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본가에서 시어머니가 다녀갈 적마다 가빈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금이 봉건시대도 아닌데 아들을 낳아야 여자 구실을 한다고 닦달하는 시어머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혼한 지 이제 겨우 3년, 아직 24평짜리 아파트 월부금도 다 갚지 못했는데 애기가 뭐 그렇게 급한 일인지 가빈은 도무지 시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빈은 아침 열 시가 다 되도록 설거지도 하지 않고 고양이 낯짝만 한 작은 거실에 누워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면서 시어머니 일을 되생각해 내고 있을 때였다.

-내 나이가 어때서~♪
핸드폰이 청승맞게 노래를 토해냈다.
“여보세요. 대치동인데요.”
“아, 거기 차가빈 씨 아닌가요?”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 시간에 참으로 뜻밖에 차가빈이라는 자기의 이름이 불리자 야릇한 기분이었다.
“제가 가빈입니다만⋯”

가빈이 말끝을 흐리자 사나이는 금방 반갑게 되받았다.
“가빈 씨가 맞구먼. 가빈 씨 나야 나. 박민수, 민숩니다.”
“어머! 민수 씨가⋯”
가빈은 너무 뜻밖의 사람이라 가슴만 콩콩 뛰고 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박민수. 

그 이름을 어찌 가빈이 잊을 수 있을까? 그는 아득한 옛날만 같던 5년 전의 남친이었다. 대학 미팅에서 만난 그와 4년 동안 사귀면서 가빈은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러나 지금 남편 최강호의 친구이기도 한 박민수는 가빈의 곁을 떠났었다. 
그런데 작년 겨울 말레이시아의 유명한 리조트 휴양지 겐팅 하일랜드에서 듯밖에 박민수와 마주친 일이 있었다.

가빈이 부부가 쿠알라룸프르에서 약 80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해발 2천 미터의 새로운 리조트 랜드 겐팅 하일랜드에 3박 4일 동안 머물고 있을 때였다.
신혼 이후 3년 동안 함께 사는 동안 가빈과 남편 최강호는 그렇게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시어머니도 시어머니지만 남편 역시 서로 좋아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서 그런지 정이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간격을 좀 좁혀 볼 생각으로 해외 여행길을 택했다. 여행사의 권유로, 비교적 비용이 적게 드는 겐팅 하일랜드로 갔다.
그곳에 있는 퍼스트 월드 호텔이라는 데는 비용이 콘도 수준이었다. 객실이 무려 6천개나 되는 엄청난 규모에 비해 서비스는 펜션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3박 4일 동안 가빈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그곳의 주요 시설은 카지노와 게임장, 어린이 놀이터, 각국 취향의 식당이 거의 전부였다.

아직 건설이 덜 끝나 그렇다고 한다.
남편 강호는 카지노의 슬롯 머신에 미쳐 거의 종일 기계 앞에 붙어서 도박을 했다.
가빈도 처음에는 슬롯 머신의 다양한 영상이나 여러 곳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 공연 무대의 각종 쇼를 즐겼다. 그러나 남편이 너무 슬롯 머신 도박에 몰두하는 바람에 혼자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쇼핑장 몇 곳을 둘러보다가 여자 옷 쇼핑 숍에서 뜻밖에도 박민수와 마주쳤다.

“가빈 씨, 가빈 씨 맞죠?”
“민수 씨, 민수 씨를 여기서 만나다니...”
가빈은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나 당황스럽기도 했다. 결혼 이후 처음 만나는 셈이었다. 

“여기 어쩐 일이예요?”
“우리 회사 일로 출장 왔어요. 겐팅 하일랜드는 지금 한창 리조트 시설을 하고 있는데 우리 회사가 투자를 할까 하고 검토하고 있는 중이라서 출장 온 것입니다. 그런데 가빈 씨는⋯”
“저는 여행 왔어요.”
가빈은 민수와 함께 쇼핑 숍 이곳 저곳을 다니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동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도 함께 사 먹었다.
민수는 날이 밝으면 떠난다고 했다. 하루를 즐기고 다시 기약 없이 헤어졌다. 
가빈은 일부러 전화번호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가빈은 남편이 아직도 죽치고 앉아 있는 카지노 슬롯 머신 앞으로 가면서 민수가 기념으로 사 준 오렌지 색 스카프를 다시 만져 보았다. 실크의 촉감이 무척 부드럽고 따스했다.

그러나 자기를 배신한 옛 남친을 결코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가빈이 민수와 사랑의 결실을 이루지 못한 것은 민수의 부모 때문이었다. 
고아나 다름없이 자란 가빈을 민수의 부모는 받아주지 않았다. 가빈은 민수를 잃느니 죽음을 택하려고까지 생각 했으나 그러지를 못했다. 
가빈은 마음을 가다듬고 중매결혼을 해 지금 남편인 최강호와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결혼한 이후 하루도 박민수를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증오와 그리움이 범벅된 표현하기 어려운 가빈의 감정은 때로 그를 죽이고 싶기도 했다. 그런 복수심 같은 것은 남편과의 사이가 멀어질수록 더 절실해지기도 했다.

말레시아서 꿈처럼 만났다 헤어진 박민수가 뜻밖에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우리 집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애틋하게 생각나서 한 시도 잊지 않았던 옛 남친에게 하는 인사치고는 참으로 멋없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웃었다. 아니 남편 최강호의 모습이 얼른 떠올라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남편과 민수가 자기를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만나는 장면을 번개처럼 떠올려 보았다.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고집 세고 질투심 많은 최강호가 그를 그냥 살려두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남모르는 데이트를 갖기 시작했다. 결혼 생활 3년 뒤에 다시 만난 옛 애인은 그전의 그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와 만나는 횟수가 늘어 갈수록 가빈은 남편에 대한 죄책감이 죽순처럼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남편 이외의 남자 품에 안긴다는 짜릿한 기분과 함께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배신자를 죽이고 싶은 심정도 가끔 불쑥 솟기도 했다.
가빈은 이런 착잡한 심정으로 밀회를 즐기면서 남편이 알까 봐 늘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의 남편을 결코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가빈이 혼자 외출하려고 옷을 차려입고 나왔다. 가빈의 옷  차림을 유심히 보고 있던 최강호가 물었다.
“당신 그 오렌지색 스카프는 못 보던 건데⋯ 나는 사 준 기억이 없는데⋯”
가빈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것은 겐팅 하일랜드 여행 갔을 때 우연히 만난 박민수가 선물로 준 것이었다. 
“이거⋯ 저어, 누가 사 준 거야.”

가빈은 우물쭈물 그 자리를 모면하고 밖으로 나갔다. 
남편은 씁쓸하게 웃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스카프는 남편이 겐팅 하일랜드에서도 본 일이 있었다는 것을 가빈은 잊고 있었다.
그날 이후 가빈은 아무래도 남편이 민수와의 밀회를 눈치를 챈 것 같아 불장난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보다는 남편과의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나마 큰 탈 없이 지탱해 온 결혼생활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가빈이 그 말을 민수에게 하지 않아도 될 일이 생기고 말았다.
박민수가 죽은 것이다. 그것도 이상하게 가빈이네 아파트 단지 내의 어린이 놀이터에서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고 죽은 시체로 아침에 발견된 것이었다.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자 차가빈이 강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시체가 가빈의 아파트 부근이라는 것 말고도 박민수의 양복에서 가빈의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 유부녀의 밀회라는 것도 충분한 살인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빈은 범행을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었다.

“정말 이렇게 잡아떼기만 할 겁니까? 이걸 좀 봐요. 이게 누구 겁니까? 이것이 죽은 뒤 박민수의 목을 다시 감았던 흉깁니다. 이게 누구 거죠?”
형사는 오렌지 빛 스카프를 내 놓았다. 그것은 가빈이 박민수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었다. 그것을 본 가빈이 처음에는 깜짝 놀랐으나 한참 만에 체념 한 듯 울부짖었다.

“그래요. 내가 죽였어요. 내가 나쁜 년이예요. 여보 미안해요.”
정말 차가빈이 범인일까? 왜 갑자기 자기가 범인이라고 시인 했을까?
스카프가 박민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남편뿐이다. 남편 최강호가 박민수를 죽인 뒤 일부러 가빈에게 혐의를 두기 위해 가져다 둔 것이었다. 
그러나 가빈은 남편의 범행임을 알고 그를 살리기 위해 거짓 자백한 것이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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