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영삼 전 대통령 [뉴시스]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김영삼 대통령 유럽 순방

“대통령, 콜 수상 독일통일 이야기에 귀 기울여”

 

- 콜 수상도 굉장히 역사적인 인물이다. 통일을 이루어낸 인물이자 카리스마도 강하다. 당시에 김영삼 대통령도 만만치 않은 개성이 강한 인물이었는데, 두 지도자 간의 정상회담 때 재미있는 상황은 없었나. 
▲ 우리 측에서 통일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니까 김영삼 대통령도 상당히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카리스마의 충돌은 없고 아주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3월6일 본에 있었고, 7일 베를린에 가서 8일까지 머물고 그다음에 영국으로 갔다. 영국에서는 여왕이 주최하는 오찬이 있었다. 그 후에 메이저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지고, 상원의장이 주최한 만찬이 있었는데, 여왕 주최 오찬에는 우리 측 인원이 각료들만 4~5명으로 아주 적은 수였고, 영국 측에서는 필립공이 나와서 여왕과 같이 있었다. 

여왕은 바로 대통령과 함께 바로 내 옆에 있는데, 밥 먹다가 시선이 테이블 밑에 떨어졌는데 여왕께서 하이힐을 벗고 있었다. 그래서 역시 하이힐 신으면 불편한가 보다고 느끼며, 여왕의 인간적인 측면을 보는 것 같아서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잊어버렸는데 그 광이 생각이 난다. 그 후에 그날 저년 때인가 여행 중에 대통령께 “아십니까?” 하니까, 대통령께서 “나는 발을 밟았어”라고 하셨다. 

정상회담은 물론 존 메이저 수상과 있었는데, 양 정상은 실무진에서 준비된 발표문이 잘되었다고 만족을 표명하면서 발표에 동의했고, 화제를 옮겨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했다. 영국 쪽에서는 양국 간의 교역 및 상호 투장 증진을 희망하고 상당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때 삼성이 1999년까지 영국 뉴캐슬 지역에 전자산업센터를 조성하기로 하고 약 7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되어 있었다. 상당히 큰 직접투자가 이루어지는 상황이었다. 한국은 고급인력과 산업기술재 교류 확대를 희망했다. 그다음에 역시 여기서도 프랑스와 같이 영국에 주재하는 우리나라 상사원들에 대한 사회보장세를 상호주의 원칙에 의해서 면제할 수 없겠느냐는 요청을 했다. 영국 쪽에서도 이에 대해 서로 구체적인 협의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다음에 UN안보리 진출에 대해서 영국의 지를 요청했더니 “특정 나라에 대한지지 여부 표명은 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다음에 “평화유지군 문제에 있어서 한국은 어디든지 조건 없이 파견하느냐”는 질문을 영국 측이 해서 우리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검토를 해서 파견하는 원칙하에 있다”고 했다. 현재 그 당시 앙골라에 파병을 검토하고 있었기에, “앙골라에 평화유지군을 보내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다음에 문화교류 증진을 위해서 영국쪽에서는 대영박물관의 한국실 개관이 꼭 실현되기를 희망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1997년까지 한국실을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대영박물관에 한국실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다음에 우리는 1996년 코리아페스티벌에 대한 영국의 협조를 요청했다. 

북한 정세와 관련해서는 KEDO에 영국 정부가 관심을 두고 참여하기를 바랐는데 영국 정부 역시 북한 정세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주로 김정일의 건강 문제, 군부의 영향력 증가 여부, 국경 경비 강화 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 중국과의 국경 경비 문제가 있어 그 배경이 무엇인가 등등의 이야기가 있었고, 권력 승계가 잘 되어 가느냐 등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 정부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공유했다. 그다음에 “한국이 KEDO 참여를 요청한 데 대해서 영국은 KEDO 관련 회의에 참석하고 있고 경제적인 역할도 하겠다”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우리가 메이저 수상의 방한을 요청한 데 대해서는 “적당한 시기를 골라서 추진하겠다”고 했는데 아시다시피 실현이 안됐다. 당시 토니 블레어는 야당 지도자였는데 영국 관례에 따라서 블레어가 국빈방문을 한 국가원수 지도자에 대한 예방을 하게 되어있어 훗날 수상이 되는 블레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것이 영국에서 했던 커다란 행사였다. 

그리고 영국에서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으로 들어가서 세계사회개발정상회담에 참석을 했다. 세계사회개발정상회담은 3월 11~12일에 걸쳐 있었고 100여 명의 국가원수들이 참여를 했다. 각 국가 정상들의 연설이 있었고 그에 따라 코펜하겐선언이 채택됐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코펜하겐선언은 정치 선언과 사회행동계획, 두 개의 부문으로 나뉘어 있는데 정치 선언에서는 전 인류 복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21세기에도 이러한 과제와 정책에 최우선순위를 둘 것을 결의하는 측면이 있었고, 또 하나는 10개 항의 선언 가운데 특히 선진국은 빈곤국에 GNP의 0.7%를 ODA로, 곧 개발원조로 제공할 것을 다시 한번 요청하고 빈곤국가의 부채를 탕감해줄 것을 결의하는데, 그와 동시에 이때 탕감하는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실제로 탕감한 국가들도 꽤 있었다. 이런 두 가지 측면을 세계사회개발정상회담 선언 속에 담고 있었다. 

그리고 물론 요새도 과제가 되겠습니다만, 사회적 폭발을 예방하기 위해서 빈곤 퇴치, 고용 확대 등이 문제가 되었고 사회 통합 강화가 절실히 요구된다는 인식을 같이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놓고 약간의 이견이 있어서 컨센서스를 이루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그렇게 코펜하겐에서의 세계사회개발정상회담은 막을 내렸다. 그 영향이 얼마나 되는지는 좀 더 두고봐야 하겠지만, 세계의 추세가 경제선진국은 ODA 0.7%라는 목적을 두고 가급적 빈곤국가의 부채를 탕감해주는 노력을 하자는 방향이 설정되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 그 이후에는 외상회담을 진행했나. 
▲ 네. 7국가 외상들과 개별 외상회담을 진행했다. 첫 번째는 이란과의 회담으로, 3월10일 오후에 있었다. 이란은 북한 핵과 KEDO에 관심을 표명했다. 그래서 KEDO가 경수로 공급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북한의 한국형 경수로를 제공하려고 하는데 북한이 이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는 확정 없이는 경수로 건설을 할 수가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표명했다. 그다음에 UN 인권위원회와 관련해서 한국은 서방 측의 강력한 요청에도 양국 간의 입장에서 기권했다는 이야기를 일러줬다. 그랬더니 굉장히 깊은 사의를 표한다고 했다. 이때 이란에 대해서 이러한 관계를 온전히 하려는 노력이 박근혜 대통령의 이란 방문이다. 재작년이었던가? 

- 작년 아니면 재작년이었던 것 같다. 
▲ 좀 가물가물합니다만, 그것이 상당히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이란 측의 적극적인 호응이 있었는데 역시 이런 것들이 쌓여온 결과다.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우리 정부의 대이란정책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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