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는 3편으로 계획했었다. 1편은 동대문역에서 연건동 1925년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간행된 ‘매문사 터’까지, 2편은 서울대 병원부터 혜화동로터리까지, 3편은 혜화동로터리에서 성북동, 미아리고개까지였다. 그런데 몇몇 장소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또 일부의 경우는 가볍게 넘기기에는 부끄러웠다. 특히 지난 2편에서 소개한 김상옥 의사에 대한 것은 그의 삶을 안 순간 가볍게 넘길 수 없었기에 2편의 중심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최최의 2편에 소개해야 할 부분이 많이 누락되었다.

 이번 3편은 2편에서 빠뜨렸던 서울대 병원부터 혜화동로터리까지 꼬깃꼬깃 도는 구간이다. 이로인해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는 총 4편이 된다. 혜화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의 4편에서는 혜화문의 역사, 시인 겸 사상가 조지훈, 시인 신동엽 그리고 미아리고개의 역사를 소개할 예정이다.

대한의원 (서울대병원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대한의원 (서울대병원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대한의원

 혜화역 3번 출구로 나오면 서울대 연건캠퍼스와 서울대병원이 있다. 그 안에는 다양한 역사의 흔적들이 있다. 서울대병원으로 들어가면, 언덕 위 오른쪽에 1908년에 완공된 국립의료기관 대한의원 본관 건물(서울대학교병원 전신, 현재는 의학역사문화원)이 있다. 그 당시에는 조선은행 본관, 동양척식회사 건물과 함께 1900년대 초 서울의 3대 명물로 꼽히던 건물이다.

 본관 앞에는 대한의원 병동 유적이 있다. 병동은 현재는 멸실되어 기초만 남아있다. 본관은 동판으로 된 둥근 지붕을 얹은 바로크풍의 시계탑과 르네상스 양식의 벽면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의 동판에는 일제 수탈의 역사가 있다. 건립 당시에는 동판이었으나, 일제가 수탈해 가면서 함석지붕으로 바뀌었다. 반세기가 지난 2001년에야 ㈜풍산이 함석을 대체해 본래 재질인 동판 지붕을 시공, 기증해 원형으로 돌아왔다.

 황상익(『근대 의료의 풍경』, 푸른역사, 2013년)에 따르면, 대한의원의 설립은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했고, 설계는 탁지부 건축소 야바시(矢橋賢吉)가 했다. 초대 원장은 사토 스스무(佐藤進)이다. 초기에는 조선 거주 일본인과 친일파가 주요 환자였다. 이재명 의사(李在明, 1887~1910)가 친일파 이완용을 습격한 뒤, 칼에 찔린 이완용을 살린 병원과 의사도 모두 대한의원과 대한의원 소속 일본인 의사였다. 그런데 이재명 의사의 의거에 참여했던 사람 중에는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 학생 오복원과 김용문이 있다.

 일제의 마수로 시작된 대한의원의 역사를 단순히 대한제국의 국립의료기관이나 서울대학병원의 전신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에서 우리나라 의학생들이 굴욕을 참고 의학교육을 받으며, 훗날 근현대 의료시스템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공로도 있다.

실험동물공양탑 (서울대병원 안 대한의원 근처)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실험동물공양탑 (서울대병원 안 대한의원 근처)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제가 세운 동물위령탑

 대한의원과 병동 터 사이, 연건학생생활관 쪽 ‘제중원 뜨락’ 표석 오른편에는 ‘실험동물공양탑(實驗動物供養塔)’이 있다. 뒷면에는 1922년 7월 15일에 세워 놓았다고 새겨져 있다. 탑이라기 보다 막대 표석 형태이다. 크기도 130센티 미터 정도 되는 듯하다. 당시의 동물실험과 관련한 비석이다. 실험자들의 속죄의식의 결과인 듯하다.

 「한국사회의 동물위령제를 통해 본 동물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엘머 휄트캄프, Elmer Veldkamp, 『비교문화연구』 제17집 2호,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2011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다른 동물위령비도 있다. 현재 농림축산검역본부 영남지역본부에 있는 축혼비(畜魂碑, 1922년 11월 18일 건립), 식품의약품안전청 부속 국립독성과학원(國立毒性科學院)에 있는 ‘동물공양지비(動物供養之碑, 1929년 3월 23일 건립)’이다.

 휄트캄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의 동물위령비 건립과 위령제는 우리 조선인들이 한 것이 아니다. 일본인들이 실시했다. 휄트캄프는 “일본에서는 수렵이나 어업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동물의 넋을 위로하는 의례가 수백 년간 이어져 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다양한 문맥 안에서 동물을 위한 공양제‧위령제가 널리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라며 일본 문화 속의 동물위령제의 역사성을 지적하고 있다. 전통적인 우리 문화에는 없던 일이다. 물론 주인을 목숨건 개나 말에 대한 무덤과 제사를 지내는 일은 있으나, 일본과 달리 지극히 개별적이다.
 
휄트감프의 주장을 보면, 일제강점기의 동물위령비나 위령제의 경우는 일제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군국주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우리나라 다양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동물위령제는 일제의 유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흐름은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과 생명존중 사상의 확산에 따른 결과이다. 일제강점기의 일본식 문화와는 다르다. 우리 사회의 변화에 따른 현대적, 한국적 현상이다.

 ‘동물공양지비’를 일제의 생명존중 사상이나, 오늘날의 동물권 존중과 같은 개념으로 확대해석해서는 안된다. 우리민족과 다른 민족에 대해 생체실험을 했던 그들이다. 수많은 조선의 백성을 수탈하고 죽였던 그들이다. 그들에게 우리민족이나 동물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동물공양지비’는 일제 문화와 군국주의 목적이 바탕인 비석이다. ‘동물공양지비’를 보고 일제의 휴머니즘이나 생명존중 사상으로 과잉해석을 해서는 안된다. 물론 과학자, 의학자들 일부는 그럴 수 있어도 부분이 전체를 덮을 수는 없다.

지성영선생 동상 (서울대병원 대한의원 정문 앞)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지성영선생 동상 (서울대병원 대한의원 정문 앞)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천연두를 퇴치한 지석영

  대한의원 본관 뒤편에는 종두법을 도입해 천연두를 극복하게 해 준 의학자 겸 국어학자 지석영(池錫永, 1855~1935) 선생 동상이 있다. 황상익에 따르면, 지석영은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 서양식 병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해군 소속 제생의원에서 우두술을 배우고, 두 살 된 처남에게 우두술을 처음 시술해 성공했다. 그 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의학교 교장으로 최초의 의사들을 배출했다.

 황상익은 1876년 문호개방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근대 서양의료 도입에 가장 공적이 큰 인물로 지석영을 꼽았다. 그 부분은 사실이다.

 문제는 의학 영역 이외의 지석영의 삶이다. 지석영은 1906년 을사늑약에 항거해 자결한 민영환의 추도식에서 추모 연설을 했다. 그런데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처단한 뒤에는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추도사를 공개적으로 읽기도 했다. 『황성신문』(1909년 12월 14일)에 따르면, 지석영이 추도사를 읽은 날, 유길준은 이토 히로부미의 역사를 설명했고, 이완용은 위사(慰辭, 위로하는 말)를 진술했다고 한다. 지석영은 최소한 자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유길준, 특히 이완용의 경우는 완전한 친일파이다. 그들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추도사를 읽었다는 것은 분명히 지석영의 한계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며칠 뒤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 있다. 『대한매일신보』(1910년 1월 1일)에 따르면, 이재명 의사의 1909년 12월 22일 이완용 습격 의거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학교 학생들이 관계되었기에 체포되었으나, 사건과 관계가 없었기에 풀려난 듯하다.

 지석영의 친일논란은 일방적인 낙인 대신 보다 세밀한 접근과 연구가 필요할 듯하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의학적 업적과 국어학에 대한 기여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극단의 친일파와 달리,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삶의 경로가 흔들리거나, 잠시 친일을 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사람들의 현실이다.

이석형 선생 생가터 표석 (서울대병원 연건학생생활관 앞)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이석형 선생 생가터 표석 (서울대병원 연건학생생활관 앞)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이석형의 절제의 미학이 담긴 계일정

 대한의원 뒤편에 있는 연건학생생활관 입구에는 표석이 하나 보인다. 세종부터 성종 때까지 활약했던 관료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의 생가터 표석이다. 서울대병원과 이석형의 후손들이 함께 세운 표석이다. 그의 본관은 연안이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그가 이곳에 터를 잡은 뒤에 그의 후손들이 이 일대에 많이 살아 이들을 ‘동촌(東村) 이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북촌과 유사한 의미에서의 동촌이다.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쓴 「계일정기(戒溢亭記)」에 따르면, 이석형의 집 동산 가운데 정자가 있고, 그 아래 연못이 있었다. 김수온은 이석형 집 연못 물이 맑고 흐려지고, 차고 넘치고 빠지는 것을 바탕으로 이석형에게 물의 지혜를 배워 삶의 자세를 경계하라는 의미로 정자 이름을 ‘계일정(戒溢亭)’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계일’은 ‘물이 넘치는 것을 경계한다’는 의미다. 김수온이 말한 ‘계일’을 이석형도 동의했다.

 그들은 모두 평온함을 중요시했고, 한때의 부주의, 게으름, 교만에 따른 넘침을 가장 우려했다. 평온함은 사람의 성품을 맑게 해 주며, 치우침이 없게 해 주기 때문이다. 또 넘침은 교만에 이르러 평온함을 깨뜨리고 결국에는 한 쪽에 기울어져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연못에 물이 차면 물을 빼내 항상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도록 했다. 김영상(『서울6백년(4) : 낙산기슭, 청계천변』, 대학당, 1996년)은 이석형의 연못과 계일정에 대해 “후손들이 권력, 재물과 복을 얻는데 항상 넘치지 않도록 살라는 뜻에서 수신 도구로 만든 것이 연못이며, 이 연못을 보는 장소가 계일정”이라고 평가했다.

 이규태(『이규태의 600년 서울』, 조선일보사, 1993년)는 “이름을 얻는데 넘치지 말며, 권력 얻는데 넘치지 말고, 행사하는데 넘치지 말고, 재물과 먹고사는데, 복도 넘치지 않는 것”이라면서 ‘계일사상’이라고 평가했다.

 이석형은 세종의 명을 받아 정인지 등과 함께 고대 전쟁사를 정리한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하기도 했다.

 서울의대 학생생활관 앞에 있는 이석형 생가터 표석은 의사가 될 학생들에게 의사 직업윤리보다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자세를 생각하게 해 주는 의미가 담겨 있는 표석이다. 이왕이면 이석형과 김수온의 ‘계일정신’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다면 좋았을 듯하다. 지금의 표석은 깊이 알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너무 간단하다.

 계일사상이나 계일정신이나 그 모두 절제의 미학이다. 대개 사람들은 ‘가득 참’을 넘어 ‘넘침’을 원한다. 물이 넘침은 결국 다른 이들의 논밭에 피해를 준다. 이석형이 경계하는 지점이다. 적당히 채우자. 그래도 삶은 여유가 있고, 또 충분하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욕심이다. 욕심은 늘 재앙을 부른다.

충혼탑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충혼탑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6‧25의 비극과 사도세자의 사당

 다시 본관 앞으로 나와 병원 뒤편에 있는 서울대병원장례식장 쪽으로 간다. 장례식장과 옥외주차장 사이에 현충탑이 있다. 이 현충탑의 부제는 ‘이름 모를 자유전사(自由戰士)의 비(碑)’이다. 6‧25의 비극이 담긴 탑이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 북한군의 남침을 방어했던 국군 부상자들이 실려와 치료를 받고 있었다. 현충탑 안내판에 따르면, 6월 28일 북한군이 점령한 뒤 병원에 있던 부상자들과 일반 환자 9백여 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당시 서울에 있었던 서울대 사학과 교수 김성칠의 일기(『역사 앞에서』, 창비, 2018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950년 6월 30일. 창경원 담 모퉁이를 돌아 대학병원 영안전(靈安殿) 근처를 지나노라니 행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서 철망 너머로 무엇을 들여다보고 수군수군, 호기심에 끌려서 그 옆으로 가보니 거적으로 아무렇게나 덮어둔 시체를 보고 그러는 것이고 그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수군대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인민군이 들어와서 대학병원에 들어있는 국군부상자들을 끌어내어 총살해버린 것이라 하나 설마 그럴 리가 있을 것 같지 않고 지나가는 풍설이라 종잡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조선사람의 명예를 위하여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김 교수는 직접 시신들을 목격했음에도 동포를, 게다가 부상자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소문을 “조선사람의 명예를 위하여” 차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다. 『역사 앞에서』의 이 부분 주석에도 “하지만 그런 바람과는 달리 6월 28일 서울대병원에서 인민군 4사단 5연대 병사들이 입원 중인 국군 및 의료진 150~200여 명을 학살했다”로 나온다.

 6‧25는 이념으로 나뉘어 동족을 죽인 전쟁이다. 복수가 복수를 부른 전쟁이다. 이방인(미국)이 이방인(중공)과 싸운 전쟁이기도 하다. 전쟁에서는 일방의 정의는 없다. 모두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이다.

 지금의 남북 대결,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이념 갈등도 여전하다. 총과 칼만 쓰지 않을 뿐, 말의 총알과 몸짓의 칼날은 여전히 세상에 가득하다. 현충탑 앞에서의 발걸음이 무겁다.

 장례식장에서 간호대학 쪽으로 나오면, 넓은 공터와 기와로 덮인 조선 시대 궁궐문 같은 것이 보인다. 성종 때에는 창경궁의 후원인 함춘원(含春苑)이 있었다. 『선조실록』(선조 36년, 1603년, 3월 18일)에는 함춘원에 호랑이와 표범이 드나들며 개를 물어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창경궁의 후원이었으나 호랑이도 많았던 때이고, 또 상대적으로 외진 곳이기도 했다.

 영조는 그곳에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를 위한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건립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正祖, 1752~1800)는 ‘묘’에서 ‘궁’으로 높여 ‘경모궁(景慕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사도세자와 정조의 어머니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 1735~1815)의 사당이 되었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태조와 세조 등 임금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으로 바뀌었다.

 서울대병원 지역은 왕궁의 후원에서 사당이 되었다가, 다시 왕실의 어진을 모신 공간으로 변했다. 구한말에는 대한의원,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세워졌던 곳이다.

 간호대학 앞으로 가면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터’ 표석이 있다. 대학 건물이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건물이다.

 청춘, 민주화운동의 산실 학림다방과 안창호의 흥사단

 대학 정문으로 나와 혜화역쪽으로 200미터 올라간다. 횡단보도 바로 옆에 학림다방이 있다. 56년 문을 연 이래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이다. 게다가 ‘다방’이란 이름은 요즘은 흔치도 않다. 그래도 지금도 청춘들의 꿈과 고뇌가 토로되는 공간이다. 수십 년 동안 많은 시인과 소설가, 연극영화인들의 발길을 붙잡던 예술인의 공간이기도 하다. 군사독재시절에는 민주주의를 꿈꾸고, 실행하려던 민주정신의 공간이었다. 최근에 운명하신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이 억압의 사슬에 묶여 있으면서도 이 공간에서는 해방을, 자유를, 민주를 숨 쉬기도 했다.

 학림다방 앞 횡단보도를 건너면 “도산 안창호 선생 말씀 :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라고 새겨진 바윗돌이 보인다. 또 그 몇 걸음 옆에는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 흉상이 서 있다. 흥사단본부가 있음을 알리는 상징들이다.

 흥사단은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이 191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설한 독립운동단체이다. 건물 안에 들어가면 1층에 안창호 선생 흉상이 또 하나 있다.

 벽면에는 안병욱(安秉煜, 1920~2013) 숭실대 명예교수가 쓴 안창호 선생 어록이 두 개 붙어 있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어라”,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안병욱 교수가 뽑은 그 두 개의 어록은 도산 선생 자신의 삶이기도 하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그 다운 말이다. 또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진실이기도 하다.

 말로만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거짓 진리를 다양한 방법을 퍼뜨려 사람들의 눈귀를 혼란에 빠뜨리는 사람들도 넘친다. 그런 그들이 나라를 사랑한다고 한다.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도 너무 많다. 거짓 선지자들과 사욕에 눈먼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그러나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정의는 반드시 제 길에 서게 된다.

김상옥의사 동상 (마로니에공원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김상옥의사 동상 (마로니에공원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김상옥 의사 동상, 제자리를 찾아가야 할 파고다공원 정문

 흥사단에서 나와 마로니에 공원으로 간다. 공원 안에는 2편에서 소개했던 김상옥 의사의 동상이 있다. 동상 자세는 ‘열중쉬어’다. 의사의 삶을 상상해 보면,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을 위한 ‘열중쉬어’일까? 얼굴도 그다지 많이 닮지 않았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군경과 전투를 했던 그의 모습 중에서 한 장면을 동상 모습으로 만들었다면 더 감동적이었을 듯하다. 그러나 없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훌륭하다. 동상을 만드는데 힘쓰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마로니에공원에서 이화사거리 방향을 보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건물이 있다. 본래 경성제국대학 본관이었고, 해방 뒤에 서울대 본관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에 이르렀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건축가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이 설계했다. 그는 이 건물 외에도 간송미술관, 화신백화점도 설계했다.

 위원회 건물에서 이화사거리 방향으로 다시 가면, 방송통신대가 나온다. 방송통신대 정문 앞 옛날 형태의 건물은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청사’ 건물이다. 오늘날 국가기술표준원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안내판에서 따르면, 중세유럽에서 유행하던 방식의 건물이며, 대한제국 시대 목조건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현재는 방송통신대학교 역사관 및 우편취급국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벽이 일반적인 목조 건물과 다르다.

 이화사거리 방향으로 다시 180미터 내려오면, 조금 특별한 대문을 갖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초등학교와 여자중학교’ 정문이 있다. 정문 옆 안내판에 따르면, 학교 정문은 본래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 있던 정문을 “1969년 3‧1절 5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특별시가 독립선언기념탑을 세우면서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높여주기 위해 이 기둥 4개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문기둥으로 기증하였다.”고 한다. 그 뒤 법과대학이 이전하면서 현재의 상태가 되었다.

 파고다공원은 3‧1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다. 당시의 정문 사진을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을 통해 입수했다. 학생들의 교복을 보면, 최대 1920년대 초 이전의 파고다공원 정문 사진엽서이다. 옛 사진을 보면, 지금의 문이 많이 훼손되었음에도 예전 모습을 그대로인 것을 알 수 있다. 국가기록원에도 파고다공원 정문 설계도가 보관되어 있다.

 기둥만 같고 과거의 파고다공원 정문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되어 버린 학교문 대신, 본래의 자리에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으면 어떨까?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역사적 유물은 본래의 자리에 있을 때 가장 빛이 난다.

 현재의 파고다공원 삼일문은 문 이름만 삼일문일 뿐, 3‧1운동의 자취를 느낄 수 없다. 육중한 문 자체가 거부감을 준다. 3‧1운동 때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모여들게 했던 그런 자유로움이 없다. 파고다공원 정문을 이제는 제 위치에 제대로 복원해 놓아야 할 때이다. 지금의 삼일문은 3‧1운동을 가두고 있다. 광장 대신 닫힌 공간처럼 보일 뿐이다.

낙산장 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낙산장 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표석만 있는 석양루, 재단장하는 이화장, 흔적없는 낙산장

 다음 답사지는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 집터이다. 학교 정문을 끼고 이화장 쪽으로 가면 된다. 대략 200여 미터 거리다.

 몇몇 자료에서는 인평대군 집터가 현재의 이화동주민센터 뒤라고 되어 있고, 표석도 그곳에 있다고 나온다. 그러나 첫 번째 답사에서는 표석을 찾지 못했고, 두 번째 답사에서 찾았다. 두 번째 갔을 때 석양루라는 이름을 고려해 주민센터 근처를 살펴보았다. 낙산 아래 석양루에 어울릴 위치를 찾아보니, 낙산 아래 종로구새마을회관이 보였다. 예상대로 표석은 회관 정문 좌측 화단에 있었다.

 인평대군은 인조의 셋째 아들이다. 소현세자와 효종(봉림대군)의 동생이다. 1640년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1641년 돌아왔다. 그가 살던 집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용흥궁(龍興宮, 효종이 왕자일 때 살았던 집)과 동쪽과 서쪽으로 마주 서 있다. 석양루(夕陽樓)가 있는데 기와와 벽돌에 그림을 새겼다. 넓고 화려하기가 여러 집 중에서 최고이다. 지금은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고 나온다.

 서쪽의 효종이 살던 용흥궁에는 아침 햇볕이 잘 드는 누각, ‘조양루(朝陽樓)’가 있었다면, 인평대군의 집은 동쪽, 낙산 아래에 있어 저녁 햇볕이 잘 드는 누각인 ‘석양루’가 있었다. 인평대군이 위독하자 효종이 직접 찾아가기도 했던 곳이다.

 그의 아들인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은 1680년 반역사건에 연루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그러나 장남 복녕군(福寧君)의 후손은 훗날 임금(고종)이 된다.

 인평대군의 이웃에는 김영상에 따르면, 효종의 북벌 계획을 추진했던 명장 이완(李浣, 1602~1674)이 살았다. 이규태는 이완은 훈련대장이 된 직후에 “왕족의 이웃에 사는 것은 법도가 아니라며” 지금의 탑골 공원 뒤편으로 이사갔다고 한다. 이석희(『충무공 이수일 장군 사료 집성』, 한영출판사, 2021년)에 따르면, 이완은 충무공 이수일(李守一, 1554~1632)의 셋째 아들이다. 이수일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때 활약했던 명장이고, 충무공 이순신처럼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했다. 이완의 집 위치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인평대군 집터에서 100미터 정도 낙산 방향으로 가면 이화장(梨花莊)이 나온다. 김영상은 이화동에 중종 이전부터 배밭이 있었고, 배밭 언저리에 이화정(梨花亭)이 있어서 이화정동(梨花亭洞)이 되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화장이란 이름도 생겼다고 한다.

 현재는 낙석과 내부 안전시설 설치공사 등으로 문이 닫혀 있다. 2022년까지 공사를 한다고 한다. 본래 이화장 자리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집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극원유고(屐園遺稿)』에 따르면, 신광한의 집은 경치가 좋아 신대명승지지(申臺名勝之地)라고 불렸고,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은 집 뒤 바위에 ‘홍천취벽(紅泉翠壁, 붉은 샘과 푸른 절벽)’이라는 네 글자를 썼다고 한다. 현재는 ‘홍천취벽’ 글씨는 볼 수 없다. 1960년대 이후 집들이 들어서면서 계곡이 메워지며 땅에 묻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집이 유명하게 된 것은 광복 뒤 이승만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금 및 구입해 이승만에게 주면서 이승만이 머물렀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1947년 10월부터 대통령으로 취임한 1948년 8월까지 거주했다. 취임 이후 경무대(현재 청와대)로 옮겼고, 때때로 사저로 활용했다. 1960년 4‧19혁명으로 경무대에서 나와 잠시 머물다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 뒤 이승만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1970년 귀국한 다음 1992년까지 머물렀다.

 이화장 정문 옆을 돌면 ‘이화장 마당’이 나온다. 이화장 옆에 만든 작은 공원이다. 잠시 쉬어가기 좋은 의자가 있다. 그중 돌덩이 의자 4개에는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이라는 글씨가 한 글자씩 새겨져 있다. 낙산 기슭 아래에서 잠시 하늘을 보며, ‘경천애인’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화장에서 낙산 아래 길을 따라 500미터 정도 가면 낙산장(駱山莊)이 나온다. 민족자본가 김종익(金鍾翊, 1886~1937)이 지은 근대식 저택이다. 위키백과(ko.wikipedia.org)에 따르면, 해방 뒤 중국에서 돌아온 독립운동가 신익희(申翼熙, 1892~1956)와 조성환(曺成煥, 1875~1948) 선생 등이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옛 건물은 없어졌고, 빌라가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낙사장의 흔적도, 신익희와 조성환 선생의 흔적도 없다. 아무런 표석도 없다. 빌라단지라 외부인은 출입할 수도 없다. 번쩍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화장에 비해 너무 초라하다. 신익희와 조성환 선생의 해방 후 삶이 담긴 곳이기에 표석을 세워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가톨릭대 성심교정 정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가톨릭대 성심교정 정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시대를 이끄는 청년들,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머문 곳

 낙산장에서 큰길로 나와 혜화동로터리 쪽으로 간다. 1킬로미터 정도다. 동성중‧고등학교 정문, 혜화아트센터를 막지나면 왼쪽에는 바윗돌 표석과 비석이 잇따라 있다.

 바윗돌 표석에는 “4‧19의 횃불 바로 여기에서”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석의 유래가 궁금해 조사를 했다. 한종수가 쓴 「고등학생들, 4․19혁명의 아침을 열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란 글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4‧19 당시 서울의 중․고등학교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학교가 동성고와 대광고, 덕수상고, 경기고등학교였다. 동성고의 경우 학생들과 교장, 교사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동성고 천복수 학생이 희생되기도 했다. 그 때의 함성을 후배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표석이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는다. 학교 운동장이나, 도로변에 잘 보이는 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 표석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길인 듯하다.

 비석은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이다. 일제말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의 학생 4,385명의 넋을 달래고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에는 당시 끌려갔던 2,700여 명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이곳에 비를 세운 것은 학도병이 입대 전에 이곳에서 합숙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로터리에서 몇 걸음 더 가면 혜화동성당이 나온다. 명동성당, 약현성당에 이어 세워진 서울에서 세 번째 천주교 본당이다. 성당 건물은 등록문화재이기도 하다. 건축가 이희태가 설계했다. 국내파 건축가로 비주류였던 그는 기존 성당 건축과 전혀 다른 독자적 건축양식으로 성당을 설계했다. 성당 안에는 한국 가톨릭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어 가톨릭 성(聖)미술의 보물창고로 알려져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본성당 문 등이 닫혀 있어 건축의 특성을 살펴보거나 미술작품 등을 볼 수 없었다. 성당 정문 안쪽의 예수와 성모 마리아상 등은 잠시라도 볼 수 있다.

 여건이 좋아져 문이 열릴 때 간다면, 차분히 성당 건물 전체와 성당 안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어 이 성당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듯하다.

 성당 옆에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있다. 대학 안 대성당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학교 입구 경비실 앞 안내판에는 “외부인 출입금지. 이곳은 사유지이므로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오니……” 같은 안내문이 붙어 있다. 신학대학이고, 김 신부의 유해가 있는 성당이다. 학교와 학생, 성스러운 성당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런 성스러운 곳을 ‘사유지!’라고 표현하며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자세는 지나친 듯하다.

 이 학교와 성당을 관리하는 분들이 외부인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이나 불필요한 의심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답사했던 날에도 경비하시는 분에게 성당 방문을 문의했지만, 막무가내로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혹시나 해서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외부인 출입을 과도하게 통제한 것이 어제오늘 만은 아닌 듯하다.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의 답사코스를 정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김 신부의 유해가 있는 그 공간을 보려던 것인데 물거품이 되었다. 코로나 와중에 이곳저곳 다녀도 이토록 거친 문전박대는 처음이다.

 외부인 출입이 문제가 된다면 보안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거나,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가톨릭 학교, 성당에서 할 일이 아닐까. ‘사유지’란 그 말에는 이미 예수도 천주교도 없다. 오직 자본의 노예가 된 천민의식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김 신부가 안식하고 있는 공간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는 데서 기뻤다.

JCC아트센터(안도 다다오 설계 건물)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JCC아트센터(안도 다다오 설계 건물)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이념과 권력투쟁의 희생자 여운형,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물

 다시 혜화동로터리로 내려오면 버스정류장 명칭이 눈에 확 들어온다. “혜화동로터리. 여운형 활동 터”이다. 이곳은 실제로는 독립운동가이며 해방 직후 정치가였던 몽양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이 활동한 곳이기도 하나, 정확히는 극단적인 좌우의 대립 속에서 극우파에 의해 암살당한 장소이다.

 『여운형: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서울대출판부, 2008년)에 따르면, 암살 당일 그는 하지(John R. Hodge, 1893~1963) 주한미군사령관 겸 미군정청 군정사령관 밑에서 민간인으로 민정(民政)을 담당한 민정관(民政官) 존슨(E. A. Johnson)을 만나러 가는 길에 존슨의 집 800미터 앞,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를 암살한 배후세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여운형의 암살은 극좌와 극우만이 존재하는 시대를 만들었다.

 지금도 비슷하다. 상대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에는 완전한 ‘흰색’과 ‘검은색’도 없다고 한다. 세상살이도, 어떤 생각도 마찬가지다. 절대적 정의는 없다.

 동성중‧고 앞 로터리 횡단보도를 건너 혜화파출소 뒷길로 들어간다. 120여 미터 올라가면 일반적인 건물로 보기에는 낯선 건물이 보인다. JCC아트센터 건물이다. 이 건물은 일본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Ando Tadao)가 설계했다.

 안도 다다오는 건축 분야를 잘 모르는 분들에게는 낯선 인물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건축가로 1995년에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al Prize)을 받은 거장 중의 거장이다. 공업고등학교 기계과가 최종 학력이다. 잠시였으나 프로 권투 선수, 공사판에서 막일도 했다. 그런 인물이 건축에 관심 갖고 홀로 책과 건축물 답사를 통해 세계 최고의 건축가가 되었다. 설계한 건물들은 콘크리트를 날 것으로 그대로 노출하고,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마술처럼 활용한다. 또 수평, 수직의 직선을 주로 활용한다. 우리나라에도 설계한 건물들이 많이 있다.

 직선의 작가 안도 다다오가 JCC아트센터를 설계할 때는 직선이 아니라 사선에 주목했다. 때문에 JCC아트센터는 안도 다다오의 작품 중에 흔치 않은 건물이 된다.

 건축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그냥 보면, 이 건물이 범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답사 중에 다양한 건물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다. 서울대병원에서 보았던 대한의원 건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건물, 방송통신대 역사관 건물, 파고다 공원 정문 등이 그렇다. 또 4편에서 살펴볼 혜화문도 그렇다.

 이화사거리에서 혜화동 로터리까지에는 조선 시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건물들이 펼쳐져 있다. 마치 타임슬립(time slip)을 하는 듯하다. 각각의 건물의 시대가 다르고 건축기법이 다르다. 거의 같은 공간에 다양한 시대의 건물이 있기 때문이다.

 건물과 장소 속에서 겉으로 드러난 모습 이외에 속살을 보면, 가끔은 확 깰 때가 많다. 그런들 어떠냐. 사는 것이 드러난 모습만으로 평가되는 것도, 속살만으로 평가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조금은 깊이 알면 일방적인 생각에 빠지지 않는 지혜가 생기게 된다.

 * 대한의원 : 종로구 연건동 28-21 (서울대병원과 서울대 치과병원 사이)
 * 이석형 선생 생가 터 : 종로구 연건동 28-21 (연건학생생활관 입구 앞)
 * 서울대병원 안 현충탑 : 종로구 연건동 28-21 (장례식장 앞)
 * 경모궁(함춘원, 영희전) 터 : 종로구 연건동 28-2 (간호대학 앞)
 * 학림다방 : 종로구 명륜4가 94-2 (2층)
 * 흥사단본부 : 종로구 동숭동 1-28
 * 김상옥 의사 동상 : 종로구 동숭동 1-124 마로니에공원 안
 * 한국문화예술위원회(경성제국대학 본관) : 종로구 동숭동 1-130
 * 방송대 역사관(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청사) : 종로구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169-1
 * 서울대 사범대 부설 초등학교, 여자중학교(파고다 공원 정문) : 종로구 연건동 177-1
 * 인평대군 집터(석양루 터) : 종로구 이화동 27-2 종로구새마을회관 왼쪽 화단
 * 이화장(우남 이승만박사 기념관) : 종로구 이화동 1
 * 낙산장(신익희‧조성환 선생) : 종로구 동숭동 129. 광명가든레지던스.
 *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 : 종로구 혜화동 90-7, 동성고등학교 정문 왼쪽 
 * 혜화동로터리 : 종로구 혜화동 56
 * 혜화동성당 : 종로구 혜화동 161-4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 종로구 혜화동 90-1
 * JCC아트센터 :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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