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누군가 거칠게 문을 열려고 했다. 방문이 곧 부서질 것 같았다. 
수원은 전화를 끊고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창 쪽에 완강기가 있었다. 화재가 나면 비상 탈출용으로 쓰는 것이었다. 15층이긴 하지만 잘만 타고 내려가면 탈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원이 창문을 열어 밖을 확인하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나!”

옥상에서부터 줄을 타고 내려온 특공대원이 방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수원은 얼른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특공대원이 유리창을 깨고 날렵하게 방안으로 들어섰다. 헬멧과 방탄복 차림이었다. 
“거실에 있어요. 모두 다섯 명이에요. 그중 세 명은 서로 총을 겨누고 있어요. 두 명은 우리 쪽이에요.”

수원은 목소리를 낮추고 거실 상황을 설명했다. 창밖에서 특공대원 한 사람이 또 나타났다. 그 외에도 특공대원 여러 명이 거미처럼 줄을 타고 내려와 15층 창밖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먼저 들어온 특공대원이 워키토키로 상황을 보고했다. 
“15층 침실 잠입 성공. 침실에 아측 인원 여자 1명. 거실에 아측 인원 2명, 적 3명, 서로 총을 겨누고 있음. 핸드폰 열고 폭파장치 누를 태세임. 사태 긴박!”
“알았다. 침실의 아측 인원은 내려보낼 수 있는가?”
“가능합니다.”

옆에서 숨죽여 말소리를 듣고 있던 수원이 끼어들었다. 
“가지 않겠어요.”
수원은 총 앞에서 온몸으로 자신을 지켜주던 성민을 두고 달아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친구 고유미도 위태롭지 않은가. 
특공대원 두 명은 난감한 얼굴로 수원을 바라보았다.

“협조해 주십시오. 인질이 한 명이라도 줄어야 작전 수행에 도움이 됩니다.”
특공대원의 말에 수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수화기를 들어 주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 안토니오 핸드폰 어떻게 되었어요?”

“모두 불통 조치 완료했습니다. 이제 폭탄은 터뜨릴 수 없을 겁니다.”
그때 다시 누군가 방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이봐, 한수원. 밖으로 나오지 못해?”

조명진의 목소리였다. 수원은 길게 숨을 들이쉰 다음 특공대원들에게 말했다. 
“제가 거실로 도로 나갈게요. 이 방문 앞에 적이 있어요.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시선을 집중시킬게요. 방문 앞에 바로 적이 있으니 방패막이가 되어 줄 거예요.”

특공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원의 말을 들었다. 
“거실 상황은 이래요. 문을 열면 바로 맞은편 창가에 외국인 여자가 소파 쪽을 향해 권총을 들고 서 있고, 그 소파 쪽에서는 다른 여자가 자신의 오른쪽을 향해 권총을 겨누고 있을 거예요. 여자가 권총을 겨누고 있는 남자가 바로 폭파범 정세찬이에요. 폭파범을 겨누고 있는 여자는 CIA 요원이고요. 그리고 폭파범은 다시 다른 남자를 겨누고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이 인질 배성민 박사예요.”
특공대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에요. 정확한 타이밍에 적을 제압해야 합니다.”
수원은 소리가 나지 않게 자물쇠를 풀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몸으로 문을 밀었다. 
“억.”

그 순간 방문 앞에 서 있던 조명진이 뒤로 밀려나며 쓰러졌다.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던 세 사람이 동시에 수원을 돌아보았다. 
“수원아!” 
성민은 낭패스런 얼굴이 되었다. 

“함께  죽겠다는  뜻인가?  이제  4분  남았어.”
정세찬의 얼굴에는 살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 핸드폰은 내려놓으시지.”
수원이 여유 있게 정세찬의 왼손에 들려 있는 핸드폰을 가리켰다. 
“고리 원전 폭파 시도 때처럼 단축 번호를 눌러 폭약을 터뜨리려는 거지? 지금 010-888-7452를 비롯해 안토니오 클럽 핸드폰 번호 3개가 모두 통화 정지되었어. 아무리 번호를 눌러도 절대 폭탄이 터지지 않을걸.”

“뭐야?”
수원의 말에 정세찬이 악을 쓰면서 벌떡 일어섰다. 
그때였다. 수원이 침실 문을 확 잡아당겼다. 성민은 재빨리 상황을 알아차리고 정세찬을 덮쳤다. 
“탕!”

동시에 정세찬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배성민의 무릎에서 피가 솟구쳤다.  
“탕!”
소피아도 총을 발사했다. 수원의 팔에서 불에 데인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침실에서 특공대원 두 명이 쏜살같이 뛰어나왔다. 
“탕! 탕!”

소피아가 특공대원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탕!”
소피아의 0.25구경 권총은 방탄조끼를 뚫을 수 없었다. 총을 맞은 특공대원은 끄떡도 않고 소피아에게 응사했다. 
“윽!”

총을 맞은 소피아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다른 특공대원은 조명진을 제압했다. 그 사이 배성민은 총상을 입은 채로 정세찬을 제압해 권총을 빼앗아 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정세찬은 배성민의 몸 밑에 깔려 있는 채로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 
‘8, 7, 4, 5, -.’

마지막 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배성민이 권총으로 정세찬의 손을 후려쳤다. 휴대폰이 멀리 나가 떨어졌다. 
거의 동시에 다른 특공대원 두 명이 유리창을 깨고 총알처럼 안으로 들어와 정세찬과 조명진을 제압했다. 
잠시 후 출입문을 통해 수사 요원들이 우르르 밀고 들어왔다. 
“성민 씨!”

수원이 피를 흘리고 있는 성민에게 다가갔다. 수원의 팔에서도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성민이 수원을 와락 껴안았다. 수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두 사람 모습, 보기 좋은데?”
유미의 말에 두 사람은 포옹을 풀었다.

구급대원이 달려와 성민의 다친 곳을 들여다보았다. 
“이 사람 먼저 치료해 주세요.”
성민이 자신의 상처 부위를 눌러 지혈을 하며 수원을 가리켰다. 대원은 수원 쪽으로 몸을 돌려 치료를 시작했다. 

“유미야. 고마워.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니?”
“너무 그러지 마. 너희 오피스텔 침입에 실패한 것도 다 내 덕분이야. 번호 키를 고장 나게 해서 못 들어가게 했지.” 
“그럼 내 파일을 빼낸 것도 역시...”

“그래 이 바보야. 그런 경고를 받았으면 집이 안전하지 않다는 걸 알아채고 중요 파일은 없애든지 조치를 했어야지. 너희가 빈에 갔을 때 우리한테 방을 쓰게 했던 게 문제야. 정세찬이 하드 디스크를 복사해 갔지.”
“세상에.”수원은 현기증이 났다.

“터빈실  폭발을  막아 준 것도  나야. 친구 이름으로  경고문을  올려서⋯”
“아, 그랬구나. 발전소 견학 때 몰래 사진을 찍은 건 왜 그런 거야?”
“정세찬의 하수인 노릇을 해야 하는 처지니 명령대로 할 수밖에. 폭발물 설치한 장소에 전파 차단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지. 그것도 모르고 정세찬은 통신 칩이 고장 나서 폭발이 안 되는 줄 알고 약이 올라 펄펄 뛰더군.”
수원의 팔에 응급조치를 끝낸 구급대원이 계속 피를 흘리는 성민의 치료에 나섰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 다들 모이게 됐어?”
“배 박사가 늘 나를 감시하고 다녔지. 내가 저들과 한패인 걸로 믿었던 거야. 그러다 거꾸로 정세찬의 함정에 빠진 거지.”
“성민 씨가 널 감시해?”
수원이 놀라 배성민을 돌아보았다. 

“배성민 박사, 고백하시지요.”
유미가 배성민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배성민은 수원을 의자에 앉히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원아, 미안하다.”
“뭐가?”

“내 정체를 숨겨서. 난 연구원으로 한국에 파견된 게 아니야. 실은 IAEA가 미국의 협조로 한국에 보낸 비밀 감시원이야. 한국이 핵무기를 몰래 만든다는 정보가 접수됐거든.”
배성민의 말에 수원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맙소사. 뭐 이런 일이 있어. 내가 한수원인 건 맞나?”

“하하하. 너 한수원 맞아. 아버지 돌아가시고 3년 만에 태어난 기적 같은 아이 한수원.”
성민은 수원의 손을 꼭 쥐었다.
구급대원들은 총알이 박혀 있는 성민의 다리를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 앰뷸런스에 태웠다. 수원의 상처도 응급 지혈만 한 상태라 둘이 병원으로 함께 가야 했다. 유미도 함께 탔다. 

“그런데 고유미 씨. 정 박사는 도대체 얼마 받고 그 짓을 한 거요?”
구급차가 출발하자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성민이 물었다. 다리에 통증이 오는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미국, 프랑스, 캐나다의 3대 메이저 회사가 극비리에 정세찬을 교섭해 5백만 달러로 한국 원전 테러 계약을 체결했어요. 2백만 달러는 선금으로 받고 3백만 달러는 성공 사례비로 받기로 했는데 일이 실패로 돌아갔지요. 그래서 외려 저들이 위기에 처하게 된 거예요.”

“저들의 최종 목적이 뭔데?” 수원이 물었다.
“소피아와 스미스, 빅토르 등 중간 진행자들은 한국형 원전에 흠집을 내는 게 목표였지.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진행 중인 치열한 입찰 경쟁에서 한국을 배제시키려는 음모야. 나는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 아나톨리라는 테러 조직을 캐려고 쫓아다닌 거야.”
“그런 싸움에 나는 왜 끌어들였을까?”

“정세찬은 너를 납치해서 사업 실패의 희생물로 바치려고 했어. 지난번에 보고서를 빼내 폭로했듯 한국형 원자로의 허구성을 강제 조작해서 발표하게 하려고 한 거야.”
“세상에...”

“정세찬은 보기와 달리 야망이 큰 사람이야. 꾸준한 노력으로 달성하기보다 한 쾌에 이루려는 스타일이지. 그래서 아나톨리 조직에 접근해 거대한 국제 음모를 하청 받은 거야.”
“어떻게 접근한 거지?”

수원이 물었다. 
“캐나다에 있는 아나톨리 비행학교에 들어가 비행 훈련을 받으면서 은밀히 접속했나봐.”
“한국에서 계획을 성공시키려면 한국인이라야 했겠군. 한국인 중에서도 전혀 의심 받지 않는 인물로 대학 교수가 적격이었을 거고.”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민 씨도 정 박사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요?”

“나도 처음에는 몰랐어. 나중에는 정체를 알고 유미 씨를 끌어들이려고 선물 공세를 폈지.”
“팔찌 말하는 거죠? 역시 성민 씨가 선물한 거 맞구나. 샌프란시스코 티파니 제품.”

“기억하고 있었네. 그때 네가 탐내기에 나중에 가서 샀지. 깜짝 선물로 주려 했는데 네가 연락을 끊는 바람에 그냥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스파이 작전에 활용한 거지.”
설명을 하는 성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소피아 빌리에와는 어떤 사이예요? 성민 씨와 가까워 보였는데, 정세찬과 공범이라니...”

수원은 망설이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렇게 보였어? 처음 만난 것은 샌프란시스코 세미나에서였지. 이상하게 소피아가 매우 적극적으로 접근해 오더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나를 포섭 대상으로 삼았던 것 같아. 그 여자가 뭔가 수상쩍어서 나 역시 끈을 놓지 않고 있었지.”

“음, 그렇다면 그들이 나도 포섭 대상으로 삼았었나? 빈에 출장 갔을 때 한밤중에 제랄 빅토르라는 남자한테 납치 당할 뻔했어요.”
“그래서?”
“전기 충격기로 퇴치했죠.”
“어휴, 하마터면 우리 한수원 박사도 마수에 걸려들 뻔했군.”  
성민은 수원의 손을 꼭 잡았다. 

21. 아! 아버지
“그런데 아까 아버지 얘기는 뭐예요?”
수원은 배성민이 한 말이 기억나 물었다. 
“아버지도 못 보고 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잖아요.”

수원이 묻자 배성민이 비스듬히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아버지, 살아계시는 게 틀림없어. 지금쯤 미국 망명 승인이 떨어졌을 거야.”
“네?” 수원은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성민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평소 아버지를 애타게 그리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 그래서 내 직업적 전문성을 살려 정보를 수집했어. 그랬더니 뜻밖에 아버지의 죽음에 많은 국제적 음모가 깔려 있더군. 게다가 아버지가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단서가 하나씩 발견되는 거야. 아나톨리 비행학교의 전설적인 교관 세르게이 한이라는 인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나는 그 사람이 너의 아버지라고 확신했지. 하지만 공연히 불가능한 희망을 부풀렸다가 실망시키게 될까 봐 네게는 말하지 않았어. 그래도 간혹 믿을 만한 정보를 알아내면 네게 알려 줬지.”
“언제?”

수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리아 바소로뮈라는 이름 기억하지? 그게 바로 나야.”
인터넷으로 아버지 한용국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었던 프랑스 여자. 그 사람이 바로 배성민 자신이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메일 내용이 사실이란 말야? 세르게이 한이 북한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해 미국에 망명 요청을 했다는 것. 그 세르게이 한이 우리 아버지 한용국 씨라는 것.”

성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워싱턴 DC에서 40여 킬로 떨어진 덜레스 국제공항. 수원은 16시간이나 걸린 항로의 종점에 다다랐다. 
“여기야, 여기.”

출구를 나서자 키가 큰 아버지의 친구 박정무 아저씨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 옆에 어머니와 이모도 있었다. 
그 때였다. 박정무 아저씨의 뒤에 서 있던 백발의 신사가 앞으로 나왔다.
“수원아, 아버지다. 인사 드려라.”
박정무가 백발의 신사 쪽을 가리켰다. 
“얘가 나하고 김윤실 여사가 같이 만든 아이 수원일세.”
박정무의 말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김윤실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백발의 신사는 박정무 아저씨 못지않게 키가 컸다. 주름지고 야윈 얼굴에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수원아!” “아버지!”
수원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얼음처럼 굳어 꼼짝하지 못했다.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아버지인가. 그런데 막상 아버지 앞에 서니 말이 막혔다. 가슴에서 꿈틀거리던 감정의 불덩이가 갑자기 눈물로 폭발했다. 
“미안하다. 아비 없이도 훌륭하게 자랐구나.”
아버지가 수원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버지, 이제 한국에 가셔도 되는 거예요?”

“망명 수속이 끝나는 대로 어서 고국에 가야지.”
아버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 산천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자동차는 공항을 빠져나가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모가 사는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시티로 가기 위해서였다. 수원과 어머니가 전에 살던 곳이기도 했다.

“이쪽 이야기는 내가 대강 해서 아버지가 알고 있어. 이제 아버지가 따님께 그동안 지내온 이야기를 보고 좀 하지 그래.”
박정무가 뒷좌석을 돌아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지난주에 북경에서 워싱턴으로 왔어. 북경에 오기 전에는 북한에 있었는데 지난겨울 두만강이 얼었을 때 강을 넘어 중국으로 탈출했지. 중국에서 스미스라는 퀘이커교 미국 목사를 만나 미국대사관에 망명 요청을 했어.”
“왜 한국 대사관에 가지 않으셨어요?”
수원이 중간에 질문을 했다.

“한국 대사관은 보이지 않는 감시가 있어서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고 하더라고.”
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1978년 4월 20일 이야기부터 좀 해주세요.”
수원의 말을 듣자 한용국은 놀라서 물었다.
“네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를 어떻게 아느냐?”

“얘가 아버지 죽음의 미스터리를 캐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요. 대한항공 902편 강제착륙 사건에 대해서는 우리 수원이가 박사랍니다.”
어머니가 설명했다.
“그럼 수원이는 핵물리학 박사하고, 대한항공 902편 박사하고 학위가 두 개나 되는군.”

박종무가 농담을 해놓고 혼자 껄껄 웃었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기니까 집에 가서 하기로 하자. 그런 그렇고, 너희 회사가 아나톨리의 폭격을 당했다면서?”
“예. 아버지도 아나톨리와 관계가 있으시다면서요?”
“응. 소련의 아나톨리 비행학교에 20년을 붙잡혀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아나톨리 비행학교 교관이었다는 말이 정말이군요. 그러면 대한항공 902편을 탄 것도, 무르만스크에서 소련 장교에게 끌려간 것도 아버지가 맞군요.”

“정말 놀랍다. 그것까지 다 알아냈다니. 나는 공식 승객 명단에 없었고, 소련당국이 나를 빼돌려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없어진 존재인 줄 알았는데.”
일행은 버지니아 이모 집에 도착했다. 수원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한테 큰절을 올렸다. 딸로서 아버지께 올리는 첫 절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아버지는 지나온 세월을 세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한용국은 무르만스크에서 소련 군부에 끌려간 6개월 동안 온갖 조사를 다 받은 뒤 정치범 수용소에서 평생을 보내도록 처분을 받았다. 수용소로 가기 직전 KGB에서 찾아와 정보원 교육을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서방에 내보낼 스파이 교육에는 서방 정보 세계를 잘 아는 한용국이 제격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더구나 영어와 불어를 할 줄 아니까 쓸모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한용국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몇 년 뒤 한용국은 세르게이 한으로 통하는 명강사가 되었다. 아무리 유명해도 한용국은  소련의 영구 죄수에 불과했다. 인신의 자유가 전혀 없었다.
아나톨리 비행학교는 처음에는 조종 기술을 가르치는 게 주업이었으나 명성을 얻게 되자 국제적인 테러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교육을 받고 나간 공산권 각국 요원들이 아랍권이나 남미 등지에서 자체적인 테러 조직을 만들고 아나톨리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990년대 들어서 소련 공산당이 무너지고 러시아 정권이 등장하면서 한용국의 운명도 달라졌다. 한용국은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조국으로 돌려보낸다는 명분이 잘못된 것 같았다.
한용국은 함경북도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10여 년 동안 감금 생활을 했다. 반드시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꿈을 끝까지 버리지 않은 한용국은 마침내 작년 겨울 목숨을 걸고 수용소를 탈출했다. 

중국 국경 마을에 도착한 한용국은 미국 퀘이커교 목사 스미스를 만나게 되었다. 영어를 잘하는 덕분에 사정이 잘 통했다. 한용국은 스미스 목사의 보호로 북경까지 오게 되고 미국 대사관에 가서 망명을 요청하게 된 것이었다. 
기구한 아버지의 운명에 손에 땀을 쥐고 듣던 수원이 물었다.
“대한항공 902편은 대체 무슨 비밀을 가지고 있었어요? 정말 핵무기와 관련되었나요?”
“그것까지 어떻게 알았느냐?”

한용국은 대견한 눈으로 수원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그게 사실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프랑스의 비밀 조직과 접촉하여 핵폭탄 원자재를 확보하고 대한항공 902편으로 들여오려고 했어. 내가 그 일의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단다.”
“핵폭탄 원자재라면?”
“95퍼센트 농도의 플루토늄이었다.”
“양은 얼마나 되었어요?”

“12킬로그램이었어. 왜 12킬로그램이냐 하면, 비행기에 실을 수 있는 개인 하물 무게 제한이 20킬로였는데 납으로 밀폐된 용기의 무게가 8킬로였기 때문이야.”
“12킬로그램이면 핵폭탄을 몇 개나 만들 수 있냐?”
듣고만 있던 어머니가 물었다.
“유도탄에 장착할 수 있는 중형급 핵폭탄 두 개는 충분히 만들 수 있지요. 지금 북한이 폐연료봉 전량을 재처리하여 폭탄을 만들 수 있는 양을 8 내지 12킬로그램으로 보거든요.”

수원의 설명을 들으며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 하물이라고 했는데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것을 실었나요?”
“아니야. 어느 일본인의 이름을 도용했지. 본인은 자기 하물인 줄 몰랐을 거야. 하물 티켓은 내가 가지고 있었고 내용물은 중석 원광으로 위장되어 있었으니까. 그 일본인은 뒤에 소련 KGB가 암살했다고 들었어.”
“그 일본인 이름이 스즈끼 아닌가요? 스즈끼 마사오.”

“맞아. 그것도 알고 있었구나.”
한용국이 감탄했다.
“그분의 딸을 만나서 들었어요.”
“딸을 만났다고? 만나서 사죄해야 돼. 내가 그 사람 이름을 빌렸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야. 그 사람이 하물로 부친 짐이 없어서 선택했을 뿐이고 KGB는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암살했을 거야.”
한용국은 괴로운 듯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김형욱 씨는 왜 만나셨어요?”
“김형욱 씨는 박정희가 몰래 보낸 사람이었지. 미국의 눈을 속이기 위해 망명을 가장했고. 김형욱은 스위스 은행에서 프랑스 비밀 조직에 지불할 플루토늄 대금과 비밀공작 자금을 가지고 왔었지. 그러나 미국이나 소련 정보원들이 우리가 하는 일을 모두 알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어.”

“만약 그때 아버지의 임무가 성공했다면 우리나라는 핵 보유국이 되었고 오늘의 국가적 위상이 사뭇 달라졌을 수도 있군요.”
“그렇지.”
“그런데 김형욱 부장은 CIA가 암살한 것이 맞나요?”
“CIA? 아니야. 일본인 스즈끼와 마찬가지로 KGB가 암살한 것이 확실해.”
“그래요?”

“미소 정보당국끼리 짠 음모가 세상에 알려지면 문제가 심각해지지. 그래서 흔적을 완전히 지우기 위해 한 작업이야.”
수원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슨 요술 상자를 연 기분이 들었다. 

그때 수원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아버지, 만나 뵈었어?”

배성민이었다. 
“네. 상상했던 전설의 세르게이 한의 모습 그대로예요.”
“하하, 그래? 난 미국 본사에 복귀 신청을 했어.”

“한국에 더 머물지 않고요? 할아버지 땅 찾는 재판도 아직 안 끝났잖아요.” 
“그 일이 좀 그러네. 한국에 와서 보니 수원이가 땅 재판에 대해 왜 그렇게 찜찜해 했는지 알겠더라고. 진짜 내 조상도 아닌 분들의 땅을 찾겠다고 나서는 것도 좀 그렇고...”

정세찬의 말대로 성민은 배 씨 가문에 입양된 것이 맞는 듯했다. 
“나 같은 덕위드(duckweed)야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사는 게 제격 아니겠어? 타고난 운명대로 살아야지.”
덕위드. 떠 있는 풀. 성민은 부평초의 삶을 자처하고 있었다. 
“너는 아버지를 찾았으니 고국에서 튼튼히 뿌리 내리고 살아.”
성민의 목소리는 한없이 쓸쓸했다.  <끝>

 

작가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 그동안 '신의불꽃'을 성원해 주신 독자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주부터는 이상우 작가의 장편 정치소설 '악녀시대'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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