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지난 「혜화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1편」에서는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에서 혜화문, 시인 김광섭, 시인 겸 사상가 조지훈의 옛집터, 음악가 채동선 옛집터를 돌아봤다. 이번 2편에서는 조지훈 옛집터 위의 선잠단, 그 건너편에 있는 음악가 윤이상, 미술사학자 최순우,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렀던 돈암장, 시인 신동엽 옛집터, 조각가 권진규 아틀리에, 미아리고개까지이다. 이 구간은 모두 성북구에 속해 있다.

음악가 윤이상 옛집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음악가 윤이상 옛집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세계 최고의 작곡가 윤이상과 조지훈, 선잠단

 윤이상(尹伊桑, 1917~1995)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이다. 『윤이상 연구』(김용환 편저, 시공사, 2001년)에 따르면, 유럽 악단에서 윤이상은 “동양의 사상과 음악기법을 서양음악어법과 결합시켜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이며, 그의 음악은 “동아시아적인 것을 서구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을 자국적 전통과 융합시키면서 그 본질에 있어서 한국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또 “독일에서 출간된 ‘20세기의 중요한 작곡가 56인’, ‘유럽의 현존하는 5대 작곡가’, 1995년 5월 독일의 자아르브뤼켄 방송에 의해 20세기 1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된 인물이라고 한다.

 김용환이 유럽의 음악계에서 본 윤이상의 평가처럼 윤이상은 20세기 세계 최고의 음악가이다. 가장 한국적인 주제로 가장 세계적인 음악을 만들어 냈다.

 위대한 세계적 음악가가 되기 전, 소양을 쌓았던 곳이 잠시였지만 성북동이다. 조지훈의 옛집 건너편, 직선거리 60미터 정도에 작곡가 윤이상이 한 때 살았던 집터가 있다. 성북동 128-13번지이다(장태동, 『서울문학기행』, 미래M&B, 2001년. 성북문화원,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2015년), 조지훈 옛집에서는 위쪽으로 선잠단(先蠶壇) 앞 횡단보도를 건너 큰길로 조금 내려가거나, 아래쪽 횡단보도를 건너 조금 올라가면 된다. 현재는 큰길가 ‘손가네 곰국수’와 ‘덴뿌라’라는 식당이 각각 있는 두 개 건물에 걸쳐 있는 공간이 옛집터이다. 바로 뒷집은 1976년에 이사 온 미술사학자 최순우의 옛집이다.

 윤이상이 살았던 기간은 1953년 휴전협정 이후 서울로 이주해 1956년 6월 프랑스 파리로 유학 가기 전 3년 동안이다. 그사이 윤이상은 필연처럼 『청록집』의 시인 조지훈(趙芝薰, 본명 조동탁, 1920~1968)을 이웃으로 만났다. 때론 격의 없는 이웃집 친구로, 문학과 음악을 하는 예술가 동료로 만났다. 술을 마시며 삶과 예술을 논했다. 최순우는 1916년생, 윤이상은 1917년생, 조지훈은 1920년생으로 비슷한 연배이다. 윤이상‧조지훈과 달리 최순우는 성북동에서 교류가 없었다. 최순우가 이사 왔을 때 조지훈은 사망했고, 윤이상은 독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윤이상에게 성북동은 필연으로 보인다. 윤이상의 대담집인 『윤이상, 상처입은 용』(윤이상‧루이제 린저, 윤이상평화재단 옮김, 랜덤하우스중앙, 2005년)에 따르면, 중국사와 문학에 해박했던 그의 아버지는 고대 중국의 정치가 이윤(伊尹)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윤은 정치에 관심을 갖은 철학자였으나 은둔해 소박하게 지내며 뽕나무 위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재상이 이윤을 설득해 정치를 하게 했고, 뒤에 전국에 뽕나무를 심게 해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었다고 한다. 그 이유로 아버지는 이윤의 ‘이(伊)’와 ‘뽕나무 상(桑)’을 이용해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윤이상의 아버지가 했다는 이야기는 윤이상이 잘못 전해 들은 이야기로 보인다. 문헌 기록으로 보면 이윤은 뽕나무 줄기에서 태어난 인물이라는 전설이 있다. 윤이상이 잘못 들었던 어떻든 확실한 것은 이윤은 뽕나무에서 태어났고, 윤이상은 뽕나무와 관련된 인물인 이윤으로 인해 이름이 지어졌다. 이름 안에도 ‘뽕나무 상’이 들어있는 만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윤이상이 부산에서 이사와 정착한 성북동 집의 위치이다. 조지훈의 이웃집이라고 할 만큼 가깝기도 했지만, 그의 집 근처에 선잠단이 있었다. 윤이상, 조지훈과 삼각형을 이루며 각각 60여 미터 거리에 있다. 선잠단은 윤이상이 이사 왔을 때 ‘터’조차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1908년에 성북동 선잠단에 있던 신위를 사직단으로 옮기고 학교를 짓고 일반에 분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과 관련된 선잠단이 수백 년 동안 있었던 곳 바로 옆에 윤이상이 살림터를 잡았다.

선잠단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선잠단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선잠단터’는 선잠단지(先蠶壇址)라고 한다. 누에치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고대 중국 ‘황제(黃帝)의 황후 서릉씨(西陵氏)’를 누에치기의 신(神)으로 모시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단이다. 왕비가 직접 주관했다. 명주실을 얻기 위해 뽕잎을 먹는 누에를 키우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선잠단에서 매년 제사를 지냈다. 누에는 뽕나무잎을 먹고 크기에 국가에서 곳곳에 뽕나무밭을 조성했다. ‘잠실(蠶室)’의 명칭도 뽕나무밭에서 유래했다. 세종은 특히 8도와 서울에 잠실을 만들게 하고 양잠에 모범을 보이며 장려했다. 동소문 밖 이곳의 선잠단은 1471년(성종 2년)에 설치된 것이다.

 뽕나무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이윤의 ‘이’와 뽕나무 ‘상’을 이름에 넣은 윤이상이 선잠단 옆으로 이사를 온 것은 기이한 인연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윤이상의 이름 그리고 이름과 관련된 지기(地氣)가 더해진 까닭인지 훗날 그는 이윤처럼 정치가는 아니나, 음악으로 세계를 다스린 큰 인물이 된 듯하다. 윤이상은 성북동으로 이사와 2년 만인 1955년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윤이상에게 성북동은 새로운 기회와 기운을 준 곳이다.

 『여보, 나의 마누라, 나의 애인 1956~1961 윤이상이 아내에게 쓴 편지(윤이상, 남해의봄날, 2019년)』에서는 유럽에 간 지 3년 만인 1959년에 쓴 편지가 있다. 그는 “나는 언제나 성북동 골짜기 송림 사이에다 조그만 초옥을 짓고 화원에 쌓여서 창작을 하리라는 꿈을 잊지 않고 있소.”라고 할만큼 성복동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그의 조국은 그를 제대로 돌아오게 하지 못했고, 성북동은 평생의 꿈으로만 남았다.

 시인들(정지용과 조지훈)과 음악가들(채동선, 윤이상)

 삶은 아이러니다. 성북동에 살았던 음악가 채동선(蔡東鮮, 1901~1953)은 6‧25 전란 중에 부산에 피난 갔다가 윤이상이 서울로 올라오기 직전인 2월에 지병으로 별세했다. 민족음악가 채동선이 별이 되어 부산을 떴을 때, 윤이상은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상경했다.

 채동선이 조지훈을 문단으로 이끈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의 시(詩) 「고향」에 곡을 붙였다면, 윤이상은 조지훈의 시 「고풍의상」에 곡을 붙였다.

 좋은 인연은 새로운 좋은 인연을 맺어준다는 것을 「고풍의상」이 보여준다. 「고풍의상」은 정지용과 인연이 깊다. 정지용이 『문장』에 첫 번째로 추천한 조지훈의 시가 「고풍의상」이다. 또 청록파 시인인 박목월도 정지용이 『문장』에 추천해 등단했다.

 윤이상의 여러 기록이나 조지훈의 기록으로 보면, 윤이상과 정지용, 윤이상과 조지훈, 윤이상과 박목월은 최소한 1948년 이전에는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도 신기하게도 정지용이 추천해 등단했던 인물들의 시집인 『청록집』(조지훈‧박목월‧박두진 3인 시집, 1946년)에 실린 조지훈의 「고풍의상」, 박목월의 「달무리」와 「나그네」가 1950년 부산에서 윤이상이 간행한 가곡집 『달무리』(박목월의 시와 같은 제목)에 실려있다.

 윤이상이 『청록집』을 읽고 감동해 그들의 시 중에서 자신의 삶과 꿈이 담긴 시들을 찾아 곡을 붙인 듯하다. 그 가곡집에는 시조 시인이며 윤이상과 같은 고향의 벗 초정 김상옥(金相沃, 1920~2004)의 시 두 편, 「추천(鞦韆, 그네)」‧「편지」도 포함되어 있다. 총 5곡이다. 작곡한 순서로 보면, 「편지」(1941년), 「추천」(1947년), 「고풍의상」(1948년)‧「달무리」(1948년)‧「나그네」(1948년)이다. 가곡집 5편 중 3편이 『청록파』 시이고, 그중 「고풍의상」은 조지훈의 시이며, 박목월의 「나그네」는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에 대한 답시이다.

 이 가곡집으로 보면, 윤이상은 조지훈을 만나기도 전에 그의 시를 통해 자신의 음악 세계를 꿈꿨던 듯하다. 특히 「고풍의상」은 아주 특별한 시이다.

 박선욱(『윤이상 평전』, 삼인, 2017년)에 따르면, 윤이상은 1950년 1월 부산철도호텔에서 한 자신의 결혼식에서 강수범의 피아노 반주와 테너 김호민의 축가로 「고풍의상」을 불리게 했다. 10년 뒤에도 「고풍의상」은 여전히 윤이상에게 깊이, 또 평상시에도 살아있었다.

 『여보, 나의 마누라, 나의 애인 1956~1961 윤이상이 아내에게 쓴 편지』에는 「고풍의상」이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1959년 3월 30일. …… 여기 가톨릭 회합에서 한국 민요를 불러 달라고 청하는 데가 너무 많아서 딱 질색이오. 이번에는 약 1200명의 전 독일 시부(市部) 대표자들이 모여 큰 기념회를 하는데 거기에 아프리카, 일본, 한국, 인도, 인도네시아의 민요와 춤을 소개하게 되어 있소. 한국 민요는 나의 「고풍의상」 그리고 「처용가」, 「농부가」 중에서 골라서 부를 것이오.”

 독일인 지도자들에게 들려줄 여러 노래 중 첫 번째 노래로 「고풍의상」을 언급하고 있다.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덧붙인 서까래) 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와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바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나린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랑나비)
 호접인 양 사풋이 춤을 추라 아미(蛾眉, 미인의 눈썹)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지이다. (조지훈, 「고풍의상」)

 1967년, 윤이상은 이른바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베를린에서 납치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독일에서 「고풍의상」 속 나비를 노래하려 했던 10년 뒤인 1968년 감옥 안 한겨울 추위 속에서 그는 오페라 『나비의 꿈』(* 뒤에 ‘나미의 미망인’으로 제목을 바꿈)을 완성했다.

 무자비한 국가폭력의 공간, 질식시킬 듯한 이념의 공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과도 같은 현실, 사방이 꽉 막힌 감옥에서 「고풍의상」의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랑나비)”를 그가 붙인 곡에 따라 노래를 부르며 자유로운 나비의 꿈을 꾸며 『나비의 꿈』으로 만들었다.

 본래 조지훈이 말한 어느 나라 고전은 『장자(莊子)』이고 나비는 ‘장자의 나비’였다. 조지훈과 윤이상은 모두 장자였고, 장자가 나비였듯 조지훈과 윤이상도 나비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인물이고, 나비였다. 『나비의 꿈』은 「고풍의상」이고, 『장자』였다. 조지훈이 해방된 조국을 꿈꾸며 장자의 나비를 노래했듯, 윤이상은 이념의 질곡에서 벗어난 통일된 나라의 나비를 꿈꾸었다. 그들에게 나비는 해방과 통일, 자유와 민주주의였다.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윤이상은 조지훈을 통해, 장자를 통해, 나비를 통해 참된 자유를 꿈꾸었고, 감옥에서 죽음 대신 생명을,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다.

 윤이상이 조지훈의 「고풍의상」에 영감을 받아 만든 『나비의 꿈』을 완성한 3달 뒤인 5월 17일 조지훈은 지병으로 별세했다. 『윤이상 연구』에 따르면 『나비의 꿈』은 윤이상이 감옥에 있을 때인 1969년 2월 13일, 뉘른베르크 오페라 극장에서 거행된 초연에서 31번의 커튼콜(curtain call, 공연이 끝난 뒤 관객의 요청으로 퇴장한 출연자를 무대 앞으로 다시 나오게 하는 일)을 받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도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가 자유가 된 얼마 뒤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나비의 시인 조지훈은 나비가 되어 번뇌의 세상을 벗어났다.

 흑장미로 피어난 부부애,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
 
 ‘동백림 간첩단 사건’은 독재정권이 조작한 사건이다. 윤이상이 먼저 납치되었고, 같은 방식으로 부인 이수자 여사 역시 납치되아 감옥에 갇혔다. 어린 딸과 아들은 머나먼 이국땅 베를린에 남겨졌다. 자식을 남겨두고 이유도 모르고 고국에 끌려와 간첩죄를 뒤집어쓰고 각각 감옥에 갇혀 있던 그들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서로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은 감동을 준다.

 『윤이상 평전』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감옥에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우연히 윤이상은 부인 이수자가 비누와 치약이 없어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달리 구할 방법이 없었다. 며칠 후 한 절도범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인 이야기를 했는데, 그 절도범이 다음날 조그만 비누와 반쯤 남은 치약을 건네주어 부인에게 전해 줄 수 있었다고 한다. 면회를 통해 전달한 것이 아니라 검찰청에 같이 불려나갔을 때 몰래 주었다고 한다.

 다시 얼마 뒤 윤이상의 생일이 다가왔으나 감옥에 있던 이수자 역시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생각한 것은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었다. 그녀는 칼도 가위도 없는 감옥에서 손가락으로 한올 한올 머리카락을 뽑았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손톱깎이로 다시 잘라 밥풀을 먹여 한올 한올 엮어서 장미꽃을 만들었다. 흑장미가 되었다. 그리고 종이에 싸고 편지를 썼다.

 “오늘은 1967년 9월 17일. 당신의 50세 생일입니다. 나의 영원한 당신이여. 변치 않는 사랑의 흑장미, 한 송이 받아주세요. 건강하세요. 서러워 마세요. 광명의 그 날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당신의 영원한 자야(*자야는 둘 사이의 애칭).”

 그녀 역시 윤이상처럼 직접 전달할 수 없어 머리카락으로 만든 흑장미와 편지를 변호사를 통해 전달해야만 했다. 진정한 사랑은 늘 감동을 준다. 이수자의 흑장미는 색깔만 검을 뿐 붉디 붉은 사랑의 장미이다.

 윤이상과 통영, 이순신, 그의 음악

 윤이상은 경남 산청군 덕산면 외할아버지 댁에서 태어났으나, 4살 때 통영 본가(경남 통영시 도천동 157번지)로 와서 성장했다. 통영은 조선 시대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곳이다. 윤이상의 삶에 이순신 장군이 늘 살아 있었다. 세병관(洗兵館)은 이순신 장군의 승리를 기념해 세운 통제영 객사 건물이다. 그 건물을 세울 때 윤이상의 선조도 참여했고, 윤이상 집안의 자랑이었다. 그의 증조부는 통영에서 구한말 수군 장교로 복무했다. 

 소년 윤이상은 또래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는 청년들을 도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책 같은 일제의 금서를 비밀리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면서 몰래 읽었다.

 『윤이상, 상처입은 용』에 따르면, 그는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 책이 우리의 민족의식과 독립 의지를 강화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마을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는 이순신 장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 이 민족의 영웅은 우리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우리들은 이순신이 살았던 곳에서 사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 시절에 나는 내 나라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걸 배웠던 겁니다.”

 『윤이상 평전』에 따르면,그런 마음은 행동으로 연결되어 무장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했고, 우리말 노래를 작곡해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두 달 동안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일제 경찰을 피해 서울로 올라와 을지로 인쇄소에서 필경사(筆耕士)로 일하며 몸을 숨기기도 했다. 도피 생활 중에 건강을 해쳐서 경성제국대학병원(현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병원에서 8․15를 맞기도 했다. 서울대병원은 훗날 감옥에 있을 때 다시 한번 신세를 지게된다. 1948년 부산사범학교 음악선생이었을 때에는 통영에서 「충무공 제(祭)」가 열리자 이순신의 「한산도가」를 작곡해 학생들에게 부르게 하기도 했다. 1950년에는 정인보(鄭寅普, 1893~1950)가 작사한 「충무공(이순신)」을 작곡하기도 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할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한산도가」)

 『윤이상 연구』에서 그는 자신의 음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래 예술가란 자기 민족의 전통 속에서 발전하기 마련이지요. 다만 한국음악 그대로는 서양 사회에 그대로 수용되기 어려우므로 한국음악의 알맹이, 그 철학적‧미학적‧음향적 요소들을 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하고자 애썼습니다. 끊임없이 우리 고전을 연구하고 또 고향에서의 기억을 더듬으며 한국적인 것의 본질을 되살리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죠. 한국적인 것의 핵심은 이 우주의 위대한 질서 그 흐름 자체가 곧 음악이라는 것입니다.”(이한숙, 「윤이상, 그는 누구인가:이념의 벽에 가리워진 천재 음악가」, 『음악사랑』, 1994년 10월호에서 재인용)

 윤이상의 삶을 살펴보면, 고향 통영과 민족의식의 구심점 이순신을 포함한 한반도 사람들, 조지훈의 「고풍의상」은 자신의 음악 알맹이였다. 윤이상은 그 모두를 모아 가장 한국적인 음악을 만들어 세계인들을 감동시켰다.

 위대한 음악가 윤이상에게 영감을 준 조지훈이 살던 이웃집이나 마찬가지임에도 윤이상의 집터에는 현재 아무런 표지판도 없다.

미술사학자 최순우 옛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미술사학자 최순우 옛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국미의 순례자, 미술사학자 최순우

 최순우(崔淳雨, 1916~1984). 우리나라 박물관 역사 그 자체이다. 필명이다. 국립박물관의 공직자로 본명은 ‘희순(熙淳)’이다. 그의 전문성을 기준으로 ‘전시의 귀재’ 또는 ‘박물관인’으로 불릴 수도 있다. 또 마지막 직책인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불릴 수도 있다. 그러나 평생을 우리의 삶과 문화재와 함께 한 그의 삶을 보면, 그런 무미건조한 표현은 야만적인 표현이나 다름없다.

 그가 쓴 무수한 문화재 해설 기록을 기준으로 본다면, 최소한 ‘한국미의 순례자’(이충렬,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김영사, 2012년)나,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이 말한 ‘우리 아름다움에 대한 도인(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학고재, 2008년)’ 쯤은 되어야 할 듯하다.

 그의 삶은 황무지에서도 소박하게, 함빡 웃으며 피어나는 우리 민족을 닮은 무궁화꽃 같다.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했으되 언제나 배움과 사람에게 겸손했고, 하는 일은 가장 치열하되 명명백백했으며, 학문은 끝없이 깊되 높은 곳에서 넓게 보았으며, 말과 글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으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은 그 자체가 문화재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지금은 북한 땅이 되어버린 개성 출신이다. 1934년 송도고보 5학년 때 개성부립박물관 관장 고유섭(高裕燮, 1905~1944, 미술사학자)을 만나면서 박물관과 인연을 맺어 1984년 별세 때까지 50년을 박물관에서 살았다. 고유섭의 제자로 개성 3걸이 있다. 최순우, 진홍섭(秦弘燮, 1918∼2010) 이대 교수, 황수영(黃壽永, 1918~2011) 동국대 교수이다. 최순우가 고유섭의 첫 제자이다.

 그는 현장에서 키운 직관력과 통찰력, 이른바 ‘안목’을 키운 특별한 사람이다. 그래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美)를 보는 눈으로서 안목을 말할 때 우리 시대 최고의 안목은 단연 혜곡 최순우 선생이다. 혜곡 선생의 안목은 한국미술의 축복이었다. 혜곡 선생은 평생을 박물관에서 살면서 구체적인 유물을 통하여 한국민의 특질, 나아가서는 한국미학의 대방향을 제시한 당대의 대안목으로 <한국미술오천년>, <조서시대 회화전>, <한국민예미술전> 등 수많은 특별전을 기획하면서 한국미술사의 대맥을 세운 미술사가이자 미학자이다. 혜곡 선생은 미술품을 ‘학(學)’으로 보기 이전에 감상하는 자세로 관찰하며 ‘멋’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거기에서 느끼는 미적 감흥을 온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그 아름다움의 미적 가치를 하나씩 발견해갔다.”(유홍준, 「우리들의 영원한 국립박물관장」, 『그가 있었기에-최순우를 그리면서』, 김홍남 외 32명, 혜곡최순우기념관 엮음, 진인진, 2017년)

 20여 년 전에 처음 그의 책 『최순우전집』과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보았을 때 아주 편안히 우리 문화재의 고갱이를 느꼈었다. 그때부터 사금파리에 불과했던 도자기들이 달리 보였고, 불상과 건축물의 선 하나하나, 여백 하나 하나, 빛깔 하나하나가 모두 숨을 쉬고 말을 하는 듯했다.

 물론 여전히 까막눈이다. 하지만 까막눈이면 어떠랴. 모른다고 누가 뭐라할 일도 없다. 다만 전과는 조금 다른 뭔가를 느낄 수 있는 정도의 까막눈이 된 것만으로도 책으로 만난 스승, 그에게 감사할 뿐이다.

미술사학자 최순우 옛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최순우옛집01ⓒ김재경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최순우의 삶, 말, 글, 집이 그 자체 문화재

 윤이상 옛집 터 바로 뒤편이 최순우가 1976년 1월부터 1984년 12월 별세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평생을 박물관에서 바친 삶답게 이 옛집에는 한국미의 순례자 최순우가 보고 듣고 만지며, 생각했던 우리의 아름다움을 소박하되 기품있게 담아놓은 집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잠시 이 집은 주변이 개발되면서 파괴의 검은 먹구름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 집 주인의 인품과 안목에 따른 집 자체의 아름다움에 감동된 많은 사람의 성금과 후원으로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매입해 보수 및 복원했다.

 ‘내셔널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제1호’이다. 이번 탐방기에서 소개할 ‘권진규 아틀리에’는 ‘내셔널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제3호’이다. 내셔널트러스트는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된 보존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시민들의 후원으로 사서 보존하는 운동이다. 우리나라에는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다.

 지난 탐방 당시는 겨울철 휴관 상태였다. 3월 31일까지 휴관이다. 다만 네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후원회원은 사전 예약(02-3675-3401) 후 관람이 가능하다고 한다. 4월~11월까지는 일요일과 월요일은 휴관이고, 화요일~토요일까지는 10~16시까지 문을 연다. 요금은 무료이다. 다른 국립기관과 달리 일요일에도 휴관이니 일요일에는 가면 안된다.

 최순우의 삶에 대해서는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가 가장 좋다. 인간 최순우의 진면목과 그가 한국미술과 문화재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조목조목 설명해 준다. 박물관이나 문화재에 관심이 있는 사람, 근현대 문화재 역사만이 아니라, 자기개발을 원하는 사람이 읽어도 된다. 그 이상의 교훈과 경험이 담겨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가장 말단 공무원의 뜨거운 삶과 분노, 분노를 지혜로 바꾸는 모습, 사내정치에서 이기는 법, 관계를 맺는 법, 인간관계의 중요성, 글의 힘 등이 생생하다. 최순우라는 한 획을 그은 분의 인물평전을 이렇게 싸구려처럼 평가하면 안되나, 이 책은 당장 어렵고 힘든 길에 서 있는 많은 청년이나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책이다. 눈을 크게 뜨고 읽는 사람이면 확실히 엄청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또 문화재 관련 일을 하는 사람에게 혜안을 주고, 문화재를 활용한 새로운 비즈니스를 하려는 사람에게는 아이디어의 창고가 될 수도 있다.

 최순우가 보고 듣고 느낀 우리나라 문화재의 속살, 진짜를 알기 위해서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최순우, 학고재, 2008년), 또는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최순우, 학고재, 2016년)를 읽어야 한다. 특히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를 먼저 읽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읽는 것이 좋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개정판의 경우 두꺼워져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최순우와 관련된 사람들과 문화재 이면사 등을 조금 자세히 읽고자 한다면 『그가 있었기에-최순우를 그리면서』를 읽으면 된다.

 ‘최순우 옛집’은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출발점이며 성공을 알리는 출발점이다. ‘최순우 옛집’이기에 시민들의 동의와 후원을 얻어 ‘내셔널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제1호’가 될 수 있었다. ‘최순우’ 자체가 우리 문화재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인물이었고, 그의 집 자체가 우리 문화재를 담아낸 문화재였기 때문이다. 무형문화재와 같은 인간문화재는 아니나, 그의 눈과 말, 행동, 그가 만든 집이 문화재나 다름없다. 최순우가 만든 제1호 때문에 제2호, 3호가 생겨날 수 있었다. 최순우는 세상에 없으나, 그의 문화재 사랑은 살아서 부드러운 눈으로 이땅과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더많은 최순우가 나오길 염원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렀던 돈암장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렀던 돈암장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돈암장과 동활인서 터

 ‘최순우 옛집’에서 한성대입구역으로 나와 삼선중학교 쪽으로 가면 ‘돈암장(敦岩莊)’이 있다. 20분 정도 걸린다. 1945년 8‧15해방 후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이 미국에서 귀국해 조선호텔에 머물다 옮겨 거주했던 곳이다. 대략 1년 6개월 정도 거주했다.

 대목장 기능보유자였던 배희한(裵喜漢)이 궁궐 양식으로 건립한 한옥 목조건물로 친일파로 몰렸던 내시 송성진의 집이었다고도 한다(배희한 구술, 이상룡 편집, 『이제 이 조선톱에도 녹이 슬었네』, 뿌리깊은나무, 1991년). 그 뒤 조선타이어주식회사 사장 장진영(張震英)의 소유가 되었던 듯하다. 이승만과 그의 지지자들이 장진영에게 빌려 사용했다. 주한미군사령관 겸 미군정청 미군사령관 하지(John R. Hodge, 1893~1963)과의 갈등이 심해지자 부담을 느낀 장진영이 반환 요청하면서 일제강점기 총독부 정무총감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이 사용했던 마포장(麻浦莊)으로 옮겼다가 다시 종로구 이화동 이화장으로 옮겨갔다.

 돈암장과 그 바로 옆 예담교회 지역에는 조선시대 동활인서(東活人署)가 있었다. 『성북의 문화재』(박경룡, 성북문화원, 1997년)과 『사연이 깃든 성북의 유래』(양보경, 성북문화원, 1998년)에 따르면, 활인서는 조선시대 빈민환자, 특히 전염병 환자를 위한 국립의료기관이다. 동활인서(동소문 밖 연희방)와 서활인서(남대문 밖 용산강)가 있었다. 오늘날 찜질방과 같이 찜질과 목욕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다. 의원 외에 무당을 두어 전염병 역귀 물리치게 했다. 명칭 변경 및 폐지, 재설치, 혜민서와의 통합 등의 변화가 있었고, 정조 때 동활인서는 신당동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돈암장을 비롯한 활인서 터에 일본인이 설립한 젖소 사육과 우유를 판매하기 위한 평산목장이 있기도 했다고 한다.

 약자를 살리던 활인서 터는 일본인의 목장이 되기도 했고, 친일파의 집이 세워졌으며, 또 그  터에 공과를 떠나 독립운동을 했던 이승만이 잠시 머무르기도 했던 곳이다.

 김영상은 『서울 600년 4: 낙산기슭‧청계천변』(대학당, 1996년)에서 활인서의 위치를 “동소문동 4가 10번지 언저리”에 있다고 보았다. 그 위치는 돈암장 부근과 비슷하다. 그는 『수선전도』에 표시된 동활인서 위치, 지금의 중구 신당동 236-304번지와 서활인서 위치인 마포구 아현동 아현중학교 자리는 훨씬 후세에 변경된 위치로 보았다. 조선 중기까지는 돈암동의 이 지역에 있었던 것은 확실한 듯하다. 

시인 신동엽 옛집터에 있는 건물 동선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시인 신동엽 옛집터에 있는 건물 동선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돈암장‧동활인서 터에서 성신여대입구역 방향으로 가다가 아리랑로를 건너는 횡단보도를 건너면 시인 신동엽(申東曄, 1930~1969)의 돈암동 옛집으로 갈 수 있다. 독재에 저항하던 시절에 매년 4월이면 청년들의 가슴을 울렸던 시가 있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1967년)이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 독재의 시대, 4월 혁명, 다시 쿠데타의 시대가 연이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껍데기는 가라”라고 외쳤다. 알맹이만 남으라 했다. 아우성만 살아남으라했다. 이념의 껍질을 벗어버리자고 했다. ‘그 모오든’ 무기를 던진 순수한 알몸으로 만나자고 했다. 분단의 철조망을 치워버린 중립의 공간에서 맞절하자고 했다. 그의 호소 “껍데기는 가라!”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또 그는 노래했다.

 언제 부터였을까,/살림을 시작하기 위해 백성들 가슴에/달았던 꽃이, 백성들 머리 위 기어올라와,/쇠항아리처럼 커져서 백성 덮누르기/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산짐승, 유한약탈자/쫓기 위해 백성들 문밖 세워뒀던 문지기들이,/안방 기어들어와 상전노릇 하기/시작한 것은,//
 이조 5백년의/왕족,/그건 중앙에 도사리고 있는 큰 마리낙지.//

 그 큰 마리낙지 주위에/수십 수백의 새끼낙지들이 꾸물거리고 있었다/정승배, 대감마님, 양반나리, 또 무엇// 
 지방에 오면 말거머리들이/요소요소에 웅거하고 있었다/관찰사, 현감, 병사, 목사,//
 마을로, 장으로/꾸물거리고 다는 건 빈대,/봉세관, 균전사, 전운사, 아전, 이속, 관세위원/그들도 벼슬은 벼슬이었다//
 벼슬자리란 공으로 들어오지// 않는 법,/밑천을 들였으면/밑천을 뽑아야,//
 그리고 지금이나/예나, 부지런히 상납해야/모가지가 안전한 법,// (신동엽, 『금강』 중에서, 창작과비평사, 1989년)

 그의 노래가 지금과 무엇이 다른가! 큰 마리 낙지, 새끼낙지, 말거머리, 벼슬아치는 지금도 도처에 있다. 그나마 전에는 신동엽의 외침을 가슴에 담고 행동했던 이들이 있었으나, 그들마저도 언젠가부터 똑같은 낙지와 거머리가 되었다.

 동선동에서 민족의 미래를 꽃피운 신동엽

 충남 부여 사람 신동엽은 1953년 봄 서울에 상경해 성북구 돈암동 사거리에 있던 헌책방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해 1955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책방에서 훗날 평생의 동반자 인병선 여사를 만났다. 1957년 부여에서 결혼한 뒤, 1959년 서울 돈암동에 단칸방을 얻어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동선동에서 서너 차례 이사를 한 뒤 1962년 동선동 5가 45번지에 한옥을 마련하고 1969년 간암으로 소천할 때까지 살았다. 그는 동선동에서 첫 시집 『아사녀』(문학사, 1963년)를 발표했고, 1967년에 「껍데기는 가라」를 짓기도 했다.

 동선동 집은 현재는 빌라도 바뀌었다. 20세기 후반 한국 시민사회에 들불을 피운 그의 숨결이 남아있는 그곳에는 그와 관련된 어떤 흔적도 없다. 그저 빌라의 숲에서 빌라의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신동엽전집』(신동엽, 창비, 1980년)과 『한국현대시인연구11:신동엽』(성민엽 편저, 문학세계사, 1992년) 등에서는 그의 동선동 집 주소가 46번지로 나온다. 그러나 인병선씨와 함께 작업해 출간된 김응교의 『시인 신동엽』(현암사, 2005년)에는 45번지로 나온다.

 한 몸 두 얼굴의 신동엽과 김수영

 신동엽과 시인 김수영은 닮았다.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인 샴쌍둥이 같다. 성민엽은 “1960년대 한국시에서 독창적인 시세계와 한국문학의 민족문학으로서 자기 정립에 일정한 기여로 크게 돋보이는 두 시인은 신동엽과 김수영이다. 둘은 대조적”이라면서 김수영은 도시적‧소시민적 자기부정‧자유민주의‧적극적 저항의 모습을 갖고 있으나 신동엽은 농촌적‧민중적 자기긍정‧민족주의‧소극적 저항의 모습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문학이나 삶에서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으나, 그들은 사실상 자유와 민주, 민족, 민중이라는 같은 모태에서 똑같은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런 까닭인지 서로는 너무 잘 알아보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었다.

 김수영이 교통사고로 불의에 사망하자 신동엽은 한국일보에 「지맥(地脈) 속의 분수」라는 제목의 추도사를 썼다.

 “한반도 위에 그 긴 두 다리를 버티고 우뚝 서서 외로이 주문을 외고 있던 천재 시인 김수영. 그의 육성이 왕성하게 울려 퍼지던 1950년대부터 1968년 6월까지의 근 20년 간, 아시아의 한반도는 오직 그의 목소리에 의해 쓸쓸함을 면할 수 있었다. …… 한반도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는,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 그의 죽음은 민족의 손실, 이 손실은 서양의 어느 일개 대통령 입후보자의 죽음보다 앞서 5천만 배는 더 가슴 아픈 손실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김수영은 죽지 않았다. 위대한 민족 시인의 영광이 그의 무덤 위에 빛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민족의 알맹이들은 다 알고 있다”

 이 추도사는 만약 신동엽이 먼저 사망해 김수영이 추도사를 썼다면, 아마도 김수영에 의해 똑같이 써졌을 글이다. 신동엽과 김수영이 같은 시대에 같은 고민을 하며 같은 말을 하고 있었던 둘이나 하나였던 사람들이다. 1960년대 위대한 시인 김수영과 신동엽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민족과 민중에게 숙제를 남기고 떠났다.

 신동엽의 옛집터에 독재와 불의, 냉전 시대를 온몸으로 불태운 그의 흔적을 남겼으면 한다.

 그의 뜨거운 말이 넘실거리는 두 작품의 일부를 소개한다.

 수운(水雲)이 말하기를

 수운이 말하기를/한반도에 와 있는 쇠붙이는/ 한반도의 쇠붙이가 아니어라/한반도에 와 있는 미움은/한반도의 미움이 아니어라/한반도에 와 있는 가시줄은/한반도의 가시줄이 아니어라.// 수운이 말하기를,/한반도에서는/세계의 밀알이 썩었느니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닦아라, 사람들아/네 마음속 구름/찢어라, 사람들아,/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볼 수 있는 사람은/외경을/알라리//

 신동엽 시인의 삶에 대해서는 『시인 신동엽』(김응교, 현암사, 2005년), 그의 전작에 대해서는  『신동엽 전집』(신동엽, 창비, 1980년), 시집만 보려면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신동엽, 창작과비평사, 1989년), 대서서사를 읽고 싶다면, 『금강』(신동엽, 창작과비평사, 1989년)을 읽으면 된다.

조각가 권진규 아틀리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조각가 권진규 아틀리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고대 신화의 세계를 부활시키려던 조각가 권진규

 다음 코스는 한국 근대 조각가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권진규(權鎭圭, 1922~1973)가 살며 작업했던 동선동 언덕 위에 있는 아틀리에이다. 성북동과 동선동은 권진규가 함경도에서 월남해 정착해 살았던 공간이다.

 1946년 월남해 정착했던 성북동의 거처는 확인하지 못했다. 성북동에 살때는 1947년(26세) 화가 이쾌대(李快大, 1913~1965)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를 다니기도 했다. 이쾌대의 작품 중 널리 알려진 것은 「조난」․「걸인」․「군상Ⅰ-해방고지」이다. 이쾌대는 일본 제국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에 유학을 다녀왔고, 1938년 도쿄에서 열린 제25회 니카텐(二科展)부터 3년 연속 입선했다.

 이쾌대의 코스를 훗날 권진규도 동일하게 밟는다. 권진규는 제국미술학교의 후신인 무사시노미술학교(武藏野美術學校)를 졸업했고, 이쾌대처럼 1953년 제38회 니카텐(二科展)에서 「마두(馬頭)」로 최고상을 받았던 탁월한 예술가였다.

 그러나 이쾌대는 6․25 당시 인민의용군으로 참전했고 포로가 된 뒤 자의로 북한으로 넘어갔다. 권진규는 그와 달리 1948년에 일본으로 가서 1959년(38세)에 귀국했다.

 동선동으로 그가 돌아왔을 때부터 1973년(52세) 5월 4일, 그의 삶 자체가 죽음으로 완성된 작품으로 남을 때까지 약 14년 동안 머물렀다. 함경도 시절이나 일본 유학시절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는 일본에서 연구한 테라코타(terracotta, 점토로 만든 작품을 구운 것)과 옻칠을 통해 작품을 만드는 건칠(乾漆) 조각을 개척했다. 그가 도전하고 꿈꾼 조각의 미래는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하고 싶습니다. 만물에는 구조가 있습니다. 한국 조각에는 그 구조에 대한 근본 탐구가 결여돼 있습니다. 우리의 조각은 신라 때 위대했고, 고려 때 정지했고 조선조 때는 바로크화(장식화)했습니다. 지금의 조각은 외국작품의 모방을 하게 되어 사실(寫實)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불쌍합니다.”(조선일보, 1971.6.20. 「건칠전 준비중인 조각가 권진규씨 인터뷰」)

 그는 현재의 조각이 고대로부터 내려온 가장 원초적인 예술의 목적을 잊고 있다고 보았다. 특히 우리 민족의 가장 위대했던 시대의 조각이 시대가 변할수록 후퇴했기에 이를 가장 원시적인 작품 제작방식인 테라코타 방식으로 재현, 부활시키려고 했던 듯하다. 특히 테라코타의 원초적 속성에서 영원한 세계를 찾았고, 만들어내려 했다.

 유준상(예술의 전당 전시본부장)은 그에 대해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강한 거절 정신의 밑바닥에 짙은 페시미즘(pessimism, 염세주의 혹은 비관주의)이 흐르고 있는 조각가였다고.”라고 했다. 또 “그는 정말 외로운 사람. 흙먼지로 온통 뒤덮인 아틀리에 속이 그의 전세상이었으며 감옥의 독방을 연상케 하는 자그마한 온돌방 하나가 그의 사지를 그 나름으로 뻗게 하는 안식처였다. 여기서 자고 깨면 일을 하기 시작했고 간혹 창밖으로 돈암동 일대를 멀거니 바라보는 것이었다.”라고 그의 하루하루를 증언했다(유준상, 「영원을 응사한 비극의 작가, 『한국의 미술가 권진규』, 삼성문화재단, 1997년).

 유준상의 말처럼 그의 아틀리에는 그랬고, 언덕 위에 있던 아틀리에 밖에서는 붐비며 현대화되어가고 있는 돈암동과 서울 시내가 보인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언덕 위 그의 아틀리에는 세상에 있지 않은 절대고독의 공간이었다. 그는 언덕을 내려가 세상 사람과 함께 하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도 그의 언덕에 편하게 올라오지 않았다. 서울 한복판이었으나, 절간과 다름없는 공간이 그의 아틀리에이다. 탈속한 공간에서의 그의 작업은 수도승의 수도와 다르지 않았을 듯하다.

 이순신과 연결된 사람들 : 권진규와 박혜일

 필자는 오랫동안 이순신을 공부했다. 권진규의 삶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권진규 사이버 미술관(http://jinkyu.org)에 있는 연보에 따르면, 1962년 2월, 영화를 위해 진해를 방문해 조선 시대 수군을 재현하는 이벤트를 참관해 사진을 찍고 깃발의 문양 등을 디자인했다고 나온다. 그 영화는 1962년 유현목 감독이 제작한 『임진왜란과 성웅 이순신』이다. 그는 그 영화를 위해 촬영세트 제작도 했다. 영화는 이순신이 거북선을 개발한 뒤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다.

 그는 일본 유학중에 일본 영화 『고질라(ゴジラ』(1954년)‧『고질라의 역습(ゴジラの逆襲)』(1955년)의 촬영세트 제작 경험도 있었다. 그러나 권진규에게 『임진왜란과 성웅 이순신』는 일본에서 만든 촬영세트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을 듯하다.

 그의 참여는 과거의 경험을 살린 것이나 묘한 인연으로 연결된다. 그가 죽기 3개월 전에 인연을 맺고, 죽기 직전 유서를 남겼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서울대 원자핵물리학과 교수 박혜일이기 때문이다. 박혜일은 「조각가 권진규와의 만남」(『한국의 미술가 권진규』, 삼성문화재단, 1997년)이라는 글에서 그들의 인연을 기록으로 남겼다.

 박혜일은 몇 년 뒤부터 자신의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이순신 관련 논문들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1998년에는 제자들과 함께 기존의 『난중일기』의 오류들을 밝힌 『이순신의 일기』(서울대출판부)를 저술하기도 했다.

 기존 미술에서는 무관심했고, 현대미술에서는 시대에 낙후되었다고 평가되는 테라코타를 활용하며 신라 시대의 위대한 예술을 부활시키려 했던 권진규, 원자핵물학과 교수로 기존 역사학계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과학사학에 도전했던 박혜일이다.

 기성의 관점에서 벗어나 역사 속에서 그 무엇을 찾았기에, 또 창의적 도전정신을 갖았기에 그들은 서로가 순식간에 지인지감(知人之鑑)을 했던 듯하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만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그들이 그 짧은 기간에 6번을 만나고, 편지를 두 번이나 하고, 전화를 한 번했다는 것이 성립될 수 없을 듯하다.

 권진규의 죽음과 영화 『임진왜란과 성웅 이순신』의 제작과는 10년의 시차가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살았고, 일본에서 유학했던 권진규에게 이순신은 자신의 삶에 늘 어떤 숙제처럼 다가왔을 듯하다. 혹독한 세월을 살다간 이순신과 자신의 삶이 오버랩 되어 보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혜일과의 만남 역시 어쩌면 그들 사이의 공통점과 ‘운명론’과 같은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된 것으로 상상해 볼 수도 있다. 박혜일은 훗날 「이순신(李舜臣)의 전사(戰死)와 자살설(自殺說)에 대하여」(『창작과 비평』, 1993년 가을)라는 논문으로 위대한 영웅 이순신의 불가피한 죽음, 즉 자살설을 언급하기도 했다.

가사를 걸친 자소상(테라코타에 채색,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한국의 미술가 권진규』, 삼성문화재단, 1997)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가사를 걸친 자소상(테라코타에 채색,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한국의 미술가 권진규』, 삼성문화재단, 1997)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윤이상의 음악을 들었던 권진규

 박혜일의 「조각가 권진규와의 만남」에는 또한 특별한 관찰 기록이 있다.

 “그의 작업실 동쪽 벽에는 전축이 놓여있어 LP음반을 가끔 틀고 있었다. 수집한 음반 중에는 윤이상의 초기 대표작 「로양(Loyang)」‧「가사」‧「예악」 등 네 곡이 수록된 음반(WER 60 034)이 눈에 띄기도 했다. 이는 서구식 기법에 동양사상, 특히 한국의 가락을 교묘하게 짜넣어 한국 음악의 세계화에 이바지했다 할 작품이다. 이 음반은 미술평론가 유준상 선생이 1967년 동독사건으로 재판 중에 있던 윤이상에게 선물로 받은 것을 빌려준 것이었다고 한다.”

 윤이상이 성북동에 살 때 권진규는 일본에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인연이 없다. 윤이상이 베를린에서 납치되어 한국 감옥에 있었을 때 그는 일본에서 전시회를 했고,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윤이상이 풀려나 독일로 돌아갈 때, 그는 꿈이 깨진 것에 고통스러워 해야 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장르와 공간에 있었다. 또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러나 때때로 그들은 비슷한 시련과 고민을 했다. 특히 권진규가 추구했던 예술과 윤이상이 추구했던 음악은 비슷한 부분이 많다. 둘 다 동양의 전통과 서구의 현대적 예술을 접목하고자 했다.

 그런 까닭에 권진규가 윤이상의 음악에 관심을 갖았던 듯하다. 또 그들은 이순신으로 엮어 있기도 하다. 이순신의 역사 속에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던 윤이상과 이순신의 삶을 만든 영화의 세트를 제작한 권진규나 모두 이순신의 아우라 속에 있던 인물이다.

 권진규에 대해서는 권진규의 대부분의 작품이 수록된 도록 겸 해설이 담긴 『한국의 미술가 권진규』와 「권진규 사이버 미술관」을 참고하면 보다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미아리고개 옆길 점집들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미아리고개 옆길 점집들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여진족의 길과 단장의 미아리고개

 다음 코스는 미아리고개이다. 권진규 아틀리에에서 미아리고개 꼭대기까지는 약 400미터 정도다. 아틀리에 아래 골목으로 내려가 미아리고개 방면으로 죽 올라가면 된다. 고개에 올라가면 ‘미아리구름다리’가 있다. 고개 위 다리라 남쪽과 북쪽 모두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디를 둘러 보아도 대부분 막혀 있다. 몇십 년 전의 서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한켠에서는 멀찍이 남산타워가 보이기도 하나 골목 풍경처럼 보인다.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성북문화원, 2013년)에 따르면, 미아리고개는 성북구 돈암동에서 길음교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고개이다. 옛 문헌에서는 ‘미아리’란 명칭은 없고, ‘사아리(沙阿里)’로 나온다고 한다. 6‧25때는 북한군이 탱크를 타고 넘어왔고, 남한의 수많은 사람들이 납북되어 북으로 끌려가던 길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는 미아리고개 너머에 공동묘지를 조성해 “삶과 죽음이 나뉘게 되는 공간으로 인식”되기도 했다고 한다. ‘단장(斷腸)의 미아리고개’는 그때부터 생긴 별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미아리고개』(박수진 외, 성북문화원, 2014년)에 따르면, 첫 이름은 ‘되너미고개’였다. 즉 되놈(오랑캐, 狄, 여진족)들이 넘는(踰) 고개(峴), 적유현이었다고 한다.

미아리고개 예술극장 위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미아리고개 예술극장 위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면 ‘미아리고개 예술극장’이 있다. 또 그 옆에는 철판에 ‘단장의 미아리고개’(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 1956년)가 새겨져 있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고/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미아리고개』에 따르면, 이 노래에는 반야월의 개인사가 반영되어 있다. 전쟁전 미아동에 살았는데, 아내와 자녀를 남기고 먼저 피난 간 사이, 둘째 딸이 영양부족으로 사망하자 부인은 미아리고개 근처 공동묘지에 묻고 피난갔다고 한다. 피난살이를 끝내고 돌아와 딸이 묻힌 곳을 찾았으나 찾지 못해 죄책감을 담아 만든 노랫말이 이 노래의 2절이라고 한다. 가슴에 묻어야 했던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겪으며 만든 노래이다. 1절은 납북되던 사람들의 찢어지는 아픈 사연이다.

 노래비 옆에는 「염원」이라는 「미아리고개공원 사적비」가 있다. 색깔만 다를 뿐 마치 최근 외국 곳곳에 등장했던 정체불명의 금속막대처럼 생겼다. 김도경‧이영송 작가가 비석을 형성화해 만든 작품이다. 또 그 길로 내려가면 점들이 많다. 한 많은 미아리고개에서 한(恨)을 풀고, 미래를 조금이라도 예측하고자 하는 마음이 모여 생긴 점집들이다.

 미래를 아는 것은 쉽지 않다. 미래는 어제가 쌓이고, 오늘이 만드는 것이 때문이다. 미래를 두려워 하기 보다 오늘을 어떻게 살지를 먼저 살펴야 할 듯하다.

* 조지훈 옛집터 : 성북구 성북동 60-44
* 음악가 윤이상 옛집터 : 성북동 128-13 (최순우 옛집 앞이 음식점 두 곳 지역)
* 선잠단지(선잠단 터) : 성북구 성북동 64-1 
* 미술사학자 최순우 옛집 :  성북구 성북동 126-20 
* 돈암장 : 성북구 동소문동4가 103-3
* 동활인서 터 : 성북구 동소문동 4가 103 혹은 동소문동 4가 10번지 언저리
* 시인 신동엽 옛집터 : 성북구 동선동5가 45
* 조각가 권진규 아틀리에 : 성북구 동선동3가 251-13
* 미아리고개 예술극장 : 성북구 돈암동 5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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