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김정아 기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편집=김정아 기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광진구를 1편에 이어 간다. 지하철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 1번 출구에서 군자역 방향으로 170여 미터 가면 정문이 나온다. 지난 1편의 화양정(華陽亭)에서 간다면, 10분 정도 더 걸린다. 화양정과 그 인근의 시인 모윤숙의 옛 집터, 이영희 교수의 옛 집터를 둘러보고 간다면 30분 정도 더 걸린다. 어린이대공원은 그 이름이 주는 선입관으로 성인들은 무관한 곳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막상 가보면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 단위 산책객은 물론 성인 산책객들도 아주 많다. 주제가 어린이이나 누구라도 편안히 산책하고 사색하면서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볼거리도 많다. 하기에 따라 하루 내내 있어도 지루하지 않은 곳이다. 산책길도 아주 다양하다. 곳곳에 많은 시비(詩碑)와 동상, 조각들이 있어 삶의 의미를 더할 수도 있다.

순명비 유강원 석물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순명비 유강원 석물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권위주의 문화 흔적이 가득한 어린이대공원

 이번 탐방기에서는 어린이대공원 안내도에 들어있지 않은 각종 동상과 시비 등을 중심으로 안내한다. 개장은 05시, 폐장은 22시이기에 아무 때나 가도 된다.

 1번 출구로 나와 직진해 걷다보면, 오른쪽에 2층 한옥 건물로 된 ‘어린이대공원’이란 현판이 걸린 능동문이 나온다. 어린이대공원이 능동에 있기에 능동문이 되었다. 능동(陵洞)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비(妃)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閔氏)의 능인 유릉(裕陵)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가장 먼저 ‘순명비 유강원 석물’을 찾아간다. 공원 곳곳에 있는 「어린이대공원 안내도」에도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순종이 황제에 오르기 전인 1904년에 사망했다. 능 이름을 유강원(裕康園)이라 했다가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황후로 추존되면서 유강원은 유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왕과 왕비, 추존왕과 추존 왕비의 묘는 능(陵), 세자나 세자빈, 왕의 사친(私親, 후궁이 낳은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 어머니) 묘는 원(園)이라고 하고, 기타 왕족이나 관료, 백성은 ‘묘’라고 부른다.

1926년 순종이 사망한 뒤 남양주시 금곡동 홍릉 쪽에 능이 생기면서 유릉도 옮겨갔다. 그때 남겨진 석물들이 현재의 석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관리들을 위한 골프장으로 바뀌었다.

 석물들은 망해가는 나라의 마지막 황후의 흔적이다.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 황후의 석물 의미를 기억해야 할 듯하다.

 석물 뒤에는 멀찍이 흰색 조형물이 보인다. 자세히 보면 아래 어떤 소년 동상이 서 있다. 그곳 가는 길에는 “어린이는 내일의 주인공. 착하고 씩씩하며 슬기롭게 자라자”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가 새겨진 표석이 보인다. 안내판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1970년에 본래 골프장이었던 이곳을 어린이를 위한 자연공원으로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만들어졌다는 내용이다. 그래서인지 이 공원에는 박정희의 흔적이 많다. 공과를 떠나 골프장을 어린이대공원으로 만든 것은 잘한 일이다.

 다시 몇 걸음을 가면 유강원 석물 뒤에 있던 흰색 조형물이 나온다. 이 조형물은 앞뒤에 각각 동상이 서 있다. 유강원 쪽에서 보인 소년 동상은 정재수라는 소년이다.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 댁에 새해 인사를 하러 가던 중 아빠와 함께 눈길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 반대편에 있는 동상은 한때 전국의 많은 초등학교에 세워졌던 반공소년 이승복의 동상이다. 이 두 동상 모두 광화문 광장에 있는 이순신 동상을 제작한 김세중의 작품이다. 글은 윤석중, 제자는 김종필이 썼다.

 동상을 지나면 ‘상상마을’이 나온다. 대공원 직원들이 각종 재활용품으로 만든 ‘정크아트(Junk Art) 테마파트’이다. 테마파크에는 반가운 로봇들이 보인다. 로봇 찌바, 깡통로봇 같은 것들이다. 또 기린과 코끼리도 있다. 직원들의 정성이 가득하고 솜씨도 대단하다. 프로작가들의 작품과 차이도 나지 않는다. 그 작품들을 보면, 대공원 직원들에게 무조건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듯하다. 작가가 대단한 것이냐. 보고 느끼고 알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면 그 모두 멋진 작품이다.

 음악분수 방향으로 간다. 분수 뒤편에는 흰색 조각들이 늘어서 있다. 거북이 등에 올라탄 어린이, 돌고래 등에 탄 어린이, 엄마와 함께 있는 어린이들이다. 이 중 엄마와 함께 있는 어린이를 조각한 ‘모자 상 조각’은 모두 정주영 현대 회장이 기증한 것이다. 또 다른 두 작품은 대한석유공사 박원석이 기증한 것이다. 동상을 내력을 읽다 보면, 기업인들이 많이 기증 또는 헌납했다. 좋게 표현하면 기증이나 다르게 보면 강제적인 기부와 다를 게 없다. 권위적인 정부일수록 정식 세금 보다 강제적인 기부가 많다. 이곳의 동상들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대부분 선의로 자발적으로 기부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준조세가 많은 나라는 불투명한 국가이다. 또 정경유착이 심할 수밖에 없다. 이 동상들이 기증될 때나 지금도 비슷하다. 투명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국가는 기업에 직간접적으로 준조세를 강요한다. 자발적 기부문화가 형성되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다. 그것이 건강한 시민사회다. 어린이를 위한 조각이나 뒷맛은 개운치 않다.

 분수대에서 후분 방향으로 가면 ‘국민교육헌장비’가 보인다. 여기에도 박정희의 친필 서명이 들어있다. 60~70년대 학생들은 반드시 외워야 했던 그 국민교육헌장이다. 좋은 말, 귀한 문장이나 국가가 강요할 것은 아닌 권위주의 정권의 계몽주의 유산이다. 몇 걸음 더 가면, 조금 멀리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였던 고하 송진우(宋鎭禹, 1887~1945) 동상이 보인다. 1983년에 세워진 동상이다. 조각은 김영중(金泳仲)이 했다. 동상에서 나와 다시 후문 방향 큰길로 가면 오른쪽에 유엔평화동산이 있다. ‘박연 동상’과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로 시작하는 윤석중 작사 「새나라의 어린이」 노래비,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으로 시작하는 윤극영의 「반달」 노래비, 최기원의 「통일과 번영의 상」, 기타 여러 조각이 있다. 「새나라의 어린이」 노래비는 1984년에 덕수궁에서, 「반달」은 창경원에 있던 노래비를 옮겨온 것이다. 「통일과 번영의 상」의 글씨는 박 대통령이 쓴 글씨다.

박연 동상 엘리 발튀스 1990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박연 동상 엘리 발튀스 1990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먼나먼 동방의 나라에 온 이방인, 벨테브레이

 ‘박연 동상’의 ‘박연(朴淵·朴延·朴燕·朴仁·胡呑萬, 1595~?)’은 네덜란드 사람이다. 본명이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Jan Janse Weltevree)로 네덜란드 드 레이프 출신이다. 1627년 동료 2명과 함께 우리나라에 상륙했다가 붙잡혀 귀화해 평생을 한반도에서 살았다. 훈련도감에서 홍이포(紅夷砲)의 제작과 활용법을 가르쳤고, 병자호란 때는 출전했다. 같이 상륙했던 동료 2명은 이때 전사했다. 1653년 훗날 『하멜표류기』로 널리 알려진 하멜(Hendrick Hamel, 1630~1692) 등이 표류해 오자 통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1648년에는 무과에 급제했다. 우리나라 여자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박씨 성을 사용해 박연이라고 한다. 인터넷에는 원산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나, 사실 여부를 필자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동상은 네덜란드 조각가 엘리 발튀스(Elly Baltus, 1956~ )가 1990년에 제작한 것으로 박연의 고향인 네덜란드 드 레이프(De Rijp) 시에서 1991년에 서울시에 기증했다. 발튀스는 그 이전인 1988년에 같은 동상을 제작해 드 레이프 시에 설치해 놓기도 했다.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동상은 같은 작품의 복제품이다.

 크기는 1미터 정도이나 특이한 작품이다. 우리나라 전통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모습이다. 그러나 작품을 구성하는 방식은 마치 정크 아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전체적으로 다양한 장치로 신체를 만들었다. 두 자루의 총을 끼고, 신발은 한쪽은 자동차, 한쪽은 배이다. 가슴에는 삼성자동카메라 3대가 훈장처럼 붙어있다. 등에는 카세트플레이어와 현대자동차의 엔진, 어깨에는 타이어, 같 뒤에는 모종삽 등등이 있다. 배는 조선 시대 그가 탔던 네덜란드 배를 상징하고, 자동차는 현대의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듯하다. 이 작품은 21세기 우리나라의 변화된 모습을 박연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는 듯하다. 하나하나 자세히 보면 마치 숨은그림찾기 같은 작품이다. 왼쪽 팔에는 작가의 이름과 제작연도가 새겨져 있다.

 벨테브레이의 동상을 보다 보니, 당시 우리나라 리더들이 얼마나 바깥세상에 무지했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하멜의 경우 조선을 탈출해 일본에 갔을 때 수십 가지 질문을 받았는데, 우리의 경우는 벨테브레이나 하멜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것이 거의 없다. 그저 이방인의 하나로 본 듯하다. 바다 건너 큰 세상이 있고, 그들의 분명 신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았던 듯하다. 『하멜표류기』에 언급된 조선에 대한 기록과 조선인이 그들을 대했던 태도는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하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리더들이었다면, 그들이 사는 세상에 대해 아주 깊은 관심을 갖았을 텐데, 그런 사람들도 거의 없었나 보다.

 그런 분위기나 문화는 지금도 여전하다. 매일 신문과 TV에는 우리나라 내부 이야기만 가득하다. 바깥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관심이 없다. 외국의 사건과 사고 기사나 가끔 나올 뿐이다. 이런 문화, 이런 지적 풍토는 또 다른 정신적 쇄국일 뿐이다. 서구인들의 신대륙 개척, 태평양횡단과 같은 도전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또다시 약소국으로 전락할 뿐이다. 리더들부터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어야 한다. 교육부터 변화해야 한다. 한반도만이 우리의 영토가 아니다. 한반도에만 사람이 살고 있지도 않다. 강대국에 얹혀사는 것도 한계가 있다. 다른 세계를 찾아가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넘칠 때 대한민국은 약소국이 아니라 진정한 강대국, 문화 제국, 경제 대국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4백 년 전 네덜란드의 이방인은 우리에게 “당신들은 아직도 여전히 갇혀 사는 민족입니까, 은둔의 왕국입니까”라고 물을 듯하다.

 『다시읽는 하멜표류기』(강준식, 웅진지식하우스, 2002년)는 하멜의 조선살이와 다양한 그 시대의 정보를 싣고 있다. 또한 표류기 전체도 번역되어 있고, 하멜이 쓴 「조선왕국기」도 번역되어 있다. 17세기 조선과 조선인의 삶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필수적인 책이다. 또 표류기 끝에 실린 나가사키 총독과의 응답내용을 보면, 우리의 기록이 얼마나 부족한지, 우리가 얼마나 외국에 무관심했는지 거꾸로 보여준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턱스크한 호랑이 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턱스크한 호랑이 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공원안에서 만나는 방정환, 김동인, 이승훈, 조만식

 박연 동상을 비롯해 여러 조형물을 지나다 보면 왼편에는 돌하루방 두 기가 마스크를 쓴 채 서 있다. 이 공원 후문에 있는 대형 호랑이 조각에는 호랑이가 턱스크를 한 채 서 있기도 하다. 코로나 덕분이다.

 「평화와 번영의 상」 뒤편 언덕을 넘어가 식물원 방향으로 가면 어린이의 영원한 친구, ‘소파 방정환 선생 상’이 있다. 능동숲속의 무대(야외공연장) 무대 정면에 있다. 『서울문학기행』(장태동, 미래M&B, 2001년)에 따르면, 처음에는 남산 어린이회관 앞에 있었으나 회관이 이전되면서 어린이대공원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남산에 있을 때 동상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이마에 누군가 흰 페인트로 낙서를 했고, 동상 일부분인 중절모를 조각한 돌로 사라졌다고 한다. 대공원으로 이전할 때 소년한국일보가 주도해 전국 어린이들로부터 성금으로 10원 동전 150여 만개를 모아 1987년 어린이대공원으로 이전·복원하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1931년 개벽사에 출근하던 중에 쓰러져 죽어가면서도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 저 어린이들은 어떻게 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기부자를 보면, 기업으로는 도투락월드, 두산그룹,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 삼성물산, 삼성전자, 선경, 진로, 현대건설, 빙그레이다. 언급된 기업을 보면 지금도 번성하는 기업들이다. 좋은 일에 기부하는 기업은 오래가는 듯하다. 그러나 이 역시도 준조세로 볼 수 있기도 하다.

소파 방정환 선생 동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소파 방정환 선생 동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동상을 보면, 소파가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중절모를 벗어 옆에 놓고 다정히 어린이와 이야기하는 모습이다. 소년의 오른손에는 팽이와 팽이채가 쥐어져 있다. 지금은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들의 놀이도구이다. 조각은 김영중이 했다.

 야외공연장 입구 오른쪽에는 소설가 ‘김동인(金東仁, 1900~1951)의 상’과 ‘김동인 문학비’가 있다. 이 작품 역시 조각은 김영중이 했다. 사직공원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공연장에서 나와 꿈나래 정원 쪽으로 맞은편에 있는 ‘능동 숲속의 무대’ 표석 왼쪽에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 표석이 있다. 헌장은 있으나, 지금도 매일 많은 어린이가 학대받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고 있다. 헌장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어른의 책임이다. 죽은 헌장 표석이 아니라, 살아있는 헌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조각 역시 김영종이 했다.

 그 옆에는 ‘서울, 황금알을 품다’는 조형물이 있다. 서울시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것이나, 황금알 때문인지 산듯하고 멋지다. 맞은 편에는 “물 한 모금 입에 물고”로 시작하는 강소천의 「닭」이 새겨진 문학비가 있다. 이 역시 김영종이 설계했다.

 꿈마루 카페 앞에는 포크처럼 생긴 ‘어린이대공원 건립비’도 있다. 뒷면을 보면, 후원자 명단이 나온다. 현대건설 정주영, 석유공사 박원석, 삼성문화재단 이병철, 럭키크럽 구자경 등등 기업들이 많이 후원했다.

순국처녀 류관순 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순국처녀 류관순 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꿈마루 뒤편 꿈마루 북카페 옆길에는 ‘순국처녀 류관순’ 동상이 있다. 공원 안에 있는 무수한 동상 중에서 유일하게 이정표가 있는 동상이다. 대형 태극기를 들고 있다. 기단에 비해 동상이 너무 작다. 이순석의 작품이다. 태극기 뒷면에는 글이 새겨져 있으나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안내판에라도 그 내용을 써 주었으면 좋았을 듯하다.

 팔각정 방향으로 가면 ‘명상정원 혜윰’이 나온다. 혜윰은 ‘생각’의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처음 들어본 우리말이나 멋있다. 정원 안에는 김소월, 김영랑을 비롯해 여러 시인의 시가 시화(詩畫)로 그려져 있다. 산책 중 휴식하는 어르신들이 많이 앉아 계시다. 시의 숲에서 잠시 ‘혜움’하며 쉬었다 가면 좋을 곳이다.

남강 이승훈 선생 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남강 이승훈 선생 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바다동물관으로 간다. 왼쪽 뒤편, 구의문 방향에 ‘남강 이승훈 선생 상’이 있다. 이승훈(李昇薰, 1864~1930)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오산학교 교장,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교육자이다. 조각은 민복진, 전면 글씨는 박 대통령이 썼다.

고당 조만식 선생 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고당 조만식 선생 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팔각당 방향으로 가다 보면, 초식동물마을, 맹수마을을 지난다. 그 위에 ‘고당 조만식 선생 상’이 있다. 조만식(曺晩植, 1883~1950)은 국산품 사용 운동인 물산장려운동을 했고, 독립운동사, 조선일보사 사장을 역임했다. 동상 앞에서 남쪽을 보면 멀리 롯데타워가 보인다. 전망이 좋다. 민복진이 조각했고, 전면 글씨는 박 대통령이 썼다. 길옆에 있어도 방문객들이 없어 한적하다. 조만식 선생에 대해서는 『민중과 함께 한 조선의 간디: 조만식의 민족운동』(장규식, 역사공간, 2007년)을 참고하면 조만식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잔디축구장 끝에는 6·25전쟁 때 가장 치열했던 백마고지에서 중공군과 싸우다 산화한 ‘백마고지 삼용사의 상’이 있다. 중위 장승우, 하사 안영권, 하사 오규봉의 상이다. 이 상의 전면 글씨 역시 박 대통령 글씨다.

코올터 장군 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코올터 장군 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역사 앞에 부끄러워 해야 할 동상 작가 김경승

 후문으로 나간다. 후문 근처에는 호랑이 두 마리가 있다. 한 마리는 마스크를 제대로 썼고, 다른 한 마리는 턱스크를 했다. 요즘의 우리 모습이다. 후문을 나가면 큰 길 왼쪽에 “죤.비.코올터 장군 상(John. B. Coulter,  1891~1983)”이 보인다. 미국 육군 중장 출신이다. 제2대 주한미군사령관이었고, 6·25에도 참전했으며, 전역 후 유엔 한국재건단(UNKRA) 단장으로 전후 복구를 지원했다. 그의 동상은 1959년 미군이 주둔했던 서울 이태원 로터리에 설치되었으나 남산3호터널 공사로 1977년 이곳으로 이전했다.

 6·25 이후 생긴 미군 관련 동상은 인천상륙작전의 UN군 최고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미8군사령관으로 육군사관학교 재건에 기여한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 1892~1992), 밴 플리트의 외아들은 공군 조종사로 6·25에 참전해 실종되었다. 그리고 이 코올터 장군 동상이다. 맥아더 동상은 인천 자유공원, 밴 플리트 동상은 육군사관학교에 있다.

 이 동상들은 세울 때 동상의 주인공들이 모두 살아있었다. 그들이 이 땅에 기여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또 존경받고 감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을 만드는 것은 어찌 보면 낯뜨거운 일이다. 조각은 김경승이 했다.

 최열의 「연구의 자취와 관점」(『한국현대미술의 역사』, 열화당, 2006년)에 따르면, 김경승이 맥아더, 밴 플리트, 코올터 동상을 제작했다고 한다. 기가 막힌 것은 김경승의 삶이다.

 일제강점기 김경승은 『매일신보』(1942년 6월 3일) 기사 「선전 추천 또 1인, 조각 김경승씨로 결정」)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말했던 사람이다.

 “중대한 문제는 재래 구라파 작품의 영향과 감성의 각도를 버리고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데 새 생명을 개척하는데 대동아전쟁 하에 조각계의 새 길을 개척하는 것일 것입니다. 나는 이같이 중대한 사명을 위하여 미력이나마 다하여 보겠습니다.”(최열, 「근대조소예술의 전개-20세기 전반기」, 『근대를 보는 눈-조소예술』, 국립현대미술관, 1999년에서 재인용)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말하는 사람, 대동아전쟁 즉 일본의 침략전쟁에서 일본을 위해 조각의 길을 개척하겠다는 사람이다. 그는 최열에 따르면, 「대동아 건설의 소리」 같은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해방 뒤에는 안중근, 김구, 이순신, 세종대왕 동상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작품을 제작했다. 그러다 살아있는 미군 장성의 동상도 제작했다.

 어이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당황스러울 정도다. 해방 당시 아무리 우리 수준이 낮았다 하더라도 도가 지나친 듯하다.

 몇 걸음 더 가니 서쪽 편에 ‘을지문덕 장군 상’이 보인다. 길에서는 눈 크게 뜨고 찾아야 보인다. 코올터 동상과 달리 조금 깊숙이 있다. 코올터 동상과 비교해 보면, 구석에 박혀 있는 듯한 모습이다. 아차산역 4번 출구 근처, 대공원치안센터 옆쪽이다. 치안센터가 있어서 동상에 해꼬지 하는 사람은 없을지라도 너무 구석지다. 처음에는 양화대교 남쪽에 세워져 있었으나 양화대교 확장으로 현재 위치로 이전된 것이다. 조각은 최기원이 했다.

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1512년 정덕본,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이미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1512년 정덕본,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이미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

 우리나라 역사상 3대 대첩을 꼽는다면 을지문덕(乙支文德, 생몰연 미상)의 살수대첩(612년), 강감찬(姜邯贊, 948~1031)의 귀주대첩(1018년),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한산대첩(1592년)을 들 수 있다. 특히 살수대첩은 우리나라 역사의 육지 전투 중 가장 위대한 군사적 승리라고 평가된다.

 고구려와 새로이 중국을 통일한 수(隋)나라와의 전쟁은 589년에서 614년까지 모두 네 차례 일어났다. 수나라의 네 번의 침략에서 첫 번째 침략(598년)은 장마와 폭풍, 고구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살수대첩이 있었던 612년의 두 번째는 을지문덕, 요동성의 강력한 항거, 고구려군의 전략전술로 대패, 세 번째(613년)는 요동성의 항거와 내부 반란으로 인한 철군, 네 번째(614년)는 내부 사정과 고구려의 전략적 항복으로 성과 없이 돌아가야 했다. 수의 침략은 모두 실패했고 수나라가 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 중 612년의 침략은 엄청난 규모였다. 수 양제(煬帝, 569∼618, 재위 604~618)는 1,138,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육지와 바다 두 방향으로 고구려를 침략했다. 이 군사의 수는 588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진(陳)나라를 공격할 때 동원한 50만 명의 배가 넘는 엄청난 규모이다. 또 프랑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45만 명을 동원했었다. 수나라의 110만 군대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 군대가 동원된 전쟁이다. 이는 수나라가 얼마나 고구려를 두려워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이다.

 고구려 수도 평양을 향해 진격하던 중 요하에서 수나라 장수 맥철장(麥鐵杖), 전사웅(錢士雄), 맹금차(孟金叉)이 고구려군에 의해 죽었고, 고구려 요동성의 불굴의 저항과 항복을 가장한 지연 전술로 발이 묶이자 수 양제는 우중문(于仲文, 545~613)으로 하여금 9개 군 305,000명의 별동대를 뽑아 별도로 평양으로 진격하게 했다. 그러나 우중문의 별동대는 을지문덕에게 속아 살수대첩에서 거의 전멸당하고 2,700명 만이 간신히 탈출해 돌아갔다. 내호아(來護兒)가 이끄는 수나라의 수군 수만 명 역시 평양성의 외성에서 고구려군의 지략에 걸려 참패하고 수천 명만이 살아서 겨우 탈출했다. 중국 역사에 기록된 최악의 패배이다.

 기적과 같은 위대한 승리를 만든 주인공은 을지문덕이다.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삼국사기(三國史記)』(1145년)에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열전 4」·「을지문덕」과 『삼국사기』·「고구려본기 8」·「영양왕 23년(612년)」 부분이다. 수 양제의 고구려 침략 이유와 과정, 패배, 을지문덕의 대응이 언급된다.

 김부식은 을지문덕에 대해 “양제의 요동 전쟁은 군대를 출동시킨 성대함이 전례가 없었으나 고구려는 한쪽 지역의 작은 나라임에도 능히 막아내 스스로를 보존했다. 적군을 거의 다 섬멸한 것은 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전(傳, 춘추좌전)』에서 이르기를, ‘군자(君子)가 있지 않았다면 그 어찌 나라가 능히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했으니, 옳은 말이다.”라고 극찬했다. 군자인 을지문덕이 있어 거대한 수나라의 침략에도 고구려가 망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까닭에 『삼국사기』·「열전」에서는 삼국통일의 주역이며 기록이 많이 남아 있던 신라의 김유신을 가장 먼저 기술하고, 그 다음에 을지문덕을 넣었다. 망한 나라 고구려 출신이고, 기록 부족 때문이었던 듯하다. 김부식은 「김유신 열전」 끝부분에 “비록 을지문덕의 지혜와 전략(智略)과 장보고(張保皐)의 의로움과 용맹함(義勇)이 있었어도 중국(中國)의 책이 없었다면 흔적조차 아주 없어져 들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을지문덕과 장보고 기록 유래를 밝히기도 했다.

조선일보 1936년 5월 20일 민족의 수호신 을지장군의 묘소 폐허로부터 구하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조선일보 1936년 5월 20일 민족의 수호신 을지장군의 묘소 폐허로부터 구하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시(詩)로 수나라 우중문을 전략적으로 꾸짖은 을지문덕

 『삼국사기』에 실린 을지문덕에 관한 기록은 송나라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쓴 『자치통감(資治通鑑)』과 수나라에 대한 정식 역사책인 『수서(隋書)』에서 뽑아 편집한 것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오언시(五言詩)인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시는 『수서』의 「우중문(于仲文) 열전」과 북송시대에 편찬된 『태평어람(太平御覽)』(983년)에 실려 있다.

 “신(神)과 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까지 통달했고, 기묘한 작전은 땅의 이치까지 알고 있구나(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신책구천문 묘산궁지리). 싸움에서 승리한 공로가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아 이제 멈추기를 바라노라(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전승공기고 지족원운지).”

 이 시를 분석해 보면, 특별한 부분이 있다. 이 시가 중국의 고전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을지문덕의 학문 수준과 전략전술 능력을 함께 보여준다.

 “신(神)과 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까지 통달했고, 기묘한 작전은 땅의 이치까지 알고 있구나(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는 『주역(周易)』의 「계사(繫辭) 상(上)」에 나오는 “우러러 하늘의 이치를 보고 구부려 땅의 이치를 살핀다(仰以觀天文 俯以察地理 앙이관천문 부이찰지리)”, “만족함을 알아 이제 멈추기를 바라노라(知足願云止)”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 지족부욕 지지불태)”는 문장을 활용한 것이다.

 이 시의 의미는 을지문덕 자신이 『주역』과 『도덕경』을 통달해 하늘과 땅의 움직임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니, 무지한 일개 장수에 불과한 수나라 사령관 우중문은 감히 자신에 도전할 생각을 말라고 자극하는 심리전(心理戰) 전략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을지문덕이 이 시를 언급할 시기에는 고구려에 『도덕경』이 공식적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후에 당나라에서 수입되었다. 즉 영류왕 7년(624년)에 당나라에서 도사(道士)가 천존상(天尊像, 도교 최고의 신의 상)과 도법(道法)을 갖고 와 『노자』를 강의했다고 한다. 또 영류왕 8년에는 왕이 당나라에 사람을 보내 불교와 『노자』의 교법을 배우고자 요청하니 당 황제가 허락했다고 한다. 이때의 『노자』를 학자들은 『도덕경』으로 보기도 한다. 『도덕경』이 정식 명칭으로 등장한 것은 보장왕 2년(643년)이다.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이 왕에게 유교와 불교는 흥하나 도교는 아직 성하지 않다면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해와 사람들에게 가르치게 하기를 건의했고, 그에 따라 당 태종이 도사 8명을 보내며 노자의 『도덕경』도 보내주었다고 한다. 보장왕 때야 애매한 『노자』가 아닌 정식 명칭의 『도덕경』이 들어온 것이다.

 『주역』 역시 을지문덕 시대 이후에나 활발히 학습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로 보면 을지문덕은 공식적으로, 또 널리 퍼지기 전에 이미 『도덕경』과 『주역』을 알고 있고 즉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학문을 갖춘 인물로 볼 수 있다. 즉 최소한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들어오기 전 10여 년 전에 이미 한문에 능숙했고, 『도덕경』 등을 배우고, 익혔던 최첨단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을지문덕의 시는 그 증거이다. 그는 또한 단신으로 수나라 우중문 진영를 방문해 우중문 등과 회담을 한 것을 보면 중국어에도 능통했던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만세보, 삼한 24걸 중 제1등인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 상(像), 1907년 1월 1일, 한국연구원 소장 이미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만세보, 삼한 24걸 중 제1등인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 상(像), 1907년 1월 1일, 한국연구원 소장 이미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중국 역사서에서 찾은 을지문덕에 대한 사실들

 김부식의 글 중에는 중국 역사서에 없는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을지문덕 열전」 맨 앞에 나오는 한문 문장 한 줄도 안 되는 내용이다.

 “을지문덕은 그 조상의 계통이 자세하지 않다. 자질이 침착하고 굳세며 지혜롭고 계략에 능했다. 더불어 글을 해석하고 지을 줄 알았다(乙支文德 未詳其世系 資沈鷙有智數 兼解屬文)”

 이 부분은 『자치통감』과 『수서』를 비롯해 다른 중국 역사책에도 나오지 않는다. 김부식이 당시 참고했다던 우리나라 역사책들인 『고기(古記)』 혹은 『삼한고기(三韓古記)』에 실려 있던 내용인 듯하다.

 그래도 너무나 간단하다. 자신이 극찬했음에도 그가 언제 태어났고, 어떤 신분의 사람이며, 어떻게 성장했고, 어떤 관직에서 활동했는지, 언제 죽었는지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당시 존재했던 우리나라 역사서에도 을지문덕에 대해 자세한 기록이 없었던 듯하다. 아니면 고구려의 역사책을 없애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빈번히 역사를 손바닥 뒤집듯 하는 사례들이 많은 것을 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지웠을 수도 있다.

 조선 시대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평양 출신 인물, 『서원등록(書院謄錄)』 현종 10년(1669년) 2월 23일 기사 중 평안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올린 서장(書狀)에, “세상에 전해오기를 고구려 을지문덕은 본래 평양부의 석다산(石多山) 사람”,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1794년)의 “평양 석다산(石多山)” 출신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삼국사기』와는 시간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난다. 출신지 부분은 천년 가까이 구전되어온 것이 기록된 듯하다.

 우리나라와 달리 중국의 여러 역사책에는 을지문덕이 언급된다. 수나라에 이은 당나라, 당나라에 이은 송나라 때의 역사 기록들을 시간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인접한 기록들이고, 같거나 비슷한 내용으로 보아 있는 그대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기록 중 을지문덕에 대해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 태종이 명령해 편찬한 수나라 정사(正史)인 『수서』(636년)의 「우중문 열전」에는 “고려 장수(高麗將) 을지문덕(乙支文德)”으로 나오고, 우중문이 양제로부터 “고구려 왕과 을지문덕을 만나면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비밀명령을 받았다고 나온다.

 당나라 역사가인 이연수(李延壽)가 643년부터 659년까지 편찬한 『북사(北史)』의 「수본기 하 제12(隋本紀下第十二)」에는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과 살수에서의 패전이 나오나 을지문덕은 언급되지 않는다. 일부 인터넷 자료에서는 『북사』에 을지문덕이 나온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나라의 재상 두우(杜佑, 735~812)가 편찬한 『통전(通典)』(801년)의 「병8(兵八)」에서는 “고려 국상(國相) 을지문덕(乙支文德)”, 「병15(兵十五)」에서는 “고려 국상 걸지문덕(乞支文德)”, 송(宋)나라 이방(李昉)이 편찬한 『태평어람(太平御覽)』(983년)의 「병부8(兵部八)」에서는 “고려 장수(高麗將) 을지문덕”이라고 하면서 ‘유장(儒將)’로 보았다. 또 「병부44(兵部四十四)」에서는 “고려 국상 을지문덕” 「병부55(兵部五十五)」에서는 “고려 국상 을해문덕(乙亥文德)”, 송나라 사마광의 『자치통감』(1065~1084)에서는 “고려 대신(大臣) 을지문덕”, 사망광의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서는 을지문덕이 언급되나, “『혁명기(革命記)』에는 위(울)지문덕(尉支文德)이라고 했는데 지금부터는 『수서』와 『북사』를 따른다”라고 주석을 해 놓았다. 즉 을지문덕이 『혁명기』라는 책에서는 ‘위(울)지문덕(尉支文德)’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을지문덕 장군 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을지문덕 장군 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을지문덕은 귀화인이 아닌 고구려 을지문덕

 이들 기록에서 말하는 고려는 고구려이다. 이름을 비교해 보면 거의 대부분 을지문덕이다. 같은 책에서도 다른 이름인 ‘걸지문덕(乞支文德), 을해문덕(乙亥文德)’으로도 나오나, 을지문덕이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면, 이는 뒤에 나오는 다른 이름의 경우는 오기로 보인다. ‘위(울)지문덕(尉支文德)’의 경우로 인해 학계 일부에서는 을지문덕이 선비족(鮮卑族) 계통의 성(姓)인 ‘울지(尉遲)’씨와 같은 성으로 보아 선비족 계통 귀화인(歸化人)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위(울)지문덕(尉支文德)’이 언급된 『자치통감고이』는 가장 시대가 늦다. 을지문덕 시대 보다 500년이나 뒤에 편찬된 책이고, 정식 국가 편찬 역사서도 아니다. 게다가 『혁명기(革命記)』도 존재는 했으나 현재는 확인이 되지 않는 책이다. 『자치통감』에 주석을 붙인 호삼성(胡三省, 1230~1302)의 『자치통감음주(資治通鑒音注)』(1286년) 권 181 「수기 5(隋紀五)」에서는 “을지, 동이의 복성(乙支 東夷複姓)”으로 주석했다. 즉 ‘을지’은 우리나라 사람의 두 글자로 된 성(姓)이라는 의미다. 이는 을지문덕을 중국계 혹은 선비족 계열의 귀화인이 아니란 의미다. 위의 여러 역사서와 『자치통감음주』로 보면, ‘을지문덕’이란 이름이 가장 정확한 이름이고 고구려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음은 을지문덕의 직위이다. 이들 책에서는 장수(將), 국상(國相), 대신(大臣)으로 나온다. 다수는 국상이다. 국상은 고구려의 최고 관직이다. 종합해 보면, 을지문덕은 장수이면서 국상이다. 『태평어람』에서 을지문덕을 ‘유장(儒將)’으로 보고 있는데, 유장은 무신이 아닌 문신 출신 장수를 뜻한다. 가장 후대 기록인 『자치통감』의 ‘대신(大臣)’은 고구려의 관직 칭호가 아니다. 중국식 표현이다. 이를 김부식이 『삼국유사』에서 그대로 사용해 을지문덕의 위상이 모호하게 되었다.

 을지문덕을 양제가 알고 있었고, 영양왕의 명령을 받아 수나라 군대에 들어갔던 것, 수나라와 계속 소통했던 것, 문신 출신이나 장수도 겸했다는 ‘유장’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는 일반적인 높은 신하의 의미인 ‘대신’이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탁월한 능력을 지닌 그 당시 최고위직인 ‘국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또 ‘문덕(文德)’이란 이름 자체도 특별하다. 한문으로 이름을 지었으나, 그 의미 자체가 학문적 능력을 칭송하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문을 특수한 일부 사람들이 사용하던 시대에 그런 이름을 지은 것만 보아도 그의 집안은 고구려의 귀족 계층의 일원으로 추정할 수도 있을 듯하다. 기록이 너무 부족해 신비로운 영웅이 을지문덕이다. 

 을지문덕 묘소와 후손
 
 을지문덕의 묘소는 어디에 있을까? 기록이 거의 없다가 『순종실록』(순종 2년 1월 31일, 1909년)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순종이 을지문덕의 무덤을 찾아 보수하고 지방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라고 하면서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황성신문』(1909년 5월 14일)에는 묘소의 위치가 처음 등장한다. 순종의 지시에 따라 묘소를 찾았는데 현암산 동쪽 기슭에 있고, 그 산의 이름은 ‘을지공산(乙支公山)’이라고 한다는 내용이다.

 『동아일보』(1934년 5월 26일)에 실린 이은상의 을지문덕 묘소 답사기에 따르면, 이은상이 찾아갔을 때는 을지문덕의 묘 터에 다른 사람이 새로이 묘를 썼다고 나온다. 또 『동아일보』(1935년 10월 1일~3일)에는 김준연·안창호·송진우 등이 묘를 찾아간 내용이 나온다. 을지문덕 묘자리에 어떤 사람이 묘 자리가 좋다는 즉 풍수설에 따라 을지문덕 묘 앞에 알면서도 부친의 묘소를 썼다는 것이다.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대성학교 교장(1907년 평양에 설립)으로 있을 때 학생들과 수학여행으로 가서 묘소를 개축하려고 했었으나 해외여행으로 자신이 하지 못했다고 한다. 묘소 기사들이 실리면서 1936년 고당 조만식(曺晩植, 1883~1950) 등 평양의 유지들이 ‘을지문덕 묘산 수보회(乙支文德墓山守保會)’를 조직하고 성금을 모으고, 묘를 쓴 사람을 설득해 이장시킨 뒤 묘를 수축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욕(私慾) 풍수가 문제이다. 민족의 영웅 묘소에 조상의 무덤을 쓴다고 그 후손들이 잘 살 수 있을까. 또 오늘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조상의 묘를 잘 쓴다고 자신과 후손들의 삶이 풍요로워질까. 큰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이장(移葬) 모습을 보면, 그 리더의 수준을 짐작할만하다. 그의 진실은 혹세무민이지 국가를, 국민을 보는 것이 아니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을지문덕의 후손은 『만세보(萬歲報)』(1907년 1월 1일)에 처음 “그 자손은 평안도에 거(居)하야 돈(頓)씨라 칭하더라”라고 나온다. 이후부터 돈씨의 족보에 근거한 기사들이 등장한다. 기사에 언급된 족보 내용에 따르면, 고구려의 재상 을파소(乙巴素, ?~203)의 6세손이 을지문덕이다. 그의 15(혹은 17)세손 을지수(乙支遂)가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1135년)을 토벌한 공로로 돈산백(噸山伯)에 봉해지고 ‘돈(頓)’씨 성을 하사 받으면서 이 때 성을 ‘을지’에서 ‘돈’으로 바꾸었다는 내용이다.

 기사에서 언급되는 을지문덕의 묘도 돈씨 성을 쓰는 사람들이 알려주었다. 그런데 『동아일보』(1935년 10월 3일)에는 묘청의 난 토벌 때 을지문덕의 15세손 을지수·을지달·을지원 삼형제가 김부식을 도왔다고 한다.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김부식이 묘청의 난 이후 10년 뒤에 완성한 『삼국사기』에 을지문덕의 가문의 연원, 또 고구려의 을파소가 을지문덕의 선조라는 것을 기록하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삼국사기』에는 을파소 열전이 있고, 그가 유리왕 때의 대신인 을소(乙素)의 손자라는 기록을 비롯해 을파소에 대해 상세하게 나온다. 돈씨가 을지문덕의 후예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돈씨는 극히 희귀한 성씨이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돈씨는 목천 돈씨이다.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평안도 대동과 강서, 황해도 등지에 36가구가 있었고,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남한에 22가구 100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고구려 때 을지문덕의 후손, 고려 때 돈산백의 후손이라면 그 숫자가 너무 적다. 그러나 을지문덕의 후예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을지문덕의 후예라고 족보에 기록한 것, 을지문덕의 묘소를 지켜온 것을 보면, 사실이든 아니든 그들은 위대한 민족의 영웅을 1500년 가까이 지켜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을지문덕과 고구려의 승리 전략전술

 을지문덕과 고구려는 어떻게 수나라를 이겼을까? 그는 5000년 한반도 역사에서 아주 드문 위대한 영웅이다. 그를 아는 것은 단순히 위대한 영웅을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다. 반복되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또 승리하기 위한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 역사서에 언급된 그와 고구려의 승리 전략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당시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국상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고구려의 승리 전략전술도 을지문덕의 전략전술이 배경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첫째는 강력한 적을 상대할 때는 수비·수성(守城)이 우선이다. 전쟁은 삶과 죽음 둘 중 하나로 끝난다. 맞받아 싸우는 것은 용기는 있으나, 10배 20배가 넘는 강대한 적과의 싸움은 패배와 굴복을 각오해야 한다. 을지문덕은 적극적인 전투보다는 방어에 우선을 두었다. 2차 침략 때 요하 전투에서 늪지를 건너는 수나라 군대를 공격한 것은 유리한 지점에서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고, 그 결과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대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나 1만 여 명의 희생자를 내어야 했다.

 둘째는 장기전으로 적이 지치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치면 사기가 꺾이고 내부의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요동성 등의 6개월에 걸친 항거는 수나라 군대를 피로하게 했고, 결국 군대를 분할해 평양성 공격 부대를 별도로 편성하게 했다. 80만은 요동성과 인접 고구려 성에 발이 묶였고, 30만은 평양성으로 이동했다. 장기전에 지친 군대가 특별 명령을 받았기에 조급증이 심해져 오판하기 쉽게 되었다.

 셋째는 적에게 불리한 곳, 아군에게 유리한 곳으로 유인하는 전술이다. 아군이 이길 수 있는 곳을 활용해 싸웠다. 살수(청천강)은 소수의 고구려군대가 절대 다수의 수나라 군대를 기습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을지문덕은 적에게 끌려가지 않고, 적을 이길 수 있는 곳으로 끌어들여 승리했다. 이 때 을지문덕이 살수의 상류에 둑을 막아 터뜨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고려 때 강감찬(姜邯贊, 948~1031)이 1018년 10만 거란 군대의 2차 침입 때 흥화진에서 소가죽을 꿰어 강을 막아 터뜨려 거란군을 대패시킨 것은 사실이다. 을지문덕은 뚝을 터트려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강을 건너는 수나라 군대를 공격한 경우로 강감찬과 차이가 있다.

 허목(許穆, 1595~1682)의 『기언(記言)』에는 살수대첩과 관련해 수나라 군대가 살수에서 승려 7명이 걸어서 강을 거너는 것을 보고 따라 건너다 모두 익사했고, 고구려 사람들이 그를 기념해 살수 가에 7기의 불상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연도기행(燕途紀行)』에도 청천강가에 있는 칠불사(七佛寺)의 유래를 허목처럼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들도 살수대첩과 관련한 을지문덕의 기만전술의 하나로 추정할 수도 있다. 수나라 수군 대장 내호아도 평양성 근처에서 고구려군의 거짓 패배에 속아 유인되어 매복한 고구려군에게 대패했다.

 넷째는 적이 끊임없이 혼란에 빠지게 하는 기만전술이다. 요동성에서는 성이 함락될 위기 때마다 수나라에 항복 의사 표시를 하면서 군사력의 재건 시간을 벌었다. 수나라 군대는 수양제의 직접 지시를 받아야 했기에 항복 의사 표시를 믿고 요동성의 고구려군이 복구할 시간을 주었다. 양제는 “모든 군사의 진격과 후퇴는 반드시 나에게 알려 지시를 기다리며, 멋대로 하지 말라”고 했었다. 요동성에서는 그와 같은 수나라 군대의 허점을 파악하고 활용한 것이다.

 을지문덕 역시 수나라 군대에 직접 방문하거나, 항복 의사 표시로 수나라 군대의 경계심을 풀게 했다. 수나라 군대는 평양성 앞 30리까지 진군했음에도 을지문덕의 전략에 따른 피로의 누적과 군량 부족으로 항복 의사 표시를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철수했다. 을지문덕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패배하도록 속였다. 

 다섯째는 을지문덕의 리더십이다. 위의 모든 전략전술을 리더십으로 볼 수도 있지만, 최고의 리더로서 그는 그 자체로도 탁월했다. 목숨을 걸고 적진에 단신으로 들어가 적을 기만하고, 적진의 허실(虛實)을 살폈다. 심지어 우중문은 양제의 ‘고구려 왕이나 을지문덕을 만나면 반드시 사로잡아라’라는 명령조차 수행하지 못하고 그를 풀어 보냈다. 『수서』 등에는 수나라 위무사(慰撫使) 유사룡(劉士龍)이 체포를 저지했다고 하나, 유사룡의 말 때문에만 을지문덕을 놓아준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황제의 명령까지도 잊어버릴 만큼 우중문 자체가 을지문덕에게 설득당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때문에 우중문은 을지문덕이 떠난 직후 정신을 차리고 추격했고, 을지문덕에게 “다시 의논할 이야기가 있으니 다시 와 주시면 좋겠소”라고 뒷북을 쳤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를 방문한 목적, 허실 파악을 달성했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진영으로 돌아왔다. 적진을 단신으로 방문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담대함을 갖은 인물, 적이 명령을 잊을 만큼 탁월한 설득력을 갖은 인물이 을지문덕이다. 화가 난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군을 추격했고, 고구려군은 7번이나 패배하면서 후퇴했다. 이는 촉한의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맹획(孟獲)을 7번 사로잡았다가 7번 풀어 주어 그의 마음을 얻었다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을 거꾸로 활용한 것이다. 을지문덕은 고의로 7번 패배하면서 수나라 군대의 자만심을 높여, 끝내는 절멸의 기회로 만들었다.

 을지문덕의 지혜는 일상에서도 필요하다. 살수대첩 당시의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생활에 응용한다면, 언제나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듯하다.

 서울의 을지문덕, 광진구의 을지문덕

  살수대첩 이후 을지문덕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역사책에 간간히 등장하나 언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다. 국상(國相)이었던 것을 보면, 612년 경에는 최소 50대 연령은 되었을 듯하다. 50대를 기준으로 보면, 평원왕(平原王, ?~590, 재위 559~590)과 영양왕(嬰陽王, ?~618, 재위 590~618) 때 인물이다.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국상 이전의 그의 활동을 신비로운 것으로, 알 수 없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가 60대나 혹은 70대였다면, 양원왕(陽原王, ?~559, 재위 545~559)으로 볼 수 있다. 국상에 오르기 전까지 고구려와 주변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삼국유사』를 보면, 양원왕 원년(545년)에는 백암성을 고쳐 쌓았고, 548년에는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했고, 550년에는 백제가 침략해 왔고, 551년에는 돌궐과 신라가 쳐들어왔다. 554년에는 백제의 웅천성을 공격했다.

 영양왕 때인 590년에는 수나라에 의해 진(陳)이 멸망하자 수나라의 침략을 대비해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을 비축했다. 598년에는 영양왕이 말갈족을 거느리고 요서를 공격했고, 수 문제는 30만 명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 603년에는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했고, 607년에는 백제의 송산성, 석두성을 공격했다. 608년에는 신라의 북쪽 국경을 습격하고, 우명산성을 함락시켰다.

 을지문덕이 국상이 된 이후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살수대첩 직전 몇 년은 수나라, 백제, 신라와 전투가 계속되었다. 을지문덕이 유장(儒將)이었고, 수나라에서까지 알려질 정도였다면, 그는 최소한 590년부터 608년까지는 문신으로 활동했겠으나 장수로도 북방과 남방 모두에서 활약하면서 실력을 쌓았다고 추리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실력이 드러나 국상에 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살수대첩 이후 을지문덕이 얼마나 더 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노쇠에 따른 은퇴, 정치적 갈등에 따른 은퇴, 혹은 사망의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 노쇠는 그의 신체적 연령과 관계된 것이다. 정치적 갈등은 영양왕이 618년에 사망하면서 영류왕이 등장한 것과 관련될 수 있다. 영류왕은 당나라에 적극적인 사대정책을 펼쳤다. 수나라와 전쟁을 했던 을지문덕과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 영류왕 부분에 고구려에 대한 다양한 기록이 있음에도 을지문덕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최소한 영류왕 이후 그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을지문덕은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많은 흔적이 있다. 그와 직접 관련은 없으나, 서울 ‘을지로’는 그의 이름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을지로 입구에서 광희문에 이르는 길이다. 이순신과 관련된 충무로는 충무로역에서 청계천 사이 남북방향으로 뚫린 길이다. 을지로와 충무로는 을지로3가역에서 교차한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을지로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충무로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수나라를 이긴 을지문덕이 을지로에, 일본을 격파한 이순신이 충무로(이순신의 시호 충무)에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지금 어린이대공원 후문 구석에 있는 을지문덕은 더 바깥으로, 광장으로, 거리로 나와야 한다. 특히 광진구에는 고구려유적이 있는 곳이다. 을지문덕 역시 생존해 있을 때 광진구 지역을 한 번쯤은 다녀갔을 곳이다. 을지문덕장군 동상을 지금처럼 구석에 천덕꾸러기처럼 세워 놓지 말고 광진구의 복판에 드러내 구민의, 또 우리 국민의 자부심을 키우게 할 기회를 만들면 어떨까.

 을지문덕에 대해서는 단재 신채호의 『을지문덕전』(박기봉 편역, 비봉출판사, 2006년)가 가장 잘 정리되어 있다. 소설로 편히 읽고 싶다면 안수길의 『을지문덕전』(일신서적출판사, 1994년)을 추천한다. 『삼국사기Ⅰ·Ⅱ』(김부식 지음, 이강래 옮김, 한길사, 1998년), 『명장열전』(이성무, 청아출판사, 2011년) 등도 참고하기 좋다.

* 어린이대공원 : 광진구 능동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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