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배신당한 우정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장마가 그치고 다시 찬란한 태양이 코발트 빛 하늘에 빛나던 일요일이었다. 서연이도 할머니를 잃은 슬픔에서 조금 헤어났다. 석현이와 함께 동네 산책을 나서려고 막 집을 나설 때였다. 형준이와 영희가 일꾼 한 사람을 데리고 집에 나타났다.

“아니, 너희들이 연락도 없이 웬일이냐?”
서연이 조금은 놀라고 반가워 두 사람을 보고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같이 온 사람을 누구냐고 묻는 표정을 지었다.
“이 아저씨가 우리 일을 도와 줄 거야.”

영희가 말하자 아저씨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깨에는 땅 팔 때 쓰는 드릴을 메고 있었다.
“문제는 너희 집 장독대 아니겠어? 그래서 영희와 의논했는데 우선 파 보기로 했어. 어쩌면 그곳에 엄청난 보물이 있을지도 모르거든, 경비는 우리 둘이서 대기로 하고 오늘 이 아저씨를 모시고 왔어.”

형준이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서연은 맞아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 반가워했다.
“우선 여기 장독들부터 옮기자.”

형준이 앞장서고 네 사람이 장독대 위의 크고 작은 장독을 모두 마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아저씨가 콘크리트 바닥을 기계로 부수기 시작했다. 두껍게 깔린 콘크리트가 아니라 금방 걷어지고 흙 바닥이 그러났다. 서연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정말 저기서 보물이 쏟아질까?

“이제 삽으로 흙을 걷어 내면 됩니다.”
아저씨가 이마에 땀을 닦으며 말했다.
“좀 쉬었다가 해요. 마루로 올라오세요.”
어느새 준비했는지 서연이 커피 넉 잔을 타서 들고 나왔다.
그 때였다.

“여기 오늘 무슨 일이냐?”
뜻밖에도 추 경감이 나타났다.
“삼촌. 어쩐 일이야?”
영희가 반가워하며 뛰어가 추 경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음. 장독대를 파고 있었군. 나도 그 일을 의논하러 왔는데⋯”

추 경감이 파헤쳐놓은 장독대를 보면서 말했다.
“아니? 아저씨도요?”
서연이이도 형준이도 약간은 놀랐다.
“그 속에 보물이 있는 게 틀림없어. 범인이 자백을 했거든⋯”
“예? 범인을 잡았다고요?”

세 사람이 모두 놀라 동시에 소리를 쳤다.
“어떤 놈이어요? 우리 할머니를 해친 사람이⋯”
서연이 추 경감을 쳐다보았다.

“우선 저 밑에 무엇이 묻혔는지 확인한 뒤에 범인 이야기를 해 주지⋯”
추경감은 입을 열지 않고 열심히 장독대파는 일을 거들었다. 얼마 파지 않아 판자가 가로막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판자를 들어내면 보물이 있을 거야.”

추경감이 말하자 모두가 흥분해서 심장이 빨리 뛰었다. 네 사람이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는 순간에 아저씨가 가로막은 판자를 들어냈다.
거기에는 다시 접시 같은 게 덮인 항아리가 나타났다.
“항아리!”

서연이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항아리를 들어 올렸다. 추경감이 덮인 뚜껑을 들어냈다.
“엇?”
그러나 항아리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이게 뭐야?”
서연이 실망의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형준은 놀라운 얼굴로 항아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이게 보물이야. 이 빈 항아리가 철화용문 백자항아리야. 사옹원 분원리에서 만든 백자야. 뉴스에서 본 백억짜리 용춤 항아리와 똑 같아. 와 놀라워!”
정말 그랬다. 형언할 수 없는 청백 바탕에 철사(鐵砂)로 구름 속에서 막 승천하는 용(龍)의 신비로운 자태를 그린 450센티 남짓한 백자였다.

모두가 흥분해서 어쩔 줄 몰랐다. 추경감이 백자항아리를 조심스럽게 옮겨 마루 가운데 있는 뒤주 위에 얹었다.
세월의 무게를 잊고 금방 가마에서 나온 듯한 백자의 청아한 모습은 정말 고혹적이라고 모두 생각했다.
“그런데 범인은 누구예요?”

서연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얘기하자면 좀 길어. 범인은 너희들 친구 중 한 사람인⋯”
“예? 그럼 김명섭이란 말이군요.”
형준이 소리를 질렀다. 모두 놀라 눈이 둥그레졌다.
맞았어. 주모자는 김명섭이야.“

추 경감의 말에 모두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추 경감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석현이의 테이프에서 나온 지문의 주인공이 어느 설비회사의 전과 5범인 천공 기술자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 기술자는 ‘에스앤케이’의 용역 일꾼이었는데 가정집에 에어컨을 설치할 때 실외기 케이블이 나가는 벽을 뚫는 기술자였다. 왼손잡이인 그는 현장에 버려진 목장갑에서 채취한 DNA도 일치했다.

추 경감이 중개소를 추적해서 집 사러 왔던 사람도 그 기술자였음을 확인했다
범행 뒤 회사를 그만두고 지방에 가 있다가 붙잡혀 왔다.
그는 사장의 조카인 김명섭과 평소 잘 아는 사이였는데 1천만 원을 받기로 하고 범행에 가담했다.

“명섭이는 우리 집에 백자가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서연이 추 경감의 이야기 허리를 끊고 물었다.
“김명섭이 인사동에 있는 유명한 간숭미술관에 아르바이트 하러 다닌 것은 알지?”
“예.”

영희가 대답했다.
“아르바이트라는 것이 자료를 정리하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 오래된 자료 속에서 놀라운 기록을 발견했지.”
추경감은 잠깐 뜸을 들인 뒤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료 속에 미술품을 모은 간숭미술관 창업주가 남긴 기록 중에 놀라운 사실이 있었지. 17세기 분원리에서 제작된 ‘철화용문 백자’ 한쌍을 분원리의 서연이 할아버지인 장종선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그 백자에 반한 창업주가 팔라고 매달렸다는 거야. 서연이 할아버지는 너무도 집요하게 매달리는 간숭 창업자의 열성에 감동하여 한 쌍 중 하나를 그냥 주어버렸다는 거야.”
“아니 공짜로요?”
형준이 놀랐다.

“감동적인 이야기이지. 예술품을 아끼는 사람끼리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무엇이 있나 봐. 그 뒤 간숭 창업주는 육이오 전쟁 때 그것을 분실했다는 거야. 그런데 그 백자를 물려받은 서연이 할아버지는 육이오 때 급히 피난 가면서 백자를 화단에 묻고 갔던 거야. 서울이 수복되어 서울에 왔으나 분원리는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가려던 할아버지는 폭격에 돌아가셨어. 뒤에 고향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화단 한편을 장독대로 만들었으니 그 밑에 묻히고 만 거야. 할아버지가 거기 백자를 묻은 사실을 몰랐거든.”

“육이오 당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미리 대구 고모 집으로 피난 가 있다가 한참 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왔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몰랐군요.”
집안에 보물이 있는 것을 모르게 된 사연을 서연이 설명했다.

“그렇게 됐군요. 우리 집 내력을 좀 아는 명섭이 엉뚱한 욕심을 냈군요.”
“서연이네 집 내력을 알고 보물을 캐러 들어왔던 명섭과 하수인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는군. 범인 둘이서 대화하는 소리를 듣고 명섭이 목소리를 알아차린 할머니가 명섭이 아니냐고 소리치자 엉겹결에 가지고 있던 칼로 찌르고 달아났다는 거야. 나도 지훈 형사반장에게서 들었지.”

추 경감의 설명을 듣고 서연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쁜 자식. 돈에 눈이 어두워 친구의 할머니를⋯”
형준이 마루를 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뒤주 위의 백자는 세속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고한 아름다움이 변함없었다.

[작가소개]

이상우;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5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6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1983년 한국추리작가협회를 창설하고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로 대한민국 문화 포장 등 수상.

50판 까지 출판한 초베스트셀러 <악녀 두 번 살다>를 비롯, <신의 불꽃>,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추리소설 잘 쓰는 공식> 등이 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