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도에 범인을 맞추면 6단?

정말 모처럼 만이었다. 장서연의 고향은 서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광주 남종면 분원리지만 거의 반 년 만에 집에 들르게 되었다. 그것도 같은 학과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남자 친구 차형준과 같은 과의 김명섭, 그리고 미술 전공의 추영희 등 네 명이 함께 남한산성을 둘러볼 일이 있어 갔다가 코앞에 있는 분원리 집에 들른 것이다.

집에는 할머니가 초등학교 다니는 동생 석현이를 데리고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육이오 전쟁때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십여 년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서연이 남매는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 같은 할머니였다.
“사랑하는 할머니!”

<1 > 고향 집에서 생긴 일

서연이 열려 있는 대문으로 들어서자 마당에서 고추 손질을 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가 허리를 껴안으며 말했다.
“아이구! 깜짝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할머니가 돌아서서 서연의 얼굴을 매만지며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아이고 매워! 캑캑....”

“형준이도 왔어.”
“안녕하세요. 할머니.”
형준은 이 동네에 살다 이사를 갔기 때문에 할머니를 잘 알았다.
“아이고 형준아. 이렇게 많이 컸구나.”

할머니가 형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명섭이, 영희도 인사드려.”
서연이 두 친구를 소개했다. 키가 훤칠하게 큰 명섭은 늘 싱글싱글 웃는 낯이었다.
추영희는 약간 살이 붙었으나 얼굴이 동그래 귀여워 보였다.
할머니가 인사를 받고 서연의 얼굴을 감싸쥐고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정겨워 어쩔 줄을 몰랐다.

고추 만지던 할머니 손에서 나는 매운 냄새가 서연의 코를 찔렀다. 맵기는 해도 할머니 품에서 풍기는 구수한 할머니 냄새가 싫지 않아 할머니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서연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파란 가을 하늘에 솜구름 몇 송이가 목화처럼 흘렀다. 고향 하늘이 서울 하늘보다 훨씬 정겨워 보였다.

“시장하지. 내 얼른 밥 지을 테니 모두 우물가에 가서 발 닦고 오너라.”
할머니가 하던 마 일을 멈추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서연은 마당을 한 바퀴 휘 둘러 보았다. 소를 기르던 외양간은 텅 빈 채 헛간으로 쓰였다. 그 곁에 있던 감나무에는 가지가 꺾어질 듯 열린 감들이 붉은 물이 들기 시작했다. 이 집을 지은 지가 200년은 되었다고 하니 감나무도 백 살은 넘었을 것이다. 서연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비어 있는 사랑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쌀가마와 바가지 같은 허드레 살림살이로 반쯤 차 있었다.

퀴퀴한 농가 냄새가 났지만 싫지 않았다. 그 냄새  속에는 50여 년 전 한국 전쟁 때 피난길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 냄새와 1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체취도 섞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연은 들어가지는 않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마당 왼쪽 끝에 있는 화단에는 샐비어와 꽃 없는 봉숭아 잎이 무성했다. 열 평은 넉넉히 됨직한 화단은 손질을 하지 않아 꽃보다 잡초가 훨씬 많았다.

“화단이 예쁘다. 인공적으로 꽃꽂이를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꽃이 피는 게 훨씬 좋아 보여.”
영희가 맨드라미 꽃봉오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화단이 무척 넓어 보여. 옛날부터 있던 화단이야?”
명섭이 물었다.

“옛날에는 저기까지 화단이었지. 아래채 밖에 있던 장독대를 옮겨오면서 화단을 반으로 줄였지. 내가 꽃 캐내서 옮겨 심는 데 사흘이나 걸렸어.”
할머니가 마당에 나왔다가 화단 옆의 장독대를 보면서 말했다.
서연은 고향 냄새를 맘껏 즐기기 위해 마당 구석구석을 천천히 밟아 보고는 마루로 올라섰다.

서연과 세 친구는 대청마루에 차려놓은 밥상 앞으로 갔다. 금방 뜯어 온 듯한 상추쌈과 된장찌개가 입맛을 돋우었다.
“이 집이 2백 년 이상 되었단 말이지. 저 대들보 좀 보아. 참 우람하게 보이지.”
명섭이 등이 굽어 지붕을 겨우 받치고 있는 듯한 아름드리 소나무 대들보를 쳐다보며 감탄했다.

“이백 년 이전에는 여기 집이 없었나?”
추영희가 무너질 듯 겨우 버티고 선 사랑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족보에 보면 조선 초기에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았다고 하니 아마 그때도 이 집터에 살았을 거야.”

서연이 풋풋한 상추에 보리밥과 양념 고추장을 잔뜩 얹고 쌈을 쌌다. 주먹만 한 쌈을 입을 한껏 벌리고 쑤셔 넣다시피 먹으며 말했다.
“오백 년쯤 전에 이곳이 왕실의 사옹원(司饔院) 광주 분원이었다는 거야. 까마득한 우리 할아버지가 옹기쟁이였나 봐.”
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얘야. 옹기쟁이가 뭐니. 기왕이면 도공이라고 하지.”
추영희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래서 동네 이름이 분원리(分院里)구나.”
명섭이 큰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이 집도 꽤 넓은데 몇 평이나 되냐?”
형준이 물었다.

“잘 몰라. 아무도 재 보지 않았으니까.”
서연의 대답을 들으며 명섭이 마당을 둘러 보았다.
“아마 2백 평은 훨씬 넘을 것 같아. 주소를 나중에 알려 주어. 내가 인터넷에서 확인해 볼 테니까.”

“알아서 뭐해. 할머니나 나는 이 집이 재산이라고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어.”
“그래도 알고 사는 것이 낫지 않아? 안 그래? 하하하.”
명섭이 크게 웃으며 말했으나 아무도 따라 웃지 않았다.

점심을 함께 먹은 뒤 일행은 마당에 깔아 놓은 멍석에 둘러앉았다.
“자, 이거나 먹자. 모처럼 왔는데 시골이라 먹을 게 있어야지...”
할머니가 수박을 잘라 쟁반에 수북히 담아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모두 수박을 한 입씩 베어 먹으며 여유로운 오후를 보냈다.
“근데 얘야. 이상한 일도 있었어.”

할머니가 서연이 곁에 비스듬히 앉으며 말을 꺼냈다.
“글쎄 말이야 며칠 전에 읍내 부동산 중개소에 있는 사람이 웬 청년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이 집을 팔라는 거야..”

“예? 우리 집을 팔라구요? 할머니가 집 내놓으셨어요?”
서연이 의아해서 물었다.
“팔긴. 우린 어디 가서 살라고 대대로 물려 온 집을 판단 말이냐?”
“그런데요?”
“안 판다고 했더니 값을 잘 쳐 줄 테니 팔라고 막 떼를 쓰는 거야. 별꼴을 다 보았어.”

“얼마를 쳐준대요?”
듣고 있던 명섭이 물었다.
“시세에서 한 천만 원은 더 준다던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귀담아 듣지를 않았어.”
“무엇 때문에 안 팔려는 집을 사려고 떼를 쓴대요?”

서연이 물었다.
“이 집이 명당 터라는 거야. 젊은이의 아버지가 불치병에 걸렸는데 이 집에 와서 요양을 하면 낫는다는 역술가의 말을 들었다던가...”
“말하자면 옛날 말로 피접을 온다는 뜻이구먼. 근데 왜 하필 이 집이야?”
영희도 의문이 들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날 밤 서연과 영희는 안방에서 자고, 명섭과 형준은 마루에서 모기장을 치고 잤다. 가을이라지만 아직은 모기가 윙윙거리며 시위를 했다. <계속>

 

작가소개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5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6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1983년 한국추리작가협회를 창설하고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로 대한민국 문화 포장 등 수상.
50판 까지 출판한 초베스트셀러 <악녀 두 번 살다>를 비롯, <신의 불꽃>,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추리소설 잘 쓰는 공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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