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가 어느 쪽에서 날아왔습니까?”
서생면 쪽에서 날아와서 월내 쪽으로 가다가 되돌아 왔습니다.”
“서생면 면사무소 쪽을 말하는 거군요. 원자로를 기준으로 보면 동북쪽이지요. 반대쪽은 남쪽이고요. 임랑 해수욕장이 근처에 있지요.”
문동언 경위가 말했다.

“거긴 비행장이 없는데... 바다에서 비행기가 뜰 리도 없고.”
손진훈 과장이 혼잣말을 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비행기에 조종사가 없었던 게 확실하군요?”
“조종사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비행기에서 한 사람이 탈출한 것은 틀림없어요.  비행사 모자를 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 비행기의 기종이나 넘버 같은 것은 보지 못했습니까?”
손진훈 과장이 다시 물었다.
“레저용 경비행기 같았어요. 위에는 Sky Ranger라는 표시가 있었어요.”
수사관들은 그 외에도 세세한 것들을 물었다. 아나톨리에 관해 수원이 알고 있는 여러 나라의 네티즌에 관해서도 물어보았다.

“아나톨리가 세계적 조직인 것 같아요. 테러에 관여하는 단체일 거예요.”
“고맙습니다. 또 필요하면 물어보러 오겠습니다.”
문동언 경위 일행은 거의 두 시간에 걸친 심문을 끝내고 돌아갔다.
경찰에 진술하는 동안 수원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성민과 화성에서 비행하던 일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성민이 이 사건과 연관돼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경찰에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대 사랑하는 나는 행복한 사람/잊혀질 땐 잊혀진대도...”
컬러링으로 가수 이문세의 달콤한 목소리만 흘러나올 뿐 성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원은 꼭 연락해 달라는 메시지를 음성으로 남겼다.
수원은 환자 휴게실로 가서 컴퓨터를 열었다. 이메일을 제공하는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는 온통 고리 원전 폭탄 테러에 관한 내용이었다.
메일함에 접속해 보니 메일이 여러 개 와 있었다. 그 중에 마리아 바소로뮈가 보낸 것이 눈에 띄었다.

- onesil님, 오랜만입니다.
놀라운 소식이 있어 메일을 씁니다. 중국에 있는 ‘닝닝 웡’이라는 여자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닝닝은 1970년대에 프랑스 주재 중국 대사관에 근무하던 여성입니다. 판도라 사이트의 회원이기도 하고요.
닝닝이 북경에서 입수한 것인데요, 오랫동안 북한에 억류돼 있던 한국인이 최근 북경의 미국 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답니다. 이름이나 경력으로 보아 아무래도 onesil님의 아버지인 것 같습니다.

망명 요청자 이름은 세르게이 한.
1939년생.
한국 외교관으로 파리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대한항공편 강제착륙 사건 때 소련에 억류됨. 소련에 10여 년간 감금되었다가 소련 공산당이 해체된 뒤 러시아 정부로부터 북한에 인계됨. 북한에서 스파이 죄명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2009년 2월 두만강 빙판을 건너 중국 땅으로 탈출. 연길에서 미국 선교사를 만나 미 대사관에 망명 신청.

미국 국무성이나 주미 한국 대사관에 좀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본숑스.
마리아 바소로뮈.
‘세르게이 한?’
수원은 너무 놀라 손이 떨렸다.
‘세르게이 한? 용국 한?.’
그동안 여러 사람의 메일을 받아보았으나 마리아 바소로뮈가 전해 준 정보가 가장 신빙성이 있었다. 이번 메일도 사실이라면 아버지가 살아계실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까?’

그렇다면 정말 기적이었다.
수원은 미국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 박정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의 정자를 찾아서 수원을 탄생시켜 준 사람이었다.
“한국인 망명 요청 건이 실제로 있는가, 그 곳 대사관에 좀 알아봐 주세요.”
“오케이.”
그동안 아버지 죽음의 의혹을 풀기 위해 애써 온 수원의 이야기를 듣고 난 박정무는 당장 알아보겠노라며 흔쾌히 약속했다.

19. 가장 긴 하루
신 고리 2호가 폭탄 테러를 당한 지 9시간 뒤인 오후 네시, 과천 지식경제부 대회의실에서 내외신 기자 회견이 열렸다. 전 세계의 이목이 고리 원자력발전소에 집중되어 있었다. 뉴스를 좇는 매스컴의 경쟁도 치열했다. 회견장에는 2백여 명의 내외신 기자와 카메라맨이 몰려 열기가 후끈했다.

정부 측 참석자는 지식경제부 장관, 법무부 장관, 국방부 차관, 국정원 제1차장, 경찰청장, 그리고 한국수력원자력 김종호 사장이 주요 멤버였다.
지식경제부 장관이 사건 개요를 전달했다.
“덧붙여 말씀드릴 것은 한국형 원자로의 설계가 세계 어느 나라의 설계, 시공보다 안전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어 질문이 쏟아졌다.
“CNN입니다. 범인의 윤곽은 잡혔습니까?”
“아직 밝힐 수 없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법무부 차관이 답변했다.

“KBS 김정락 기자입니다. 단독범행입니까, 아니면?”
“단독범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SBS 진철수 기잡니다. 단독범이 아니라면 배후 조직이 있다는 겁니까?”
“국내 세력입니까 외부세력입니까?”
“북한이 개입돼 있습니까?”
기자들의 질문이 빗발쳤다.

“아직 대북 용의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외국의 테러 조직 가운데 하나인 아나톨리가 개입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국정원 차장이 설명했다.
“AP통신 카펜터입니다. 아나톨리가 어떤 조직입니까?”
“아직 정체를 정확히 밝히진 못했지만 국제적인 연계망을 가진 테러 조직으로 추정됩니다.”

“아나톨리가 테러의 배후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우선 자폭 비행기에 ‘아나톨리’라고 쓴 플래카드를 달고 있었다는 점을 보면 아나톨리의 짓이 확실합니다.”
경찰청장이 답변했다.
“그거야 위장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조선일보 기자가 반박했다.
“그럴 가능성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폭파 비행기의 조종사가 주범이고, 그가 아나톨리 한국 조직책이라는 말씀이지요?”
중앙일보 기자가 물었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법무차관이 대답했다.
“방사선 유출 제로라고 하셨는데, 현장 측정 데이터를 직접 공개할 수 있습니까?”
다른 기자가 물었다.

“회견이 끝난 뒤 데이터를 드리겠습니다.”
지식경제부 장관이 대답했다.
한 시간 이상 계속된 회견은 다섯시 15분에야 끝났다.
한편 아나톨리를 추적하고 있는 수사본부는 큰 수확을 올렸다. 인터넷 추적 팀이 한국수력원자력 게시판에 올라온 협박문의 IP 추적에 성공했던 것이다. 특급 호텔 휴게실 CCTV를 분석해서 게시판 글이 올라온 시간대에 휴게실 컴퓨터를 사용한 사람의 리스트를 작성했다. 그 가운데 얼굴을 교묘하게 가린 두 명이 강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한 명은 남자였고, 한 명은 여자였다. 둘 다 신원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마침내 알아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경찰은 그 두 사람의 신병 감시에 들어갔다.

핸드폰 추적 팀은 중국 대포 폰의 주인을 찾음으로써 일이 잘 풀려 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중국 핸드폰에 전화요금을 입금한 사람에 이르러 추적이 끊겨 버렸다.
다행히 중국 대포 폰이 한국 내에서 사용될 때 거쳐 간 중계 셀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중국 대포 폰을 가진 사람이 또 다른 한국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중국 대포 폰을 사용하는 위치를 찾아내자 그 위치에서 한국 핸드폰 하나가 항상 같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나타났다. 한 사람이 두 대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안토니오 클럽을 감시하던 팀은 안토니오 2호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그러나 안토니오 2호는 꼼짝하지 않았다.
“아니 저건 뭐요?”
폭탄 테러가 있던 날 새벽, 안토니오 2호를 감시하던 수사관이 멀리 떨어진 해변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요트 한 척이 더 있었다. 요트가 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약 수원이 그 요트를 보았다면 장 안토니오의 시체가 발견 되던 날 고리 원전 앞바다에 떠 있던 요트라는 걸 금세 알아보았을 것이다.
“새벽에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수사요원은 즉시 해경에 연락하고 경비정으로 따라가며 멀리서 감시하기 시작했다.

요트는 북쪽으로 한참 올라가서 월내리의 임랑 해수욕장 앞 바다로 가서 멈추었다.
같은 날 새벽, 울산 공항과 김해공항 감시 레이더는 허가 받지 않은 민간 경비행기가 감지되어 확인을 하느라 분주했다.
또한 해경 레이더와 육군 예비사단 정보대에도 정체불명기가 서생면 항공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모든 기관이 즉각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항공기와 선박을 출동시켰다.
감시팀이 제지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 현장은 폭발 규모에 비해 그리 처참하지 않았다. 비행기는 원자로 돔의 4분의 3 정도 되는 높이에 충돌했다. 돔의 최종 방호벽인 시멘트 콘크리트가 50센티미터 정도 파였다. 두께가 1미터 20센티미터니까 파괴에 이르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땅에는 거의 1미터 깊이의 구덩이가 파였다. 비행기는 산산이 부서져 잔해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비행기가 부딪친 반대쪽에 터빈실과 주제어센터 건물이 있었다. 덕분에 이 시설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감정 팀은 공격에 사용된 폭약을 C-14로 판단했다. 정확한 양은 알 수 없으나 20kg 이상이 사용된 것으로 보였다.
폭탄 공격 직전 비행기에서 탈출한 조종사는 해변에 가까운 월내리에 내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방호복을 입은 채 푸른색 낙하산을 질질 끌며 걸었다. 사나이는 곧 낙하산을 접어서 어느 민가의 담 밑에 버린 뒤 바다로 달려갔다.
방호복의 사나이는 요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요트는가 사나이 쪽으로 급히 미끄러져 갔다.

“꼼짝 말아라. 경찰이다!”
그때 모래언덕 뒤에 잠복해 있던 경찰관들이 튀어나와 총을 겨누었다. 그러자 방호복의 사나이는 뒤를 힐끗 돌아다보았다. 사나이는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  요트에 뛰어올랐다. 
요트가 다시 속력을 내는 순간 바다 왼쪽에서 쾌속정 두 대가 나타났다.
“우리는 해양경찰이다. 그 자리에 멈춰라!”

뭍에서는 경찰이 총을 겨누고, 바다에서는 쾌속정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요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바다 가운데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쾌속정이 추격을 시작했다.
20여 분을 추격한 끝에 요트가 도주를 포기했다.
무장한 해양 경찰관들이 요트에 올라갔다.

“손들고 나와!”
그러나 요트에는 여드름투성이의 소년 하나밖에 없었다. 선내를 다 뒤졌으나 다른 사람은 없었다.
“너는 누구냐?”
경찰이 묻자 여드름 소년이 떨면서 답했다.
“저는 낚시점 알바생인데요.”

“여기 탄 사람은 어디로 갔어?”
“두 사람 다 산소통 메고 바다로 뛰어들었어요. 전 그 아저씨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소년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두 사람?”
“예. 한사람은 요트 몰고 온 아저씨고요. 한 사람은 해변에서 요트에 올라 탄 사람이구요.”
“같이 온 아저씨가 누구냐?”

“잘 몰라요. 조씨 아저씨라는 것밖에...”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리다니...”
넓은 바다 속을 샅샅이 뒤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해변으로 돌아온 경찰은 해변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조종사와 조 씨라는 남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말 귀신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20. 함정
며칠 동안 수원은 성민에게 여러 번 전화를 했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다. 사무실로 전화를 해 봐도 휴가 중이라고만 했다.
이상한 예감에 수원이 애를 태우고 있을 때 뜻밖에도 정세찬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니, 정 박사님이 웬일이세요?”
“안부 전화입니다. 무사하시지요?”

정세찬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좀 다르게 들렸다. 항상 차분하고 가라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약간 들뜬 것 같았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으세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수원 씨 아닙니까?”
“그렇긴 하네요.”
“여기 부산입니다. 어제 밤에 부산에 출장 왔다가 뜻밖에 배 박사와 유미 씨를 호텔에서 만났지 뭐예요?”

“예? 그럼 두 사람이 여기 호텔에 와 있었단 말인가요?”
수원은 성민이 전화기도 꺼놓고 유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감이 밀려왔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군.’
수원은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정세찬도 그래서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이리 좀 나오시겠어요?”
“왜요?”

“그 두 사람과 우리 두 사람이 한 번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원은 유미의 손목에 찬 팔찌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역시 성민이 선물한 게 틀림없었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미심쩍긴 했지만 확인까지 하진 않았다. 어쩌면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무엇이든 깨끗이 마무리를 지어야 미련이 남지 않는 법입니다. 두 사람 얘기도 들어 보고요.”

수원은 정세찬도 연인이 다른 남자와 호텔에 있는 것을 목격했으니 속이 편할 리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호텔이에요?”
“샹그릴라 호텔입니다. 빨리 오세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럼 한 시간 내로 갈게요.”

수원은 외출할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 두 사람이 사귀는 게 사실이라면 정세찬의 말대로 이참에 배성민에 대한 마음을 깨끗이 정리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수원은 간단히 머리만 매만지고 집을 나왔다.
수원이 호텔 로비에 들어서서 두리번거리자 한 남자가 다가왔다.
“정 박사님 만나러 오셨죠?”
“네, 그런데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앞장서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 뭐 하십니까?
주영준의 문자였다. 주영준은 문자 메시지조차 항상 심각한 투로 보냈다. 수원은 얼른 답신을 보냈다.

- 친구 만나러 샹그릴라 호텔에 왔어요.
수원은 남자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15층에서 멎었다. 남자는 1501호 객실 앞에서 멈췄다. VIP룸이었다. 남자는 문 옆에 달린 벨을 눌렀다.
“어머,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네요. 전 정세찬 박사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모시고 왔잖아!”
남자가 갑자기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수원의 몸을 열린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 안으로 들어선 남자는 어느새 손에 권총을 빼어 들어 수원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앞으로 가.”

남자는 총구로 앞쪽을 가리켰다. 수원은 놀라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수원은 남자가 지시하는 대로 현관 안쪽으로 들어섰다. 널찍한 거실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한 수원 박사, 어서 오십시오.”
가운데 소파에 앉아 있던 정세찬이 손을 들어 보였다. 옆에는 고유미가, 맞은편에는 배성민이 앉아 있었다. 창가에서는 붉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서양 여자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수원의 뒤를 따라 들어온 남자가 권총을 든 채 배성민의 원탁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수원이 들어서자 가장 놀란 사람은 배성민이었다.
“무슨 짓들이야? 수원이는 그냥 내보내.”
배성민이 정세찬과 고유미를 향해 소리쳤다.
“그건 좀 곤란한데.”
정세찬이 느릿느릿 말하면서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수원은 정신을 수습하며 상황 파악을 하려 애썼다. 우선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인질로 삼으려는 게 분명했다.
“인질은 나 하나면 충분하잖아.”

배성민이 이번에는 사정조로 말했다.
수원은 눈을 천천히 움직이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 안은 현재 정세찬이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배성민도 자신처럼 잡혀 온 처지인 것 같았다. 고유미와 소피아, 그리고 권총을 든 남자는 정세찬을 돕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수원의 편은 배성민뿐이었다.

“배 박사, 무리한 요구라는 건 당신도 알잖아? 한수원 박사야말로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할 사람이야. 한국형 원자로 개발의 핵심 연구원. 우리가 한국을 탈출하는 데 꼭 필요한 한 인물이지. 우리가 잘 모시고 함께 나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정세찬은 웃음을 머금고 여유롭게 말했다. 그러나 눈동자는 불안하게 움직였다. 친구처럼 지내던 사람들의 엄청난 변신에 수원은 혼이 나간 듯 얼떨떨했다.

“한수원 박사, 이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이 가시나? 우리를 도와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아시겠지?
정세찬이 엉거주춤 서 있는 수원을 바라보며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원자로 폭파가 실패하는 바람에 일이 꼬였어. 일단 한국을 빨리 떠나야 하는데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서 이렇게 초대한 거요.”

원자로 폭파에 실패? 그렇다면 정세찬 박사가 폭파범이란 말인가?
“정 박사님이 아나톨리란 말인가요?”
수원이 정세찬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하하. 머리 회전이 빠르시군. 역시 국제적 재원은 달라.”
정세찬은 과하게 제스처를 쓰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나톨리는 아니야. 아나톨리는 전 세계적으로 뻗어 있는 거대한 국제조직이거든. 나는 지질한 교수 짓에 신물 난 한국 아나톨리 책임자요.”
“유미 너는 뭐야?”
수원이 고유미를 향해 힐책하듯 물었다.

“고유미 씨는 나의 둘도 없는 동지. 조명진 씨도 충성스런 동지.”
정세찬은 수원을 유인해 온 남자를 가리켰다.
“소피아는 우리의 재정 책임자.”
자기 이름이 나오자 창가에 서 있던 여자가 몸을 돌렸다. 빈에서 만났던 아토믹캐나다의 직원 소피아 빌리에, 그 여자였다.
수원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배성민의 연인인 줄 알았던 소피아가 정세찬과 한패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 네 사람은 배 박사와 한 박사를 모시고 한국을 떠날 거요. 밤 11시 비행기로 인천 공항을 떠나 미국으로 갑니다.”
정세찬의 말이 끝나자 소피아가 수원을 바라보며 턱으로 자기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앉으라는 명령이었다.

수원은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우선 이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수원은 명령대로 소피아 곁에 있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한 시간 뒤에 우리는 이 호텔을 나갑니다. 배 박사 곁에는 조명진이 붙어 보호할 것이고 한수원 박사 곁에는 소피아가 다정하게 붙어 보호할 것이오. 자연스럽게 호텔을 나가야지 허튼짓 하면 당장 옆구리에 구멍이 날 줄 아시오.”
수원은 성민을 건너다보았다. 조명진의 총구가 성민을 향하고 있었다. 성민은 안타까운 눈으로 수원을 바라보았다.

수원은 다시 고유미에게 눈길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고유미는 외면을 했다. 그리고는 옆에 놓인 커다란 카메라 가방만 만지작거렸다.
수원은 무엇보다 친구의 배신이 가슴 아팠다. 한국에 돌아와 우연히 마주친 고유미, 학창시절처럼 스스럼없이 지내온 두 사람. 우정을 가장한 계산된 접근이었단 말인가.

“자, 한 박사. 핸드폰과 여권을 내놓으시오.”
“난 여권 같은 거 안 가지고 다녀.”
순간 수원이 핸드백을 열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안 돼! 뺏어!”

정세찬이 소리치자 곁에 앉은 소피아가 핸드폰을 쥔 수원의 팔을 낚아챘다. 수원은 죽을힘을 다해 소피아의 팔을 뿌리치면서 핸드폰을 열린 창밖으로 집어던졌다. 던지기 직전 수원은 핸드폰의 SOS버튼을 눌렀다. 15층에서 땅에 떨어질 때까지 몇 초의 시간에 SOS 발신이 될 것이라고 계산했다.
몇 초 후 주영준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SOS 긴급 메시지 전송음이었다.
- SOS. 한수원이 구원을 요청합니다.
“뭐하는 짓이야?”

정세찬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소피아가 어찌나 세게 팔을 비트는지 수원의 입에서는 저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저 여자 가방을 조사 해봐.”

정세찬의 명령이 떨어지자 소피아가 수원의 팔을 놓고 핸드백을 빼앗아 거꾸로 쏟았다. 화장품 몇 가지와 지갑, 손수건, 수첩, 여권이 나왔다.
“패스포트.”
소피아가 수원의 여권을 집어 정세찬에게 던져 주었다.
“없다면서? 숙녀께서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

정세찬이 수원의 여권을 손에 쥐고 흔들면서 말했다.
“앞으로 긴 세월을 우리와 함께 지내야 할 텐데 그런 속임수를 쓰면 되나? 한 번 더 이런 일이 있으면 인생이 얼마나 괴로운 건지 알게 해주지. 나는 두 번은 안 봐주는 사람이거든.”
정세찬이 목청을 높여 주의를 주었다. 주의라기보다는 협박이었다.
“너희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보고 있던 성민이 소리를 질렀다. 정세찬이 험악한 표정으로 성민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하면 열등감이 좀 보상되나?”
성민이 입가에 비웃음을 흘렸다.
“열등감? 내가?”
정세찬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너는 상류사회에 끼어들 수 없어. 한탕 했다고 단번에 신분 상승이 되나?”

“뭐야?”
정세찬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고 성민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러는 배 박사님께서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입양아 주제에.”
정세찬이 들고 있던 권총으로 성민의 이마를 거세게 내리쳤다. 입양아라는 말에 수원은 깜짝 놀라 성민을 바라보았다. 수원의 시선을 느낀 성민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뿌리 이야기를 하며 내게 부럽다고 했구나.’
수원은 가슴이 아려왔다. 성민이 조국에 대해 아무런 애정도 못 느끼고 국제 고아처럼 쓸쓸해 한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성민의 이마 한가운데서 피가 흘러내렸다. 수원이 손수건을 들고 다가가 이마의 피를 닦아주었다.

“이거 써.”
정세찬이 곁에 걸려 있는 모자를 배성민에게 던졌다.
“푹 눌러 쓰고 상처 안 보이게 해. 자, 그러면 모두 출발 준비한다.”
정세찬은 시계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호텔과 공항을 나갈 때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해. 만약 두 사람이 허튼짓 하면 그대로 총을 쏘아버리고 튀어. 우리가 살아남는 게 중요하니까. 마지막 접선 장소는 잘 알고 있지?”

정세찬은 허튼짓하면 총을 쏘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었다. 배성민과 한수원이 알아듣고 행동하라는 뜻이었다.
정세찬의 말이 끝나자 소피아가 핸드백에서 권총을 꺼냈다. 장난감같이 작은 은빛 권총이었다. 너무 작아 손에 쥐고 있으면 권총을 들고 있는지 아닌지 모를 정도였다.

“잠깐 화장실에 좀 다녀오게 해 주세요. 바지에 실례를 해버리면 지나가던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수원이 시간을 끌 요량으로 말했다.
“빨리 다녀와.”
정세찬이 소피아를 보고 눈짓을 했다. 소피아는 권총을 든 채 수원을 뒤따라 화장실로 들어갔다. VIP룸이어서 넒은 거실에 침실이 두 개, 화장실이 두 개,  부속실이 한 개, 부엌까지 딸려 있었다.
수원은 소변을 보는 척하면서 손잡이 곁에 붙어 있는 비상벨을 잽싸게 눌렀다. 거실 쪽에서 부저가 다급하게 울렸다.

“뭐야?”
정세찬이 고함을 질렀다. 화가 난 소피아가 수원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무슨 짓이야. 놓아 줘!”
성민이 소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조명진이 앞을 막아섰다.
곧 이어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정세찬이 수화기를 들었다.
“아무 일 없어요. 실수로 잘못 누른 거요.”

“곧 확인하러 올라가겠습니다.”
프론트 직원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밖으로 새어나왔다.
“올 것 없어요.”
정세찬이 침착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곧 가겠습니다.”
직원은 올라가서 확인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냥 죽여 버릴까?”

수원을 바라보는 정세찬의 얼굴에 살기가 등등했다.
“닥터 정, 밖을 봐.”
창문을 내다보고 있던 소피아가 소리쳤다. 정세찬은 권총을 배성민에게 겨눈 채 창 쪽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경찰차 수십 대가 호텔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사이로 방탄 무장을 한 특공대원들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저자들이 어떻게 알고”

정세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계획이 실패한 것 같은데 이제 우리를 풀어주고 항복하시지? 정상참작이라는 게 있잖아.”
배성민이 느긋하게 말했다.
“흥. 내가 고이 물러갈 것 같아?”

정세찬은 고유미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이를 갈았다.
“이럴 것에 대비해서 장치를 다 해 뒀지. 내가 버튼 하나만 누르면 호텔 전체가 날아가. 알겠어?”
성민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주먹만 불끈 쥐었다.
그때였다.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정세찬은 수화기를 들고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온후크 스위치를 눌렀다.
“경찰이다. 정세찬 거기 있지?”
수원은 내심 놀랐다. 주영준이 핸드폰의 SOS 구조 요청을 받았더라도 시간이 한참 걸린 뒤에야 나타날 줄 알았다. 주영준이 아니라 경찰 특공대가 달려온 것도 놀라웠다. 게다가 경찰이 정세찬의 이름을 먼저 부른 것도 뜻밖이었다.
“내가 정세찬이다.”

전화기에서 잡음이 들리다가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수사팀장 문동언 경위요. 당신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소. 당신들은 지금 완전 포위되었으니 항복하시오. 한수원 박사와 배성민 박사를 풀어주고 자수하면 최대한 정상을 참작해 주겠소.”

그러나 정세찬은 전혀 흥분하지 않고 대응했다.
“프로끼리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옥상에 헬리콥터를 대기시키시오. 20분의 여유를 주겠다. 만약 1초라도 어기면 이 호텔에 장치된 폭발물을 터뜨리겠다. 호텔 투숙객이 아마 2백 명이라지?”
“헛소리 그만해!”

“내가 헛소리하는 것 같아? 고리 원전에 장치했던 폭발물을 기억하라. 지금 즉시 모든 엘리베이터 가동을 중지하고 비상계단은 2층부터 차단해. 눈앞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 걸 보지 않으려면.”
“그런 거짓말에 속을 것 같나?”

“음, 맛을 봐야 믿겠다 이거군.”
정세찬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버튼을 하나씩 느릿느릿 눌렀다.
- 쾅.
호텔 아래쪽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경찰과 연결된 전화기를 통해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곧이어 앰뷸런스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알겠다. 요구를 들어주겠다.”
문동언 경위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건 맛보기다. 작은 양을 지하 맨홀에 설치해서 별 피해는 없었으리라 믿는다.”

정세찬은 마치 큰 배려라도 해주는 것처럼 말했다.
“알았다. 헬리콥터를 준비할 시간을 달라. 한 시간 정도 필요하다.”
“30분이다.”
정세찬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흘렀다. 수원은 정세찬의 얼굴에서 차가운 죽음의 그림자를 보는 것 같았다.
“좋다. 30분 뒤에 옥상에 헬리콥터를 대겠다. 단 인질은 다 돌려보내야 한다.”
“29분 50초 남았다.”
정세찬이 전화를 끊었다.

수원은 최소 29분은 살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민은 예리한 눈빛으로 사태를 지켜보았다.
“만약 경찰이 쳐들어오면 저 두 사람을 먼저 없애고 우리도 깨끗이 가는 거다. 소피아, 탄환이 몇 발이나 있지?”

정세찬은 가장 비극적인 결말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소피아 권총에는 탄환이 8발, 장전된 한 발까지 모두 9발이지. 베르타M20, 이태리 제품, 길이 12센티, 0.25구경.”
배성민이 대신 대답했다. 수원은 권총의 사양을 줄줄 말하는 성민을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그래도 맞으면 죽어. 최후의 청소는 소피아가 한다!”
수원은 곧 펼쳐질지 모르는 피바다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지옥 같은 침묵이 흘렀다.
“수원아, 아버지도 못 보고 가는 것이 안타깝구나.”
배성민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이에요?”
“네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아버지인데.”
수원은 침실로 가는 도어 앞에 서 있는 배성민한테 재빨리 달려갔다. 성민은 수원을 자신의 등 뒤에 숨겼다.
“무슨 수작이야. 기왕 죽을 거 시간을 앞당겨 줄 수도 있어.”
정세찬이 성민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댔다.
그때였다.
“정 박사, 이제 다 끝났어. 권총 내려놓으시지.”

정세찬 옆자리에 앉아 있던 고유미가 갑자기 일어서면서 카메라 가방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소피아가 가진 장난감과는 비교도 안 되게 컸다. 윌더38이었다.
고유미는 정세찬의 귀밑에 총구를 콱 박았다.

“아니!”
수원과 성민은 놀라 입을 벌렸다. 누구보다 당황한 사람은 정세찬이었다.
“유미, 왜, 왜 이래?”
정세찬이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더듬거렸다. 권총을 손에 든 그대로였다.
조명진은 어느 쪽에 총을 겨누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했다. 소피아만이 재빨리 고유미 쪽으로 총을 겨누었다.

“정 박사를 쏘면 당신과 배성민도 무사하지 못할 걸.”
일촉즉발의 긴박한 순간이 전개되었다. 고유미의 총이 정세찬을 노리고 있고, 정세찬의 총은 배성민을 향하고, 소피아의 총은 고유미를 겨누고 있었다. 누가 첫 발을 쏘든 연쇄적으로 발사해 세 명이 동시에 죽게 될 판이었다.
“유미야. 너, 너...”

수원은 너무 놀라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나오려는 수원을 성민이 제지했다. 자신의 몸으로 수원의 방패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난 너의 친구야.”
“친구? 폭발 경고를 게시판에 올린 그 친구?”
수원은 그제야 유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래. 나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해외 작전본부 오리엔트 앤티테러반 소속이다. 정세찬의 테러 행각을 2년 동안 따라다니며 감시해 왔다. 정세찬, 이제 미합중국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너를 체포한다.”

“너, 너!”
정세찬은 말을 잇지 못한 채 고유미를 노려보았다.
“정세찬, 핸드폰 이리 던지시지.”
고유미는 폭발물 뇌관 역할을 할 정세찬의 핸드폰부터 압수하려 했다.
“웃기는 소리. 그럼 이제 슬슬 호텔 투숙객들과 함께 천국 여행이나 떠나볼까?”

“멍청하긴. 우리가 함께 움직였다는 사실을 잊은 거야? 폭탄이 어디 설치돼 있는지 나도 알고 있잖아. 흐흐. 벌써 폭탄 처리반이 다 해체해 놓았을 거야.”
고유미가 회심의 웃음을 지었다.
“고유미,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정세찬은 조금도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허술한 사람으로 보이나? 이럴 줄 알고 네가 모르는 곳에도 설치해 두었어. 세 개나 더.”
정세찬은 킬킬 웃음까지 흘렸다.

그 순간 성민이 침실 문을 열고 재빨리 수원을 침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수원은 얼른 문을 잠그고 침대 머리맡에 있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영준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갔다.
‘얼른 받아요. 제발.’

그러나 영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원은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바깥 상황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직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주영준입니다.”
마침내 영준이 핸드폰을 받았다.

“지금 어디 있어요?”
수원이 다급하게 물었다.
“호텔 앞에 와 있습니다. 한 차장님이 보내준 SOS를 받자마자 경찰에 연락했습니다.”
“핸드폰이 부서졌을 텐데 용케 위치 추적이 되었나 보군요?”
“한 차장님이 샹그릴라 호텔에 있다고 문자 보냈잖아요. 지금 그쪽 상태는 어떻습니까?”

수원은 목소리를 낮추고 또록또록하게 말했다.
“저들이 폭탄을 설치했답니다. 한두 군데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요?”
“제 말 잘 들으세요. 빨리 수사팀에 연락해서 핸드폰 전화 중에 팔찌사오리, 아니87452, 아니, 010-888-7452의 통화를 중지시키도록 하세요. 그 번호 말고도 장 안토니오 명의의 핸드폰을 모두 통화를 중지시키세요. 저들이 지난번과 같이 핸드폰을 폭발 리모컨으로 사용하는 것 같아요.”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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