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백한 기준’ 없어 각기 다른 판례… “추행 범위 넓혀야”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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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지난해 12월 말 경남 김해의 큰길가에서 한 남성이 지나가는 여성에게 정액으로 추정되는 액체를 뿌리고 달아났다. 피해 여성의 신고로 범인은 잡혔지만 사건을 조사한 경찰은 정황은 있으나 성범죄의 영역으로 단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고의성 입증을 위한 수사를 진행 중이다. ‘정액 테러’ 사건처럼 성범죄로 규정하기 애매한 물질 등을 뿌리고 도망가는 ‘엽기 성범죄’는 계속 발생하고 있지만 뚜렷한 처벌 대안이 없어 비슷한 사건을 두고도 각기 다른 판례가 나온다. 이와 관련한 전문가들의 해석도 다양하게 확인됐다.

- ‘재물손괴죄’일까 ‘강제추행죄’일까… 성범죄로 볼 수 있나

경남 김해에 사는 20대 여성 A(25)씨는 최근 겪은 사건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자해를 시도하다 양팔에 흉터가 생겼다. 결국 그는 정신과병원을 찾았고 2,3주 전후로 스트레스가 극심해졌다는 전문의의 소견서를 받았다. A씨는 지난해 12월 말 퇴근길에서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 길을 걸어가다 맞은편에서 오던 20대 남성과 마주치며 지나가는 순간 남성은 A씨 등 뒤에 ‘흰색의 끈끈한 점액질로 된 액체’를 뿌리고 도망갔다. 이로 인해 머리카락이 젖었고 패딩 뒤에 뿌려진 액체는 다리까지 흘러내렸다. 근처 편의점에서 휴지로 옷을 닦던 A씨는 액체가 정액으로 의심돼 경찰에 신고했다. 

당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A씨에게 정액인지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그는 “옷을 닦다 보니 흰색의 끈적이는 느낌 때문에 정액 같아서 ‘정액 테러’를 당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이 성기를 봤느냐고 물어봐서 휴대폰을 보며 걸어가서 못 봤다고 했더니 경찰은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옷을 닦은 휴지를 드릴지 물었는데 경찰은 괜찮다며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30여 분 뒤에 출동했던 경찰은 ‘주변에 CCTV가 없어서 못 잡을 것 같다, 잊고 편히 쉬라’는 말을 건넸다”고 말했다. A씨는 “큰길에 CCTV가 없을 리도 없고 목격자도 있었는데 문제를 심각하게 보지 않고 대충 처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결국 그는 머리와 옷을 닦은 휴지를 챙겨 182에 민원을 넣고 재신고를 했다. A씨의 이야기를 들은 경찰은 전담수사팀을 꾸려 수사를 진행했고 사건 발생 9일 만에 범인을 특정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식 결과 범인이 뿌린 액체는 정액처럼 보이도록 만든 액체인 것으로 확인됐다. ‘가짜 정액’인 셈이다. 경찰 조사에서 범인은 여성에게 정액이 아닌 ‘액체’를 뿌렸다며 범행을 시인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번 사건의 처벌 수위를 놓고 고심 중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물질이나 액체 등을 뿌려 물건을 훼손하게 한 ‘재물손괴죄’로도 처벌이 가능하나, 직접적으로 피해자의 신체에 (물질이나 액체 등을) 뿌렸기 때문에 ‘폭행죄’로도 볼 수 있어서다. 또 폭행죄가 인정되면 ‘강제추행죄’로도 성립할 수 있다. 

사건을 조사한 경찰 관계자는 일요서울과의 통화에서 “신체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것뿐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한테 특정 물질이나 액체를 뿌리는 것만으로도 폭행죄가 성립된다”며 “강제추행죄에는 폭행이나 협박도 포함되기 때문에 이번 사건은 강제 추행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다. 원치 않는 사람한테 물을 뿌리거나 침을 뱉는 것도 폭행으로 간주해 강제 추행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다만 강제추행죄는 고의성이 입증돼야 하기 때문에 범인에 대한 수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첫 출동 당시 미흡했던 경찰의 대처가 ‘성인지 감수성’ 부족 때문이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출동 경찰이 옛날 바바리맨 정도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게 문제가 됐던 것 같다”며 초동 대처가 미흡했다고 인정했다. 이어 “피해자가 안심할 수 있도록 조치했어야하는데 부족했다. 피해자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전문가 “가짜 정액은 고의성 입증 어려워”

이번 사건뿐 아니라 몇 년 전부터 성범죄로 규정하기 애매한 물질 등을 뿌리고 도망가는 성추행 범죄는 계속 발생하고 있지만 뚜렷한 처벌 대안이 없어 비슷한 사건을 두고도 각기 다른 판례가 나왔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성추행 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보면서도 전통적인 법적 판례에 비춰볼 때 아직은 성범죄 영역에 포함될 수 있을지 섣부르게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전문가들의 해석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일요서울과의 통화에서 “이번 사건은 강제 추행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의도를 갖고 고의로 인정될 만한 증거물이 ‘정액’인데 진짜 정액일 경우는 확실한 고의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이건 진짜 정액이 아니기 때문에 성적인 목적을 위해 액체를 만들어서 뿌렸다는 고의성을 입증하기까진 어려워 보인다”고 지적했다. 

성폭력 전문 신진희 변호사도 “진짜 정액이면 강제추행죄가 성립되지만 이번처럼 가짜 정액인 경우는 고의성 입증이 어려워 강제 추행이 성립되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신 변호사는 “사람의 신체에 특정 물질을 붓는 행위를 했을 때 그 물질을 강제 추행에 해당하는 물질로 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며 “강제 추행에 해당하는 물질은 주로 정액이나 오줌 등 사람의 체액인데 정액이 아니라면 강제추행죄 처벌은 쉽지 않을 것 같다. 길 가는 여성의 머리에 진짜 정액을 끼얹었던 사건은 강제 추행으로 유죄 판결이 선고된 적 있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현행 법률에 따른 법적 판단과는 별개로 성범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우리 법의 판례로 봤을 때는 아직까지 성범죄로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며 “대법원에서는 강제추행죄에서 ‘추행’의 의미를 판시할 때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행위라고 적시하고 있다. 대체로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킨다고 인정했던 판례들은 성적으로 관련 있는 행위나 물체, 행동 등을 취했을 때 추행으로 인정된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는 사안에 따라 달리 판단한다”고 말했다. 

이어 “판례 중에서는 엘리베이터에서 피해자를 칼로 위협해 꼼짝 못하게 해 놓고 그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건 추행이 된다고 보는 판례가 있는가 하면 횡단보도 맞은편에 서 있는 여성을 보고 남성이 바지를 다 벗고 성기를 보여줬던 사건은 강제 추행이 아니라고 봤다”며 “이런 판례를 보면 추행으로 보는 기준이 굉장히 애매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땐 당연히 성적 수치심을 느끼고 추행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도 대법원은 추행에 해당한다고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이번 사건도 진짜 정액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단순히 액체를 부은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강제 추행으로 의율 되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다만 최근에는 성인지 감수성이 전보다는 높아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며 “판례에서 성범죄 영역을 확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기존 판례와 달리 이 부분을 성적 수치심으로 인정할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액인지 아닌지의 여부보다는 정액으로 보여서 성적 수치심을 느꼈느냐가 중요한 문제인데 이와 같은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며 “이를 입법의 문제로만 해결하기보다는 법원에서 적극적으로 ‘추행 범위’를 넓히는 방향으로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입법이 되더라도 법원에서 소극적으로 판결하면 바뀌는 건 없다”며 법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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