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 경감은 문득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처음에는 남편의 부정을 조사해 달라던 투의 부탁이 어느덧 범죄의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남편 되시는 분이 범죄 단체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인가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단수가 높은 여자로군.’

추 경감은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자신이 송희가 쳐놓은 덫에 걸려드는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부군이 범죄와 관련되어 있는 듯한데 경찰에 신고하자니 혹시 잘못 생각한 것이면 가정불화가 생길 것 같고 그냥 두자니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여자와 놀아나는 것 같은……”

“둘 다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송희는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자주 머리를 쓰다듬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완전히 덫에 걸렸군.’
그 모습을 바라보며 추 경감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3. 자하문의 총성

‘정치가에게 한두 번 당해 보았나?’
강 형사는 볼이 탱탱 부어 중년 남성의 뒤를 쫓고 있었다. 들킬 테면 들키라지 하는 식으로 별로 주의도 하지 않은 채 되는대로 뒤를 밟고 있었다.
“정필대라는 사내가 누군데요?”

갑작스레 정필대를 미행하라는 추 경감의 지시에 강 형사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지금 추 경감과 강 형사 팀은 거물급 청부살인으로 보이는 사건을 맡아 증거 수집에 정신이 없는 참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 나오려는 인물이야.”

“그럼, 정치인이란 말입니까?”
강 형사가 눈이 둥그레져서 물었다.
“맞았어. 서울 제 13 선거구에 나올 것이란 인물일세.”

“저, 그거 안 할랍니다. 정치인 조사해 봐야 본전 찾기 어려워요. 틀림없는 것을 밝혀내도 정치 모략이다 뭐다 하면서 거꾸로 경찰만 죽는 꼴 되는 것 한두 번 보았습니까?”

“누가 그거 모른대. 하라면 하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아무튼 전 못합니다. 다른 사람 시키십시오. 게다가 지금 우리가 좀 중요한 시기입니까? 미제 사건 다섯 개가 한꺼번에 풀릴지도 모르는 때입니다.”
“그건 내가 더 잘 알아. 자네밖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자네를 붙이는 거야.”

“그럼 그 자가 청부살인 조직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추 경감은 어색함을 덜려는 듯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싹싹하던 강 형사도 담뱃불을 붙여 주지 않았다. 그 덕분에 추 경감은 라이터를 철컥대며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것 봐, 강 형사, 이게 사적인 일이라는 것은 나도 알아. 그래서 자네를 시키는 거라니까. 자네가 이 일을 맡아야 누구보다도 빠르게 종결짓고 우리 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믿어서 시키는 것이라고.”
이 말에 우쭐해서 미행을 떠맡았던 것이 실수였다고 강 형사는 생각했다. 정필대 미행사건을 거의 개인적인 일처럼 여기며 맡은 강 형사는 우선 그들의 주변을 살펴보았다.

정필대. 나이는 36세. 직업은 하도 많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방배복지회장, 삼한물산 고문, 청소년선도연맹 부이사장… 아내의 이름은 송희. 나이는 30세. 아들 하나, 딸 하나. 이번 총선거에서는 민족당 후보로 서울 제13선거구에서 출마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십여 년 전부터 민족당 총재의 비서로 일해 오며 13선거구에서 기반을 닦았다고 한다.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하며 얼굴이 사나이답게 생겼다. 지방대학 정치학과를 나온 뒤 잠시 미국에 유학 갔다가 1년도 안 돼 돌아왔다고 했다.
아내와는 금슬이 좋은 편으로 특별히 바람을 피울 이유는 없었다.

강 형사는 3일째 정필대를 미행했으나 별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4일째 되던 날 점심 무렵 강 형사는 여전히 소득 없는 미행을 하고 있었다.
‘추 경감님도 그 나이에 여자한테 약해 가지고.’
강 형사가 이 사건을 맡게 된 까닭을 생각하며 피식 웃는 동안 정필대가 웬 여자와 만나는 것처럼 보였다.

강 형사가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필대의 집에서 나온 이후 그가 한 일이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묘령의 여자가 접근한 것이다. 멀리서 보아도 상당히 미인 축에 드는 여자였다.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긴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그런데다가 정필대가 앞장서자 여자는 다소곳이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둘은 스스럼없이 근처의 여관으로 쑥 들어갔다. 안에서 바야흐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야 익히 짐작이 되었지만 강 형사가 그런 현장을 덮칠 필요는 없었다. 간통이란 친고죄이기 때문에 강 형사는 그저 그 여자의 신원과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가 추 경감에게 충실히 보고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강 형사는 일단 빠져나갈 수 있는 뒷문이 있는가를 조사해 보았다. 자그마한 여관이라 정문 이외의 출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강 형사는 느긋한 마음으로 여관 현관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들고 천천히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종업원 총각이 별 싱거운 사람도 다 보았다는 듯이 강 형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객실에서 나올 손님을 기다리는 친구쯤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지금 전문적인 범죄자들의 뒤를 쫓느라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있을 것인데 그에 비하면 풋내기를 쫓고 있는 자신은 행운아라는 생각을 하며 강 형사는 다시 한 번 정필대의 행동일지를 살펴보았다.

오전 7시 00분 조깅을 나오다. 지나는 모든 이에게 인사.
오전 8시 43분 외출. 자가운전.
오전 9시 15분 민족당사 도착.
오후 1시 32분 민족 당 사무총장 한장식과 나타남.
오후 2시 40분 일식집 ‘미선’에서 점심 후 혼자 걸음.

강 형사는 그 밑에 2시 56분 '자하문장' 투숙, 20대 후반 여성과 동행이라고 적어 넣었다.
‘자판기 커피는 너무 달단 말야. 차라리 블랙을 뽑을 것을 그랬나?’
강 형사가 느긋한 마음으로 엉뚱한 후회를 하던 순간이었다.
“탕!”

분명히 총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3시 15분이었다.
강 형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틀림없이 여관 내부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여관 종업원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달려왔다.
총소리는 여관 2층이나 3층에서 난 것 같았다. 강 형사는 그것이 권총 소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다른 사람은 무슨 굉음인지 잘 분간하지 못할 그런 불명확한 소리였다.

“나는 경찰이다.”
강 형사가 어리둥절해진 총각 종업원을 보고 말했다. 종업원은 더욱 질린 표정이 되었다.
“지금 그 소리 어디서 났지?”

강 형사가 손가락으로 계단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2층인 것 같습니다.”
여관은 모두 3층뿐이었다. 강형사는 급히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자네는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어.”

강 형사는 따라 올라오려는 종업원을 제지했다.
2층에서는 두 사람이 문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였다.
“어디서 소리가 났습니까?”
강 형사가 누구라 할 것 없이 외치듯이 물었다. 목만 밀고 내다보던 젊은 여자가 자기 앞방을 가리켰다.

“203…”
강 형사는 중얼거리며 그리로 뛰어갔다.
그러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열쇠!”

그렇지 않아도 여관 여주인이 마스터키를 가지고 달려오고 있었다.
“당신이 이 여관 주인이오?”
“예, 당신은 누구요?”

늙수그레한 여주인이 엄청나게 부른 비곗덩이 배를 내밀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경찰관이요. 빨리 현관에 내려가 투숙객들이 나가지 못하게 하시오.”
강 형사의 지시에도 여주인은 멀뚱하게 섰을 뿐 현관을 지키러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 해요! 신나는 구경거리라도 있는 줄 알아요?”
강 형사가 호통 치자 그제서야 그녀는 프런트로 내려갔다.
강 형사가 문을 따고 활짝 열었다. 거기엔 비참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자 벌써 피비린내가 확 풍겨옴으로써 비극적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방 안에는 벌거벗은 한 사나이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주위로 피가 아직도 번져 나가고 있었다.

강 형사가 다가가 얼굴을 살폈다. 강 형사는 기겁을 하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아니, 이럴 수가! 이건 정필대…”
강 형사는 마지막 말을 신음처럼 삼켰다. 정필대가 왼손에 권총을 쥔 채 쓰러져 있었다. 왼쪽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이미 절명한 후였다. 방 안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으나 같이 온 여성은 보이지 않았다.

“이것 봐! 미스터…”
강 형사는 현장을 보존하기 위하여 다시 문을 잠그고 종업원을 불렀다.
“박입니다. 박철호.”

“미스터 박, 203호에 같이 투숙했던 아가씨는 어떻게 됐어?”
“아가씨라뇨?”
이놈이 얼이 빠지더니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나? 강형사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함께 들어오지 않았어?”
“아니요.” 박철호는 파랗게 질려 있기는 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자네 혹시 그 여자가 들어오는 것을 놓친 건 아냐?”
“목 떨어질 일이 있나요? 손님 들어오는 것을 놓치게요?”
“이것들 봐. 좀 비켜 주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투숙했던 손님들이 더러는 현관으로 내려왔다.
“지금 나가실 수가 없습니다.”

강 형사는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 뒤에 들어온 딴 여자 손님은 없나?”
강 형사가 다시 다급하게 물었다.
“없습니다…. 그 손님은 혼자 들어왔어요.”

“시치미떼지 마! 밖에서 내가 다 보고 있었단 말야.”
“정말입니다. 그 손님은 혼자 들어왔어요. 계단 옆방을 달라고 했습니다.”
“계단 옆방?”
강 형사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그 말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 뒤에 들어온 여자는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은 없다고 하고서?”

“203호실 손님과는 관계가 없다는 거지요. 그 여자는 303호에 들었어요.”
“진작 말했어야지. 쑥색 바바리를 입었지.”

“예, 맞습니다.”
강 형사는 로비를 둘러보았다.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강 형사는 다시 한번 여주인과 종업원에게 손님 중 아무도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시키고 3층으로 올라갔다.

303호의 문을 한 번 노크했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강 형사는 불길한 생각에 문을 왈칵 잡아당겨 보았다.
뜻밖에 잠기지 않은 문이 활짝 열렸다.

“어마?”
여자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그제야 강 형사는 큰 실수를 한 것을 알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가 사랑의 행위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가 강 형사의 침입에 깜짝 놀랐던 것이다. 사실 그에 못지않게 강 형사도 놀랐다. 얼른 문을 닫았다. 얼핏 본 바로는 정필대와 동행했던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곧 문이 벌컥 열렸다.

“너 뭐 하는 새낀데 함부로 문을 열고 지랄이야!”
사내는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바지만 일단 입고 나왔는데 상당히 좋은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이 잡놈의 자식을 그냥!”
사내는 강 형사의 말을 채 다 듣지도 않고 멱살을 휘어잡고 흔들었다.
“나는 경찰관이오. 이 안에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볼일 다 보셨으면 아래층으로 좀 내려오실까요?"
“볼일?”

사내는 혼자 킥 웃더니 강 형사를 보고 다시 신경질을 냈다.
“남이야 무슨 볼일을 보든 왜 참견이오? 경찰이면 경찰이지 남의 사생활은 왜 참견하느냔 말이오.”라고 화를 내며 잡은 멱살에 더욱 힘을 주었다.
생각대로라면 바닥에 메어꽂아도 시원찮겠지만 강 형사는 꾹 참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무튼 빨리 옷을 입으시고 내려오십시오.”
그제야 사내도 멱살을 풀었다. 그는 투덜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슬쩍 들여다보니 여자는 벌써 옷을 다 걸치고 있었다.
단발에 풀어진 펌 머리를 하고 있었다. 얼굴에 주근깨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뚱뚱보 여주인이 신고를 했다고 했지만 경찰의 출동은 늦었다.

강형사는 우선 여관에 들어 있는 사람들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현관 로비는 사람들로 복작대고 있었다.
“이 여관 종업원은 모두 몇 명입니까?”
강형사가 뚱보 여주인에게 물었다.

“저하고 저 박군하고 교환 겸 경리 보는 미스 조, 이렇게 셋입니다.”
“숙박부 좀 볼까요? 오늘 것 말입니다.”
“예? 오늘 거요?”
“예.”

“저어, 보아도 소용이 안 되실 텐데요. 아무것도 적지를 않았거든요.”
“뭐요? 숙박부를 적지 않아요?”
“원래 낮 손님은 묵어가지 않는 법이라서요.”
그러면서 여주인은 슬그머니 봉투 하나를 강형사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요?”

“약소합니다만 점심 값이라도 하시라고…”
여주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거 정말 안 되겠구만.”

강 형사가 눈을 부라리자 여주인은 찔끔하여 봉투를 다시 집어넣었다.
“왜 이렇게 하는 겁니까?”
“이유가 뭡니까?”
사람들이 물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4. 사라진 여인

“언제 풀어줄 거요?”
처음부터 빠져나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중년 사내가 다시 강 형사에게 재촉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강 형사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이것 봐, 자네 그렇게 함부로 날뛰어도 무사할 줄 알면 큰 오산이야. 내가 시경에 한 마디만 하면 자네는 모가지가 날아간다고.”

“제발 덕분에 그런 일이나 있었으면 좋겠소.”
짜증이 날 대로 나 고함을 빽 지르는데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수고하십니다.”

강 형사는 들어오는 경찰관에게 신분을 밝히며 인사를 했다.
“천만에요. 그런데 누구를 수사 중이셨습니까?”
인사를 받은 사람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인사를 했다. 종로서의 최 경감이었다.

“특수한 임무를 띠고 용의자를 미행 중이었는데 이곳에서 죽었습니다.”
“타살입니까?”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지요.”

최 경감은 선선히 허락을 했다. 나이는 추 경감과 비슷하게 보였다. 그러나 비쩍 마르고 키가 큰 데다 두터운 안경까지 쓰고 있어서 인상은 정반대였다.
“일단 여관 내의 사람들을 조사해 보지요.” <다음호에 계속>

 

이상우;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학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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