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김재경 정치평론가]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이른바 빅딜 형태로 단행된 단일화가 선거의 결정적 터닝 포인트가 된 적이 많다. 유력 후보간 단일화에서부터 군소후보들 단일화까지 다양한 형태로 이뤄진 합종연횡이 선거의 판세를 바꾸는 것을 넘어 결과까지 뒤집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철저히 정치적 계산 하에 이뤄지는 단일화는 선거 초반은 물론이고 선거 막판에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등 여론과 민심의 물결과 흐름을 바꾼다는 점에서 항상 주목을 받았다. 크게는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적게는 기초자치단체장이나 기초의원까지 선거마다 단일화가 이뤄지곤 했다. 물론 단일화가 반드시 승리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엉뚱하게도 제3의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되는 사례도 간간히 나오면서 정치의 묘미를 느끼게 해주는 일들도 상당했다. 역시 최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로부터 촉발된 4월 서울시장 재보궐선거 단일화 논의도 정치권과 국민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때에 따라 판세의 흐름은 물론이고 당락의 결정적 변수로 작용할 수 있어서다.

1985년 3월 6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한 YS. 2015.11.22. (사진은 독자 정태원씨 제공) 뉴시스
1985년 3월 6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한 YS. 2015.11.22. (사진은 독자 정태원씨 제공) 뉴시스

- YS-DJ 단일화 실패 노태우 당선’ DJP 연대 집권성공한 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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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몽준 단일화 철회에도 노무현 당선이례적 사건
- 4월 서울시장 선거 안철수-국민의힘 단일화 성패 승부 갈라

단일화 역사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사건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다. 당시 김영삼(YS)과 김대중(DJ) 두 정치 지도자의 단일화 논의가 심오하게 진행됐지만 결과적으로는 무산됐다. 그로 인해 노태우 후보가 13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87년으로 시계추를 옮겨보면 당시는 6.29 선언으로 정국이 안정을 찾아가던 때로 새 헌법에 따라 16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를 눈앞에 둔 시기였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을 걷어내고 민주정부를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국민들은 희망의 꿈을 꾸고 있던 시기였다. 문제는 YS냐 아니면 DJ냐 였다.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는 두 유력 정치인들은 처음에는 서로 양보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영호남 대표하는 YS-DJ ‘단일화 무산지역갈등 촉발

김대중씨는 1986"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실상 YS를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김영삼씨 역시 "사면과 복권이 이뤄지면 김대중씨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이들은 손을 맞잡고 19875월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면서 국민적 기대감을 한층 높였다.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의 힘겨루기 속에서도 재야에서는 '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두 사람에게 합의를 촉구하기도 했다.

그해 10월 고려대 시국토론회에서 두 사람 사이의 단일화 합의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두 사람의 연설에서 YSDJ를 향한 청중들의 분위기가 갈렸고, 이에 힘을 받은 DJ는 통일민주당 탈당을 선언했다. 이후 1112DJ를 총재로 하는 평화민주당이 만들어지고, 양측간 신경전이 가열되면서 단일화는 무산됐다. 한 원로 정치인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역사에 만약이라는 설정은 없지만 단일화가 됐다면 망국적 지역감정의 골이 지금처럼 크게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신군부 정권 종식으로 민주정부 설립이 앞당겨지며 1990년대 외환위기 등과 같은 국난이 발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결과론이지만 어찌됐건 민주화 세력의 민주정부 설립 염원은 노태우 정권으로 인해 지체됐고, 사회 전반의 개혁 자체도 타임 테이블을 뒤로 물릴 수 밖에 없었다.

단일화 성공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97년 김대중·김종필(JP)'DJP' 연합 출범으로 이뤄졌다. 한정사상 첫 정권교체가 바로 이 단일화로 이뤄진 것이다. DJ 정권 출범 후 이 연합은 3년간 연립 내각을 구성하는 최초의 사례를 낳기도 했다.

역시 과정은 쉽지 않았다. 1996411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DJ79석을 얻는데 그쳤다. 3김 정치의 시대에서 YS에 이은 유력 대선주자는 단연 DJ였지만 부진한 총선 성적표로는 차기 대권을 장담하기 어려운 정치 지형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동교동계 내부에서 호남 고립 구도를 깨기 위해 1996년 중순부터 JP의 자유민주연합과의 정책 공조가 추진됐고, 양 진영은 본격적인 합체를 위한 물밑 작업에 돌입했다.

시 동교동계의 한 원로 정치인에 따르면 DJP 연합을 위해 영국의 거국내각과 독일의 신호등 연정과 같은 정치 선진국 사례를 꽤 많이 연구했다고 전해진다. 겉으로는 두 사람 간 단일화지만 두 사람이 각각 이끄는 정치 세력의 이념적 지향점이 다르기에 이런 연구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즉 이회창 진영에 맞서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이론적 근거를 확실하게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는 얘기다. 두 거물을 따르는 정치 세력 뿐 아니라 두 세력을 지지하는 국민들에게도 무언가 합리적 이유를 댈 수 있는 논거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노무현,정몽준 후보 누구를 지지하느냐4.6P승리

동교동계와 달리 JP의 자민련은 당시 DJ 친위세력인 충청계와, YS 견제로 밀려난 TK민정계 그리고 중간지대까지 세 계파로 나눠져 있었다. 때문에 내부적 합의를 도출하기가 쉽지 않았던 만큼 자민련 내부에서도 이론적 근거의 필요성이 컸었다는 게 일반론이다.

그런 와중에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의 DJ 비자금 사건 폭로가 DJ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다급해진 DJJP에게 양보를 하면서 단일화가 성사됐는데 내용은 공동정부 구성을 대가로 JP가 대선후보 자리를 양보하고 충청표를 몰아주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DJ는 이회창 후보에 39만표 앞선 총 1032만표로 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0년대 들어 극적인 합의가 선거의 승패를 바꾼 대표적 사건으로는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다. 두 사람 모두 200216대 대선에 절치부심 다시 나선 이회창 후보에 선거 초반 압도적으로 밀렸다. 하지만 단판승부로서의 단일화 합의로 판세는 뒤집어졌다.

특히 두 후보간 단일화는 이전과 달리 여론조사를 근거로 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진다. 여론조사 문구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견주어 경쟁력 있는 단일후보로 노무현·정몽준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십니까'였다. 이 문항 하나로 4.6%포인트 앞선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 됐는데, 극적 단일화 방식 합의 후 두 사람이 러브샷을 하는 모습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주요 정치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대선 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단일화 이슈는 항상 정치권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보수 진영이 우세를 보이던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이어 2011년에는 박원순과 안철수 단일화가 단연코 가장 큰 이슈였다. 20119월 여야 정당 밖 인사인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와 안철수 서울대 대학원장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면서 3기의 박원순 서울시장 시대를 연 것이다.

이후에도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와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권연대라는 이름으로 후보단일화가 이뤄졌다. 국회의원 선거 중에서는 19대 총선 민주당이 통합진보당에게 상당한 의석을 양보한 것이 의회권력의 구도를 흔들었으며, 18대 대선에서는 범야권의 두 유력 후보인 문재인과 안철수 단일화가 연일 언론에 보도되면서 국민적 이목이 쏠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9월 27일 청와대 상춘재 앞에서 여야4당 대표들과 만찬 회동에 앞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환담하고 있다.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9월 27일 청와대 상춘재 앞에서 여야4당 대표들과 만찬 회동에 앞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환담하고 있다. 뉴시스

안철수-국민의힘 후보 단일화 서울시장 최대 변수

무엇보다 오는 4월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를 두고 정치권 안팎에서는 어게인 2011‘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당시 등판했던, 안철수, 오세훈, 나경원, 박영선 등 주자들이 모두 이번에도 예비후보로 나섰기 때문이다. 물론 2011년과 2021년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10년 전의 경우 국민의힘이 여권이었고, 지금은 민주당이 집권여당이다. 또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인한 사퇴가 재보궐선거의 이유였다면, 지금은 고 박원순 전 시장의 성비위가 이유다. 이슈도 2011년은 무상급식 논란이 판세를 뒤흔든 핵심 요소였지만, 올해는 젠더 문제가 전면에 부각돼 있다.

물론 부동산 문제와 행정수도 그리고 코로나19 지원책 등 정책 이슈가 젠더 이슈를 누르던 분위기가 조성될 즈음에 터진 김종철 사태는 성비위로 다시금 무게추를 옮겨가게 하고 있다. 김종철 전 정의당 대표의 성추문이 진보진영 전체의 성 도덕성 논란으로 점화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책보다는 남성과 여성의 성 대결 양상 분위기도 감지된다
다급한 이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다. 지난주 안 대표는 잇따라 단일화 띄우기 행보에 나섰다.

하지만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를 일축하면서 마치 핑퐁게임의 판세를 보는 듯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당연히 현재는 안 대표가 단일화 의제를 던지고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이를 거부하는 형국이지만, 오세훈과 나경원 등 국민의힘 주자들 사이에서도 단일화 언급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슬슬 분위기가 달아오를 조짐이다.

가장 큰 충돌 지점은 방법도 방법이지만 시기가 현재로서는 최고의 관심사다. 안 대표는 하루빨리 단일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국민의힘 주자들은 급할 게 없다는 태도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28일 신년기자회견에서 국민의힘 후보가 우선이라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김 비대위원장은 단일화 논의는 1주일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다음날 김 비대위원장은 다시 “2011년 박원순 당시 무소속 후보(단일화)에 민주당이 관여한 기간도 8일밖에 안걸렸다고 일축했다. 나경원 예비후보도 128일 한 경제지와의 인터뷰에서 단일화는 진정성을 갖춘 의지의 문제이지 시간적인 문제는 아니다예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도 뚝딱 했었지 않느냐고 말했다.

결국 국민의힘에서 나서지 않는 이상 안 대표의 단일화 이슈몰이는 단순한 정치적 액션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치권의 전망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국민의힘은 자당의 후보들만으로도 충분히 본선 경쟁력이 있다고 보고 있을 것이라며 시간을 최대한 끌면서 자당 후보들의 지지율을 끌어올린 뒤 보다 유리한 국면에서 필요하다 판단되면 단일화에 나설 것이라고 점쳤다.

물론 안 대표가 국민의힘에 전격 입당하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다면 또 다른 국면을 맞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서울시장 야권 후보 단일화는 빨라야 3월 중순 이후는 돼야 가능하리라는 전망이 현재로서는 우세하다. 다만 최근 우상호박영선의 두 여권 후보와 민주당 지지율이 상승 추세라 이른 단일화 합의 가능성을 전면 배제하기는 힘들다는 것도 역시 정치권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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