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쪽을 향한 한우물 석구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동북쪽을 향한 한우물 석구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금천 시흥동 일대를 1편에 이어 걷는다. 한우물에서 ‘시흥향교 터’까지다. 한우물 위에 있는 건물지와 제2우물지 근처에서는 등산객이 붐빈다. 또 곳곳의 평평한 바위에는 등산객들이 휴식하고 있다. 삼성산과 관악산 정상이 보이는 곳 역시 마찬가지다. 조용히 쉴만한 바위를 찾았다. 건물지에서 남쪽으로 80여 미터를 가면 헬기장이 있고, 헬기장을 지나면 돌출한 바위 하나가 있다.

바위에 새겨진 글자와 알 수 없는 구멍들

 그 바위에 잠시 쉬려다 보니, ‘崔仙(최선)’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최씨 성을 갖은 사람이 스스로 신선으로 여기며 새긴 듯하다. 그 두 글자를 새기려면 적어도 한두 시간은 걸렸을 듯하다. 그가 진짜 신선이었거나, 신선처럼 살고 싶었다면 산꼭대기 바위에 글씨를 새기는 그런 노동은 하지 않았을 듯하다. 글자를 새기며 땀을 흘렸을 모습에 웃음이 난다. 또 이왕이면 시간을 더 들여 의미 있는 사자성어라도 더 첨가했다면 어땠을까.

 처음 글자를 발견한 뒤 바위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른 바위에는 ‘김’이라는 글자와 네모진 칸에 들어 있는 두 글자도 있었다. 산꼭대기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면 그 이름이 영원할까. 또 누가 바위에 새긴 그 글자로 그를 기억할까. ‘최선’이라는 사람과 ‘김’이라는 사람을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다. 무엇을 했던, 혹은 하는 사람인지 조금의 단서도 없다.

 또 있다고 한들 산꼭대기 바위에 자신의 이름만을 새긴 사람이 아릅답게 보이지도 않는다. 자연은 누구의 이름을 새긴다고 자신의 것이 되는 소유물이 아니다. 그렇게까지 자신의 흔적을 남겨야만 했던 삶이 오히려 애잔하다. 글자를 새길 힘과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에 스스로를 더 건강하게 하고, 누군가를 돕는 일을 했다면 그를 진짜 더 오래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을 듯하다. 가끔 문화재에 낙서를 하는 몰지각한 사람들에 대한 뉴스를 봐도 그렇다.

 재미로 우연히 시작한 일이지만, 바위를 살펴보다 보니 이곳의 바위들에는 이상하게도 인위적으로 판 구멍들이 여기저기 바위에 있다. 어떤 의도를 갖고 뚫은 구멍이다. 어떤 구멍은 핸드폰이 통째로 들어갈 정도로 크다. 그러나 그렇다고 건물 기둥 같은 것을 세우기 위한 용도로 보이지는 않는다. 구멍들의 위치가 삼각형이나 사각형처럼 정형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왜 이 일대 바위에는 이런 구멍들이 파 있을까? 고고학자가 아니기에 글로써 의문만 남긴다. 성혈(性穴)일 수도 있으나 알 수 없다.

호암늘솔길에서 만난 얼어붙은 실 폭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호암늘솔길에서 만난 얼어붙은 실 폭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부귀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만진 포대화상의 뱃살

 바위 위의 글씨로 시작된 바위 구멍을 찾아 그 언저리를 살피고 다시 발길을 돌려 석구상, 한우물로 내려간다. 석구상에서는 동북쪽으로는 호암산 정상이나 삼성산 삼막사, 관악산 정상으로 길이 이어져 있다. 또 남쪽으로는 석수역까지 이어지는 서울둘레길도 나 있다.

 탐방길이고 이 산에서의 목표가 한우물이었고, 다음 목적지가 호압사(虎壓寺, 호랑이를 누르는 절)이기에 호암산 정상 등은 가볍게 훗날로 미루었다. 등산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그 길로 곧바로 600미터 정도 거리에 있는 호암산 정상 등으로 가도 좋다. 또 서울둘레길을 통해 석수역으로 하산하는 것도 좋다.

 한우물에서 호압사로 가는 길은 ‘호암산 능선길’이다. 다른 이정표에서는 ‘호암늘솔길’로 되어 있다. 700미터 거리다. 그러나 말이 능선이지 몇십 미터만 능선이고, 대부분은 아주 가파른 계단길이다. 올라오는 사람들은 모두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가끔은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는 투덜거림도 들린다. 그 자체가 ‘깔딱고개’이다. 가다 보니 옆 바위들 사이에 물이 흐르다 얼어붙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자연의 법칙을 새삼 느낀다. 순리(順理)를 생각하게 해준다.

 다시 이정표를 만난다. 서울둘레길(서울대) 0.4킬로미터, 석수역 3.5킬로미터, 한우물 800미터란다. 100미터 내려왔다. 다시 간다. 이번에는 400미터 남았단다. 멀리 서울이 보인다. 급경사 계단길이 시작된다. 깔딱고개다. 호압사에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완만하다. 많은 사람이 산에 오른다. 조금 더 가면 그들은 깔딱고개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질 듯하다.

호압사 포대화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호압사 포대화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호압사에 도착하니 환하게 웃으며 배를 불뚝 드러낸 포대화상이 반긴다. 안내문에는 어린이나 노인, 병약한 분들에게 복과 덕을 베푸는 스님이란다. 또 전설에는 배를 만지면 부자가 되고, 귀를 만지면 장수하고, 머리를 만지면 총명해진다고 한다. 포대화상을 보니, 배와 귀는 사람들이 많이 만진 듯 약간 거무티티하다. 머리는 만진 흔적이 별로 없다. 부자가 되고 오래 사는 것이 사람들 꿈인 것이 느껴진다. 머리의 경우 높아 만지기도 불편하다. 이왕이면 머리까지 만질 수 있도록 포대화상이 앉아있는 받침돌을 낮추었으면 좋을 듯했다.

 호압사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금천구 유일의 전통사찰이고, 호압사 창건 설화가 나온다. 태조 이성계가 서울로 도읍을 옮겨 궁궐을 짓는 중에 꿈을 꾸었다고 한다. 반은 호랑이고 반은 이상한 괴물이 눈에 불을 뿜으며 건물을 들이받아 궁궐을 무너뜨리고 사라졌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한양은 비할데 없는 좋은 도읍지”라고 하고, 한 곳을 가리켰다고 한다.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었다. 꿈에서 깬 태조가 무학대사를 불러 꿈 이야기를 하자, 무학대사가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호암산에 호압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다.

서울을 향해 가는 호압사 삼성각 뒤 종이호랑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서울을 향해 가는 호압사 삼성각 뒤 종이호랑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호랑이 기운을 누르는 절의 유래

 전설을 여러 문헌으로 확인해 보았다.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동문선(東文選)』(1478년)이다. 그는 같은 시기의 관료였던 윤자(尹慈)가 언급한 내용을 실었다.

 윤자에 따르면, 그는 경오년(1450년, 한국역대인물정보시스템 과거급제년도인 1447년와 실록의 관직 기준으로 추정) 봄에 어사(御史)를 그만두고 금천의 수령이 되었다. 그때 들은 호암산에 대한 풍수지리 전설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지(衿之, 금천) 동쪽에 드높은 산이 있다. 그 기세가 북쪽으로 달려가는데 호랑이가 가는 것 같다. 높고 험한 바위가 있는데 세상에서는 호암(虎巖)이라 부른다. 술가(術家, 풍수가)가 보고는 바위 북쪽 모퉁이에 절을 세우고 호갑(虎押)이라 했다. 그 북쪽 7리에는 다리가 있는데 궁교(弓橋)라고 했다. 또 그 북쪽 10리에는 암자(菴)가 있는데 사자(獅子)라고 했다. 모두 호랑이가 가는 기세를 누르려는 까닭이다.” 현재의 호압사(虎壓寺)를 ‘호갑사(虎押寺)’라고 했다. 풍수지리설을 말하나 무학대사는 언급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동일한 내용이 나오나 호갑사의 한자가 다르다. ‘호갑(虎岬)’으로 나온다.

 또한 서거정, 윤자와 같은 시대 인물인 성현(成俔, 1439~1504)의 시(詩), 「금천 수령 김석손군이 그 고을 작은 정자에 써 주기를 청하다(衿川守金君碩孫請題其縣小亭)란 시에도 ‘호암’이 언급된다. 결국 윤자, 서거정, 성현의 시대에는 확실히 호암이라는 바위 명칭이 있었고, 그 호랑이 모양 바위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호갑사(호압사), 사자암, 궁교를 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무학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1656년)에는 “호암산(虎巖山) 금천현 동쪽 5리에 있다. 관악산 서쪽 줄기이다. 호랑이 모양의 바위가 있기 때문에 호암산이라고 했다. 산 위에 돌로 쌓은 옛 성이 있는데 둘레가 1600여 자이다. 안에는 큰 못이 있는데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다.” 또 “사자암(獅子菴)은 호암산에 있다”고 나온다. 또한 삼성산 삼막사에 대해서는 “고려 말, 서역(西域)의 승려 지공(指空) 및 저명한 승려 나옹(懶翁)과 무학(無學)이 함께 이 산을 유람하고 이 사찰을 창건했다. 이 절에 삼석화상(三釋畫像)이 있다.” 삼석화상은 칠성각 안에 있는 마애삼존불상을 뜻하는 듯하다. 유형원의 기록에는 호암산에 대해서는 그 이전의 기록처럼 무학대사 이야기는 없다. 삼성산 삼막사와 관련해 무학대사가 등장한다. 호암산의 경우 호압사는 나오지 않고 사자암만 나온다. 무학대사의 풍수설도 없다. 바위가 아니라 호암산이라는 산 명칭이 등장하는 것이 이전 기록과의 차이다.

 석구(石狗, 돌로 만든 개)의 등장

 다음은 신위(申緯, 1769~1845)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중의 1830년에 쓴 금천에 대한 시, 「구십구암음고이(九十九菴吟藁二)이다. 그는 호암산을 ‘검지산(黔芝山)’으로 부르고, “이 산 전체가 호랑이와 비슷해 옛사람이 재앙을 물리치려는 무궁한 뜻으로 호압(虎壓, 호압사)‧사암(獅菴, 사자암)‧사견우(四犬隅, 네 모퉁이의 개)를 두었구나(此山全體類於菟 古人禳無窮意 虎壓獅菴四犬隅)”라고 윤자의 주장을 그대로 전한다.

 또 그 시의 주석에 “검지산의 형상이 사납기가 호랑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호압사(乕壓寺), 사자암, 사견우는 모두 옛날에 이 산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만든 것이다(黔芝山形猙獰類乕 故乕壓寺獅子庵四犬隅 皆古之爲此山而壓勝者也)”라고 풍수 목적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호갑사가 아니라 호압사(虎壓寺)이다. ‘乕壓寺(호갑사)’의 ‘乕’는 ‘虎’와 같은 ‘호랑이 호’이다. 또한 시에는 특별히 ‘네 모퉁이의 개’가 추가되어 있다. 이는 조선 시대에 쌓은 한우물 석축 남쪽 맨 위의 돌에 새겨진 ‘석구지(石狗池, 돌로 만든 개 연못)’, 한우물 위쪽에 있는 ‘석구상(石狗像, 돌로 만든 개)’과 관련된 기록인 보인다.

 한우물 근처 ‘석구상’과 ‘석구지’라고 새겨진 돌로 인해 확인된 ‘석구지’ 명칭은 신라 시대에 성곽을 지키는 군사들의 식수원 성격의 연못 또는 우물과 달리 조선 후기 신위 시대 즈음 언젠가 호랑이를 제압하기 위한 풍수적 장치로 추가 설치된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신위의 기록과 현재의 석구상을 비교해 보면, 돌로 된 개 3마리가 호암산에 더 있는 듯하다. 등산객들은 한 번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호압사를 세운 무학대사의 등장

 1911년에 간행된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상)』(조선총독부 내무부지방국 편집, 경성인쇄소)에는 두 가지 관련 기록이 있다. 의민(義旻) 스님 쓴 「경기좌도 시흥 삼성산 호압사 법당 현판문(京畿左道始興三聖山虎壓寺法堂懸板文)」에는 신축년(1841년)에 호압사를 중창했는데, “우리나라(조선)가 처음 터를 세울 때 호랑이 혈(虎穴) 장소를 진압했던 곳이다. 쇠락하자 상궁 남씨(南氏)와 유씨(兪氏)가 다행히 도와 법당을 새로 지었다”고 나온다. 또 설암문인(雪巖門人)이 쓴 「삼성산 삼막사 사적(三聖山三藐寺事蹟)」(1771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무학은 나옹의 제자로 지리학(地理學, 풍수학)을 더욱 잘했다. 우리 태조가 듣고 불러 나라의 수도를 정하게 했더니 외백호(外白虎, 풍수에서 가장 바깥쪽에 있는 산줄기)의 기세가 급하고 모양이 위태로워 날뛰는 기운이 많으므로 곧 그 위에 절을 세워 호압(虎壓)이라 해 눌러 두게 하고, 그 앞에 암자(庵子)를 창건해 사자(獅子)라고 두려워하게 하고, 그 곁에 개를 묻어 ‘사견우(四犬隅, 네 모퉁이의 개)’라 해 머물게 했다. 또 절을 네 모퉁이에 창건해 서울(京都)를 누르게 했다. 동쪽에 있는 것을 청련(靑蓮). 서쪽에 있는 것을 백련(白蓮), 남쪽에 있는 것을 삼막(三藐), 북쪽에 승가재(僧伽載)라고 했다. 여지(輿誌)에 전하는데 이른바 외백호는 즉 이 산이다. 이른바 삼막은 즉 이 절이다.”라고 했다.

 설암문인의 글에 처음으로 호암산에 대한 무학대사의 풍수관련 이야기가 언급된다. 의민의 글에는 무학은 언급되지 않고 호랑이 관련 풍수만 나온다.

 『경기지방의 명승사적(京畿地方の名勝史蹟)』(조선지방행정학회, 1937년)에서는 다음과 같다.
 “호압사는 삼성산에서 시흥으로 내려가는 금지산(衿芝山) 위에 있는 작은 암자이다. …… 이 산에서 북쪽을 향해 멋지게 달려나가는 듯한 호랑이 모습을 한 바위가 있다. 나라 도읍을 정할 때 이 호랑이가 날아오르면 금천현(지금의 시흥군)의 운명이 쇠퇴하고, 이어서 경성에 화가 이른다는 풍수설에 의해 북쪽에 절을 세우고. 그 북쪽에 궁교(弓橋)를 설치했다. 또 그 북쪽에 사자암을 세워 호랑이가 도망쳐 달아나는 기세를 눌러서 절의 이름을 호압사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기록과 유사하다.

 땅의 기운을 다스리려는 시도

 이런 기록들로 보면 호암산의 호랑이 형세에 대한 풍수적 조치는 확실히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기록들을 검토하면 초기에는 풍수전문가가 관련된 것은 맞으나 무학대사는 조선 말기에 덧붙여진 듯하다. 이는 무학대사의 유명세를 활용해 호압사의 풍수적 중요성에 권위를 더하려는 의도 또는 구전과정에서의 확대재생산된 이야기로 추정된다.

 호압사의 이름도 처음에는 호갑사였다가 조선 후기에 호압사로 바뀐 듯하다. 그래도 절의 역사는 최소한 1450년 이전에 존재했다고 볼 수 있기에 500년 이상된 역사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이나 공동체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기 위해 땅의 기운을 다스리려는 풍수설이 합리적이거나 과학적인지는 알 수 없다. 또 검증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은 조선 시대에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조선의 풍수』(무라야마 지준 지음, 최길성 옮김, 민음사, 1990년)에서는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땅 기운의 염승(厭勝, 지나친 기운을 억제하는 것) 사례를 찾아 언급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이 호암산 사례이다. 염승 방법으로는 대개 절을 세우거나, 어떤 상징적 돌(거북이, 두꺼비, 남근석)이나 불에 달군 쇠를 묻거나 세우는 방식들이다. 지명을 바꾸기도 했다.
 호암산의 경우는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절(호압사와 사자암)과 ‘석구상’을 만들어 세웠다. 충남 서산의 안흥량은 물길이 험해 조난사고가 잦자 본래 이름 ‘난행량(難行梁)’을 안흥(安興梁)으로 바꾸었다. 물길이 평안해지길 바라는 이름이다.

 경남 하동군 이맹점 산마루에는 오래된 용이 사는 연못이 있었는데, 이 용못 때문에 경주 사람 가운데 맹인이 많이 생긴다고 해서 맹인들이 나서서 쇠를 불에 달구어 그 연못에 가라앉혔다. 물이 뜨겁게 해 용을 멀리 쫓아내려는 목적이었고, 그에 따라 용은 멀리 떠났다. 맹인 수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대구시 남쪽 연귀산 산허리에 돌거북(石龜)을 만들어 두어 산세를 눌렀다. 안동에는 공알산이라는 여자 성기 모양의 작은 산이 있다. 그 산의 음기로 인해 문란한 여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안동부사로 부임한 맹사성은 도덕 교육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알산의 음기를 억제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는 산기슭과 산이 가장 잘 보이는 안동읍 안 두 곳, 모두 3개소에 남근석을 세워 공알산 음기를 눌렀다고 한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풍수를 본다면, 의미가 있을 듯하나 좋은 땅은 누구나 다 보면 안다. 풍수에 억메일 필요는 없을 듯하다. 풍수보다 덕을 쌓은 일이 더 우선이다. 『소학』에서는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 선을 쌓는 집은 반드시 자신과 후손까지 복 된다)”라고 했다.

삼성각 안 산신과 호랑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삼성각 안 산신과 호랑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서울로 가는 호압사 종이호랑이

 호압사의 본전은 약사전이다. 주불은 돌로 만든 약사불(藥師佛)이다. 돌이나 금칠을 해 놓았다. 두 손을 모아 약사발을 들고 있다. 약사불은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 부처님이다. 그 좌우에는 작은 약사천불상이 있다. 약사전 앞 마당에는 520년 정도 된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다.

 삼성각에는 관음보살좌상, 산신상, 무학대사의 영정 등이 있다. 산신의 경우 양쪽에 호랑이가 각각 한 마리가 앉아있다. 호랑이들을 보면 산신이 손을 얹은 오른쪽 호랑이는 앞을 보고 차분히 앉아있으나 왼쪽 호랑이는 그런 산신과 호랑이를 질투하듯 화난 얼굴로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며 산신을 쳐다보고 있다. 무학대사의 영정은 그림이 아니라 초상화를 찍은 사진이다. 무학대사가 창건했다는 전설을 갖은 절에서 대사를 대접하는 것이 소홀하다. 제대로 다시 그린 그림을 걸어 놓은 것이 전설의 사실 여부를 떠나 절의 오랜 역사에 힘을 더 싣는 일일 듯하다.

 삼성각 뒤편에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가 비닐에 쌓여있다. 아마도 절의 행사 때 호압사를 상징하는 용도로 활용되었던 호랑이인 듯하다. 이 호랑이는 서울 시내를 향하고 있다. 게다가 서울을 향하는 호랑이 산세를 누르려고 창건했다는 호압사에서, 행사 뒤에 삼성각 뒤에 방치한 종이호랑이는 호압사를 뒤에 두고 서울을 향해 성큼 오른발을 내딛고 있다. 지극히 사소한 것이나 앞뒤가 맞지 않다.

 호압사에서는 호암산문으로 내려가는 길 ‘가을단풍길’과 호암산폭포로 가는 ‘호암늘솔길’이 있다. 호암늘솔길에는 잣나무 산림욕장을 거쳐간다. 1킬로미터쯤 거리다. 칼바위 전망대와 한우물에서 보았던 절벽 아래 산 밑에 만든 길이다. 시간이 많다면 한 번쯤 산책할만한 코스다.

 그러나 녹동서원이 다음 탐방지라 몇 미터 가다가 되돌아 나와 호암산문으로 길을 잡았다. 이 길 역시 경사가 아주 급하다. 금천구청역에서 출발해 호암산문, 호압사, 한우물로 갔다면 호압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진이 빠졌을 듯하다. 또 찻길만 있고 도보객을 위한 길이 없어 위험하기도 하다. 때문에 그 중간에 오른쪽에 있는 ‘호암산 치유의 숲’으로 들어가 내려갔다. ‘치유의 숲’에는 다양한 산책로와 시설이 있다. 봄가을에는 즐기기 좋을 숲이다.

호압사 약사전 안 석조약사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호압사 약사전 안 석조약사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호암산문을 지나 큰길 앞에는 “누구나 잠깐동안 고요히 앉으면 강가 모래같이 많은 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낫도다. 모래탑은 끝내 무너저 티끌이 되거니와 깨끗한 마음은 부처를 이루는도다”라는 글이 새겨진 큰 바위가 서 있다.

 그 글귀에 반해 앉았다. 순간 유적지를 찾아다니고 글을 쓰는 이 일이 어쩐지 모래탑을 쌓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과정에는 잡념이 없었다. 또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돌아보면서 마음의 티끌도 청소하고 있다. 결국 그 글이 말하는 고요히 앉아있는 것과 지금의 탐방은 똑같은 행동이다. 방식이 다를 뿐이다.

 뒷면의 글에 매혹되었기에 앞면이 궁금했다. ‘호암산 호압사’만이 각진 앞 두 면에 대문짝만하게 새겨져 있다. 허무함이 밀려왔다. 뒷면의 글과 달리 앞면의 양쪽에 새겨진 그 글 자체가 모래탑으로 보인다. 

 허탈함을 덜어내려 큰길을 건너 탑골로, 관악벽산타운3단지 아파트, 삼성산2터널, 금천초등학교, 삼성산터널을 지난다. 조용하고 한적한 길이다. 터널을 지나자마자 왼쪽 길로 접어들면 안순환(安淳煥, 1871~1942)이 일제강점기에 세운 녹동서원(鹿洞書院)이 있었던 동네가 나온다. 호압사에서 30분 거리다. 지금은 빌라촌으로 변했다. 녹동서원에 대한 표석도 없다.

안순환 선생 공덕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안순환 선생 공덕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젊어서 수많은 모래탑을 쌓은 사람, 안순환

 안순환은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된 인물이다. 안순환의 삶은 복잡했다. 서화가(書畵家)이기도 했고, 관료, 음식전문가 겸 경영자, 녹동서원 설립자 및 단군교의 단군전 건설 후원자였다. 친일인명사전에도 실릴 만큼 친일을 한 것도 사실이고, 녹동서원을 통한 유학부흥운동과 단군교를 후원할 만큼 민족정신을 갖은 이중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1890년 20세 때부터 고서(古書)와 고화(古畫) 등을 판매하는 서화상(書畫商)을 시작했다. 이때 서화가 해강 김규진(金圭鎭, 1868~1933)과 교류도 시작되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훗날 안순환과 김규진은 짝을 이뤄 송광사‧법주사‧고란사‧마곡사‧용주사‧해인사‧개운사‧전등사‧대흥사‧백양사‧도선사 등의 편액을 썼다. 김규진이 글씨를 쓰고, 안순환이 대나무나 난초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었다. 1922년에는 『조선총독부 관보』(6월 30일)에 따르면, 「석란(石蘭)」으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다. 예술가 안순환 모습이다.

 1900년에는 현재의 조폐공사와 같이 화폐를 제조했던 용산에 이전 설치된 전환국(典圜局) 기수(技手), 9품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년 뒤인 1901년에 면직되었다. 고종의 어진(御眞, 임금초상화)를 그렸던 조석진(趙錫晋, 1853~1920)이 화가이면서도 1887년에는 전환국 사사(司事)로 활약하기도 했던 것을 보면, 안순환의 그림 실력이 전환국에 들어가는데 영향을 미친 듯하다.

 그러다 1908년에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관직생활을 한다. 대한제국의 궁중 음식과 연회를 전담하는 전선사(典膳司)의 주임인 장선(掌膳), 6품에 임명되었다. 그가 몇 년 뒤 조선 최소 근대적 요리점인 명월관을 열고 음식점 사업을 한 계기가 된다.

 1909년에는 당시 일본에 있던 황태자에게 문안하러 가는 송병준의 수행원에 임명되기도 했다. 친일파 단체인 일진회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0년에는 다시 장선으로 정3품에 올랐다. 1911년에는 이왕직 사무관에 임명되었다. 음식 관련 관료 안순환 모습이다.

 

 그 뒤 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었던 사설극장인 원각사(圓覺社)의 사장을 하기도 했다.

 『삼천리』(1936년 8월, 8권 8호)에 따르면, 명월관(현 동아일보사 일민미술관 자리)은 1917 또는 1918년에 안순환이 순조선요리옥(純朝鮮料理屋)을 세운 것이 명월관의 전신이고, 화재 뒤에 식도원(食道園)을 새로 세웠다고 한다. 또 『삼천리』에서는 안순환을 “경성(서울)의 조선요리업자의 원조”라고 평가했다. 안순환은 식도원을 1935년까지 운영했다고 한다. 명월관 설립 시기는 자료마다 상이하다.

 명월관의 분점이었던 태화관에서는 1919년 3‧1운동 때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곳이다. 안순환은 그로 인해 옥고도 치뤘다. 친일인물이 주인인 태화관에서 독립운동의 깃발이 들어졌기 때문이다.

 『별건곤』(1928년 05월, 제12·13호)에는 안순환이 쓴 「조선요리의 특색」이란 글이 있다. 그 글을 보면, 안순환은 몇 년간 궁내부 전선과에서 일했고, 또 몇 년 동안 음식점업에 종사하면서 음식을 만들고 연구하며, 일본 궁내성 요리도 시찰했다고 한다. 중국과 서양 요리도 직접 만들고 연구도 했다. 그는 조선 음식의 개량 필요성은 있으나, 기본적으로 높게 평가했다. 첫째는 우리나라 요리는 봄에는 송편, 여름에는 깨인절미를 만드는 것처럼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둘째는 양념이 들어가 맛있고 원료의 독기를 제거하며 소화도 잘된다. 셋째는 음식을 진열하는 방법이 교묘해 음식을 차릴 때 방위와 자리가 따로 있는 특징이 있다. 넷째는 여러 음식을 한 상에 차려 한 번에 다 내놓아 먹는 사람의 마음 기쁘게 해준다고 한다. 또 우리 음식은 가지 수도 많아 떡을 예로 들면 30여 종이 있다고 한다. 이런 장점으로 외국인은 우리나라 음식 초대를 받으면 다 감탄한다고 한다.

 안순환은 1910~1930년대 중반까지 한편으로는 요리점 주인으로 활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화가로도 활동했다. 

빌라 기둥에 붙어 있는 단군전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빌라 기둥에 붙어 있는 단군전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말년에는 티끌을 털어내려 했던 사람, 안순환

 그 시기에는 사업으로 성공했고, 친일도 했다. 그런 그가 60대인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다. 일제의 압박이 정점을 향해가던 암흑기였다. 그런 중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고려 인물 안향(安珦, 1243년~1306)의 21세손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변신은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니다. 비용과 시간, 게다가 일제와의 거리두기와 반일(反日) 의심을 살 일들이었다. 결단을 내렸던 것은 성공했던 물질적 욕망을 넘어 정신적 욕망, 즉 의미 있는 삶,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민족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졌기 때문인 듯하다.

 1930년 유교 교육과 종교화를 추진하기 위해 사재를 투입해 시흥 송록동에 녹동서원을 설립했다. 녹동서원에서는 학생들의 모든 학비를 지원하는 명교학원(明敎學院)을 운영해 유교를 대중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지도자들을 양성했다. 자신의 선조 안향을 기리기 위한 목적도 분명히 있었으나, 그 이상의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서울에 총본부를 둔 전국 규모의 유교단체인 <조선유교회>도 조직했기 때문이다.

 녹동서원 옆에 1932년 단군교 본부를 위한 단군전(檀君殿)도 건립하고 후원했다. 단군교(檀君敎)는 1909년 나철(羅喆)과 정훈모(鄭薰謨) 등이 설립한 종교이다. 국조 단군을 중심으로 대일투쟁을 위한 종교였다. 교세의 확대와 더불어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1910년에 대종교(大徖敎)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 명칭 변경 문제로 나철과 정훈모가 갈라졌다. 정훈모는 단군교를 유지했다. 1929년 안순환은 정훈모를 만나 단군교 교당인 단군전 건립을 약속했고, 약속을 지켰다. 그 뒤 일제의 탄압으로 시흥의 단군교 총본부도 폐쇄되고 단군교도 해체되었지만 그는 그 때까지 후원을 했다.

 유교의 종교화와 전국 조직화, 단군교 지원은 일제의 한계를 예측하고 민족의 미래를 고민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사업가이면서 요리업자, 서화가였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말년에 180도로 변했다. 금천구에 있는 녹동서원과 단군전의 흔적은 다양한 삶을 살며, 칭찬과 비난을 모두 받고 살았던 사람이 초심으로 돌아간 모습이 있다.

 녹동서원이 있었다는 예전 주소 지역은 현재는 빌라촌이 되어 있다. 예전 위치에는 표석도 없다. 3분 거리에 있는 ‘단군전 터’에도 빌라가 들어서 있다. 녹동서원과 달리 빌라 기둥에 ‘단군전 터’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녹동서원은 6‧25때 거의 불탔고, 일부만 1970년대 용인민속촌 건립때 민속촌으로 이전되었다. 단군전은 1980년대에 안양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녹동서원은 사라졌으나, 그를 기리는 비석이 근처에 있다. 서원 자리 건너편 ‘삼성산 시민휴식공원’에 있는 「안순환 공덕비」이다. 비석의 위치는 공원 입구에서 미끄럼틀 쪽 화장실 방향 왼쪽 길을 따라 계단에 오르면 된다. 삼성산터널 오른편이며 화장실 뒤편이다. 비석을 보면 ‘안교환(安敎煥)’으로 나오나, 이는 1932년에 개명한 이름이다.

 비석에서 단군전이 있던 곳까지는 5분 거리이다. ‘디비하우징 빌라’가 들어서 있다. 기둥에는 ‘단군전 터’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근처에는 단군전이 있었다는 징표인 듯 ‘단군어린이공원’이 있다.

 조선 전기의 해학문화를 저술한 강희맹

 ‘단군전터’에서 5분 정도 가면 조선 세종~성종 때의 문신이며 저술가였던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살았던 집터가 나온다. 가는 중에 우측을 보면 순흥안씨 양도공파묘역, 순흥안씨 흥령부원군 양도공 삼대영원이 있다. 고려말 조선초 문신 안경공(安景恭, 1347~1421)과 그 후손들의 묘이다. 양도공(良度公)은 안경공의 시호(諡號)이다.

 강희맹의 집터는 그가 조선 전기 대표적인 농업책인 『금양잡록』을 포함해 각종 저술을 했던 곳이다. 집터 표석은 동도그린빌리지 A동  모퉁이 전봇대 아래에 있다. 동도슈퍼 맞은편이다.

 강희맹은 문신 겸 화가 강희안(1417~1464)의 동생이며,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의 조카이다. 세종이 이모부, 문종과 세조와는 이종 사이다. 『세조실록』‧『동국여지승람』‧『경국대전』‧『국조오례의』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농사에 관심이 많아 농사짓는 법에 대한 『사시찬요』, 주변에서 채집한 농민의 삶이 담긴 노래집인 『농구십사장(農謳十四章)』, 『금양잡록』, 금천 지역의 민담과 관직 생활 중에 들었던 해악 등을 정리한 『촌담해이』를 저술했다. 농사 서적과 해학집을 저술한 것은 그가 고위 관료였으나 백성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촌담해이』는 대충 읽으면 19금(禁)의 음담패설에 가깝다. 유학자였고, 고위 관료가 쓴 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내용이다. 지금도 공개석상에서 『촌담해이』를 이야기하면 당장 성희롱으로 난리가 날 내용이다.

 기생과 바람을 피우다가 기생에게 재산을 빼앗긴 선비, 예쁜 첩을 지키기 위해 바보 같은 사내종을 수행원으로 보냈다가 거꾸로 예쁜 첩과 사내종이 관계를 맺게 만들고도 상황 파악을 못하는 어리석은 선비, 남자를 유혹하는 여성들, 계율을 중시했던 승려가 유혹에 넘어간 이야기 등이다.

 이 책은 성리학이 경직화되기 전인 고려의 유풍이 남아있던 조선 전기의 개방적인 성(性)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해학이나 음담패설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과 감정을 숨기고 이율배반적으로 행동하는 선비들의 이중성을 비판한다.

 조선 초중기 사람들의 음담패설의 해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서울대 구인환 교수가 번역한 『촌담해이』(신원문화사, 2004)를 보면 된다. 강희맹의 『촌담해이』, 서거정이 쓴 『태평한화골계전』, 송세림이 쓴 『어면순』이 번역되어 함께 실려 있다. 음담패설로 읽지 말고, 조선 시대 전반기의 문화를 살펴보는 관점으로 보았으면 한다.

 정치인 강희맹은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 특히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을 때는 참여해 원종공신 2등, 1468년 남이(南怡)장군 반란 의혹사건 때 형조판서로 남이 심문에 참여해 익대공신 3등이 되었다. 그런 점 때문인지 『성종실록』(성종 14년(1483년) 2월 18일)에 실린 「강희맹의 졸기」에는 “평생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단점이 있었다는 사관의 비평이 나온다.

 집터에는 두 개의 표석이 있다. 예전에 세운 화강암 표석과 최근 금천구에서 세운 깔끔한 표석이다. 표석은 작은 나무 박스 화단과 가로등 기둥, 전봇대, 헌옷 재활용 박스 사이에 끼어 어지럽다. 그런 까닭에 그냥 지나치기 쉽다.

삼층석탑과 향나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삼층석탑과 향나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작으나 결코 작지 않은 3층석탑

 강희맹 집터에서 나와 다시 호압사에서 내려왔던 길로 거꾸로 올라간다. 삼성산시민휴식공원, 삼성산터널, 금천초등학교, 삼성산2터널, 시흥현대아파트, 탑동초등학교를 지나 우측 샛길로 들어가면 주택들 사이 쌈지공원 같은 곳에 약 580년 된 향나무가 보인다. 20분 정도 걸린다. 그 향나무 아래 탑의 윗부분이 없어진 5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이 있다. 삼층석탑 표석은 구로구에서 세운 것이다. 이 지역이 예전에는 구로구에 속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향나무에 대한 보호수 안내판은 금천구에서 세웠다.

 이 삼층석탑에서 기도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한다. 큰 절의 거대하고 정교한 탑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작고 하찮은 탑, 게다가 일부분은 없어져 미완성의 탑으로 여길 수 있다. 또 거대한 향나무에 가려 더더욱 왜소하다. 그러나 이 지역 서민들에게는 그 어느 큰 절의 탑보다 더 친근하고 마을 안에 있으면서 큰 힘을 주었던 듯하다. 이 지역의 옛 명칭인 ‘탑동’의 유래도 이 석탑으로 생겼다고 한다. 그만큼 동네 사람들의 정신건강과 마을의 평화에 큰 영향력이 있었던 듯하다.

 향나무는 높이가 10미터에 달한다. 줄기를 보면 오랜 연륜을 말하는 듯 갈라지고 찢어서 있다. 거친 붓질을 한 뒤에 미세한 붓질로 그 피부를 그린 듯하다. 이 향나무는 1편에서 언급했던 은행나무들에 비하면 아주 평안히 머물고 있다. 또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듯하다.

 향나무가 석탑을 압도하고 멋있지만, ‘탑동’이란 명칭으로 보면, 작은 석탑이 거꾸로 향나무를 사람들의 나쁜 손길로부터 보호하는 듯하다. 이 석탑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적용되기 어렵다. 너무 투박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작은 것이 더 강하다”는 사례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석탑에 기원을 드린다. 코로나19가 멈춰주기를.

삼층석탑과 향나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삼층석탑과 향나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이러나저러나 잘 보존되고 있는 향나무와 석탑을 보면, 이 동네 사람들이 무척 순박하고 따뜻하며 여유로운 사람들인 것은 확실하다.

 향나무와 석탑에서 아래로 난 길을 따라 죽 내려가면 탑동초등학교 앞 삼거리가 나온다. 길 건너 맞은편 길을 택해 180미터 가면 다시 삼거리가 나오고, 건너편에 ‘범일운수종점’이 보인다. 그 삼거리 일대에 예전에 시흥향교가 있었다. 내려온 삼거리 모퉁이에 횡단보도 앞 기둥 밑에 ‘시흥향교 터’ 표석이 두 개 있다. 믿음부동산 앞 도로 기둥 밑에 있다. 하나는 서울시에서, 다른 하나는 금천구에서 설치했다. 향교는 지방에서 유생을 교육시키던 기관이다. 조선 후기에는 말썽도 많았던 민폐기관이기도 했다.

 시흥은 ‘일어난다’는 뜻으로 정조가 지은 이름이다. 답사했던 지역은 옛 시흥지역이고 현재는 금천구 시흥동 일대이다. 석수역에서 시흥향교까지 구간은 신라 시대를 만나고, 조선과 현대인들의 염원을 만나는 길이다. 또 논란의 삶을 살았던 사람(안순환), 고위 관료였으나 백성과 함께 하려고 했던 사람(강희맹), 따뜻한 마음을 갖은 사람들(탑동)이 포근히 늘어서 있다. 시흥동을 통해 금천구가 더 크게 일어나길 기원한다.

* 호압사 : 금천구 시흥2동 234
* 녹동서원 터 : 금천구 시흥4동 169 일대. 표석 없음
* 안순환 공덕비 : 금천구 시흥동 산116. 삼성산시민휴식공원 위쪽 좌측 코너
* 단군어린이공원 : 금천구 시흥동 169-21
* 단군전 터 표석 : 금천구 시흥동 169-53. 디비하우징 빌라 기둥
* 순흥안씨양도공파묘역 : 금천구 시흥동 54-2
* 강희맹 집터 : 금천구 시흥동 807-14 동도그린빌리지 A동 모퉁이
* 3층석탑과 향나무 : 금천구 시흥동 230-40 
* 시흥향교터 : 금천구 시흥동 262-6 믿음부동산 앞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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