라 시대 유적으로 입증되었다. 한우물보다는 후대에 만들어졌다.

 한우물을 망치는 사람들

 한우물과 제2우물지 모두 국가사적 제343호이다. 서울시 안에 있는 산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있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우물 또는 연못일 듯하다. 한여름, 한밤중에 한우물에 떨어진 달과 별을 본다면, 신선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듯하다.

 또 이 한우물은 경주 안압지도 부럽지 않다. 평지에 있는 안압지와는 차원이 다르다. ‘하늘 우물’이라는 별명처럼 하늘과 소통하는 우물이다. 백두산에 천지가 있다면, 서울 금천 호암산에는 천정이 있다. 그만큼 귀한 곳이다.

 그런 한우물을 최근의 극소수 몰지각한 사람들이 훼손하고 있다. 한우물 보호를 위한 철제 울타리에 있는 안내문에는 “이곳에 물고기와 자라 등을 무단방생하여 한우물이 오염되고 있다”며 방생을 삼가 달라고 하고 있다. 이 우물은 그냥 우물이 아니다. 신라의 군사들이 당나라 군대를 막기 위해 판 우물이다. 이 우물은 임진왜란 때 조선 군사들이 일본군을 막기 위해 먹던 우물물이다. 그런 우물에 물고기와 자라를 방생하는 것은 역사에 무지한 결과이다. 수많은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이 서린 이곳을 오염시키면서 복을 빈다면, 복으로 되돌아올까.

 한우물 앞 서울 방향에는 두 그루의 기념식수 나무가 있다. ‘서울600년 기념식수’란 이름으로 1994년에 이원종 서울시장과 강성환 구로구청장이 심은 것이다. 서울은 조선 시대의 서울로만 볼 수 없다. 한우물의 역사를 안다면, 서울의 역사를 안다면, 600년이 아니라 백제 수도 서울을 포함해 2천년 서울이라고 보아야 옳다.

 구로구에서 복원을 위해 발굴조사를 한 뒤 한우물은 그나마 정비되었으나, 제2우물지는 여전히 아무런 조치가 없다. 이미 30년이 지나고 있다. 제2우물지는 한우물보다 높은 곳에 있다. 건물지와 함께 제대로 다시 발굴하고 복원한다면, 한우물과 더불어 서울 시내에서 최고의 명소가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연못이 될 듯하다.

 현재의 모습을 보면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가 일어날 지경이다. 제2우물지의 신속한 발굴과 복원을 촉구한다. 서울 하늘 아래 이렇게 귀하고, 멋진 곳에 있는 하늘 연못을 이렇게 손 놓고 있는 관계 당국의 느림에 숨이 막힌다. 장담컨대, 이곳은 금천구 만이 아니라, 서울시, 나아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명소가 될 수 있는 곳이다. 옛 전쟁터의 역사 현장, 위대한 장군과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을 살아 숨 쉬게 만들 수 있는 공간이다.

 조만간 그런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한다. 한우물과 제2우물지의 역사를 알고,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복원된 미래를 상상해 본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듯하다.

 금천구 2편은 한우물 지역부터 이어간다.

* 천주교시흥동성당 : 금천구 시흥동 937-1
* 은행나무와 시흥현령 선정비, 금천현 동헌 터, 시흥행궁터 : 금천구 시흥동 831-6. 카멜리아스포츠센터 주변
* 장택상 별장 터 표석 : 금천구 시흥동 412-5. 금천녹색광장
* 한우물, 불영암, 석구상 : 금천구 시흥동 산 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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