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16세기 조선 중기의 학자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실천한 진보적인 인물이다. 백성 구제에 헌신하고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한 경세가로 우리나라 실학(實學)의 효시(嚆示)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이지함의 본관은 한산(韓山),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6대손으로, 현령 이치(李穉)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이다.

이지함은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성리학 외에도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에 해박하였다. 초야에서 지내던 토정이 벼슬길에 나가게 된 것은 선조 대이다.

58세가 되던 1574년에 6품직을 제수 받아 포천 현감이 되어 민생을 살리기 위해 선조에게 상소를 제출했다.

“‘땅과 바다는 백 가지 재물을 보관한 창고입니다. … 씨를 뿌리고 나무 심는 일은 진실로 백성을 살리는 근본입니다. 따라서 은(銀)은 가히 주조할 것이며, 옥(玉)은 채굴할 것이며, 고기는 잡을 것이며, 소금은 굽는 데 이를 것입니다. … 마땅히 취할 것은 취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 또한 성인이 권도(權道, 임시로 행하는 도)로 할 일입니다.”

이지함의 사회경제사상이 잘 나타나 있으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내용이었다.

이지함은 산업과 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농업 이외의 여러 산업을 개발하면 그 이익이 백성에게 갈 것이니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성인도 임기응변 정책을 펼 수 있다”는 논리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치우쳐 있던 당시에는 매우 개혁적이었다.

유교 국가 조선은 ‘농본상말(農本商末)’의 경제체제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를 국가의 기본으로 삼아왔다. 농업만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보고, 상업이나 수공업을 천시하던 시대에 적극적으로 산업과 자원 개발을 제시한 것은 혁명적 사고였다.

또한 상소문에는 ‘제왕이 가진 세 가지 곳간’인 ‘민심인 도덕의 곳간’, ‘조정의 인재의 곳간’, ‘육지와 바다라는 자원의 곳간’을 열고, ‘말업인 상공업으로 본업인 농업을 보완하라’는 ‘본말상보론(本末商補論)’이 들어 있다.

1578년 아산 현감이 되어서는 다시 선조에게 상소문을 올려 피폐한 농촌사회의 참담한 실상을 낱낱이 거론했다.

“남쪽의 왜적 2만~3만 명이 침입해 와도 이 나라는 무너질 것입니다. …국가가 백성을 위해 해준 게 없으니 백성 또한 나라를 위해 죽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많은 백성이 군역의 부담 때문에 장가를 못 가자 군역개혁을 건의했으며, 노숙 재활 기관과 비슷한 ‘걸인청(乞人廳)’을 설치해 관내 걸인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앞장섰다.

조식(曺植)은 “이지함을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였으며, 의병장 조헌(趙憲)은 스승인 토정을 “은나라를 일으켜 세운 이윤, 유비를 도와 촉을 세운 제갈공명”에 비유했다.

민생·부국(富國)·통상을 강조한 이지함의 사상은 박제가(朴齊家) 등 조선 후기 북학파 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500년 전 인물이지만 이지함은 영국의 아담 스미스보다 앞서 ‘국부론’을 주장했으며, 그가 제시한 산업개발과 민생안정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겠다.

이지함이 인사의 난맥상을 규탄하며 ‘적재(適材)를 적소(適所)에 앉혀야만 나라가 바로 선다’고 한 상소문은 유명하다.

“해동청(海東靑)은 천하의 좋은 매이지만 새벽 알리는 일을 맡기면 늙은 닭만도 못하고, 한혈구(汗血駒)는 천하의 명마이지만 쥐 잡는 일을 맡기면 오히려 늙은 고양이만도 못하다. 하물며 닭이 사냥을 할 수 있고, 고양이가 수레를 끌 수 있겠는가.”

최근 문제가 된 LH 직원들의 3기 신도시 땅 투기 시점은 변창흠 국토부장관의 LH 사장 재직 기간과 정확히 겹친다. 변 장관이 책임을 면할 수 없는데, 국토부가 ‘셀프 조사’를 주도한다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것’과 다름없다. 꼬리 자르기 식 축소 조사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야당의 동의 없이 허점투성이 무자격자를 26번째 장관에 임명한 당연한 업보(業報)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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