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기 [뉴시스]
만국기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제50차 UN 총회

ASEM회의 유치 

- 1995년 9월에 제50차 UN 총회에서 장관님께서 기조연설을 했다. 북한 인권 관련 언급을 하셔서 북한 측이 아주 세게 반발을 했었다. 
▲ 이규형 참사관이 점잖게 국제사면위원회, 엠네스티인터네셔널 보고서를 인용해서 북한에는 정치점 수용소가 있고, 세계적으로 수용된 인사들의 이름까지도 나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사실 기조연설에서 북한의 정치수용소 문제를 거론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때 UN대표부에서는 북한이 답변권을 행사하면서 그 논쟁 가운데 나오게 되지 않겠느냐는 판단에 일부러 이 이야기는 기조연설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상대로 정치수용소 문제를 이야기 하면서 반론을 했다. 그랬더니 다시 북한 대표가 나서서 “남쪽에는 국가보안법이 존재한다. 왜 남한 대표는 그것을 언급하지 않느냐”고 나무라면서 그 사실을 유념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규형 참사관이 나와서 “남쪽이 국가보안법이 있는 것은 냉전의 잔재로서 국가의 자유와 평화 민주를 유지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것이다. 하루 속히 이러한 필요가 없을 만큼 평화가 한반도에 자리를 잡기를 바란다”는 식으로 응답하고 거기서 우리는 그쳤다. 그런데 무려 장장 두 시간 반이나 응수가 오고 갔다. 그때 UN 사무국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UN 총회에서 남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한 설전이 있었던 것은 참 오랜간만의 일이라는 이야기를 하더라는 후일담을 들었다. 

- 그리고 얼마 후 1995년 10월4일 북한의 『노동신문』에 “개가 짖어도 달은 여전히 밝다”라며 비판한 것으로 알려저 있다. 또 북한의 최수헌 외교부부장이 기조연설에서 남한의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 우리가 북한의 인권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실익이 있느냐. 괜히 남북관계만 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물론 처음부터 있는데, 우리가 이 문제에 눈을 감고 가면 누가 북한에 있는 무고한 인민들의 인권을 이야기하겠느냐는 것이다. 북한 사람들의 계산 방법이 있지 않나. 냉엄한 수지타산에 맞춰 한다. 그러니 감성적인 접근은 결코 건전한 남북관계에 도움이 되징 않는다는 생각을 지금도 변함이 없다. 

-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고 인권 문제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어려운 일을 겪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동일한 잣대를 가지고 북한의 인권 문제를 바라봐야 되는데 저희의 시선은 좀 다른 것 같다. 장관님 말씀처럼 그것은 좀 문제가 아닌가 한다. 
▲ 그렇다. 

- 1998년 ASEM회의 개최는 아마 단군 이래 우리가 유치한 가장 큰 국제회의인 것 같다. ASEM회의를 유치하는 과정이 우리나라 외교의 큰 성과였다고 생각을 한다. 장관님께서 그 주역이셨다고 보는데, 그 당시의 상황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 우리나라로서는 초유의 많은 국가 정상들이 모이는 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사실 당시 우리 상황으로 이런 규모의 국제회의를 가질 만한 국제회의장도 없었다. 아시다시피 세계는 WTO라고 하는 무역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한편으로 보면 지역이 블록화되어가는 현상이 있었다. NAFTA·EU·ASEAN·남미공동시장 등이 있다. 이렇게 자꾸 블록화되어가는데, 이런 상황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무역질서에 대해서 우리가 대응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런 가운데 고촉통 싱가포르 수상이 아세안 국가를 대표해서 프랑스에 방문해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아시아와 EU의 접점을 갖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했다. 고총톡 수상이 아시아에 들어와서 이 이야기를 한 결과 양 유럽과 아세안+3 간의 지역적인 유대를 갖는 게 좋겠다고 하며, 태국에서 제1차 회의를 갖는 것으로 유럽·EU 쪽과 합의됐다. 그래서 1991년 11월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고위관리회의에서 당시 정책 실장으로 가 있던 반기문 시장이 제3차 ASEM을 한국에서 개최하도록 하자고 제의를 했다. 

막후에서도 일본·유럽 쪽과 이야기를 했는데 대충 호의적인 반응이었기 때문에 저희가 운을 떼었다. 그런데 그때 상황이 사전에 우리가 이러한 EU와 아세안의 움직임을 보고 대충 제1차는 1996년 방콕에서 하는 것으로 하고 2년 후에 1998녀 런던에서 한다. 그다음에 2000년에는 이것을 정규화하느냐 아니면 수시개최 하느냐를 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런데 런던이 결정되고 나니까 2년마다 정규화하자는 분위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때 아세안은 방콕이 1차였고, 다음에 런던, EU로 갔으니까 그다음에는 아시아 차례였다. 그러니까 한·중·일 세 나라 가운데 하나인 거다. 그래서 일본과 이야기를 했더니 야나이 순지 외무심의관은 “한국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하고, 중국에 타진했더니 “검토해보겠다”고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2000년 회의를 한국에서 유치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할 수 있도록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았다. 

25개 이상의 국가 정상급들이 모이는 회의를 2000년에 개최한다는 것은 동북아시아에서 우리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생각과 부합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더군다나 안보적인 측면에서 한반도에서 세계 25개국 이상의 정상들이 모인다면 그 나름대로 한반도의 특수한 사정,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이 얼마나 아시아에 있어서 긴요한가를 각인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나. 그때 “다소 경제적인 부담이 있더라도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 하는 정부 내 컨센서스가 이루어져서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현지에 훈령을 했다. 88서울올림픽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내걸고 있던 것이 세계화다. 그 세계화정책과도 부합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1996년에 2002월드컵 유치를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2000년 ASEM, 2002월드컵 두 행사를 병행하자고 외무부에서 결정하고 청와대의 허가를 맡으려 했다. 그런데 문제점이 있었다. 회의장이 없었던 거다. 각국 정상들과 장관급 수행원, 그리고 많은 숫자의 기자단들이 오는 행사로, 실제로 수천 명이 오는 것이었다. 

- 시설들이 만만치 않겠다.
▲ 회의장·숙박시설·경호·교통 등에 대한 실행계획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범정부적으로 총리실에서 이 문제를 계획했다. 방콕에서는 1996년 ASEM을 개최할 때 방콕은 3일간 공휴일을 선언했다. 방콕은 아주 교통상황이 나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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