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이에 죽을 고비 넘겼는데”…‘군번 없는 유격대’ 공로 인정 왜 어렵나

사진=김혜진 기자
사진=김혜진 기자

[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매일 오전 7시. 김지묵(83)씨는 비가 오나 눈이오나 국방부를 찾는다. 벌써 5년째 ‘국방부 장관은 6·25 참전 사실을 인정하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10대 소년이던 그는 전투에 참여했지만 현재 보훈 대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1인 시위를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일요서울 취재 결과, 김 씨는 ‘비정규 첩보부대’에서 활동했던 ‘비정규군’이었다. 비밀 작전 특성상 군번이나 계급이 없던 그가 국방부에 제출한 자료를 인정받기까지는 한계가 있었다. 김 씨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비정규군 참전 용사들의 공로 인정 및 보상 문제는 19대 국회 때부터 문제로 지적돼왔지만 여전히 답보상태에 머물러있다. 보훈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 전쟁 후 신병 재(再)징집… 기록 없어 서훈 불가
- “KLO부대 등 비정규군 ‘보훈 사각지대’ 놓여”

김지묵 씨는 1950년 6·25 전쟁 당시 13살이었다. 황해도 개풍군에 살던 그는 전쟁이 발발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인천 강화도로 피난을 왔다.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1년 말, 김 씨는 북한 지리를 잘 아는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어린 나이지만 전쟁터로 차출된다.

김 씨는 비정규 첩보부대였던 ‘8240부대’에서 북한 첩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평소에는 연락병으로 근무하다가 북한 정보를 수집해야 할 때 인민군 부대 쪽으로 보내졌다”며 “북한 지리를 잘 아는 북한 출신 청년들을 데려다 학생복이나 일반 복장을 입히고 지시를 내려 적지로 보내면 (우리가) 정보를 수집해 다시 넘어오는 역할이었다. 인민군에게 잡히더라도 어리니까 스파이로 안 보고 다시 보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6·25참전 KLO한국유격군 보상법안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그가 속했던 8240부대는 현재 ‘KLO(주한첩보연락처·Korea Liaison Office)부대’로 명칭이 변경됐다. 1950년 11월 중공군 개입 이후 미국 극동군 사령부가 운용한 한국인 특수부대다. 전쟁 당시 ‘팔미도 등대 점등 작전’ ‘강원 화천발전소 탈환 작전’ 등 북한군 점령지역 항만을 봉쇄해 북한군과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특수 임무를 맡아 큰 공을 세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랫동안 KLO부대 규명을 주도해 온 남광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는 일요서울과의 통화에서 “부대원들을 북한군으로 위장해 적지로 침투시키는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 북한 출신으로 구성됐고 군번도 받지 못했다”며 “전후 대원 상당수가 정규군이 됐지만 6·25 전쟁 당시의 활약상은 대부분 미군의 기밀로 취급돼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군번 없는 부대원…‘이중 복무’까지

1953년 7월27일 휴전 후, 1954년 2월 부대가 해체되면서 김 씨는 보상으로 준 안남미 쌀 두 가마니를 받고 강화도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4년이 흐른 후 다시 입대 영장을 받게 된다. 비정규군으로 활동했던 당시 기록이 없다 보니 병역법에 따라 신병으로 또 징집된 것이다. 김 씨와 같은 일반 병사 1만2000명은 한국군에 재입대해 ‘이중 복무’를 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남 교수는 “미 8군이 뒤늦게 유격대원들이 한국군에 다시 배속된 사실을 알고 국방부에 항의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며 “그들이 미군에 배속돼 수행한 활동에 대한 보상 문제 등은 일절 논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 전역한 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6·25 참전군인 보상 문제를 듣고 2012년 8월 보훈처를 찾았다. 김 씨는 “어린 나이에 좁은 공간에서 사격을 해서 그랬는지 난청으로 고생을 해 왔다”며 “전쟁터에 병원도 없고 당장 총 맞아서 몸을 못 쓰는 게 아니면 약을 먹을 여력조차 없던 사정을 이야기하니 보훈처는 국방부에서 참전 확인증을 받아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순탄하게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김 씨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당시 함께 참전했던 동료들의 ‘인우 보증’을 포함해 두 차례 참전 확인 절차를 거친 국방부는 “대상자의 참전 당시 경험 청문 후 내용 확인 결과, 진술이 당시 부대 관련 기록 및 전쟁사, 참전용사 증언 등과 상이해 사실로 볼 수 없다”며 “참전사실 확인 절차를 추가적으로 진행할 수 없으나 행정소송 등 법령에 의해 보장된 구제방법을 강구할 수 있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국방부 “심의 최대 두 번까지”
19·20·21대 국회서 논의…통과는 ‘아직’

김 씨를 돕고 있는 박주만 강화 국가유공자회 사무국장은 “현재 월 25만 원 가량의 노인 연금만 수령하며 사는 어르신이 비용을 내며 기본 6~7년이 걸리는 행정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라며 “비정규군이어서 동료들이 ‘인우 보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령 심사 항목 10개 가운데 2개가 일치하지 않아 인정이 어렵다는 국방부 측 답변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지적했다. 박 사무국장은 “유공자회 임원들이 모여 자료 심사 및 전적지 방문 확인까지 했으나 국방부는 재심의 요청을 더 이상 받고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국방부 관계자는 일요서울과의 통화에서 “충분히 조사했지만 김지묵 씨의 주장을 인정할만한 증거가 불충분해 기각한 것”이라며 “심의는 최대 2회까지만 가능해 재심의를 할 수 없고 앞으로도 가능성은 없다”고 못 박았다. 이어 “국방부의 기본 입장은 국가가 위태로울 때 고생한 분들의 업적을 인정하고 보상하는 것”이라며 “국회에서 논의돼 온 ‘6·25 전쟁 참전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에 관한 법률안’이 국방위원회에서 통과된 만큼 국방부는 관련 내용에 충분히 동의하고 있다. 예산 관련 부처인 기획재정부와 협력을 통해 이번 국회에서 법안 통과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19대, 20대 국회에 이어 21대 국회에서도 ‘6·25 전쟁 참전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 법안이 국회 국방위원회 상임위를 통과했지만, 여전히 법제사법위원회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남 교수는 “6·25 전쟁 직후 시대적 환경과 제도적 여건의 어려움으로 참전 용사들의 희생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해 매우 안타깝다”며 “현재 생존자 대부분이 80세 이상 고령자임을 감안할 때 더 늦기 전에 보상이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비정규 부대인 KLO부대가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못했는데 1990~2000년대 초에 공개된 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보상을 해줘야한다는 공고가 나오면서 일반인들도 인식하게 된 것”이라며 “법안이 국방위를 두 번이나 통과한 상태고, 21대 국회에서는 여야 둘 다 비슷한 입법을 발의한 상태라 기대감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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