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장흥의 카페에서 나설 때는 비가 부슬부슬 내릴 때였다. 뜨겁던 첫여름이 지나고 장마가 시작되려는 전주곡으로 내리는 부슬비였다.
“시간도 늦고 차편도 없는데 우리 올 나이트로 한잔 더 하지요.”

일행 중 한 사람인 민속학자 정 박사가 붙들었으나 나는 내일 충주캠퍼스에 가서 특강을 해야 되기 때문에 집에 가야 했다.
“아니오. 택시나 하나 불러주면 여기서 일산까지는 금방이니까.”
“꼭 가야 한다면 그렇게 하지요.”

내가 밖으로 나오자 정 박사가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려고 했다. 바로 그때 지붕에 노란 불이 켜진 택시 한 대가 우리 앞에 와서 섰다.
“빈 택시입니다. 이용하세요.”

운전석의 유리 창문이 열리고 여자 운전사가 말했다.
나는 그 택시를 탔다. 나는 보통 운전사 옆자리에 앉지만 기사가 여자이고 또 늦은 밤이라 여자 기사가 불편해 할까 봐 뒷좌석에 앉았다.
백미러에 비친 여자 기사의 얼굴을 흘깃 보았다.

얼굴이 희고 눈썹이 까만 미인 스타일이었다. 입술은 새빨간 장미색 루즈를 발라 섬뜩해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는 직업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거기다가 하얀 블라우스가 실내등에 비쳐 푸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어딘지 모르게 으스스한 분위기를 주는 여자였다.
“어디까지 모실까요?”
이제 들어보니 여자의 목소리도 이상했다. 저승에서 들려오는 듯한, 생김새와는 전혀 다른 쇳소리를 냈다.
“일산까지 갑니다. 검찰지청 있는데...”

“아, 마두동이군요.”
여자 기사는 갑자기 핸들을 꺾어 오던 길을 뒤돌아섰다.
“아니 일산 가려면 저쪽 길로 해서 통일로로 나가는 게 좋지 않은가요?”
내가 제의했다.

“네. 그게 보통 손님들이 생각하는 길이지요. 하지만 이 길로 해서 봉일천으로 나가면 훨씬 빠릅니다.”
여자 기사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달렸다. 빗줄기는 기분 나쁠 정도로 끈질기게 차창을 쉼없이 적셨다.
“하지만 이 길은 미리내...”

"네. 미리내 공동묘지로 가는 길입니다. 공동묘지를 지나면 바로 봉일천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여자 기사가 내말을 싹 무시하는 바람에 나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부슬비 내리는 이 밤중에 수만 개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 복판을 가로질러 꼭 가야한단 말인가.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카페에서 마신 포도주 기운이 이제 돌기 시작해 깜빡 잠이 들었다.
잠결에도 차가 이상하게 간다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악!”

나는 비명을 질렀다. 내 앞 운전사 자리는 아무도 없었다. 운전석 쪽의 차 문이 열려 있었다. 문 밖으로 부슬비가 내리고 공동묘지들이 수없이 펼쳐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가 너무 놀란 것은 차가 슬슬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운전사도 없는 자동차가 혼자 슬슬 굴러간단 말인가. 이거 틀림없는 귀신들의 장난이다. 처음부터 그 운전사가 여자 귀신이라는 것을 내가 왜 눈치 채지 못했을까?

“사람 살려!”
내가 고함만 치며 차에서 뛰어 내리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데, 운전석 옆 열린 문으로 귀신 얼굴이 쑥 나타났다. 산발한 검은 머리가 비에 젖어 어깨까지 덮고 핏물을 바른 듯 붉은 입술에 백지장 같은 창백한 여자 귀신의 얼굴이었다.
“악! 귀신, 여자 귀신⋯”

나는 까무러칠 듯이 덜덜 떨었다.
“하하하. 손님 정신 차리세요. 저 운전기사예요.”
여자 귀신이 웃으며 말했다.
“뭐야? 운전기사?”

“예. 차가 갑자기 시동이 꺼져서 제가 뒤에서 밀고 있었어요. 이제 언덕을 다 올라 왔으니 내리막에서 시동을 걸게요.”
“그럼 나보고 밀어 달라고 하시지요.”
내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자세히 보니 그 여자 기사가 맞다.
“곤히 잠든 것 같아서요.”
여자 기사는 다시 시동을 걸고  빠른 속도로 묘지 길을 빠져나왔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