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이번 탐방기의 계획은 혜화동 JCC아트센터에서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혜화문, 성북동의 시인 겸 사상가 조지훈의 옛집터, 동선동 시인 신동엽 옛집터, 돈암동 미아리고개까지 구간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혜화문길’의 의미와 조지훈에 대한 소개를 중심으로 하다 보니 예상치 않게 분량이 많아졌다, 또 이 구간에 대해 답사 전에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중요한 몇 곳을 놓쳤다.

 그런 까닭에 이번 탐방기는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에서 음악가 채동선 옛집터까지 한정한다. 이 구간 일부는 종로구, 일부는 성북구이다. 2편에서 성북구의 이 구간에 있는 네 곳 곳(음악가 윤이상 옛집터, 미술사학자 최순우 옛집, 돈암장, 조각가 권진규 옛집)과 시인 신동엽 옛집터, 미아리고개를 소개할 예정이다.

# 역사의 현장, 구(舊) 서울시장 공관

 혜화동 JCC아트센터에서 혜화문 방향으로 150미터 직진하면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가 나온다. 답사 당시에는 코로나로 휴관 중이었다. 혜화문 근처, 한양도성 길 주변에 있다. 1940년대에 건축된 목조 건물이다. 1959년부터 70년대까지는 대법원장의 공관이었고, 1981년 18대 박영수 서울시장부터 2013년 35대 박원순 시장까지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되었다. 고(故) 박원순 시장은 임기 중이던 2013년 한양도성 복원을 위해 공관 이전을 추진하고, 현재의 안내센터로 바꾸었다.

 대법관 공관 시절에는 「4․19혁명재판 판결문」이 작성된 곳이다. 4․19혁명은 1960년 3․15부정선거로 일어났다. 혁명은 선거날인 3월 15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불길로 일어났다. 4월 11일에는 3월 15일 실종된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어 2차 마산 시위가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처음 궐기했고, 4월 19일에는 서울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강경진압을 추진했던 경찰의 무차별 사격은 『서울 근현대 역사기행』(정재정 외, 혜안, 1999년)에 따르면, 사망 185명, 부상 1,696명을 만드는 대형 참사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부정선거와 학살과 다름없는 독재권력의 만행에 따른 성난 민심을 이승만 대통령은 이길 수 없었다.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다음날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경무대(현 청와대)를 떠났다.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팜플렛을 보면, 전시관 1층에는 한양도성과 혜화문, 시장공관과 한양도성 전시실과 카페가 있다. 2층에는 시장공관과 역대 시장, 공관의 역사 등에 대한 전시실이 있다. 다른 국가기관 시설처럼 월요일에는 쉰다.

 센터 근처 혜화문을 중심으로 한양도성길이 좌우로 이어진다. 서북쪽 숙정문까지는 도보 1시간, 동남쪽 동대문까지는 1시간 10분이 걸린다. 옛 조선의 도성길을 걷고 싶다면 혜화문으로 나가 좌우의 도성길을 택하면 된다.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한창이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자업자득 또는 불운처럼 민선 서울시장들을 재선까지 포함해 살펴보면 임기를 제대로 마친 사람이 드물다. 삶의 후반도 그다지 편하지 않다. 대개는 처음부터 서울시장이란 선출직 그릇이 아니었거나, 오만과 과욕이 재앙을 부른 경우다.

 지금의 후보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러나 공약을 보면, 시민을 위해 1년 만에 바다를 가르고, 오병이어(五餠二魚,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인 예수)의 기적을 만들 태세이다. 임기 1년에 불과한 시장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이룰 수 없는 공약이다. 또 어느 공약은 서울시장직으로는 권한 조차 없다. 이슈를 주도하는 것과 할 수 없는 공약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나 과장이 심하다.

 어려울 때일수록 솔직해야 한다. 혹세무민을 원한다면 자기최면으로 자기망상에만 그쳐야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감언이설도 한두 번이다.

 지금의 모습을 보면 누가 되든 전례에 따라 새로운 시장 역시 삶의 어려운 난관을 지날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다.

이순신이 근무했던 함경도 건원보, 조산보, 녹둔도 지역(광여도 중 관북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9세기 전반)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이순신이 근무했던 함경도 건원보, 조산보, 녹둔도 지역(광여도 중 관북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9세기 전반)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 분단으로 끊기고 잊혀진 이순신의 함경도길

 안내센터 앞길을 따라 70여 미터 가면 혜화문이 나온다. 잘린 성벽 사이에 난 창경궁로와 복원된 혜화문으로 오면 ‘길’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길’은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을 연결하고 문화를 전달해 준다. 때로는 약탈과 침략의 선(線)이 되기도 한다. 조선 시대는 서울 도성에 난 길은 더 특별하다. 조선은 고도로 발달된 중앙집권, 관료국가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사방팔방 나 있는 길도 행정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수직적인 길이다. 소통의 길이 아니다. 길의 본래 목적과는 차이가 크다. 지방과 지방을 연결하는 수평적인 길이 있기는 있었지만, 수직적인 길을 보완하는 목적이 더 강하다.

 조선 시대 서울에는 4대문(四大門 : 동대문‧흥인지문, 서대문‧돈의문, 남대문‧숭례문, 북대문‧숙정문)과 4소문(四小門 : 동소문‧혜화문, 서소문‧소의문, 남소문‧광희문, 북소문‧창의문)이 있다.

 각각의 문에 연결된 도로를 통해 각 방향의 지방과 연결된다. 거칠게 잡아보면, 서대문은 황해도‧평안도, 남대문은 경기 남부‧충청‧전라‧경남, 동대문은 함경도‧강원도‧경북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문이다.

 이중 답사의 출발점이었던 동대문과 이번 답사기의 시작점인 혜화문은 조선 중기까지는 여진족과 관계가 깊다. 북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함경도)경흥로 또는 경원가도’이다. 조선 군대가 북방 여진족을 정벌하거나, 방어하기 위해 파병하는 길목, 여진족의 사신이 오가는 길이기도 하다.

 동대문에서는 동대문~동묘~안암동~수유리, 혜화문에서는 혜화문~미아리고개~수유리를 거쳐 의정부~양주를 지나 함경도로 갔다.

 두만강 지역 여진족을 향해 서울에서 떠났던 인물로는 세종 때 두만강의 여진족을 퇴치하고 6진(鎭)을 설치해 현재의 국경선을 만든 김종서(金宗瑞, 1383~1453), 선조 때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대표적이다.

 이순신은 함경도에서만 3차례, 약 5년을 근무했다. 1576년 무과에 급제한 뒤 12월 함경도 동구비보(삼수 지역)의 권관(종9품)이 되어 1579년 2월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1583년 7월에는 함경도 남병사 이용의 군관에 임명되어 다시 함경도로 갔고, 10월에는 함경도 건원보(경원 지역) 권관이 되어 여진족 추장 울지내를 유인해 격퇴하고 11월에 돌아왔다.

1586년 다시 함경도 조산보(경흥 지역) 만호(종4품)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8월에는 녹둔도(두만강과 동해 사이에 있던 삼각지, 현재는 러시아 영토) 둔전관(군대의 농장)을 겸직했다. 9월에는 녹둔도를 기습한 여진족으로 인해 첫 번째 백의종군을 했고, 1588년 1월, 두만강 건너편 여진족을 토벌했던 시전부락 공격 작전에 우화열장(우측 화포부대 지휘관)으로 참전해 승리한 뒤 백의종군이 해제되고 아산으로 낙향했다.

 이순신이 3차례나 왕복했던 서울의 출발점은 동대문 또는 혜화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은 이순신의 ‘백의종군길’과 달리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두만강 지역으로 간 김종서의 길, 이순신의 길을 다시금 생각해야 할 때이다. 말로만 통일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민족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동대문과 혜화문을 설명하는 안내판에 그런 이야기 몇 줄 더 넣는다고 손해될 일이 없다. 그냥 동대문과 혜화문이 아니라 김종서가 여진족을 정벌하러 통과했던 길, 이순신이 여진족을 격퇴하기 위해 출발했던 길이라고 할 때 동대문과 혜화문은 육중한 무생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게 된다.

혜화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혜화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 새떼들의 피해를 막기 위한 혜화문의 장치

 혜화문(惠化門)은 동소문(東小門)으로 불리기도 한다. 동대문과 북대문(숙정문) 사이에 있는 문이다. 북대문은 지형이 험하고 연결된 도로가 없어 성문 기능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문을 열어놓으면 음기(陰氣)가 불어 서울 여자들이 음란해진다는 풍수설까지 영향을 주어 문을 닫아두게 했다(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고 한다. 이로 인해 혜화문이 북대문을 대신했다. 지금은 비과학적 주장으로 볼 수 있으나, 한때는 그런 주장이 당연히 여겨졌다. 여러 지역에 남아있는 풍수설은 사람을 당황시키게 하는 일이 많다. 유심히 보면 부귀영화를 꿈꾸거나 재앙을 피하기 위한 고민의 결과이다.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가도 수긍할 수 없는 풍수설을 보게 되면 풍수설 자체를 부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북대문이 폐쇄되면서 혜화문이 함경도 등 북쪽 지역을 오가는 주요 출입문이 되었다. 특히 여진족 사신의 서울 출입문이다. 처음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으나, 창경궁이 세워지면서 창경궁 동문이 홍화문으로 명명되자 혜화문으로 개명되었다.

혜화문 안 천정 봉황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혜화문 안 천정 봉황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혜화문의 ‘혜화(惠化)’에는 “여진족에게 은혜를 베풀어 가르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여진족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하고 중국 북경에 입성한 뒤부터는 여진족과는 무관한 길, 국경 방어 차원에서도 의미 없는 길이 되었다. 여진족도 중국의 주인이 되었기에 이 길 대신 명나라 사신들이 다녔던 ‘의주로(서대문~개성~평양~의주)’를 사용했다.

 혜화문의 역할이 크게 줄어들자 문루(門樓, 문 위에 세운 누각)가 무너질 정도로 잊혀졌다. 영조 때 문루를 세웠으나 일제가 헐어버렸고,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에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성문까지도 없애버렸다.

 1994년에 복원된 현재의 혜화문은 본래 자리가 아니다. 본래 자리는 지금 위치 옆 큰길 위라고 볼 수 있다. 복원된 혜화문은 길옆 언덕 위에 있어서 아래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복원과정에서의 교통 불편 때문이었던 듯하나, 현재 모습 역시 정상적 복원으로 보기는 어렵다. 현실과 타협한 결과인 듯하다.

  혜화문에는 지역적 특색이 반영되어 있다. 남대문과 동대문의 경우 천정에는 용이 그려져 있다. 혜화문 천장에는 새의 제왕인 봉황이 그려져 있다. 또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 : 매 머리 모양의 장식)가 있다. 봉황과 취두는 모두 혜화문 밖 삼선평(三千坪) 들판에 새떼가 많아 이를 막기 위한 풍수적 장치이다. 북대문의 풍수사상이나 혜화문의 취두‧봉황은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의 철학적 유물이다.

김광섭 옛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김광섭 옛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 빌라가 된 김중업이 설계한 시인 김광섭의 옛집

 혜화문에서 한성대입구역으로 간다. 미아리고개까지 가는 길에 잠시 근대의 주요 시인과 예술가들이 살았던 성북동의 한 구간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가 주요 탐방 목표였기에 성북동에서는 한성대입구역에서 가까운 시인 겸 독립운동가 김광섭(金珖燮, 1906~1977)과 시인 겸 사상가 조지훈(趙芝薰, 본명 조동탁, 1920~1968), 음악가 채동선(蔡東鮮, 1901~1953)의 흔적만 먼저 살펴보았다. 이 구간의 큰길 건너편에 있는 음악가 윤이상(尹伊桑, 1917~1995) 옛집터, 미술사학자 최순우(崔淳雨, 1916~1984) 옛집은 다음 편에서 소개한다.

 한성대입구역 앞 횡단보도를 건너 서북쪽 성북동 방향으로 420미터 정도 가면 편의점 세븐일레븐이 있다. 그 옆집인 고깃집 바로 앞 도로변 보도에는 ‘김광섭 집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표석에는 시인 김광섭으로 나온다. 김광섭은 시인만이 아니라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삶을 단면으로만 보아서는 안될 듯하다. 김광섭에 대한 표석은 보다 입체적으로 써 있으면 좋을 듯하다. 

언덕 위의 김광섭 옛집 터에 세워진 빌라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언덕 위의 김광섭 옛집 터에 세워진 빌라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김광섭 옛집터는 표석이 있는 세븐일레븐 옆 ‘성북로10 고깃집’을 왼쪽 골목 140미터 위에 있는 ‘원익스카이빌’이 있는 자리다. 언덕 위다.

 표석에 따르면, 김광섭이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살았던 옛집은 건축가 김중업(金重業, 1922~1988)이 설계했다고 한다. 김중업이 설계한 김광섭의 옛집은 빌라로 바뀌었고, 그곳에는 아무런 안내 표석이 없다. 옛집터에서는 멀리 남산타워도 보인다. 개발되기전 김광섭이 살았을 때는 언덕 위에서 서울이 고즈넉이 보였을 듯하다.

 김중업의 대표작품으로는 「서강대학교 본관」(1958),  「주한프랑스대사관」(1960년), 「부산 UN묘지 정문」(1966), 「3·1빌딩」(1969), 「KBS국제방송센터」(1988), 「올림픽공원 상징조형물」(1988) 등이 있다. 프랑스에서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에게 건축을 배웠다. 르 코르뷔지에는 현대적인 아파트 단지 방식을 만들기도 한 인물이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김중업은 건축가로 활약했다. 그러나 군사독재 시대의 졸속이 만든 비극인 와우아파트 붕괴사건(1970년 부실공사로 34명이 사망), 경기도 광주대단지사건(서울시의 무허가 빈민촌 철거에 따른 10여만 명 강제이주)을 비판하다가 정부의 탄압을 받아 강제 추방되듯 조국을 떠났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사망 뒤에야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김광섭의 옛집은 김중업의 초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성북동과 문학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성북동과 문학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김광섭은 성북동 집에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시(詩) 「성북동 비둘기」를 지었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한적한 산속 마을과 다름없던 성북동이 1960년대 부터 도시화되고 개발되는 과정에서 산속에 살던 비둘기가 쫓겨나는 모습을 노래했다. 이 시 속의 비둘기는 산속에 살던 우리의 전통적인 ‘멧비둘기’이다.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는 비둘기이다. 인간에 의해 자신의 생태계가 파괴되어 쫓겨나는 비둘기이다. 88올림픽 때 대량 수입되어 급속히 퍼져 도심 한복판에서 도시 오염과 전염병 전파의 주범으로 낙인이 찍힌 지금의 비둘기가 아니다. 인간과 싸우는 비둘기, 쓰레기통을 뒤져야 하는, 구걸하는 비둘기가 아니다. 「성북동 비둘기」에는 친근했던 과거의 비둘기가 살아있다.

 시 「성북동 비둘기」는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기도 했다. 「성북동 비둘기」의 영향인지는 모르나, 1983년 간행된 『한국의 발견 : 서울』에서는 성북구의 땅 모양을 날아오르는 비둘기 형상에 비유했다. 실제로 성북구의 모습을 지도에서 확인해 보면, 날아가는 새로 상상할 수도 있다. 「성북동 비둘기」가 지어지지 않았다면, 또 다른 누군가는 삼선평의 새들 때문에 ‘매’나 ‘봉황’의 모습이라고 주장했을 듯하다.

# 그림과 노래가 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의 시는 그림이 되기도 했고,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가 되기도 했다. 특히 시(詩) 「저녁에」가 그렇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랴”

 이 시는 성북동에 살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던 화가 김환기(金煥基, 1913~1974)에 의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그림으로 탄생했다. 이른바 ‘점화(點畵)’이다. 「저녁에」에 나오는 ‘별’을 상징하는 검푸른 점(點)들이 빽빽한 추상화이다.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이해하려면 시 「저녁에」를 알아야 한다.

 「저녁에」는 본래의 「저녁에」 제목 대신 김환기의 그림 제목과 같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으로 바뀌어 2인조 음악 그룹 ‘유심초’에 의해 노래가 되었다.

 김광섭, 김중업, 김환기. 그들은 지금은 모두 고인(故人)이다. 그들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성북동 이곳에는 그들의 흔적만이 표석으로 혹은 이야기로 지금의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원익스카이빌’ 자리에는 새로이 김광섭과 김중업의 흔적을 성북구청이나 문화원에서 만들어 두었으면 한다. 「성북동 비둘기」는 성북구의 상징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방-조지훈기념 건축조형물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시인의 방-조지훈기념 건축조형물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 문화예술인의 동네, 성북동과 시인의 방

 ‘김광섭 집터’에서 다시 약 150미터 정도 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차도의 한 차선이 작은 공원처럼 된 곳이 보인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성북문화원에서 제작한 고풍스러운 멋진 작품의 ‘성북동과 문학’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여느 안내판과 격이 다르다. 몇 줄 안되는 의무적(?) 또는 형식적인 안내판이 아니라 작품이다. 안내판에는 장준호 작가의 조각도 삽입되어 있다. 뒷면에는 성북동에 살았던 많은 인물들이 길을 따라 살았던 지역에 표시되어 있다. 아쉬운 것은 구체적인 주소가 없다는 점이다. 주소 같은 자세한 정보를 써 놓았더라면 더 멋진 작품이 되었을 듯하다.

 이곳은 카카오지도에서는 ‘방우산장’으로 검색된다. 네이버지도에서는 버스정거장 표시만 있고, ‘방우산장’을 검색하면 그 근처 다른 곳이 나온다.

 안내판에 따르면, 1930년대 초반부터 시인 김기진(金基鎭, 1903~1985), 작가 김일엽(金一葉, 1896~1971) 등 많은 문인이 모여 살아 ‘문인촌’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하다. 소설가 이태준(李泰俊, 1904~?)‧박태원(朴泰遠, 1910~1986),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시인 겸 사상가 조지훈, 시인 김광섭, 소설가 염상섭(廉想涉, 1897~1963) 등이 살았다고 한다. 또 화가 김환기‧김용준(金瑢俊, 1904~1967)‧김기창(金基昶, 1913~2001), 음악가 윤이상‧채동선 등도 살았다. 성북동은 많은 문인과 화가, 음악가가 좁은 공간에 살면서 교류했던 공간이다.

 이번 답사에서는 혜화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가 주코스이기에 한성대입구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김광섭, 조지훈, 채동선만 주로 살폈다. 성북동의 다른 인물이나 공간은 다음 기회에 소개할 예정이다.

 안내판에서 20여 미터 더 올라가면, 버스정거장(홍익대부속중고등학교입구)과 뭔지 모를 건물 비슷한 구조물과 의자들이 보인다. 구조물과 의자는 ‘시인의 방’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성북동 조지훈기념 건축조형물’이다.

 자세히 보면, ‘방’이라기보다는 야외의 학교 교실 같은 풍경이다. 옛날 초등학교 의자, ‘ㄱ’자 모양의 반쯤 덮인 천정과 한옥의 창살 방문이 있는 벽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문 뒤편에는 조지훈의 시 「낙화」가 세워져 있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오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이 방은 「낙화」 속 주인공의 집과 닮았다. 그러나 버스와 각종 차량으로 시인의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오니”와는 다른 느낌이다.

 조지훈은 필명이다. 그의 아들 조광렬이 쓴 『승무의 긴 여운 지조의 큰 울림:아버지 조지훈-삶과 문학』(나남, 2007년)에 따르면, 지훈은 필명이다. 본명은 동탁이다. 어릴 때 어느 노인이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芝蘭生於深林 不以無人而不芳(지란생어심림 불이무인불방, 난초가 깊은 산 속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향기롭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에서 지(芝)와 방(芳)을 따서 지어준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부인에게는 본래 이름 대신 ‘난희(蘭姬)’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지훈의 필명처럼 지훈은 향기로운 사람으로 평생 살았다.

 조지훈은 흔히 『청록집』의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청년 조지훈은 시인이 맞다. 그러나 중년 조지훈은 고려대 교수로 마지막 선비, 한국학의 체계를 정립한 사상가로 볼 수 있다.

# 원치 않았던 현판을 달아놓은 ‘방우산장’

 안내판에는 “시인 조지훈은 자신이 기거한 모든 집을 ‘방우산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방우산장이란 ‘마음 속에 소를 한 마리 키우면 직접 소를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다름없다’는 ‘방우즉목우(放牛卽牧牛)’의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지훈의 사상을 담아 만들어진 ‘시인의 방_방우산장’은 조지훈을 기념하는 공간만이 아닌, 그가 바라보았던 삶의 공간이자 이곳을 찾는 시민들의 창조성이 만나는 열린 공간입니다”로 공간의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안내판에 있는 “마음 속에 소를 한 마리 키우면 직접 소를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다름없다”는 말을 조지훈의 「방우산장기(放牛山莊記)」에서 확인해 보면, 조지훈의 말도 글도 아니다. 또 이어져 있는 “‘방우즉목우(放牛卽牧牛)’의 사상”이란 것도 처음듣는 사상이다.
 그는 「방우산장기(放牛山莊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방우산장은 내가 거처하고 있는 이른바 ‘나의 집’에다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 기르는 한 마리 소야 있든지 없든지 방우(放牛)라 부르는 것은 내 소, 남의 소를 가릴 것 없이 설핏한 저녁 햇살 아래 내가 올라타고 풀피리를 희롱할 만한 한 마리 소만 있으면 그 소가 지금 어디에 가 있든지 내가 아랑곳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집은 떠다니지 못하지만 사람은 떠돌게 마련이다. 방우산장의 이름에 값할 집은 열 손을 넘어 꼽게 된다. 어떤 때는 따뜻한 친구의 집이 내 산장이 되었고 어떤 때는 차운 여관의 일실(一室, 방 한칸)이 내 산장이 되기도 하였다. 방우산장에는 아직 한 장의 현판도 없다. 불행하게도 한 장의 현판을 걸었던들 방우산장은 이미 나의 집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요, 나의 엉터리도 없는 집 이름은 몇 번이든 바꿔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두려운 일은 곧 뒷날 내 죽은 뒤 어느 사람이 있어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 주노라는 제 정성으로 방우산장이란 묘석을 내 무덤에다 세워 줄까 저어함이다.”

 조광렬에 따르면, ‘방우산장’은 1941년 조지훈이 오대산 월정사에서 머물던 방에 이름을 붙인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그가 1938년에 성북동 심우장(尋牛莊, 깨달음을 상징하는 소를 찾는 사람의 집)에 살던 한용운을 찾아가 만났던 것을 보면, ‘방우산장’은 한용운의 심우장의 영향인 듯하다. 불교에서는 본성을 찾고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소에 비유한다. 10단계이다. 이를 그린 것이 심우도(尋牛圖)이다. 첫 단계가 한용운의 심우이다. 3단계는 소를 발견하는 견우(見牛), 4단계는 소를 붙잡는 득우(得牛), 5단계는 소를 길들이는 목우(牧牛)이다. 이 10단계 중 조지훈의 방우는 없다. 불교를 공부했음에도 조지훈이 방우라고 한 것은 그 자체가 그의 특별함이다. 얽매이지 않는 시인의 감성이 빛나는 부분이다.

 방우산장은 그 자신이 머문 모든 곳이었고, 방우의 우(牛)는 그 자신을 뜻하는 듯하다. 깨달음이 목적이 아니라,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자신을 질책하기 위한 고민으로 ‘방우’라고 자신을 표현했던 듯하다.

 안내판의 알 듯 모를 듯한 문장이나 ‘사상’ 대신 본래의 문장을 넣었으면 어땠을까. 또 조지훈은 ‘방우산장’이란 묘석을 세워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의 삶과 생각은 여전히 여행을 하고 있다. 원치도 않았던 ‘방우산장’ 현판을 옛집 터도 아닌 길 한복판에 세워둔 듯하다. 차라리 그와 관련한 다른 명칭을 지어 붙이는 것이 좋았을 듯하다.

 방우산장을 지나 그의 옛집이 있던 곳으로 간다. 카카오지도나 네이버지도에는 나오지 않는다. 네이버지도에 나오는 ‘방우산장’이 조지훈과 무슨 관계인지는 알 수 없다. 아들 조광렬이 언급한 주소는 현재 ‘시인 조지훈 집터’란 표석이 있는 곳이다.

 ‘시인의 방’ 끝 오거리에서 정면을 보면 이마트24가 있다. 이마트24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보성세차장이 보인다. 그 옆 1층 엄지네일이 있는 붉은 벽돌의 빌라가 옛집 터에 있는 건물이다. 빌라 앞에는 표석이 있다. 승무를 추는 여인 그림과 조지훈의 시 「승무」를 그린 시화와 집의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승무」의 탄생과 3인 시집 『청록집』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승무」는 시 「고풍의상」에 이어 『문장』에 추천된 작품이다. 여기에 「봉황수」까지 추천되면서 3편 추천제에 따라 20세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추천인은 당시 최고의 시인 정지용이었다. 「고풍의상」은 훗날 성북동 이웃에 살던 윤이상에 의해 곡이 붙여지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교가」도 조지훈이 작사하고, 윤이상이 작곡을 한 것이기도 하다.

 시 「승무」에는 사연이 많다. 우연히, 한순간 지어진 것이 아니다. 조광렬에 따르면, 「승무」를 짓기 전에 한성준(韓成俊, 1875?-1941)의 춤과 최승희(崔承喜, 1911~1969)의 춤, 어떤 이름 모를 승려의 춤을 보았고, 1938년에는 수원 용주사에서 승무를 보고 절 뒷마당 감나무 아래에서 넋을 잃고 앉아 있기도 했다고 한다. 또 1939년에는 김은호의 그림 「승무도」 앞에서 두 시간 가까이 서서 7~8장의 스케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를 제대로 짓지 못하며 몇 달을 보내다가 구(舊) 왕궁아악부의 「영산회상」을 보고 영감을 얻어 완성했다고 한다. 시 한 편을 위해 1년여 동안 몸살을 앓은 결과이다.

 산문 「내 시의 고향」에 따르면, 『청록집』은 『문장』으로 등단한 시인인 조지훈, 박목월(1916~1978), 박두진(1916~1998), 3인의 공동시집이다. 그들은 모두 “민족적 현실의 초극을 위한 저항을 노래하진 못하였으나 붓을 꺾고 숨어서 시를 씀으로써 치욕의 페이지에 이름을 얹지는 않았고, 쫓긴 이의 슬픔 속에 잠겨서 시를 썼으나 퇴폐에 몸을 맡기지 않아 희구(希求)하는 슬픔으로 빛을 삼았던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고 한다. 또 박두진이 출판사인 을유문화사에서 요청을 받아 서로에게 연락했고, 박목월은 『청록집』이란 시집 제목을 지었으며, 조지훈의 성북동 옛집에 모여 서로의 시 중에서 선택해 나온 시집이라고 한다. 그들은 훗날 머리가 하얗게 늙으면 ‘백록집’을 내자고 했으나 48세 조지훈의 이른 타계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로 시작하는 박목월의 「나그네」는 조지훈이 박목월에게 보낸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우름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로 시작되는 「완화삼(玩花衫)」에 대한 답시이다.

조지훈 옛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조지훈 옛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 한국학의 체계를 세운 한국사상가, 조지훈

 시인 신경림은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우리교육, 1998년)에서 조지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훈은 단순한 시인만이 아니다. 학자로서 『한국문화사서설』, 『한국민족운동사』도 저술했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주저하지 않고 바른 소리를 함으로써 선비의 몫을 다했다. 그를 시인으로서 보다도 지사나 논객으로 더 높이 평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3‧15부정선거 전후 때 「지조론」을 들어 꾸짖던 그의 준열한 목소리, 5‧16군사정부가 마구잡이로 빨갱이라는 올가미를 씌어 학생들을 잡아들일 때, ‘그들 사이에 진짜 공산주의자가 몇이나 되느냐’고 호통쳤다.”

 신경림이 말한 조지훈은 학자이며 선비였던 조지훈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고려대 교수 시절에 민족문화연구소를 창설했다. 소장으로 그는 연구소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민족‧국가, 정치‧경제, 과학‧기술, 풍속‧예술 등 총 12부문을 선정해 정리하는 『한국문화사대계』 편찬을 주도했다. 그 안에는 그가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45년 해방까지 60년 동안의 대일항쟁사를 정리한 『한국민족운동사』도 제1권에 들어있다.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 글은 등장인물의 그 당시 그 사건에 있어서의 공적을 논술하는데 주안을 두었고, 후일의 공적으로 하여 과거의 죄과를 엄폐하거나, 후일의 죄과로 하여 과거의 공적을 깍지도 않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다만 「일제하의 이중첩자 연구」가 완성되지 않은 까닭에,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을 다룬 부분은 후일에 인명의 첨삭이 가해질 수 있으리라”

 그의 서술 방식은 철저하게 객관적이다. 죄를 덮거나, 공로를 깎아내리지 않으려 했다. 아쉬움은 그의 말처럼 「일제하의 이중첩자 연구」가 완성되지 않은 부분이다. 그 부분은 지금도 연구가 많지 않다. 그래서 조지훈의 미완성과 이른 타계가 더욱더 안타깝다.  선비 조지훈은 지조(志操)를 중요시했다. 「지조론」에서 그는 지조와 지도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 자신의 의견을 고집해 양보하지 않음)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 더구나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하는 정치가는 권모술수에 능한 직업정치인보다 지사적 품격의 정치 지도자를 더 대망하는 것이 국민 전체의 충정(衷情)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後半)을 보라’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또 「임기응변」에서는 “선비는 지조를 지킴으로써 그 값이 있다. 지조란 것은 자기의 주체를 세우고 신념에 순(殉, 따라 죽음)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시세에 따라 변화가 막측하지 않고 …… 자기를 팔지 않아 침묵(沈默) 도회(韜晦, 자신의 지위나 재능 따위를 숨겨 감춤)로 소신을 지킨다”고 하기도 했다.

 「어떤 길이 바른 길인가」에서는 “목적지를 향하여 장애를 피하면서 최단 거리의 길을 희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본연의 소망이다. 그러나 예나 이제나 몰락의 길은 평이하고 향상의 길은 간고(艱苦, 몹시 고생스러움)하다. 눈앞의 평탄에 속아 절망의 길을 자취(自取, 스스로 만들어 그렇게 됨)하지 말고 처음에는 험난하더라도 초극의 길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가 말한 지조와 리더론, 선비의 자세, 선택의 문제는 조지훈의 시대나 지금이나 똑같다. 언젠가부터 우리 정치에는 권모술수가 넘친다. 거짓말 경연대회를 하는 듯하다. 또 어제를 팔아 정치를 하다가 이제는 과거의 타파 대상이었던 기득권자와 똑같은 ‘후반’을 살아가는 모습이 흔하다. 조지훈이 바랐던 ‘지사적 리더’는 몇 십 년이 지났어도 지금도 필요하다.

 조광렬에 따르면, 그는 제자들에게 “죽음을 공부하라”, “살찐 돼지보다 깡마른 학이 되라”라고 강조했고, “우리는 죽어야 하고 죽음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죽는 까닭과 죽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했다고 한다. 선비였고, 지사였기 때문에 쉽게 말할 수 없는 사생관(死生觀)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듯하다.

 4․19혁명 뒤에 만들어진 고려대에 세워진 「그날의 분화구 여기에-고대 사월혁명탑명」을 보면, 그의 차가운 이성을 둘러싼 뜨거운 심장의 고동소리를 느낄 수 있다.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 사악(邪惡)과 불의에 항거하여/압제의 사슬을 끊고/분노의 불길을 터뜨린/아! 1960년 4월 18일/천지를 뒤흔든 정의 함성을 새겨/그날의 분화구 여기에 돌을 세운다.”

 사상가 조지훈에 대해서는 현재는 별도로 출판되어 있는 『한국민족운동사』(나남출판, 1996년)와 『조지훈-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 03』(돌베개, 2003년)을 참고하면 된다. 돌베개판 책은 청소년이 읽는 수필이라는 부제가 있으나 나이와 무관하게 읽을 책이다. 그의 삶 전체에 대해서는 조광렬의 『승무의 긴 여운 지조의 큰 울림:아버지 조지훈-삶과 문학』이 가장 좋다.

근린생활시설로 공사 중인 채동선 옛집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근린생활시설로 공사 중인 채동선 옛집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 가사가 네 번 바뀐 곡의 주인공, 민족음악가 채동선

 첫답사에서는 조지훈 옛집에서 시인 신동엽 옛집 터로 곧바로 갔다. 가는 도중에 들려갈 계획이었던 채동선 옛 집터는 뛰어넘었다. 가는 도중 재확인해 보니, 2019년 가을에 옛집이 재개발로 철거되었다는 뉴스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돌아와 다시 채동선을 다시 살펴보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채동선에 대해서는 『그와 나 사이를 걷다』(김영식, 호메로스, 2018년)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고, 서울 망우리공원에 있는 그의 묘소도 몇 차례 다녀온 적이 있었다. 집터가 사라졌다고 그냥 뛰어넘었던 것이 못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 원고를 마감하는 날 이른 아침에 김광섭의 옛집터와 함께 다시 찾아갔다. 2021년 현재 그 집터가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옛집터는 현재 6층의 도시형 생활주택 및 근린생활시설 건립 공사를 하고 있다. 그의 옛집은 이제 흔적조차 사라졌다. 건축주와 시공자는 세종주택(주)이고, 설계자는 두비건축사무소이다. 건축주와 설계자가 이 터가 민족음악가 채동선이 살았던 곳임을 알고, 채동선의 흔적을 건물에 어떤 형태라도 남겨두기를 간곡히 바랄 뿐이다. 우리는 어제의 땅 위에서 오늘을 살고 내일을 만들어간다. 삶 역시 마찬가지다. 채동선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라면 건물의 가치도 더욱 상승할 수 있다. 바라거니 새로 지어지는 건물에 채동선을 입혔으면 한다. 특히 건축주와 시공자가 ‘세종주택건설’이라면 세종대왕의 뜻을 이어 부디 한 번 더 깊이 고민했으면 한다.

 김영식 작가에 따르면, 채동선이 작곡한 노래 중 한 곡은 곡은 하나이나 가사가 네 번이나 바뀌었다고 한다. 처음에 정지용 시인의 시 『고향』에 곡을 붙였으나(1933년), 정지용 시인이 6․25 때 납북되면서 정지용이 금기시 되자 박화목의 『망향』으로 대체되었다. 그가 타계한 뒤에는 유족들이 이은상의 『그리워』로 바꾸었다(1964년). 1988년 정지용의 시가 해금되자 다시 처음의 『고향』이 부활했다고 한다.

 그가 작곡한 『고향』은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맨 처음 만든 곡이다. 그는 3․1운동에 참가해 일제의 감시를 받다가 일본으로 유학 갔고, 그 뒤 다시 독일 베를린 음악대학교에서 음악 공부를 하다 돌아온 직후였다. 식민지인의 고통과 나라를 빼앗긴 분노 속에서 서러운 타국 생활을 했던 그였다. 고향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었을 듯하다. 그러나 그의 고향은 그가 떠날 때와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식민지였다. 그런 아픈 마음이 『고향』에 들어있기에, 자신이나 조국이나 옛 고향을 잃은 같은 처지라 가장 먼저 『고향』을 대상으로 작곡했던 듯하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 /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프르구나” (정지용, 『고향』)
 “꽃피는 봄 사월 돌아 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넘어/ …… /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들 것일레라” (박화목, 『망향』)
 “그리워 그리워 찾어와도/ 그리운 옛님은 아니뵈네/ …… / 그리워 그리워 찾어와서/ 진종일 언덕길만 헤매다 가네” (이은상, 『그리워』)

 곡의 가사가 된 세 편의 시를 비교해 보면, 가장 유명해진 『그리워』보다 『고향』이 일제강점기 식민지 음악가 채동선의 삶과 마음을 모두 담은 진짜 곡으로 보인다. 일제의 침탈 이전의 고향, 대한(大韓) 사람의 고향을 꿈꾸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음악가였기에 그는 다른 음악가들과 달리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다.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 일제 말기에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민요를 채보하며 해방을 기다렸다. 또 이념적으로 치우지도 않았다.

 그 까닭에 해방공간에서 좌우 어느 편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민족음악가로 해방된 조국에 기여하고자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개척해 갔다. 이 시기에 그는 새로운 조국을 위해, 대한민국의 국민을 위해 「조국」, 「독립축전곡」, 「한글날 노래」, 「3․1절 노래」, 「개천절 노래」, 「한강」, 「무궁화 노래」를 작곡했다.

 6․25중 피난지 부산에서 53세로 안타깝게 병사했다. 살던 서울 집은 재개발 영향으로 없어졌고, 서울 망우리공원에 있던 묘소도 2012년 고향 전남 보성군 벌교로 옮겨졌다. 서울엔 그의 노래만 남아 있다. 지하에서 서울을 돌아보며, 『고향』의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를 부를 듯하다.

 다음 편에서는 성북구 성북동의 음악가 윤이상, 미술사학자 최순우, 동선동의 시인 신동엽을 찾아간다,

*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구 서울시장 공관) : 종로구 혜화동 27-1. 
* 혜화문 : 종로구 혜화동 28-5
* 시인 김광석 옛집 표석 : 성북구 성북동 167-12. 세븐일레븐 옆 고깃집 앞 보도
* 김광석 옛집 터 : 성북구 성북동 168-34 원익스카이빌
* 성북동 조지훈기념 건축조형물(방우산장) : 성북구 성북동 142-1
* 네이버지 지도 ‘방우산장’ : 성북구 성북동 155-14
* 조지훈 옛집터 : 성북구 성북동 60-44
* 채동선 옛집터 : 성북구 성북동 18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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